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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4. 묵상글 ( 대림 제3주일. - 로또의 기쁨과 행복.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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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4. 대림 제3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2.14 03:55
- 로또의 기쁨과 행복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대림 2주일은 ‘회개하라!’ 주일이고,
대림 3주일은 ‘기뻐하라!’ 주일입니다.
대림 2주일 가르침대로 회개하였다면
이제 기뻐할 수 있게 되었으니 기뻐하라는 얘기입니다.
왜냐면 우리의 회개가 세속인의 회개가 아니고 신앙인의 회개라면
세상을 향했던 내가 주님께로 돌아선 것이기에
이제 주님으로 인해 희망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그러니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로또의 행복을 예로 들어 오늘 희망과 기쁨을 얘기하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매주 로또를 산다고 제게 얘기하였습니다.
그래서 일확천금의 꿈을 꾸고 있고 그것이 이루어지리라고 믿기에 사느냐 물었더니
자기는 그런 꿈과 믿음 때문이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세속적인 행위가 아니니 다행이다 생각하며 그러면 왜 사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로또를 사서 부적처럼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한주의 희망이 생겨서
한주 내내 뿌듯하고 희망을 지니고 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로또의 행복이 두 가지인데 로또에 당첨돼 기쁜 행복이 하나이고,
로또에 당첨될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기쁜 행복이 다른 하나이며,
완료형이 하나이고 미래진행형이 다른 하나입니다.
그런데 통계에 의하면 당첨된 사람은 엄청 기쁘고 행복한 순간이 있었지만
그 기쁨과 행복은 당첨된 순간이었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불행하게 된답니다.
그 이유를 보면 하나는 그 돈으로 방탕하게 살기 때문에 다른 하나는
돈을 욕심내는 주변 사람들 때문에 돈도 건강도 사람도 다 잃기 때문입니다.
저도 군대에서 그런 체험이 있었습니다.
고된 훈련으로 배가 너무 고프고 늘 고팠으며 집단 허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식사 종이 울리면 친구들은 쏜살같이 달려가고 그래서 긴 줄이 생기는데
저는 일부러 늦게 가 맨 뒤에 섭니다.
속으로 먼저 먹으려고 하는 놈들 한심하다고 하며 영적 우월감을 즐기지만
한 꺼풀 속으로 더 들어가면 저만의 희망 연장책이었던 것입니다.
경험으로 볼 때 일찍 먹고 나면 먹으리라는 희망은 사라지고 또 먹고 싶습니다.
실제로 먼저 먹은 친구들을 보면 먹고 나서도 또 주변에서 껄떡거립니다.
그걸 아는 저는 맨 뒤에 서서 얼마 안 있으면 먹게 되리란 희망을 오래 즐깁니다.
그때는 100m 뒤에서도 배급하는 곳을 뚫어지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집중합니다.
옆에 꽃이 폈어도 그것 눈에 들어오지 않고 누가 지나가도 보지 못할 정도입니다.
사실 한순간의 기쁨과 즐거움,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한순간일 뿐 더 이상이 없는 기쁨과 즐거움은 오히려 더 허기지게 할 뿐이니
우리는 완료형의 희망과 기쁨보다는 현재진행형의 희망과 기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희망 고문이 아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확실하고 틀림없는 희망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돈도 로또도 성공과 성취도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가 희망하고 우리에게 현재진행형의 기쁨과 행복을 줄 것은 하느님입니다.
돈과 로또와 성공과 사람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하느님은 다 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우리 신앙인들이고 우리는 그 하느님께 희망을 걸며 기뻐합니다.
이 하느님을 믿습니까?
이 하느님을 사랑합니까?
이 하느님을 희망합시다! 그리고 기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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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4. 대림 제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뻐하라, 두려워하지 마라, 기다려라, 회개하라>
“주님은 눈먼이를 보게 하시며,
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주시며,
주님은 의로운 이를 사랑하시네.”(시편146,8)
오늘은 대림 제3주일, 영롱한 대림촛불이 주님께서 더욱 가까이 다가 오셨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신망애, <믿음-희망-사랑>의 세 영혼의 촛불을 들고 깨어 주님을 기다리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오늘 대림 제3주일은 옛부터 입당송 라틴어 첫마디를 인용해 <가우데테 (Gaudete) 주일> 즉 <기뻐하라 주일>이라 불렀습니다. 통상적으로 대림시기는 더욱 엄격한 참회시기로 여겨졌고 초기교회는 이번주 3일은 단식과 절제를 행하곤 했습니다.
이를 상징하듯 대림시기는 보랏빛 제의를 입습니다만, 오늘은 특별히 이를 완화하여 기쁨을 상징하는 분홍색 또는 장미색 제의를 입으며, 일명 <장미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입당송 말씀이 우리의 기쁨을 한층 고무합니다.
“기뻐하십시오. 거듭말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주님 탄생의 그날까지 이런 대림의 충만한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입당송에 이어지는 필립비서 내용이 좋아 계속 인용합니다. 그대로 대림시기 삶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
참으로 기쁘게 살 때, 이처럼 주님은 넘치는 축복을 주심을 깨닫습니다. 본기도 역시 우리의 기쁨을 고조합니다. 이어지는 이사야 예언자의 충고가 기쁨의 절정을 이룹니다. 세상사에 지치고 메마른 광야같고 사막같은 모든 이들을 일깨우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하며 환성을 올려라.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주님 만이 주실 수 있는,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기쁨이요 주님을 앞당겨 만나는 만남의 기쁨입니다. 결코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입니다. 도대체 주님이 아니곤 어디서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있겠는지요?
오늘은 제42차 자선주일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 주님을 기쁘게 하는 자선활동임을 깨닫습니다. 말그대로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는 선행의 자선입니다. 토빗기 말씀이 자선의 중요성을 마음 깊이 각인시킵니다.
“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 금을 쌓아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준다.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충만한 삶을 누린다.”(토빗12,8-10)
오늘 이사야의 다음 예언은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서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이 또한 우리에게는 샘솟는 기쁨이 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온전한 치유의 구원임을 확인합니다. <그때>가 바로 주님을 기다리며 만나는 <오늘>입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도대체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깊이 잘 들여다 보면 모두가 장애자들이요 참으로 애타게 목마르게 이런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런 이사야의 예언이 오늘 복음을 통해, 또 <그때의 오늘>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실현됩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참으로 주님을 전폭적으로 믿고 신뢰할 때, 전인적 온전한 치유의 구원을 상징하는 말씀이요, 이런 주님을 만나 모시는 이 거룩한 기쁨의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답이 나왔습니다. 바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기쁨이요, 주님을 마중나가는 기쁨이요, 주님을 만나는 기쁨입니다.
둘째, “기다려라!”
기다리는 <인내의 달인達人>이 되라는 것입니다.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분명 오시는 주님을 깨어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간곡한 당부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오심이 가까웠습니다.”
끝까지 참는 자가 궁극의 승리요 생명의 구원을 얻습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동료 형제들의 품행상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라 했습니다. 참으로 지극한 인내의 믿음과 사랑으로 버텨내고 건뎌내야 할 것이 참 많은 세상입니다.
셋째, “두려워하지 마라!”
불안과 두려움에 포위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입니다. 참으로 주님으로 인해 기뻐할 때, 주님을 기다릴 때, 두려움도 점차 약화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말씀 뒤에는 반드시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는 주님 말씀이 뒤따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언제 들어도 힘이 납니다.
“너희는 맥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
요셉 수도원 십자로 중앙, 언제나 거기 그 자리의 예수부활상 역시 수도원을 찾는 사람들을 환대하시며 바위판의 성구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에는 ‘너와 함께(with you)’, 그리고 ‘너를 위해(for you)’란 내용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넷째, “회개하라!”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크다 했으니 바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지칭합니다. 그러니 이런 존엄한 품위에 맞갖은 삶이 바로 회개의 삶입니다. 회개하라, 사랑하라, 보속하라, 하루하루 주어지는 선물같은 날들입니다. 죽으면 회개도, 사랑도, 보속도 없습니다.
전방위에 걸쳐 펼쳐지는 회개의 삶입니다. 주님의 선구자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닦는 것은 구체적 회개의 실천을 통해 실현됩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선활동도 참 좋은 회개의 표현이요, 원망이 아닌 감사도 참 좋은 회개의 표현입니다. 야고보 사도를 통한 주님의 권고입니다.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심판받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심판자께서 문앞에 서 계십니다.”
