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반 고교야구를 호령했던 경남상고의 우완 김건덕은 187cm-95kg의 건장한 체격에 150km에 육박하는 묵직한 직구를 구사하였고 파워커브,슬라이더가 수준급이었으며 고교생으로선 드물게 경기운영능력까지 갖춘 초고교급 투수였다. 93년 화랑기,94년 봉황기 우수투수상을 수상하였고 타격에도 재능이 있어서 당해년도 최고타율을 기록한 고교타자에게 수여하는 이영민 타격상까지 받을 정도로 투타를 겸비한 최고 유망주였다.
93년 경남고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였고 부산 고교 야구의 양강인 부산고,경남고에 비해 전력이 열세였던 경남상고를 혼자 짊어지며 94년 화랑기 준우승,봉황기 4위,황금사자기 준우승등 진출하는 대회마다 팀을 상위권에 올려놓았던 에이스이자 부산 야구의 기대주였다. 94년 세계 청소년 대회 미국과의 결승에서 8-10으로 뒤지던 8회말 천금같은 동점 적시타를 터뜨렸고 상대투수의 폭투로 결승점을 뽑았다. 9회초 미국의 마지막 공격을 무실점으로 막고 마운드에서도 승리투수가 되며 11-10의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었다. 81년 이후 13년만에 한국의 2번째 우승을 이끌며 대회 mvp,우수투수상,다승왕(3승),베스트 나인(best 9)에 선정되었다. 이때가 투수이자 그의 짧은 야구인생에서 최고의 전성기였다.
우승멤버였고 홈런상을 수상하였던 76년생 동갑내기 이승엽(경북고)도 좌완 투수로 고교무대에서 걸출한 기량을 보였으나 당시 김건덕의 명성과 실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연고구단인 롯데의 파격적인 입단제안을 거부하고 한양대에 진학했으나 이후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마운드에서 1루에 견제구조차 던질수 없을 정도로 그의 어깨는 심각하게 망가진 상태였다. 고교시절 과도한 혹사가 그의 투수재능을 박탈하고 말았다. 경남상고의 전력이 약했고 그를 뒷받침해 줄 투수가 없었기에 매경기 연투를 했고 그에 따른 무리한 투구는 혹사로 이어져서 투수생명을 단축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혹사당한 자신의 어깨를 보호하기 위해 한양대 입학시 일정기간 투수로서의 경기출전은 하지 않겠다는 조건명시를 달았으나 성적에 연연했던 야구협회에서 95년 대륙간컵 대회에 그를 투수로 대표팀 명단에 포함시켰고 결국 등판함으로서 그의 자구책은 수포로 돌아갔고 어깨는 회복되지 않았다. 이후 타자로 전향했으나 고교시절 경기를 지배할 정도로 강렬한 투구를 보여주었던 "투수 김건덕"을 떠올렸던 이들에게 "타자 김건덕"은 평범한 선수에 불과하였다. 대학시절 투수로서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었고 지명타자로 출전했다. 결국 98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어느 구단으로 부터 지명을 받지 못한채 미아가 되었고 2001년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삼성에서 그를 불러 2개월간 재기 가능성을 시험했으나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이승엽이 삼성에 입단해서 간판타자로 군림하며 2003년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경신(56)하고 일본 최고의 명문 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4번 타자로 자리매김을 하며 승승장구하는 동안 김건덕은 혹사 후유증으로 인해 재능을 피워보지도 못한채 야구인생을 접고 말았다. 최동원-선동열같은 대투수의 계보를 이을수 있는 재목이 프로에서 단 한경기도 뛰어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사라진 것이다. 고교 투수의 혹사를 거론할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명사이고 비운의 선수이기도 하다.
1996년 결성한 페이지는 국내 여성 프로젝트의 대표 주자로 초대 오현란씨와 2대 안상예씨를 거치며 독창적이고 참신한 음악을 보여주었다. 이가은씨는 이들의 뒤를 이은 3대 페이지로 페이지 4집 타이틀이자 데뷔곡인 "러브이즈블루"로 2002년 가요계에 데뷔하였다. 그녀는 예술계의 명문인 예원학교-서울예고를 거치고 미국의 캘리포니아 노스릿지 주립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엘리트였다. 팝스타일과 클래식이 혼합된 크로스오버 퓨전 발라드곡인 "러브이즈블루"에서 두 가지 창법을 구사해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두각을 나타냈고 드라마 "로망스"의 삽입곡인 "이별이 오지 못하게"의 릴레이 히트로 3대 페이지로서의 초석을 다져놓았다.
2003년 5집을 발표하며 대중친화적인 쉬운 멜로디 라인으로 구성된 "난 늘 혼자였죠"를 타이틀로 내세웠지만 전작 "러브이즈블루"만큼의 폭발적인 반응은 이끌어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뮤직비디오의 장시간 키스신이 도마위에 올라 문제의 키스신을 일부 수정하는 헤프닝을 겪기도 했다. 타이틀곡의 중량감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5집이 서서히 묻혀지기 일보직전에 동앗줄을 던져주며 생명의 은인이 되준것은 드라마 "다모"에 삽입된 "단심가"였다. 원래 2002년 sbs "여인천하"의 "난정테마"로 쓰여졌으나 빛을 보지 못한채 드라마 종영과 함께 잊혀졌는데 드라마 "다모"의 채연테마로 쓰여지게 되었고 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면서 "단심가"도 그에 편승해 인기가 높아졌다.
