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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대학과 전쟁 그리고 오스카
서울공대지 2020 Spring No.116
김성우 공학전문대학원 교수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면, 그 개인의 역량과 노력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고 감탄하게 되지만, 비슷한 시기 인접한 지역에서 다른 영웅들이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영웅이 탄생할 수 있었던 구조와 맥락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 구조와 맥락을 들여다 보는 것을 철학자들은 구조주의라고 부르고 생물학자들은 자연선택이라고 부른다.
봉준호 감독, 백종원 대표, 박진영 프로듀서와 같이 흥을 돋는 산업을 이끄는 대표 인물들이 비슷한 시기에 같은 학교에 다녔다는 것도, 근 20년새에 대한민국에서 자수성가한 부자 대부분이 비슷한 시기에 서울공대를 나와 카이스트 대학원을 다녔던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주원장과 세종대왕
명나라를 세운 홍무제 주원장은 어려서 형 한 명을 빼고 가족 전부가 굶어 죽었을 정도로 그야말로 비참한 無에서부터 출발해, 결국 277년이나 이어진 왕국을 세운, 맨손으로 일으키는 스타트업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전무후무한 인물이다. 당시 중국은 홍건적의 난으로 스스로 미륵을 자칭하던 이들이 난립하던 대혼란의 시기였다.
명나라의 탄생과 조선의 탄생은 이어져 있는데, 주원장이 원나라를 무너뜨렸고 원나라와 좋던 싫던 이어져 있던 고려는 이 혼란한 팀을 놓치지 않은 이성계 장군이 무너뜨렸다. 주원장은 개국을 한 후 공신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데,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황세자에게 ‘꽂힌 가시를 뽑아 네게 왕국을 물려주려고 그런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명나라와 마찬가지로 막 개국을 한 조선도 후계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태조 이성계는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아들, 즉 왕자가 8명이었다. 그의 다섯째 아들이던 이방원은 12명의 아들이 있었다. 태종 이방원은 형제들과 신하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왕좌 게임을 거쳐 왕위에 올랐고 그 실력과 카리스마로 다른 잠재적 경쟁자들을 압도하였다.
그러나 이런 난세 속 실력을 키울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자란 왕자들이 노련한 신하들과 외척들에게 휘둘릴까 고민이었다. 이방원도 후계문제에 있어서는 주원장과 같은 처지였다. 주원장을 직접 만나고도 온 이방원도 자신의 후계 아들에게 가시가 될만한 것들을 뽑아낸다. 자수성가하여 자신만만한 아버지의 불 같은 성깔에 비유를 맞출 만큼 눈치가 빠르고 인내심이 좋았던 셋째가 결국 왕세자가 된다. 그가 충녕대군 이도(李 )이다. 태조 이성계의 손자로 창업주의 3세가 된다.
왕자의 난이 볼썽 사나울 수 있으나 큰 조직의 수장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불가피한 면이 있고, 이 과정을 통해 잠정적 후계자들은 급격히 실력이 키우게 된다. 이는 조직의 장기적 생존을 위해 좋은 일이다. 세종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능가해 18명의 아들을 낳았다. 자식이 한 두 세 명 남짓한 요즘에는 사용하기 어려운 후계 전략이 되었고, 그래서인지 아무리 큰 기업도 3대를 이어가기 쉽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전세계 어디나 마찬가지이다.
아무튼, 가시를 모두 제거한 매끈한 몽둥이를 가지게 된 세종대왕은 그야말로 조선을 틀어쥐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펼쳐보게 된다. 내 것이라는 주인의식 그리고 개인의 탁월한 역량과 함께, 한반도의 르네상스가 탄생하게 된 것에는 이 같은 시대적 상황이 있었다.
세계대전과 하버드
1930년대 초, 세계는 대공황으로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 덕분에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 세계 각국에 강성 독재자들이 급부상하기 시작한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수상에 올라 독일을 손아귀에 넣게 된다. 같은 해 10월, 제임스 코넌트 하버드대 화학과 교수가 하버드의 총장에 임명된다.