‘원망하지 마라’. 바로 ‘감사하라’란 말이며, 감사하기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감사의 선택이자 발견이요, 감사의 훈련, 감사의 일상화가 지혜롭고 행복한 삶의 첩경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기쁨과 기다림, 회개의 삶에 충실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영적 <시온>의 미사전례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위로와 치유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 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이사35,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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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4. 대림 제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리움이 길이 된다(박노해)
나는 기다리는 사람 / 그리움을 좋아한다. //
나는 그리움에 지치지 않는 사람 / 너에게 사무치는 걸 좋아한다. //
기다림이 지켜간다. / 그리움이 걸어간다. //
이 소란하고 쓸쓸한 지구에 / 그대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 눈물 나는 내 사랑은 /
그리움이 가득하여 / 나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
기다림이 걸어간다. / 그리움이 길이 된다. //
대림이 깊어가고 기다림과 그리움이 깊어가면서 빛이 다가옵니다. 해가 뜨기 전 먼동이 터오듯, 참 빛이신 아기 예수의 탄생이 가까워지면서 세상에 희망의 동이 터옵니다. 이토록, 보랏빛 동녘 하늘 타오르는 오늘은 “기쁨주일”입니다. 이 기쁨을 오늘 <입당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기쁨을 선포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이사 35,1-2)
오늘 우리는 이 기쁨주일에 핑크빛 옷을 입고서 설레는 기다림과 고대하는 기쁨으로 벅차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광야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직도 ‘감옥’이라는 광야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이라는 광야는 목을 내밀고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장소입니다. 기다림만으로 온전히 꽉 찬 공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지금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과연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인지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마태 11,3)
요한의 이 의구심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자신이 선포했던 메시아 상과는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가려 쭉정이를 불태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쁜 나무를 찍는 도끼의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과 함께 고통당하는 사랑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불의를 징벌하고 정의를 세우는 심판자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죄인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을 구하기 위해 용서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요한은 자신이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메시아에 대한 의혹이 생겼을 것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 ;29 참조)라고 증언하기도 했지만, 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들을 통하여, 신앙고백에 이르러야 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6)
이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혼란에 빠지지 않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행복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활동 모습이 자신이 생각했던 메시아의 표상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는 복되다는 진복선언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자신의 기존 표상과 관념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질책과 경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마태 11,4) 이르시면서, ‘보고 들었던’ 내용을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여 표현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5)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보여주셨습니다. 실로, 인간 삶의 길과 하느님 생명의 길은 사뭇 다릅니다. 인간 삶의 길은 먼저 살고 나중에 죽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생명의 길은 먼저 죽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항상 살기 위해서 애를 쓰며 모든 힘을 다 쏟습니다. 그러다가 모든 힘을 다 탕진하고, 애를 쓸 힘이 더 이상 없으면 죽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길은 먼저 죽는 일입니다. 그러면 살게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은 잃은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 생명의 길을 따라 자신을 버리면, 진정 행복한 삶일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기쁨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기쁨주일”인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선언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이 “오실 분”에 대한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라면, ‘뒷부분’은 ‘먼저 오게 될 사자’인 세례자 요한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러나 이 증언은 결국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증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임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마태 11,10)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길”을 내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당신의 길을 마련하시고자 하십니다. 당신의 길이 우리 마음 안에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대림 시기는 다름 아닌 바로 이 ‘길을 닦는 일’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거침없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의 길을 곧게 하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마태 11,3)
주님!
당신께서는 말씀의 실행을 통해 “오실 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이 하시는 일을 보고 사람들이 깨달아 알도록 하셨듯이
제가 하는 일을 보고 당신의 제자임을 알게 하소서.
제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말씀의 실행을 통해 제가 누구인지를 증언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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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4. 대림 제3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주에 본당 성음악 분과 주관으로 ‘자선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열린 음악회입니다. 작년에는 수익금 전액을 장애인 공동체를 위해서 기부하였습니다. 올해에도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부하려고 합니다. 많은 분이 악기와 노래로 자선 음악회를 빛내 주었습니다. 자선 음악회의 취지를 알고 작년처럼 올해에도 많은 분이 함께하였습니다.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교회가 자선을 교회의 사명으로 여기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착하고 충실한 종아! 너희는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가난한 이에게 해 준 것이, 가장 굶주린 이에게 해 준 것이, 가장 헐벗은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렇습니다. 자선은 선택사항이 아니고 자선은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의무 사항입니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와 분수를 모르고 거친 세상과 다투려는 사람입니다. 말의 의미처럼 작은 사마귀가 자신의 앞길을 막는다고 수레 앞에서 싸우려는 것과 같습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 먼저 먹는 사람도 이와 비슷합니다. 달걀로 바위를 깨려는 사람을 말하기도 합니다. 정당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한몫을 잡으려는 사람들도 이와 비슷합니다. 노름판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결국은 패가망신하기 마련입니다. 어른들은 이야기하셨습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라. 가을이 오면 겨울을 준비하여라.’ ‘당랑거철’의 고사는 결국 수레를 모는 사람이 사마귀를 피해서 갔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마귀의 용기를 가상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어쩌면 무모한 것처럼 보이는 ‘당랑거철’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꽃동네를 설립하신 오웅진 신부님은 ‘얻어먹는 힘만 있어도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걸인들과 함께 작은 움막을 짓고 나눔을 시작하였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려는 사제의 꿈은 작은 불씨가 되었습니다. 50년이 지난 지금 꽃동네는 외로운 이들, 지친 이들, 아픈 이들, 가난한 이들의 쉼터가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꽃동네를 직접 방문하셨고, 위로와 희망을 전해주셨습니다.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에서 복음을 전하던 이태석 신부님이 있습니다. 그분의 숭고한 삶과 사랑은 많은 결실을 보고 있습니다. 그분의 삶을 다룬 ‘울지마 톤즈’는 한 사람의 희생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발이 뒤틀린 나환자들을 위해서 신발을 만들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이들에게 음악을 알려주기 위해서 스스로 악기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된 목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많은 젊은이가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고, 사제의 길을 가기 위해서 신학교에 지원하였습니다.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외친 세례자 요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모진 박해를 견디면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은 모두 거대한 권력에 맞섰던 작은 촛불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외침이 있었기에 우리는 재물, 권력, 명예라는 ‘틀’을 벗어버리고 나눔, 희생, 사랑이라는 새로운 ‘틀’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꿈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그런 주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남을 탓하고 심판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고난을 참고 이겨낸 사람들의 본보기로서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예언자들을 생각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을 털어내고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를 봅니다. 앙상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푸른 잎들은 모두 떨어져 버렸습니다. 만일 나뭇잎들이 떨어지지 않고 가지에 붙어있다면 나무는 긴 겨울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나무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생존의 지혜를 터득한 것입니다. 긴 겨울을 견딘 나무는 봄이 오면 새로운 잎이 생기고, 여름에 뜨거운 태양을 마음껏 받아들여 열매를 맺고, 나이테 하나를 더 만들어 냅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가진 사람만의 몫이 아닙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배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구원은 특정한 사람만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만이 나눌 수 있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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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4. 대림 제3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영혼의 노래 - 쉰 번째 주간 실천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2월 13일 토요일- 쉰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은총의 은밀한 업적
제임스 핀리(James Finley)와 미라바이 스타(Mirabai Starr)와 함께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실천해 보십시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신비가에게로 향함(Turning to the Mystics)』 제3시즌에서 제임스 핀리(James Finley)와 미라바이 스타(Mirabai Starr)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작품인 ‘영혼의 노래(Song of the Soul)’, 곧 ‘어두운 밤’을 함께 읽습니다. 아래의 링크를 통해 영어와 스페인어로 나누어진 이 시를 듣거나 읽을 수 있으며, 간단한 지침에 따라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또는 오디오 디비나(audio divina)를 실천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처음에는 시를 듣거나 읽으면서, 그 울림과 이미지가 당신의 영혼을 감싸도록 하십시오.
이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의 첫 단계인 Lectio에 해당합니다. 말씀이나 신비가의 시를 단순히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 소리와 리듬, 이미지가 마음에 스며들도록 하는 단계입니다. 가톨릭 영성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단순히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이 내면을 감싸도록 열어두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의미를 붙잡으려 애쓰기보다, 말씀의 아름다움과 신비가 내적 침묵 속에서 영혼을 적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로 들거나 읽을 때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끌리는 한 단어나 구절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 말씀이 당신에게 직접 말을 걸도록 하십시오. 그 의미를 하느님께 기도로 드리거나, 묵상 일기에 기록하며 성찰해 보십시오.
