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장 6-16
고난주간 첫 날 묵상입니다.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에 한 여인이 들어와 삼백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는 행위를 합니다.
오늘 묵상은
마태복음 26장과 마가복음 14장, 요한복음 12장을 동시에 보는 것이 좋습니다.
서로간에 주장하는 관점을 살펴봐야 합니다.
왜! 베다니 시몬의 집인가?
요한복음에 의하면, 11장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이 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그리고 시몬의 여동생 마리아가 예수님께 나아와 일년의 임금품삯에 해당하는 삼백데나리온의 향유를 머리에 붓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것을 보고 분개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왜 향유를 저렇게 낭비하는가?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텐데’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제자는 가룟 유다이며 돈궤를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자를 생각함이 아니라 그는 돈을 도둑질 하는 사람(요 12장 6절)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위를 이렇게 말합니다. 12절 ‘이 여인이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여인을 책망했던 제자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은 30에 넘기기로 하고 예수님을 팔 기회를 엿보게 됩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오라버니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이때에 사용하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상당한 고가의 그리고 많은 양의 향유가 준비되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당할것과 죽을 것을 수차례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을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누가 더 높은 위치에 오를 것인가?를 따져드는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의도했든 의도치않았든 마리아의 이 행위는 며칠후의 죽음을 준비하였던 진심어린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예수님의 지근거리에서 동행하였던 제자 중 한사람의 일탈은 아주 잠깐이지만 예수의 공동체의 붕괴?를 가져오는 시초가 되는 아주 큰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여기서 잠깐..
예수님의 공동체중에 12제자로 선별되고 그 중에서도 ‘돈궤’를 맡을 정도라면, 예수님의 신임을 제대로 받고 있는 것인데 왜 그는 대제사장에게 팔았을까?
‘가룟 유다’라 지칭된 유다는 ‘가룟’이라는 지칭을 붙여 다른 유다와 구분을 합니다.
대개는 지역명인 ‘가룟인’ 유다라 부르는데, 때로는 해석상 ‘자객, 비적’으로도 불립니다. ‘자객’이라 불리는 이 말은 당시 독립운동을 하였던 열심당으로도 해석이 되기도 합니다.
유다의 출신지 ‘가룟’이 아닌, 독립운동을 하는 열심당 ‘가룟’으로 해석을 하면 유다가 왜 그렇게 행동을 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자신이 믿고 온 바에 대해서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죽음을 이야기했지만, 그는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을 생각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인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주님의 계획은 이제 정말로 최고의 막바지, 절정을 향해 달리는 중입니다. 이 와중에 한 여인의 정성어린 예수님의 장례준비와도 같을 향유를 붓는 사건과 이와는 정반대로 그동안 제자로서 살아왔던 모습을 부정한채 자기 욕시을 채우고자 하는 정욕적인 모습만이 보입니다.
누가 참 제자인가? 일년치의 연봉을 날리는 행위를 하는 여인이 제자인가? 아니면 그 돈을 자기 마음대로 착복하지 못해 분내하는 제자 특히 가룟 유다가 제자인가?
답은 이미 정해져있습니다.
고난주간을 시작하며....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노린 어둠, 마귀는 그 틈을 노릴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며 그럴듯하게 말하지만, 그 행위의 동기가 어떠한가?
고난주간을 보내며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뜻을 바로 세우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