미국에서 모든 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연구실을 꾸린 코넌트 교수는 독일 과학에 대한 열등감과 경외심이 상당하였다. 20세기 초 중반만 하더라도 철학은 영국, 예술은 파리 그리고 과학은 독일이 세계 최강이었고, 미국은 산업과 금융은 발전하고 있었지만 학문적 측면에서 사실 별볼일이 없고 뭐든 촌스럽던 시절이다. 그런 면에서 근세의 대한민국과 닮아 있는 부분이 많다.
지적 추진력이 대단하던 코넌트 교수는 어떻게든 독일을 따라잡고자 했고 그 자신도 갖은 고생을 하며 미국 내에서 화학자로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우뚝 섰다. 당시 연구실의 연구원이 60명에 다다랐을 정도로 관리와 행정력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하버드에서 화학박사학위를 받은 뒤, 1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참전하여 독가스 생산을 책임진 이력이 있는, 애국심이 높았고 추진력 강한 강성이었다.
경제공황으로 재정적 어려움과 함께, 개교한지 300년이 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이자 그만큼이나 경화된 거대 교육기관을 개혁해 이끌 인물로 이사회는 40살의 코넌트 교수를 총장으로 낙점한 것은 이런 배경이 있었다. 혼란의 시대는 강력한 지도자를 부른다. 노벨상에 대한 꿈을 영원히 접어야 했던 코난트는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지만, 이내 새로운 책임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노벨상을 쓸어가던 독일을 따라잡아야 했고, 급격히 부상중인 중서부와 캘리포니아의 대학들과도 경쟁해야 했다. 여러 강력한 개혁 조치 중에 특히 승진 아니면 나가라(up or out!) 정책을 밀어붙여 학내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 일으킨다. 2000년대 중 후반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이 같은 정책을 밀어붙인 뒤 일어난 학내의 극렬했던 반발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덕분에 코넌트는 거의 해고 위기까지 몰리게 된다. 그러나 해임은커녕, 자그마치 20년이나 총장직을 유지한다. 바로, 곧 터질 2차 세계대전 덕분이었다. 요즘과 같은 주변국과의 긴장관계에 있었다면, 로버트 러플린 총장이나 서남표 총장의 거취도 캠퍼스의 모습도 지금과는 더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코넌트는 정부의 부름을 받아 국방연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게 된다. 전쟁은 아직 참전도 하지 않은 미국에도 여러 가지 영향을 미쳤다. 일본이 동남아에서 전쟁을 벌이는 바람에 천연고무 전량을 수입하던 미국은 난처해졌다. 고무가 없으면 일단 타이어를 만들지 못해 당장 차가 멈출 판이었다. 코넌트는 합성고무 개발 및 공급 계획을 세워 이 위기를 타개한다.
또한 처칠을 만나러 영국에 방문하며 영국이 핵무기 개발을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영국보다 과학기술이 뛰어난 독일의 핵무기는 더 앞설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친다. 루즈벨트 대통령을 설득해 핵폭탄 제조 승인을 얻어내고 책임자를 맡아 프로젝트를 꾸린다. 전시에 대학이 할 일은 전쟁에 이기게 하는 것이고 그에 맞게 대학 커리큘럼 손보고, 하버드대에 국방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비를 끌어왔다. 일손이 부족해 지자 교수들에게 래드클리프 여대의 학생들에게도 기술을 가르치게 했다. 전쟁에 이겨야 한다는 목표아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어 붙였다.
코넌트는 과학기술 행정가로써 학계는 물론 군과 산업계를 동원해, 독일과 영국에 뒤쳐져 있던 미국의 과학기술의 수준을 크게 앞당기고, 결국 핵폭탄 두 개를 완성시킴으로써 2차세계대전을 종결시키는데 큰 기여하게 된다.
특히 하버드와 지척에 있는 MIT는 전장인 유럽에서 가까운 동부의 공대로써, 국방무기연구의 핵심연구기관이 되었고 국방부로부터 엄청난 연구비를 지원받는다. 돈 많은 졸업생도 없고, 돈 많은 부모들이 보내지 않는 보스턴 직업기술학교는 늘 예산 문제로 쩔쩔 매였지만, 세계대전으로 국방부라는 든든한 돈줄을 배경으로 급성장하게 된다. 1950~60년대까지 MIT 연구비의 90%가 국방부에서 나왔을 정도였다.