이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의 두 번째 단계인 묵상에 해당합니다. 단순히 읽는 것을 넘어, 말씀 속에서 특별히 마음을 울리는 단어나 구절을 붙잡는 과정입니다.
가톨릭 영성에서는 성경 말씀이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라, 성령의 살아 있는 음성으로 이해됩니다. 말씀은 개인의 삶과 상황 속에서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통로가 됩니다.
즉, 말씀 속에서 마음을 끄는 단어를 붙잡아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 기도하거나 성찰을 기록함으로써, 말씀을 개인적이고 살아 있는 은총의 대화로 받아들이라는 초대입니다.
세 번째로 들거나 읽은 후에는, 하느님과 함께 침묵 속에 머무르십시오. 마음이 이끄는 만큼 그분 안에서 오래 머무르도록 하십시오.
이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의 마지막 단계인 관상에 해당합니다.
이제 더 이상 단어를 붙잡거나 의미를 분석하지 않고, 단순히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시간입니다. 가톨릭 영성에서 침묵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성령의 현존을 체험하는 공간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과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를 강조했습니다. 이는 강제적인 시간이 아니라,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만큼 머무르는 자유로운 관상입니다. 이 단계는 인간의 노력보다 하느님의 은총이 더 크게 작용하는 순간입니다. 말씀을 통해 준비된 영혼이 이제 하느님과 직접적인 친교를 누리게 됩니다.
[역자 주: 영어나 스페인어로 이 시를 듣고 읽기 어려우신 분들을 위해 번역을 시도했으나 너무 길어서 포기했습니다. 다만 렉시오 디비나의 방법을 간단하게 설명을 덧붙여 옮겨 놓았습니다. 필요하신 분들은 웹사이트에서 번역된 내용이 나오니 참조하십시오. 그리고 꼭 이 '영혼의 노래'가 아니더라도 성경의 한 구절이나 다른 영적 시를 이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Click here to read the poem in the podcast episode’s transcript.
References
James Finley and Kirsten Oates, cohosts, with Mirabai Starr, Turning to the Mystics, podcast, season 3, ep. 1, “Turning to St. John of the Cross,” March 8, 2021. Available as MP3 audio download or PDF transcript.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Laura Barbato, untitled (detail), 2020, photo, Italy,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창문에 서린 안개를 닦아내는 작은 몸짓은 곧 ‘영혼의 어두운 밤’ 속에 있다는 우리의 작은 표징이 됩니다. 그것은 ‘나는 여기 있습니다’라는 육화된 응답으로, 알 수 없음 속에서도 선명함을 향해 나아가려는 몸짓입니다. 그 옆에서 작고 한결같이 타오르는 촛불은, 겉으로는 계절이 환히 빛나더라도 우리의 내면이 그렇지 않을 때에도 성령께서 여전히 부드럽게 타오르고 계심을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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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4. 대림 제3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자 자선주일입니다. 자선주일은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가1984년 매년 대림3주일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고통받는 이들에게 자선을 실천하도록 일깨우기 위해 설정한 날입니다.
자선주일을 맞이하여 참된 자선의 의미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선을 단식과 기도와 더불어 신앙생활의 삼대 기둥의 하나로 여기셨습니다(마태6,1-8). 주님께서는 자선을 권하시면서 그것을 완전히 이해타산 없이 ‘나팔을 불지 말고’(마태6,1-4),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루가6,35 ; 14,14) 남이 자신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라고 말씀하십니다(루가6,30). 더욱이 주님께서는 어떠한 청에도 마음의 문을 닫지 말라고 하십니다(마태 5,42). 왜냐하면 가난한 이들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신이 물질적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적어도 자신의 영혼 안에 있는 주님께서 받은 사랑과 위로와 평화의 영적 선물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선이란 주님의 사랑에 입각해서 베푸는 경제적 물질적 원조 뿐만 아니라 영적인 힘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선행위란 헐벗고 굶주린 이에게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는 일,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고 집이 없는 이에게 머물 곳을 제공하는 일, 병든 이와 감옥에 갇힌 이을 찾아 주는 일, 그리고 죽은 이를 장사 지내 주는 일 등 여러가지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마태 25,31-46). 그리하여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말처럼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 넣어주고 꺽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 주며 불안하고 좌절하는 마음을 굳세게하고 두려워 하지 않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선 행위는 인간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고통받는 이들의 고통이 끝날 때까지 베풀어지는 손길이며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제한 없이 베푸는 데에 있습니다. 또한 인종, 민종, 종교, 신분, 계급의 장벽을 넘어서 한 마음, 한 시선으로 가난하고 고통 받은 이웃을 바라보게 하여 사랑과 자비로 일치를 이루게 합니다.
그
리하여 우리 모두가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 실패로 점철되어 절망으로 인해 미래를 바라보는 눈 먼 이들을 희망의 눈을 뜨게 해주고, 인생 여정에서 불행과 좌절로 절름발이 인생을 사는 이들을 다시 제대로 일어 설 수 있도록 해 주며, 죄로 물든 영적인 나병환자들에게 사랑으로 품어 안아 상처받은 영혼을 깨끗이 치유해 주며,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다음의 말을 묵상하며 자선의 의미를 되새기고 실천하는 주간 되시길 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과 겸손을 지닙시다. 그리고 죄의 더러움에서 영혼을 씻어 주는 자선을 베풉시다. 사람들이 이승에 남겨 두는 모든 것은 결국 잃고 말지만 자기가 실천한 사랑의 행위와 애긍은 가지고 가, 주님으로부터 상급과 합당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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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성체성사(현존, 희생, 그리고 친교의 신비) / 로렌스 페인골드
제 1부
기초
제 1장
그리스도께서 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는가?
성체성사에 대한 적합성의 이유들
2. 희생: 속죄의 보속 제물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육화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든 모든 사람과 자신을 결합하셨다. 그분은 인간의 손으로 일하시고, 인간의 마음으로 생각하시며, 인간의 선택으로 행동하시고,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하셨다.
만일 육화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어떤 방식으로든 모든 사람과 자신을 결합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을 드러낸 것이라면, 성체성사의 제정에 의해 그것은 얼마나 더 참된 것인가!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는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받아 모시어 우리가 그분 안에 동화되도록 하기 때문이다.