헐값에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을 사놓았다가 신도시 개발붐을 타고 그 땅이 개발부지중에서도 노른자위에 편입되어서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으며 벼락부자가 되듯 페이지를 알리기 위한 의도인지 몰라도 "이별이 오지 못하게"와 함께 "길"이란 제목으로 5집에 수록되었는데 그것이 드라마의 주제곡으로 사용되었고 드라마 붐을 타고 동반인기를 얻었으니 "단심가"는 "다모"가 배출한 히트상품이고 최대 수혜자이면서 또한 페이지(이가은)에게 인생역전의 대박을 안겨준 로또복권이었다.
게임에서 캐릭터의 낮은 레벨지수를 순식간에 높은 레벨지수로 올려주는 아이템처럼 "단심가"는 페이지의 인지도를 수직 상승시키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5집 활동에 가속 페달을 밟으며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유엔미","다시"등의 후속곡을 대중에게 선보였고 2003년 11월경 단독 콘서트 "윤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고 대구 mbc "텔레콘서트"를 비롯한 여러 콘서트와 공중파 무대에서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주며 절정기를 구가하였다. 3대 페이지로서 자신의 입지를 완전히 굳혔으며 "페이지=이가은"이란 공식을 대중의 뇌리에 확고히 심어놓았다.
그러나 2004년 6집의 공백은 이가은씨에게 돌이킬수 없는 참담한 좌절과 시련을 안겨주었다. 타이틀곡 "사랑이 변하니"의 뮤직비디오를 호주에서 촬영하고 쇼케이스를 개최하는등 여느 음반보다 많은 정성을 들이고 야심차게 준비했지만 구단(소속사)의 문제를 비롯한 여러 악재가 터져 나와서 제대로 활동을 해보지 못했다. 4집과 5집을 통해 꾸준히 상승하던 페이지의 성장 동력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2006년 베스트 음반 "언포게터블"을 발표하며 타이틀곡 "다시 사랑해줘요"로 복귀해서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며 재기를 했지만 이것이 "페이지 이가은"으로서 마지막이자 고별 앨범이 되고 말았다.
2006년 12월 28일 자신의 싸이월드 미니홈피 히스토리를 통해 전격적으로 가수의 길을 접겠다는 말과 함께 파란만장한 4년간의 가수생활을 정리하고 말았다. 새 음반을 통해 다시 만날 날을 기다려왔던 팬들은 충격과 비통에 빠지며 슬픔에 젖어들었다. 좋은 음악을 들려주며 영원한 페이지로 함께할 줄 알았던 팬들에게 갑작스런 이별은 받아들이기 힘든 천형(天刑)일 것이다. 팬들의 아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가은씨는 싸이월드 히스토리 글로 작별인사를 대신하고 자연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다시 돌아올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담긴 판도라의 상자를 품고 그녀의 노래들을 들으며 행복했던 옛 추억들을 회상하며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고교시절 이승엽 선수보다 한 수위의 실력을 지닌 김건덕 선수가 혹사 후유증으로 일찍 야구계를 떠나 잊혀진것처럼 이가은씨도 자신이 지닌 재능을 전부 보여주지 못하고 한창 나이에 가수의 길을 접으며 떠났으니 분야는 다르지만 김건덕 선수와 이가은씨 두 사람이 걸어온 인생궤적과 뒤안길이 같게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그녀의 빈 자리가 커 보이며 3대 페이지로 남긴 추억과 "이가은"이란 이름 세 글자가 깊이 패인 상처처럼 아련하고 착잡하게 다가온다.
반면교사님의 글은 이른 봄에 쓴 글입니다. 가은님 활동 하고 있습니다. 여러님! 격려와 응원이 가은님께 힘이됩니다.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격려하고 응원하자고요!! (매일 매일 - 카페접속하기, 미니홈피 방문글 및 댓글, 각방송사에 초청신청, 사이트에 가은님 검색, 각종행사에 초청신청, 가은님 공연에 무턱대고 관람하기! 등등 무수하겠지요?)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항상 주옥같은 글들만... 크.. 저는 이런글 못쓸거같아요... 글 굉장히 잘쓰시는거같아요..ㅎㅎ
정말 멋진 글입니다. 대신 가은님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힘을 주네요.^^
누구나 한두번의 시련은 다 겪지 않을가요.지금 이가은씨는 그런 시련기인가 봄니다.재도약의 발판은 우리 팬들이 아닐까요.우리 모두 응원해 줍시다.글 잘 읽었습니다.
역시 대단한 문필가이신 반면교사님..... 하지만, 가은님이 활동을 끝낸 것이 아니라는.....
가은이누나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저로써는 그저 응원밖에 할수없네요...
아직 이별아니에염 ;-;
다시 나오실겁니다.
전.. 지금까지 다음 앨범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소리이지.. -_-;; 정말 믿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나오시길... 언제나 기다릴게요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안정이 된다. 마치 안정제를 맞은것처럼 ....
김건덕선수.... 정말 천재였는데... 김건덕선수와 비교할 정도면 가은씨도 그만한 천재라는 말이네요... 아쉽기만 합니다...
반면교사님의 글은 이른 봄에 쓴 글입니다. 가은님 활동 하고 있습니다. 여러님! 격려와 응원이 가은님께 힘이됩니다.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격려하고 응원하자고요!! (매일 매일 - 카페접속하기, 미니홈피 방문글 및 댓글, 각방송사에 초청신청, 사이트에 가은님 검색, 각종행사에 초청신청, 가은님 공연에 무턱대고 관람하기! 등등 무수하겠지요?)
가은님 언~넝 나오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