한국전쟁과 스탠포드
당시 백악관에는 코넌트를 비롯한 과학자들이 많이 들어가 역할을 하였는데, 핵 원자로와 고무 사례에서 보듯 과학이 전쟁과 경제와 긴밀히 연관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재물에 무관심한 과학자들의 성향이 이럴 때는 유리하게 작용을 한다. 돈과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 그룹이 역설적이게도 권력의 핵심부로 들어가는 것인데, 게다가 선출 절차도 거치지 않는다.
일반 대중들도 과학자 하면 핵폭탄, 독가스 같은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래서 당시 만화의 악당들은 죄다 하얀 가운을 입은 과학자였고 하나같이 무슨 무슨 박사라고 불리었다. 지금은 과학자들을 대신에 공학박사들이 그 악당 역할을 맡고 있고 덕분에 악당들도 더 이상 하얀 가운을 입지 않는다. 공학자들도 그런 이미지가 그리 싫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주변국과 관계가 나쁘지 않을 때는 기업가들이 궁에 출입하지만, 관계가 좋지 않을 때는 과학자들이 궁에 출입한다. 언제부터인가 과학자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공학자들이 궁에 들어가 조언하고 정책 결정과정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전후 평화로운 시기도 잠시, 소련과의 냉전이 시작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소련도 통제를 못하는 강성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통제 못하던 강성 이승만 대통령이 결국 충돌하고 만다. 유럽에서 시작된 2차 세계대전이, 전장과 가까운 동부 MIT에 엄청난 연구개발비를 쏟아 넣게 하였듯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이제 서부에 위치한 캘리포니아의 대학, 특히 공대에 국방연구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한국전쟁으로 미국의 국방비는 그 즉시 4배가 늘었다. 그 가장 큰 수혜를 입은 곳이 스탠포드대이다. 중국과 러시아를 막아서고 있는 최전방 한국에 보낼 무기를 공급하느라 조성된 산업단지가 오늘날 실리콘밸리로 불리게 된다.
인문계생을 위한 과학교육
코넌트 총장은 하버드가 국방 연구를 통해 급성장한 MIT와의 경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뒤 기초학문에 집중하기로 한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인문계 학생들이 많아졌는데 이들은 도통 과학에 관심이 없었다. 본인 스스로도 과학자이자 행정가로써 과학이 사회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코넌트 총장은 법률가, 작가, 교사, 정치가, 공무원, 사업가들도 미래의 리더로써 과학의 전략과 전술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오늘날 인공지능을 공대뿐만 아니라 인문계생들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작금의 어젠다와 너무나도 일치하는 상황이다. 1947년은 종전으로 그의 관심사가 전쟁보다 교육으로 옮겨가기도 하였다. 그가 이끈 핵무기 개발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기자들이 들어가 취재하면서 격렬한 사회적 논쟁을 자아냈기 때문에 대중에게 과학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된다.
학위취득이 얼마 남지 않은 하버드 물리학과 박사과정 토마스 쿤이 코넌트 총장에게 불려간다. 인문계생을 대상으로 갈릴레오, 케플러, 뉴턴의 시대인 17세기 역학의 강의를 사례 중심으로 준비하라는 주문을 받게 된다. 수학이 아니라 과학과 그에 처한 사회 상황과 과학자 인물을 다루면 이야기가 있고 재미있을 터였다.
막스를 읽던 그는 이내 전공을 아예 바꾸어 아예 과학사라는 학문을 창시하게 된다. 코난트 총장이 의도했던 대로 과학사는 과학을 대중과 친하게 만드는 일등 공신이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자들의 재미난 에피소드 대부분이 이들로부터 듣는 이야기이다. 쿤이 쓴 과학혁명의 구조는 인용횟수가 무려 10만번이 넘는다. 코넌트는 쿤을 발굴하고 키운 인물로 가장 기억되고 있다.
