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5일 [성주간 수요일]
마태오 26,14-25
제자가 되려는 신앙인? 신앙인이 되려는 제자!
요즘 수많은 사이비 교주에 관한 내용을 심심치 않게 뉴스에서 보곤 합니다.
이들도 이스카리옷 유다와 마찬가지의 길을 간 사람들입니다.
처음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고 했지만, 점점 자기를 들어높이는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은 신천지의 이만희 씨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천부교라는 이단을 창설한 박태선 장로의
이력을 살펴봅시다.
그는 유년기부터 교회 주일 학교에서 교리를 배웠습니다.
서울 남대문 교회에서 집사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1948년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창동교회에서 장로가 된 박태선은 1955년부터 부흥 집회의 부흥사로 활동합니다.
이때 TV 뉴스에 보도될 정도로 많은 치유 기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이 그의 부흥 집회에 몰려듭니다.
박 장로는 점점 교만해지기 시작하여 자신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믿어버리고 자신이 믿어오던 교회가 오히려 악한 집단이라고 매도합니다.
1956년 자신을 새로운 하느님처럼 추앙하게 하고 여러 곳에 신앙촌을 설립합니다.
수많은 사람의 값싼 노동력을 통해 대기업처럼 엄청난 돈을 벌어들입니다.
그리스도는 재물과 교만을 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쨌건 그는 성경까지 바꿔가며 천부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설합니다.
이 과정에서 한 신앙촌에 불이 났습니다.
그곳에 살던 이만희 씨의 집은 불타지 않았지만,
자신의 병도 치유되지 않는 것 같고 해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그 집단에서 탈출하고 결국엔 자신이 보고 배운 대로 새로운 종교를 만듭니다.
이것이 신천지이고 이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두가 듣는 가운데 당신을 배신할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실 때 그들은 질문합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유다도 그렇게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알고 계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면서도 어떻게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기본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기본이란 제자이기 이전에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삼구와 싸우는 사순절을 사는 사람이고 제자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유다는 사순의 의미를 잊고, 곧 신앙인임을 망각하고 제자만 되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삼구와의 싸움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왜 재물에 대한 욕구와 싸워야 하는지, 왜 먹고 마시는 것과 성적 욕구와 싸워야 하는지, 왜 자신을 죽이고 겸손해져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잊고 선교나 봉사에 관한 것만 가르친다면 지금 교회도 역시 새로운 유다들을 양산하게 되어있습니다.
제자가 되는 것도 더 큰 신앙인이 되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삼구를 가르치지 않는 교회는 그래서 이단처럼 위험할 수 있습니다.
신천지는 선교를 강조합니다.
모두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속-육신-마귀는 강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교를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도 허용하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숨기도록 하는 삼구를 긍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무엇을 못 박아야 하는지 모르면 신앙인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바로 40을 의미하고 40위에 못 박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 유혹, 곧 탐욕-성욕-지배욕입니다.
이것을 한다면 신앙인입니다.
이것 없이 복음만 전하려고 하면 태어나지 않았음이 더 좋았을 법한 종교인이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5일 [성주간 수요일]
마태오 26,14-25
그저 하느님의 크신 자비만 바라며, 가슴을 치는 성주간 수요일입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스승 예수님을 적들에게 넘기는 결정적 배반 사건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취한 행동을 추적해보니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스승님을 적들에게 팔아 넘길 작정을 한 그는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움직입니다.
먼저 수석 사제들을 찾아가서 몸값 협상을 합니다.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마태오 복음 26장 15절)
유다에게서 신뢰감과 확신을 느낀 대사제들은 선금, 중도금 따지지 않고, 일시불로 처리해줍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두둑한 목돈까지 챙긴 유다 이스카리옷은 드디어 스승님을 팔아넘길 날짜와 시간을 가늠하며
적당한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더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스승님을 팔아넘길 계획을 착수하고 있던 와중에도 유다 이스카리옷은 태연한 얼굴로 다시 제자단에 합류해서, 최후의 만찬 석상에 자리 잡고 앉았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께서 그런 유다의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할 리 만무했습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예수님의 심정을 참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티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예수님 같았으면, 분노로 마음이 이글거리며 최후의 만찬 전에 제자단을 따로 집합시켰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개석상에서 배신자가 누구인지 딱 지목하시면서, 불벼락을 내리셨을 것입니다.
