에세이 특집
크림빵과 노인
이병초
6월 항쟁이 있었던 1987년, 노태우 씨의 6·29 선언이 “속이구 선언”이 되어가는 낌새를 알아차릴 때였다. 친구는 K는 오늘도 대폿집에서 조국의 현실을 운운하며 군부독재의 연장선에 불과한 6·29 선언을 깨부숴야 한다고 불을 뿜었다.
K는 얼추 취한 것 같았다. 밤마다 술을 퍼먹는 k보다 왜 내 얼굴이 더 붉은지 알 수가 없지만, 남들 눈에는 내가 더 고주망태로 보였겠지만, 억울하게도 내 정신은 말짱했다. 대폿집에서 나온 시간이 9시가 조금 안 되었을까. 우리는 홍시 서점 앞을 지나 관통로 사거리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K가 풍년제과점 앞에서 걸음을 딱 멈췄다.
“왜?”
“크림빵이 먹고 싶어서.”
제과점엔 평소와 다름없이 이런저런 빵들이 가지런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크림빵 두어 개를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런데 웬 노인이 나와서 빵을 안 팔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냐.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말인가 했다. 그러나 확실했다. 계산대에 서 있던 여직원을 제치고 노인은 빵을 안 팔겠다고 손을 내젓는 것이었다.
“왜 빵을 안 팔아요?”
“너한테는 안 판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째서 저에게만 안 팔아요?”
“안 팔면 안 파는 것이지. 이놈아, 어쩔래!”
나는 화를 벌컥 냈다. 빵집이 뭐 여기뿐이냐, 무슨 이따위 빵집이 다 있냐,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노인은 한 술을 더 떴다. 젊은 나하고 맞짱 뜨겠다는 듯이 팔뚝을 걷어붙이고 나오지를 않느냐. 빼빼 마른 노인이었다. 아니 깡마른 노인이었다. 머리는 백발이었는데 짧은 상고머리였다. 팔뚝을 걷어붙인 노인은 벌써 내 눈앞에서 식식거리고 있었다. 기막히다는 느낌보다는 이거 참 난감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노인과 싸운다는 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크림빵도 못 사고 풍년제과점을 나왔다.
아침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몸체는 작아도 노인에게조차 탈탈 털릴 만큼 뒤가 허술한 청춘은 아니었다. 술 먹다가 막차가 끊어졌다고 아무에게나 택시비를 꾸는 씨알머리가 아니었고 싸구려 티셔츠를 걸치고 군복 바지를 검게 염색해서 입고 다녔을망정 얻어먹은 밥은 반드시 샀으니까.
되도록 민폐 안 끼치고 살아온 나에게 노인은 왜 빵을 안 판다고 한 걸까. 내 얼굴이 홍콩 삼류영화에 나오는 범죄자같이 보였던 것일까, 그랬다면 더 접근을 못 했을 텐데. 그래도 그렇지, 노인이 정말 왜 그랬을까. 아침 내내 구들장을 짊어지고 어젯밤 일을 짚어봐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점심때쯤 되어서 전주시 관통로 사거리, 풍년제과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르신 계셔요?”
다짜고짜 노인을 찾았다. 카운터에 서 있던 여직원을 따라 나온 노인은 나를 못 알아보고 어리둥절했다.
“어젯밤 크림빵 못 사 먹은 놈이에요.”
공손하게 절을 하고 말문을 뗐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이냐, 바락바락 화를 내며 내칠 줄 알았던 노인이 얼굴에 미소를 띠며 손을 반갑게 잡아주는 것이 아니냐.
“그려, 젊은 놈이 이래야지.”
노인은 내 입장이 어떤지도 모르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한창 공부해야 할 놈이 초저녁부터 취해설랑 얼굴이 시뻘게 가지고 길거리를 싸돌아다녀서야 쓰겠느냐, 힘이 들수록 어금니를 더 악물고 꿈을 뼈에 새겨야지. 술은 기분 좋을 때 먹는 것이지 화풀이 깜으로 먹는 게 아니다. 어디 사는고? 시방 뭐를 하는고?”
나는 시詩를 공부한다고 말했다. 어젯밤 왜 나에게만 빵을 안 팔았냐고, 그 이유를 말해 달라고 따질 수 없었다. 너그러운 표정에 마음이 녹아버린 것이었다. 노인은 큰 비닐봉지에 빵을 한 보따리나 챙겨주었다.