성체성사는 육화의 논리를 계속 이어간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존엄을 드러내시기 위해, 육화하신 말씀을 자주 받아 우리 영적 양식으로 삼고, 우리의 삶을 그분과 함께 제물로 바칠 기회를 주시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하실 수 있었겠는가? 더욱이, 우리 일상생활의 모든 올바른 차원은 성체성사로 인해 무한한 존엄성을 얻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그것들을 미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희생과 결합하여 함께 아버지께 봉헌할 수 있기 때문이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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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4. 대림 제3주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디트리히 본회퍼는 독일 고백교회의 목사이자 행동하는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목자이자 신학자로 자신의 존재와 삶을 처절하게 살고자 깨어 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신에게 묻고 답했습니다. 『 왜 사람들이 교회에 오지 않는가? 그 까닭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그는 『히틀러 정권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유대인을 보호해 줄 것인가? 사회의 잘못을 눈감고 살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잘못을 바로잡고 생명을 구하는 교회가 될 것인가?』라는 실제적인 문제 앞에 고뇌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오랜 고뇌와 기도 끝에 『미친 사람이 모는 차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을 돌보는 것만이 나의 과제는 아니다. 이 미친 사람의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이 나의 과제이다.』라고 결론짓고 반나치 운동과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1945년 4월에 플뢰센베르크의 수용소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가 옥중에서 쓴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는 본훼퍼의 깊은 신앙을 극명하게 보여 줍니다. 『 나는 누구인가? 이 고독한 물음은 나를 비웃는다. 내가 누구이건, 오, 하느님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본회퍼는 남들이 말하는 내가 나인가,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내가 나인가를 고뇌하면서 결국 하느님 시선에서 본 내가 아니면 참된 내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앞에서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오늘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 부분은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것이고, 둘째 부분은 세례자 요한의 신원에 관한 것입니다. 앞부분에서는 요한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확인하려 합니다. 어쩌면 요한만큼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도 드물었습니다. 요한은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던 이들에게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심을 알려주었고,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드리기에 부당함을 알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분께 세례를 드렸으며, 그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이라는 하느님의 목소리까지 들었습니다. 그렇게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을 알려 주던 요한 자신이 지금은 마치 그 확신을 잃어버린 듯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 (11, 3) 라고, 질문하도록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이 그의 의혹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 감옥에 갇혀 있었기에, 그가 예수님이 오실 그분이라면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아니면 세례받은 후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요한의 예상과 달랐던 것일까요 ? 어쨌든 요한은 믿음의 어둠을 겪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볼 수 있는 표지가 무엇인지를 밝혀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가 보고 듣는 것’ 곧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입니다. 눈먼 이들, 나병환자들, 귀먹은 이들이 치유를 체험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 그 외에 다른 증거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다른 어떤 설명보다도 그 응답을 끝맺는 예수님의 말씀이 복음을 읽는 제 눈길을 멈추게 합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6절) 이 말씀은 요한 20장,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말씀하신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선포가 보고 믿었던 토마스 사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뵙지 못하는 다음 세대, 곧 우리에게 우리의 믿음이 복되다고 선언하는 것이듯,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는 말씀 역시 이미 의심을 드러낸 세례자 요한보다 오히려 우리를 향해, 우리가 의심을 품지 않는다면 요한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듯 싶습니다. 결국 이 마지막 말씀이, 오늘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입을 통해 예수님께 드린 질문은 결국 우리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러기에 요한에게 한 예수님의 응답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묻는 우리를 위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문이 생깁니다. 지금 우리에게 너희가 보고 듣는 것 이 믿음의 근거라고 하신다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보고 믿으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 2천 년 전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를 저는 이들이 걸었다는 것 ? 그것은 너무 멀리 있는, 확인할 수 없는 증거가 아닐까요 ? 복음의 뒷부분은 이러한 우리의 의심을 확신으로 이끌어 줍니다. 군중이 떠나간 다음 예수님은 이제 세례자 요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어느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고,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사자였습니다. 그가 바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인물입니다. 그 요한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은 군중에게,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하고 물으십니다. (7절) 다른 말로 하면 너희는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았느냐 ?, 라 는 것이겠지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이를 나는 알아볼 수 있을까요 ? 예수님보다 앞서 왔던 세례자 요한이 아니라 지금 세상 안에서 눈먼 이들을 보게 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또 그들 안에서 오실 분 이 와 계심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 「믿음은 환하지만 믿음의 길은 어둡다.」라는 노래 가사가 생각납니다. 요한이 감옥에서 겪은 것과 같이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도 믿음의 근거를 찾습니다. 그들한테도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근거는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는 것입니다. 고운 옷을 입은 자들을 보러 왕궁에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구석구석에 눈길을 돌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거기에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고 믿기 어렵다면, 그것을 보고 들을 수 없다면,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세상의 한 자리, 내가 있는 그곳에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그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행실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모습을 행실로 보여 주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 그분은 눈먼 이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눈먼 이들을 보게 해야 합니다. 탐욕에 눈먼 사람들을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ㅡ 그분은 다리 저는 이들을 제대로 걷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리 저는 이들을 제대로 걷게 해야 합니다. 이기심으로 균형을 잃어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람들을 너그러움으로 걸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 그분은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교만함의 종기로 더럽혀진 사람들을 겸손의 약으로 깨끗하게 치유해야 합니다.
- 그분은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해야 합니다. 자기 이야기만 하고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귀먹은 사람들에게 경청하여 그들도 듣게 해야 합니다.
- 그분은 죽은 이들을 되살리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죽은 이들을 되살려야 합니다. 살 맛나지 않아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 살게 해야 합니다.
-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마다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그분의 몸을 양식으로 먹습니다. 그래서 그분과 한 몸을 이룹니다. 그분이 우리가 되고, 우리가 그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에 보이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실로 예수님은 평가받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또 하나의 예수님입니다. 왜 사람들이 교회에 오지 않는가? 그 까닭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해서, 라고 결론짓고 실천에 옮겼던 본훼퍼처럼 우리도 우리의 믿음의 실천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 특별히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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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4. 대림 제3주일.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제 키가 얼마나 될까요? 요즘 학생들 보면 큰 아이들은 엄청 큽니다. 또 배우나 가수들 중 여자 연예인도 저보다 큰 사람이 많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제 키가 큰 편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 제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요한보다 클까요? 작을까요? 크다고 생각하시는 분? 작다고 생각하시는 분? 세례자 요한을 본 적이 없어서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은 왜 요한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요한이 큰 인물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위해 태어났고, 그것을 기뻐했고, 그리스도를 위해 한평생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에서 요한의 삶의 의미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주님을 기다리며 광야에 살았습니다. 요한이 광야에서 본 것은 무엇일까요? 복음에서 이야기하듯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일까요? 아니면 좋은 옷을 차려입은 사람일까요? 아니면 왕궁일까요?” 요한이 본 것은 하느님입니다.
힘들고 괴로울 때 우리는 무엇을 보았을까요? 하느님의 자비입니까? 아니면 먹고 마시는 기쁨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그럴듯한 속임수였습니까? 저는 확신합니다. 힘들고 괴로울 때 우리는 더욱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정확히 들여다 보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집니다.
우리가 삶의 고통에서 하느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그러한 삶에서 주님과 함께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요한과 같은 사람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광야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말리지 않는 계란말이
가능하면 금요일 저녁 식사는 같이 사는 후배 신부님과 함께 합니다.
금요일 저녁 식사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제가 음식 하나를 만들고 후배 신부님도 음식 하나를 만들어 나눠 먹는 것입니다.
저는 김치찌개를 준비했습니다. 후배 신부님은 계란말이를 해오겠다고 했습니다. 약속된 식사 시간이 조금 지나 후배 신부님은 엉망이 된 계란말이를 들고 왔습니다. 그 모습은 계란전도 아닌것이 꼭 큰 계란 덩어리로 보였습니다.
후배 신부님은 말했습니다.
신부님…. 달걀이 말리지 않아서 스크램블로 하려 했는데 망했습니다.
그도 그럴 만했습니다.
계란말이에 너무 많은 재료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당근, 양파, 햄….
많은 것을 넣으니, 계란이 말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계란말이가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너무 과하면 망친다.’라는 것입니다.
사랑도 과하면 사람을 망칩니다.
즐거움도 과하면 사람을 망치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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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8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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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4. 대림 제3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복음의 역설과 이 역설을 가능케 하는 하느님의 은총!
세례자 요한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인물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자 신약의 시작을 알리는 인물로 이해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한 “메시아의 선구자”로 불립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성인’이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지만, 요한은 특별히 신약 공동체와 연결되었기에 ‘성 요한 세례자’라 부릅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과 직접 만났고, 그리스도의 공적 사명을 시작하도록 세례를 베푼 독특한 위치를 지니고 있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군중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가 그보다 더 위대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요한의 위대함을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 이후에 태어난 신약 공동체의 지위가 더 큰 은총 안에 있음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즉, 세례를 통해 하늘 나라에 들어간 가장 작은 신자도 요한보다 더 큰 은총을 누린다는 뜻이겠지요?!
여러분은 세례자 요한보다 더 위대하다고 느끼십니까? 역사 속에서 그의 불같은 열정과 열망에 견줄 만한 인물은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그는 살아온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공동체(교회)에 속하는 것은 요한이 특별히 지녔던 탁월한 자질에 달려 있지 않은 듯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에 달려 있는 것일까요??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자 신약의 시작을 알리는 인물로, 회개와 메시아 도래를 선포했습니다. 그의 열정은 교회가 특별히 기념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을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라 하셨습니다. 이는 그의 독보적 위치를 인정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속하게 되는 것은 인간적 열정이나 예언자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은총과 믿음, 그리고 세례성사를 토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선제적인 은총과 사랑에 의해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고, 성령의 은총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일원됨은 인간적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살며, 당시 유다 사회의 중심(성전, 제사 제도)과는 거리를 두었습니다. 이는 그가 구약 예언자적 전통을 이어받아, 세속적 질서와는 다른 하느님의 질서를 선포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요한의 메시지는 단호하고 직선적이었지만, 복음의 충만한 기쁨과 역설적 풍요(예: 죽음을 통해 생명을 얻는 부활의 신비)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완성하실 부분이었습니다. 가톨릭 신학에서 ‘역설’은 십자가와 부활, 약함 속의 강함, 죽음을 통한 생명 같은 구원 신비의 핵심 요소입니다. 요한의 메시지는 준비였고, 역설적 충만은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납니다.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인간의 영적 성장에 세 가지 단계를 구분했습니다. 미적 단계, 도덕적 단계, 그리고 영적 단계가 그것입니다.
첫 번째 단계(아름다운 생각과 감정의 단계)는 시간이 지나면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 단계는 단순히 아름다운 감정과 사상에 머무르는 단계. 이는 신앙을 ‘감정적 위안’이나 ‘문화적 장식’으로만 소비하는 상태와 유사합니다.