그도 아니라면, 유다 이스카리옷만을 따로 불러, 그에게 참교육을 실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공개적으로 배신자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으십니다.
배신자가 생겨날 것임을 암시만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예수님의 이런 행보에 대한 정확한 의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 자신만 아시겠지만, 이런 유추를 해봅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회개를 마지막 순간까지 열어 놓으셨을 것이라는 것. 혹시라도 그가 회개하면
귀신도 모르게 다시 제자단에 머물 수 있게 하려는 스승님의 배려심.
돌아보니 저 역시 배반자 유다 이스카리옷, 그리고 베드로 사도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크신 자비만 바라며, 가슴을 치는 성주간 수요일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주간 수요일>
(2023. 4. 5. 수)(마태 26,14-25)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다.>
사도였던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일은, 오늘날까지도 여러 가지 면에서 수수께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도로 뽑으실 때, 그가 나중에 배반자가 된다는 것을 아셨을까? 모르셨을까?
알면서도 뽑으셨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고, 또 유다의 책임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 되고, 모르고 뽑으셨다면 ‘예수님의 권능’에 문제가 됩니다.
질문의 답은 ‘모른다.’입니다. (아직도 가장 큰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유다는 왜 배반했을까?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배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유다가 사제들에게 ‘배반의 대가’를 요구하긴 했는데, 그 ‘대가’가 꼭 돈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1)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루카 24,19ㄴㄷ.21ㄱ)”
“예수님은 ‘힘이 있는 예언자’,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시다.” 라는 믿음과 기대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뿐만 아니라, 사도들과 신자들 모두의 믿음이었고 기대였습니다.
유다도 그렇게 믿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랬는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믿음이 흔들렸을 것이고,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실망감이 배반의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유다는 자기가 예수님을 배반하더라도 예수님이 사형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마태 27,3). 배반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기대’가 ‘실망’으로 바뀐 것뿐이라면 그냥 떠나면 그만인데, 왜 굳이 박해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넘기겠다고 약속했을까?
그래서 다른 이유를 더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요한복음 5장에 있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 이야기를, 유다의 배반을 설명하는 이야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요한 5,15-16).”
그 병자는 병을 고치고 건강하게 된 것에 대한 기쁨과 감사보다 안식일을 어겼다고 박해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유다도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에 대한 기쁨보다, 또 구원에 대한 희망보다, 당장 눈앞에 닥친 박해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서, 예수님과 함께 박해받는 것을 피하려고 예수님을 배반하고 박해자들 편으로 넘어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박해자들에게 넘긴 일만 배반인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박해자들에게로 넘어간 것도 예수님을 배반한 일입니다.>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마태 26,14-16.21-22.25).”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라는 유다의 말은, “당신들이 나에게 적당한 대가를 주면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겠소.”입니다.
유다가 생각한 ‘대가’는 아마도 ‘자신의 안전에 대한 보장’이었을 것이고, 사제들은 그런 보장을 했을 것입니다.
사제들이 유다에게 준 ‘은돈 서른 닢’은 ‘안전 보장’을 약속하는 ‘보증금’ 같은 돈이었을 것입니다.
<배반의 대가로, 또는 한 사람의 목숨 값으로 보기에는 너무 푼돈입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라는 사도들의 말은,“주님, 그게 혹시 저입니까?” 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자신이 배반자가 될 수도 있음을 느끼고 불안해했는데, 그것은 그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많이 흔들리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유다도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라고 물었는데, 이 말은 “저는 아닙니다.” 라는 뜻이었거나,
아니면 아무 뜻 없이 다른 사도들의 말을 흉내 낸 말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유다만 ‘스승님(선생님)’이라고 부른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버렸음을 나타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그것은 너의 말일 뿐이다.”이고, “네가 배반자라는 것은 너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유다도 처음에는 다른 사도들과 똑같이 ‘좋은 제자’였고, ‘좋은 신앙인’이었습니다.
자신이 배반자가 될 줄은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신앙여정은 끝까지 가기 전에는, 누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긴 여행’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든지 믿음이 흔들릴 수도 있고, 세속에 마음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늘 깨어 있지 않으면, 그리고 늘 기도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유다처럼 될 수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