그 후로 노인께 몇 번 인사를 더 드렸고 나도 크림빵을 즐겨 먹는 청춘이 되었지만 시는 뜻대로 써지지 않았다. 시는 천재가 쓰는 것이라는 깡통 같은 통념을 깡그리 무시하는 데가 내 글쓰기의 시발점이었지만 써놓고 보면 신세타령에 불과했다. 헛발질이 뭔지도 모르고 순식간에 몇 년을 까먹었다. 나는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서 학원가를 떠돌았다. 밑줄 거요, 밑줄. 이거 시험에 나오는 거라니깐! “지식 소매업자”라는 글귀를 청춘의 문패로 삼고 학원가 문전 문전을 전전했다. 전주에서는 ‘전주고’를 안 나왔다고 무시당했고 서울에서는 ‘서울대’를 안 나왔다고 찬밥 신세가 되어버린 날들을 뒤집어쓰고 하루에 14시간도 수업을 했다.
2003년 5월, 나는 드디어 첫 시집 『밤비』를 냈다. 중앙 일간지들이며 전북의 일간지들에 내 얼굴과 시집 표지가 인쇄된 기사가 떴다. 친구들, 선후배들에게서 축하 전화가 걸려 왔다. 아, 이렇게 한국의 시단이 뒤집어지는구나. 시집 『밤비』는 불티나게 팔려서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고 나는 사인을 요청하는 독자들 등쌀에 행복해지겠구나. 나도 인세印稅라는 것을 받아서 누구에게든 술을 맘 놓고 살 수 있겠다. 조금만 기다려라, KBS <아침마당>에 출연해서 내 존재를 방방곡곡에 알릴 날이 곧 들이닥칠 것이니.
그러나 시집이 나온 뒤 석 달이 지나도록 출판사에서 2쇄를 찍자는 말이 없었다. 날마다 나는 기가 팍팍 죽어갔다. 시집 제목이 ‘밤비’여서 그랬는지 그해 여름은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시편들이 좋다고, 시에 나온 ‘황방산’에 꼭 가보겠다고, 첫사랑 그 가시내는 만나봤냐고 전화가 걸려 와도 그리 반갑지 않았다.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난 추석 무렵 그 노인을 찾았다. 정종 한 병과 시집이 담긴 봉투를 들고 풍년제과점 문을 열고 들어섰다. 시집은 안 팔렸어도 노인께 그동안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를 말씀드릴 참이었다.
“그 어르신 돌아가셨어요.”
비닐봉지에 빵을 담다 말고 여직원이 말했다. 나는 공손히 제과점을 나왔다. 노인 앞에서 자랑스럽게 시집에 사인하고 싶었던 마음을 휴지통에 처박고 한벽당 쪽으로 걸었다. 세상이 조용해진 것 같았다. 노인이 아직도 예전 모습일 거라고 착각한 내 정지된 기억을 뒤꿈치로 까뭉개고 싶은 순간이기도 했다. 15, 6년 전 그날- 내게 다가온 노인의 말씀이 구태舊態에 젖은 내 삶을 갱신할 수 있도록 뼈저렸던 것도 아니고, 내 삶의 나침반 역할을 한 것도 아니지만, “어금니를 악물고 꿈을 뼈에 새기듯이” 살아온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아직도 노인의 성함을 모른다. 흰 상고머리의 노인이 제과점의 사장님이었는지 직원이었는지 그것도 모른다. 지금도 전주시 관통로 사거리에 있는 ‘풍년제과점’ 거기 관계자를 만나본 뒤에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며 누구를 칭송할 만큼 내 글의 품은 넓지도 못하다. 1987년의 6·29 선언이 “속이구 선언”이 된 뒤 세상은 어찌 되었던가. k가 느끼는 것처럼 아직도 캄캄한 터널 속이던가. 최루가스에 버무려졌던 이 땅의 20대들은 환갑 전후의 세월 어디를 짚어보며 소주를 맑게 기울이고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아름답게 사는 것인지, 왜 아직도 이 땅의 청춘들은 어금니를 악물고 살아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오늘처럼 그냥쟝 혼자 있고 싶을 때면- 크림빵이라는 말 옆에 서 계시는 노인,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시간의 뒤를 단단히 조였을 노인이 생각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