이런 위기를 거치면서 우리는 두 번째 단계인 책임과 도덕적 자각의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오래 씨름하다 보면 자신의 약함과 동기의 모호함을 깨닫게 됩니다. 단순히 도덕적인 사람으로만 살려고 한다면, 진정한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는 인간의 한계와 죄성 때문에, 도덕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과 연결됩니다.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갈라 2,16).그 결과 종교가 자기만의 의로움으로 변질되고, 판단적이며, 원망과 위선으로 가득 차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진심으로 문제로 인식하게 되면 더 깊은 영적 현실로 나아가는 문을 열립니다. 더 이상 실패를 감출 수 없을 때, 실패의 지혜를 배우게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결국 우리 인간에게는 우리 존재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꼭 필요하며 반드시 하느님께세 우리의 모든 노력 너머에서 우리에게 오셔야 하는 것을 의식하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단계로서 자신의 실패와 무능을 인정하고, 은총(gratia)에 의지하는 단계입니다. 여기서 인간은 십자가의 역설을 깨닫습니다. 약함 속에서 강함이 드러나고, 실패 속에서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처럼 광야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요한과 달리 광야에 그저 머무신 것이 아니라 사회의 주변부에서 죄인들과 소외된 이들과 함께 앉아 식사하셨습니다. 그분은 옛 가치가 뒤집힌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셨습니다. 성공/실패, 첫째/마지막, 죽음/생명. 만일 요한이 살아 있었다면 그는 아마도 이 새로운 공동체와 그 역설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처럼 골고타에서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며, 본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불타는 열정은 이미 깊은 사랑으로 변했을 것이며, 그의 준엄한 심판은 자비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이런 변화 역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한 요한은 이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일 열린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매일 매 순간 이런 은총의 초대가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인식하여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우리 삶의 방향은 분명히 우리 앞에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의 길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대림 시기는 단순히 기다리는 시기가 아니라 변화를 지향하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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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4. 대림 제3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세상의 모든 ‘미인’의 가장 아름다운 눈, 코, 입 등을 조합해서 하나의 얼굴을 만든다면 어떨까요? 실제로 이런 시도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하는데, 그 결과는 놀랍게도 ‘가장 완벽한 미인’이라기보다는 다소 평범하거나 ‘평균적인’ 얼굴에 가까웠습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가진 개성 있고 독특한 매력들이 서로 중화되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내면의 종합은 어떨까요? 지혜, 자비, 용기, 예술적 재능, 유머 감각, 따뜻한 인품 등 내면의 모든 장점을 포함한다면 어떨까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뛰어나고, 모든 이에게 사랑받으며, 흠잡을 데 없는 인격과 지성을 갖춘 존재가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완벽한 사람은 인간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완벽한 사람이지만 가까이하고 싶지 않게 됩니다.
부족한 단점들이 ‘나’ 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진짜 나만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세상에 발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모습이든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모든 장점의 집합체가 아니라, 나의 고유한 장단점,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모습이 바로 하느님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가끔 자기가 원하는 방식, 자기가 정해놓은 시간에 하느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때 실망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요한도 마찬가지로 의문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라고 묻습니다. 오실 분은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를 말합니다. 이 메사아의 모습을 세례자 요한은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 3,10)라고 말하면서, 심판의 메시아 상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모습은 사랑의 메시아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의 성취를 나열하십니다(이사야 35장, 61장의 메시아적 표징). 사랑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6)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기대했던 메시아 상과 다르다고 해서 예수님을 배척하지 않는 믿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메시아의 표징은 ‘파괴’가 아닌 ‘생명’이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른다면, 이웃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아픈 곳을 낫게 하고 가난한 이에게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가장 위대한 예언자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입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취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더 은총과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특권을 누리면서도 주님의 뜻에 반대하면 살면 안 됩니다. 철저히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다가서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에서 가장 큰 용기는 자기 연민을 버리고, 삶을 직면하는 것이다(앙리프레데릭 아미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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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4. 대림 제3주일. 키엣 대주교님.
세상의 감옥에서 저희를 이끌어 내어 주소서.
감옥에 갇힌 요한은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께 묻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요한이 갇혀 있다는 사실은, 세상의 종말을 상징합니다.
기쁜 소식을 선포하러 왔지만, 그의 메시지는 마치 돌과 메마른 흙 위에 떨어진 씨앗처럼 자라지 못했습니다. 특히 권력자들 앞에서는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영적 불구가 된 헤롯왕은 눈이 있어도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요한의 경고를 듣지 못하며, 입이 있어도 진리를 말할 용기를 잃었습니다.
또한 그는 정욕에 무력했고, 세상의 시선과 체면 앞에서 진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탐닉했기에, 하느님 나라를 볼 수도, 그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요한은 구약의 모든 예언자 중 가장 위대한 이입니다.
어머니 태중에서 이미 주님을 만났고, 요단강에서 직접 메시아를 세상에 드러내며 세례를 베풀었던 바로 그 분이 모든 구세사의 중심이심을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례자 요한보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이는 더 큰 은총을 받는 사람입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하느님과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끝나지 않는 행복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했던 모든 징표가 예수님 안에서 실현되었지만, 그분이 주고자 하신 은총은 기적을 넘어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열어 보여주는 구원 자체입니다.
주께서 오심은 진정한 기쁨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에 이르기 까지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 영광에 이르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시험을 견디고,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서로를 받아들이고,
무엇보다 자신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요한처럼 세상의 감옥 안에 갇힌 듯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아직 주님을 직접 뵙지 못해 눈이 멀었고,
세상의 소음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해 귀가 멀었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선포하지 못해 입이 서툽니다.
우리의 발걸음도 흔들려 십자가의 길을 온전히 걸어 들어서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오셔서 저희를 구원하소서!”
주님은 분명히 응답하실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구하셨고, 자캐오를 부르셨고, 바울을 일으켜 세우셨던 그분은 우리 또한 구원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우리는 마침내 하늘 나라, 참된 기쁨, 영원한 행복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주님, 세상의 감옥에서 저희를 이끌어 내어 주소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님을 보게 하시고,
우리의 귀를 열어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며,
우리의 입술을 열어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흔들리는 우리의 발걸음을 굳세게 하시어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지금 내 삶에서 나를 가두고 있는 ‘감옥’은 무엇입니까?
2.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영적 장애’는 무엇입니까?
3. 주님께서 내 안에 오시어 머무르시도록, 오늘 내가 내려놓아야 할 한 가지는 무엇인 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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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4. 대림 제3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생명] 대림3주일 -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아라
(Week 03. 말씀이 얼굴을 갖추는 시간 / 임신 10–28주 / 대림 3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아라
#되어감 #존재의존엄 #생명존중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 물었다.
"오실 분이 바로 당신이십니까?"
예수님은 직접 답하지 않으시고, 일어나는 일들을 전하라 하신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임신 10주부터 28주까지, 아기는 놀라운 변화를 겪는다.
10주경 이미 기본적인 얼굴 구조가 형성되고, 16주가 되면 눈썹과 속눈썹이 자라나며, 20주경에는 지문까지 새겨진다. 이 시기는 문자 그대로 "말씀이 얼굴을 갖추는 시간"이다.
태아는 이미 소리를 듣고(24주경), 빛에 반응하며(26주경), 엄마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점점 구체적인 얼굴과 몸을 가진 '누군가'로 드러나는 과정이다.
칼 라너는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말했다.
성육신은 단절이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 안에서 당신을 점진적으로 드러내시는 과정의 정점이다.
태아가 얼굴을 갖추어가는 시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보이는 육체를 입으시는 그 신비를 미리 보여준다. 완성된 존재로 외부에서 개입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 안에서 고통과 기쁨을 실제로 통과하시는 방식이다. 태중의 아기가 하루하루 변화하고 성장하듯, 하느님은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시간을 살아오신다.
요한은 감옥에서 물었다. "당신이 그분입니까?" 그가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과 예수님의 현실 사이에는 간극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고 듣는 것"을 전하라 하신다.
신앙은 완성된 모습을 요구하지 않는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생명의 징표들을 알아보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아직 완성되지 않은 존재"이다. 토마스 머튼은 진정한 자아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태아가 얼굴을 갖추듯, 우리도 평생에 걸쳐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가는 중이다.
생명윤리는 종종 "언제부터 인간인가?"라는 시점의 문제로 축소된다. 그러나 복음은 다른 질문을 던다.