나도 비 이공계 학생들이 삼분지 일이나 되는 공대 전공선택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데, 수학, 물리, 프로그래밍을 기초가 없이도 들을 수 있도록 하려면, 아무래도 철학부터 과학사 이야기를 재해석해 들려줄 수 밖에 없다. 코넌트 총장, 쿤 교수와 내 상황이 오버랩 되어 묘한 기분이다.
2030년 우리는 어디로
복잡한 문제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방법 중에 아주 유용한 것 중에 하나는 누가 돈을 내는지 들여다 보는 것이다. 코넌트 총장 당시 하버드에 돈을 대는 것은 학부모들 이외에도 국방부와 돈 많은 졸업생들이었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을 동원해 가공할 핵폭탄을 만들어 승전에 기여했고, 이를 지렛대 삼아 각종 개혁조치를 밀어붙여 졸업생들이 자랑스러워 할만한 명성을 유지하게 하였다.
서울대는 수입의 대부분도 국가, 학부모 그리고 졸업생으로부터 나온다. 등록금과 기부금을 합쳐 오분지 일 정도를 차지하고 국가연구비를 포함 정부의 비중이 절반을 훌쩍 넘긴다. 국가는 경제와 국방 우위를 점하기 위한 첨단 기술개발과 인재를 필요로 하고 학부모들은 자식들이 몇 년 내에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대비시켜 주기를 바란다. 졸업생들은 자신의 출신 학교가 계속해서 자랑스럽기를 바란다.
이런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학교로서도 지적 추진력이 푸쉭푸쉭 터질 것 같은 교수를 계속 데려오고,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고 야심만만한 젊은이를 모으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하고 있다.
전시를 넘긴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창의력이라는 말도 무색할 정도로 개성 가득하고 어느 때보다 유명해지고 싶어한다. 모두 다 창의적이어서 창의력이라는 말도 곧 사라질지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학부도 무 전공으로 뽑는 것에 명분과 실리가 생긴다. 똑똑하고 부지런한데 딱히 진로를 정하지는 않았거나 관심사가 기존 학사 체계로 분류할 수 없는 학생들은 일단 무 전공 바구니에 담으면 된다. 10년, 20년 뒤에 봉준호, 백종원, 박진영 같은 리더들은 상당수 여기서 나올 것이다. 그쯤 되면 인공지능과 공학의 전략을 활용하지 않고서는 큰 일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학원에 융합전공이 가능하도록 학칙이 개정되었는데, 같은 맥락에서 크게 환영할 일이다.
학부를 무 전공으로 뽑으려면, 공통 과목이 더 활성화 되어야 할 것인데 현재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반면, 좀 재미있을 것 같은 과목은 상당수 타과 생 수강금지로 되어 있는데, 어찌되었건 간에 실망스럽다. 좀 급진적인 과목들도 더 늘어야 한다. 인공지능뿐만 아니라 대학원에 가지 않더라도 유전자 편집을 실험하고 반도체도 직접 구워 보고 말이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은 녀석들을 일단 한대 모아놓고 펄펄 끓게 만들려면, 다들 안 된다고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땀 뻘뻘 흘리게 하는 프로젝트를 주고 해결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전문가로써의 전공과목 이외에도 기본적으로 1) 물리 도구와 가상 도구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야 할 것이고, 2) 팀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어야 하며, 3) 글로벌 경험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과목이 공대 공통과목으로 매 학기 개설되고 있고 프로젝트의 경우 X-Corps와 공대 창의설계 축전 참가 신청하면 지원을 받을 수 있다. 3)의 경우 매해 방학에 진행하고 있는 스누인(SNU in the world)이나 글로벌 제품개발 과목을 통해 어느 정도 성취할 수 있다.
세상에 신나는 노래가 되길
흑사병이 유행으로 휴교령이 내려 뉴턴은 시골집에서 2년을 보내며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업적 대부분을 구상해 내었다. 어려운 시기이지만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숨 고르기와 생각의 시간이 될 것이다. 멋질 것만 같았던 2020년이 시작과 함께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행으로 모두가 다운된 세상이다. 이 시기를 잘 이겨내고, 연말에는 우리 서울공대가 국민과 세계에 희망의 소식을 전해 주는 한 해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