"누가 이 생명을 알아보는가?"
예수님 시대에도 눈먼 이, 나병 환자, 죽은 이는 "온전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안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생명의 역사를 보셨다. 구원은 무언가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존엄을 '드러내는' 것이다.
10주의 태아는 28주의 태아보다 덜 인간적이지 않다. 단지 다른 단계일 뿐이다. 얼굴이 아직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았어도, 그 생명은 이미 고유하고 대체 불가능한 '누군가'이다. 지문이 새겨지기 전부터, 그 존재는 이미 유일무이하다.
대림시기는 기다림입니다. 그러나 수동적 기다림이 아니라, 능동적 준비이다.
임신한 어머니는 단지 기다리지 않는다. 먹고, 쉬고, 말하고, 노래하며 아기와 이미 관계를 맺는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생명을 위해 공간을 마련한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시작되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걷는" 그 징표들 안에서 우리는 이미 도래한 미래를 경험한다.
아직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생명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고 있나?
태중의 아기뿐 아니라, 가난한 이, 이방인, 아직 '제대로 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는 어떤 시선을 보내는가?
나 자신의 '되어감'을 존중하고 있는가?
완벽하지 않은 나를 실패로 여기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 안에서 자라나고 있음을 믿는가?
말씀이 얼굴을 갖추는 시간.
그것은 단지 과거 베들레헴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생명이 얼굴을 갖추어가고, 하느님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얼굴을 드러내신다.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오늘도 유효하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완성된 증거가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생명의 징표들. 그것을 알아보는 것이 신앙이다.
대림 3주일, 우리는 기다린다. 그러나 빈 손으로 기다리지 않는다. 이미 시작된 생명을, 이미 움직이는 은총을, 이미 갖추어지고 있는 하느님의 얼굴을 품고 기다린다.
작은 이의 기도
생명을 잉태하시는 하느님,
당신은 보이지 않는 것 안에서 얼굴을 빚으시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 심장을 뛰게 하십니다.
저희가 완성된 모습만을 찾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자라나는 생명의 징표를 알아보게 하소서.
태중의 아기처럼 아직 드러나지 않은 모든 생명,
가난한 이들, 약한 이들, 보이지 않는 이들 안에서
이미 현존하시는 당신을 뵙게 하소서.
대림, 이 거룩한 기다림 안에서
이미 오신 당신을 맞이하고 아직 오실 당신을 준비하며
지금 여기 함께하시는 당신과 동행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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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4. 대림 제3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X X X X X
http://www.ofmkorea.org/ofmhomily
위 “작은형제회 홈페이지– 나눔방– 말씀 나눔.” 리스트에서 ‘김명겸요한’으로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위에 X X X X X 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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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4. 대림 제3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11,2-11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가톨릭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대림시기의 세번째 주일을 ‘가우다떼 주일’이라고 불렀는데, 라틴어인 ‘가우다떼’는 “기뻐하여라”라는 뜻입니다. 대림 제4주일이 지나면 곧 다가올 우리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대림 3주때부터 미리 기뻐하는 겁니다. 그만큼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몸소 사람이 되어 오시는 주님께 대한 감사와 기대, 희망과 바람이 큰 것이지요. 그런 마음으로 힘을 내어 남은 대림 시기의 후반부를 기쁘게 지내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더 착실히 하자고 격려하고 권고하는 것이 오늘 ‘가우다떼 주일’을 지내는 의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메마른 땅인 ‘광야’를 통과하는 여행자의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며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권고합니다. 그의 권고대로 참된 기쁨을 누리려면 먼저 기쁨이 무엇인지 그 본질부터 알아야겠지요. 기쁨은 첫째로 소유를 통해 느끼는 만족감입니다. 갖고 싶었던 물건을 손에 넣었을 때 흡족하다고 느끼는 겁니다. 기쁨은 둘째로 성취를 통해 느끼는 뿌듯함입니다. 오랫동안 염원하는 일을 마침내 이루었을 때 그런 일을 해낸 자신이 자랑스럽고 뿌듯한 것이지요. 기쁨은 셋째로 인격적 만남과 친교를 통해 느끼는 충만함입니다. 너무나 만나고 싶었던 이를 실제로 만나 그와 깊은 인격적 친교를 이루면 항상 한 구석이 허전했던 나의 마음이 깊은 곳에서부터 충만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끼는 겁니다. 이 세가지 기쁨 중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는 기쁨은 인격적이면서 동시에 성취적인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를 드디어 만나게 되는 기쁨을 이야기하니 인격적인 기쁨이고, 그 메시아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과 영광이 이루어지게 됨을 이야기하니 성취적인 기쁨이지요. 그 기쁨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통해 얻는 불완전하고 일시적인 기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 누구보다 우리를 잘 아시고, 우리가 참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 기쁨을 얻기까지 길고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일단 그 기쁨을 누리기 시작하면 우리 영혼이 저 깊은 데서부터 충만한 행복으로 차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그런 참된 기쁨을 가져다주시는 ‘메시아’라는 점에 의구심이 생긴 모양입니다. 그래서인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이런 질문을 하지요.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님을 두고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선포했던 그가, 자기에게 세례 받으러 오신 예수님을 보고 오히려 자신이 그분께 세례를 받아야 한다며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던 그가 왜 그런 의구심을 품게 되었을까요? 그건 아마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활동이 자신이 선포했던 ‘준엄한 심판자로서의 메시아’와 달랐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도끼가 나무 뿌리에 닿아 있을 정도로 심판이 임박했다고 선포했지만, 예수님은 3년 이나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하느님의 자비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타작 마당에 펼쳐둔 곡식 중에서 쭉정이를 가려 타는 불 속에 던져버리는 무서운 심판을 선포했지만, 예수님은 열매 맺을 때까지 밀과 가라지를 함께 자라도록 그대로 두시는 하느님의 인내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감옥에 갇혀 죽을 위험에 처하니 마음이 급해져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 것이겠지요. 우리도 요한처럼 주님께 의구심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들을 청해도 이루어주시지 않을 때 그렇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좋은 일이 생기기는 커녕 오히려 더 힘들고 괴로운 일들을 겪게 될 때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런 상황에서도 주님께 의구심을 품지 않고 그분을 온전히, 끝까지 믿을 수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왜 신앙생활을 하는지 그 이유와 목적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광야로 나간다는 건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와중에도 하느님을 만나 그분과 친교를 맺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내고 노력하는 것, 즉 신앙생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때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신앙생활 해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탐욕은 원하는 만큼 채운다고 해서 만족되지 않고 우리를 계속해서 더 큰 갈망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탐욕만 쫓다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참된 진리에서 점점 더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고운 옷’을 걸치고 왕궁에서 호화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 즉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신앙생활 해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하고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의 부귀영화는 뱀이나 전갈의 ‘독’과 같아서 그것을 많이 취할수록 죽음과 멸망의 구렁에 깊이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 하는 우리는 자신에게 해로운 것에 욕심부리며 집착하지 말고, 우리에게 정말 유익하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청해야겠지요.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지향으로 신앙생활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이는 세례자 요한을 무시하시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참된 기쁨과 영광에 비하면 이 세상에서의 삶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고 폄훼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써, 예수님과 함께 시작될 하느님 나라의 ‘입구’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그가 대단한 인물이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써 우리가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도록 이끄는 사람이지요. 그러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봐야 한다’고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 자체에 집중하지 말고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하느님 나라, 그리고 그 나라에서 누리게 될 참된 기쁨과 영광을 바라보며 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며 사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는 뭔가 달라도 달라야겠지요. 세상 사람들은 옳고 그름, 효율과 결과를 기준으로 삼지만 우리는 그것이 주님의 가르침에 부합되는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지를 생각하며 그렇다면 기꺼이 순명하고 아니라면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를 충만하게 채워주는 참된 기쁨은 이처럼 단순하고 분명하게 사는 이들이 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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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4. 대림 제3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big-l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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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박윤식”님을 찿아 들어 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위에 X X X X X 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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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4. 대림 제3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김건태 신부님_하느님 나라의 첫째 자리
[말씀]
■ 제1독서(이사 35,1-6ㄴ.10)
아시리아 제국이 북 이스라엘 왕국의 주민들을 사로잡아 유배지로 압송해 가고 남 유다 왕국을 황폐화하려던 때에 예언자 이사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버림받고 상처받고 짓눌린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구원하러 오시는 하느님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길 것이며, 이 무리가 히브리인들의 이집트 탈출 사건을 새롭게 하고 활기찬 생명력을 되찾아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 갈 것입니다.
■ 제2독서(야고 5,7-10)
자기의 서간을 통하여 야고보는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작은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부유한 사람들 못지않은 중요한 존재들임을 역설합니다. 그는 땅의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들처럼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질 것”을 촉구합니다. 새로운 세계는 분명 다가올 것이며, 이날 의롭고 올바른 심판이 펼쳐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 복음(마태 11,2-11)
임박한 죽음을 의식한 상태에서 예언자였던 세례자 요한은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집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자기가 제대로 알아보았다고 믿었던 메시아가 맞는 존재인가? 자기가 혹시 잘못 알아보았던 것은 아닌가? 요한의 제자들을 통해 전해 들은 이와 같은 질문 앞에서 주님은 참된 왕국이 이미 드러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를 안심시키십니다. 마음을 열어 이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은, 이토록 위대한 예언자였던 요한조차 이르지 못했던 충만함을 누리고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새김]
사람 사는 세상에서 첫째 자리는 흔히 재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세력을 떨치고 있는 사람들,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차지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이들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실패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힘의 논리를 무조건 수용하고 순응해야 하는 약자들로 취급되기 일쑤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나 이와 같은 반공동체적 의식과 현실은 당연시됐으며, 불행하게도 우리 한 민족공동체는 물론 때로는 교회공동체 안에서조차 이런 의식이 짙게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태로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까 걱정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다가올 하느님 나라에서 첫째 자리는 하느님과 이웃에게 마음을 열고 있는 사람들의 차지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들은 겸손한 사람들로서 어떠한 인간적 고통이라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힘들 때일수록 주님께 더욱 달려드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탄 축일은 분명 우리에게 평화와 기쁨의 메시지를 전해줄 것이나, 이 메시지는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을 피하거나 간과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극복해 나가려 애쓰는 사람들에게나 제대로 전달되고 수용될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 열려 있는 마음이 절실한 때입니다. 그래야 오시는 주님을 제대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또한 ‘자선 주일’이기도 합니다. 겸손한 마음, 열린 마음으로 우리보다 훨씬 못한 처지에 있는 이웃들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힘없고 가난한 모습으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준비를 하는 한 주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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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437
12월14일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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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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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서울대교구 윤병우 미카엘(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사무국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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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없는 겸손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
요즘 봉독되는 성경말씀에는 대림시기라는 무대를 빛낸 위대한 조연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엘리사벳과 즈카르야, 마리아와 요셉, 세례자 요한...
사실 그들 역시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던 존재,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단순함과 겸손함을 바탕으로 하느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명과 충실성으로 인해, 구세주 예수님의 육화강생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세세대대로 교회 안의 위대한 인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세례자 요한은 대림 시기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죽어가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이정표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구약 시대를 마무리 짓는 마지막 대 예언자인 동시에 신약 시대를 활짝 여는 가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자 요한의 위대성에 대해서 극찬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세례자 요한의 위대성 그 배경에는 지극한 겸손의 덕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신원에 대해서 착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근원과 한계에 대해서 늘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진짜입니다. 그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저 티끌이요 먼지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제게 큰 은총을 베푸셔서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어주셨습니다. 나는 이 땅 위에 잠시 등장했다가 즉시 사라지고 마는 한 줄기 연기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나는 길이 아니라 이정표입니다.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배우입니다.’
한없는 겸손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의 위대함, 그 비결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보잘것없는 주님의 피조물이지만, 겸손의 덕을 통해 위대해집니다.
힘든 일이겠지만 자신을 낮추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어렵더라도 우리 내면을 말끔히 비우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가득가득 채워주십니다.
구약시대를 마무리짓는 마지막 대 예언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선구자로서 세례자 요한의 태도는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만일 제가 세례자 요한이었다면,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 앞에 조금은 망설였을 것입니다. 스스로를 좀 더 있어 보이게 하려고 포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메시아까지는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잘 알고 있으며, 일정 부분 그분의 인류 구원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분과 나는 아주 가까운 친척 관계이며, 그분의 가족들도 잘 알고 지낸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정체, 신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하늘을 찌르는 인기 앞에 조금도 우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유효 기간이 언제까지 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떠날 순간이 왔음을 인지하자, 단 한순간도 지체 없이, 그 어떤 미련도 없이, 잘 마련된 무대를 주인공이신 예수님께 넘겨드린 다음, 신속히 구세사의 무대 뒤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겸손의 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뭐 그리 아쉬움이 많은지, 미적미적, “아직 떠날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어요. 좀 더 있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바람처럼, 구름처럼, 홀연히 떠나가는 세례자 요한의 뒷모습이 참으로 멋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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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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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타이밍이 중요하다>
-276대의 자동차와 감사 일기-
2004년 9월 13일, '오프라 윈프리 쇼'의 방청석에는 276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차가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살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쇼의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가 외쳤습니다.
"여러분 의자 밑을 보세요! 상자가 있을 겁니다. 그 상자를 열어보세요. 열쇠가 들어 있는 사람이
바로 새 차의 주인공입니다!"
사람들은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방청석에 앉은 모든 사람의 상자에 차 열쇠가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스튜디오는 비명과 환호성으로 가득 찼고, 오프라 윈프리는 눈물을 흘리며 깡충깡충 뛰었습니다.
"모두에게 차를 드립니다! (Everybody gets a car!)"
12월11일
사람들은 그녀를 '성공한 여자', '기부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이 처음부터 이토록 빛나고 행복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사생아로 태어나 지독한 가난과 학대 속에 자랐고, 14세에 미혼모가 되어 아기를 잃었으며, 마약에 손을 대어 감옥에 갈 뻔했습니다. 그녀의 하루하루는 지옥이었고, 눈을 뜨는 것이 고통이었습니다.
그녀를 지옥에서 건져 올린 것은 거창한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감사 일기'라는 작은 습관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부터인가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 동안 있었던 일 중 감사한 것 5가지를 찾아 적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거뜬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유난히 눈부시고 파란 하늘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점심때 맛있는 스파게티를 먹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하루 종일 고통스러워도, 잠들기 직전 5분 동안만큼은 행복하게 하루를 마감하기로 '착한 뜻'을 세웠습니다. 그 짧은 5분의 평화를 얻기 위해, 그녀는 낮 동안의 모욕을 참아내고, 유혹을 이겨내고, 긍정적인 것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그 '착한 뜻'이 그녀를 마약과 절망의 늪에서 건져 올려, 세상을 돕는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만들었습니다.
순간의 쾌락 vs 마지막의 평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하루 중 언제 가장 기분이 좋기를 원하십니까?"
나의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을 언제로 삼느냐에 따라 행복을 찾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마지막 순간을 위해 찾는 것이 '지혜'이고,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찾는 행복의 방법이 '지식'입니다.
지혜는 지금의 광야와 미래의 부활을 말하지만, 지식은 지금의 즐거움과 이후의 공허함이나 죄책감을 낳습니다. 따라서 어느 순간의 행복에 주안점을 두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행복은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구약 성경의 에사우를 보십시오. 사냥에서 돌아온 에사우의 코끝을 찌른 것은 붉은 팥죽의 냄새였습니다. 배고픔에 눈이 먼 그의 '지식'은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지금 당장 배를 채우는 게 행복이야. 미래의 축복 따위는 지금의 허기를 달래주지 않아."
그는 동생 야곱에게 외칩니다.
"형, 나 배고파 죽겠어. 그 맏아들 권리가 지금 당장 무슨 소용이야?"
결국 그는 찰나의 포만감을 위해 가문의 영원한 축복인 장자권을 팔아넘깁니다 그가 팥죽 그릇을 비우고 난 뒤 남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배부름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평생을 두고 흘려야 할 통곡의 눈물만이 남았습니다. 지금의 만족이 미래의 축복을 삼켜버린 비극입니다.
손끝의 말초적인 쾌락에 신경을 곤두세우면, 정작 생명의 중심인 심장은 무감각해지고 평화를 잃게 됩니다. 대문호 헤밍웨이를 보십시오.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글을 쓴다"는 철칙을 지키며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침형 인간이었고 성공한 작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삶의 끝, 즉 저녁의 평화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명예와 돈은 그에게 내면의 평화를 주지 못했고, 결국 그는 엽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세기의 연인 마릴린 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화려한 스타가 되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치열하게 노력했습니다. 전 세계가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잠들기 전의 평화를 알지 못했습니다. 약물 없이는 잠들지 못했고, 공허함 속에 36세의 나이에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습니다.
이들의 문제점이 무엇이었을까요? 과정의 행복과 성공은 추구하였지만, 결말의 기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처럼 아침에는 바위를 밀어 올리려 애쓰지만, 저녁에는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보며 절망하는 삶이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감사일기라기보다는, 그 감사를 잠들기 전에 매일 쓰겠다는 의지였습니다.
지혜를 찾는 자는 광야로 나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군중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마태 11,7-8)
사람들이 안락한 도시를 떠나 거친 광야로 나간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왜 그들은 고생을 사서 하며 광야로 나갔을까요? 그들 안에는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 더 나은 삶, 더 행복한 삶이 있다"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당신을 의심하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당신을 만난 이들이 ‘마지막’에 치유되고 되살아난다는 것을 요한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상은 끝에 주어집니다. 메시아를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끝을 중요시 여기는 이들만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손끝이 아닌 심장의 평화를 위하여
우리는 손끝의 감각적인 쾌락이 아니라, 심장의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손끝은 닿는 순간 짜릿하지만 금방 사라집니다. 그러나 심장의 평화는 영혼 깊숙이 남아 우리를 지탱합니다. 그것은 바로 양심이 주는 평화입니다. 하루를 죄짓지 않고 사랑하며 잘 살았을 때, 잠자리에 누워 느끼는 "아, 다 이루었다" 하는 그 뿌듯함, 그것이 바로 심장의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삶도 그러했습니다. 그분은 평생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럽고 험난한 광야였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다 이루었다."(요한 19,30)
그 짧은 한마디 속에 담긴 평화와 안도감, 그리고 아버지께 대한 뿌듯함. 예수님은 바로 이 마지막 순간의 승리를 위해 평생을 바치셨습니다. 이것이 지혜를 가진 이의 삶입니다.
마지막 순간을 위해 사는 사람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삶은 아침이 아니라 저녁에 결정됩니다. 로마의 한 야심만만한 법대생이 필립보 네리 신부님을 찾아와 들뜬 목소리로 자랑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이제 법학 박사가 될 겁니다!"
신부님은 웃으며 물으셨습니다.
"축하하네. 그다음은?"(E poi?)
"그 다음엔 훌륭한 변호사가 되어 명성을 떨쳐야죠."
"좋지. 그 다음은?"
"돈을 많이 벌어 편안한 노후를 즐길 겁니다."
"그렇군. 그 다음은?"
청년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습니다.
"뭐... 언젠가는 죽겠지요."
신부님은 청년의 눈을 꿰뚫어 보며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은?" 청년은 그 마지막 질문
앞에서 벼락을 맞은 듯 멈춰 섰습니다. 지금 당장의 성공 사다리 끝에 무엇이 있는지, 심판과 영원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그는 '지식'의 길을 버리고 '지혜'의 길을 선택하여 훗날 사제가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은 언제 기분이 좋기를 원하십니까?
순간의 쾌락을 좇다가 밤마다 불안과 허무함에 시달리시겠습니까, 아니면 낮 동안 땀 흘려
사랑하고 광야의 고통을 견딘 후, 밤에는 "다 이루었다"는 평화 속에 잠드시겠습니까? 잠들기 전 5분, 하느님과 단둘이 만나는 그 시간을 여러분 인생의 클라이맥스로 만드십시오. 그 5분을 위해 하루를 산다면, 여러분은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광야로 나가게 될 것이고, 그곳에서 세례자 요한을 만나게 될 것이며, 마침내 오시는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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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주에 본당 성음악 분과 주관으로 ‘자선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열린 음악회입니다. 작년에는 수익금 전액을 장애인 공동체를 위해서 기부하였습니다. 올해에도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부하려고 합니다. 많은 분이 악기와 노래로 자선 음악회를 빛내 주었습니다. 자선 음악회의 취지를 알고 작년처럼 올해에도 많은 분이 함께하였습니다.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교회가 자선을 교회의 사명으로 여기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착하고 충실한 종아! 너희는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가난한 이에게 해 준 것이, 가장 굶주린 이에게 해 준 것이, 가장 헐벗은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렇습니다. 자선은 선택사항이 아니고 자선은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의무 사항입니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와 분수를 모르고 거친 세상과 다투려는 사람입니다. 말의 의미처럼 작은 사마귀가 자신의 앞길을 막는다고 수레 앞에서 싸우려는 것과 같습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 먼저 먹는 사람도 이와 비슷합니다. 달걀로 바위를 깨려는 사람을 말하기도 합니다. 정당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한몫을 잡으려는 사람들도 이와 비슷합니다. 노름판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결국은 패가망신하기 마련입니다. 어른들은 이야기하셨습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라. 가을이 오면 겨울을 준비하여라.’ ‘당랑거철’의 고사는 결국 수레를 모는 사람이 사마귀를 피해서 갔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마귀의 용기를 가상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어쩌면 무모한 것처럼 보이는 ‘당랑거철’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꽃동네를 설립하신 오웅진 신부님은 ‘얻어먹는 힘만 있어도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걸인들과 함께 작은 움막을 짓고 나눔을 시작하였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려는 사제의 꿈은 작은 불씨가 되었습니다. 50년이 지난 지금 꽃동네는 외로운 이들, 지친 이들, 아픈 이들, 가난한 이들의 쉼터가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꽃동네를 직접 방문하셨고, 위로와 희망을 전해주셨습니다.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에서 복음을 전하던 이태석 신부님이 있습니다. 그분의 숭고한 삶과 사랑은 많은 결실을 보고 있습니다. 그분의 삶을 다룬 ‘울지마 톤즈’는 한 사람의 희생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발이 뒤틀린 나환자들을 위해서 신발을 만들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이들에게 음악을 알려주기 위해서 스스로 악기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된 목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많은 젊은이가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고, 사제의 길을 가기 위해서 신학교에 지원하였습니다.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외친 세례자 요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모진 박해를 견디면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은 모두 거대한 권력에 맞섰던 작은 촛불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외침이 있었기에 우리는 재물, 권력, 명예라는 ‘틀’을 벗어버리고 나눔, 희생, 사랑이라는 새로운 ‘틀’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꿈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그런 주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남을 탓하고 심판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고난을 참고 이겨낸 사람들의 본보기로서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예언자들을 생각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을 털어내고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를 봅니다. 앙상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푸른 잎들은 모두 떨어져 버렸습니다. 만일 나뭇잎들이 떨어지지 않고 가지에 붙어있다면 나무는 긴 겨울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나무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생존의 지혜를 터득한 것입니다. 긴 겨울을 견딘 나무는 봄이 오면 새로운 잎이 생기고, 여름에 뜨거운 태양을 마음껏 받아들여 열매를 맺고, 나이테 하나를 더 만들어 냅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가진 사람만의 몫이 아닙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배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구원은 특정한 사람만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만이 나눌 수 있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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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들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기뻐하여라 주일’이라고도 불리는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메마른 땅과 사막이라는 상징을 통하여 바빌론 유배살이에 지친 백성을 해방과 귀환이라는 큰 기쁨으로 초대합니다.
수확의 기쁨, 가족과 나누는 식사의 기쁨, 화목한 공동체의 기쁨, 축제의 기쁨 등 일상에서 누리는 기쁨보다 더 깊은 기쁨은, 겸손하게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을 기다리는 이들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때로 의심과 불안에 깎여 나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오실 분”(마태 11,3)이신지 아니신지를 묻자 그분께서는 대답으로 이사야 예언자가 이야기한 새로운 세상의 기쁨을 말씀하십니다.(11,5 참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한 1,23)인 요한에게는 ‘말씀’이신 분과 만나는 것이 곧 자기 존재의 실현이었습니다. 요한은 말씀이 담기지 않은 소리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우리는 요한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서 구원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의 ‘소리’가 전하고자 한 뜻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오해할 때 자신은 ‘소리’일 뿐임을 밝힙니다.
이제 더욱 가까워진 ‘말씀’과의 만남을 기쁨으로 준비하는 오늘, 세례자 요한이 보여 준 겸손과 진실로 우리 마음의 길을 곧게 닦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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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2-11: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1. “기뻐하여라”: 하느님이 가까이 오신다.
대림 제3주일은 “기뻐하라” 주일이라 불린다. 전례의 색도 자주색 대신 장밋빛으로 바뀐다. 그 이유는, 기다림의 긴장 속에서도 이미 임하신 주님 때문에 교회가 기쁨으로 물들었기 때문이다. 이 기쁨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구원이 가까이 있음에서 오는 기쁨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선포한다.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 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이사 35,6) 구원은 인간의 전 존재, 즉 육체와 영혼, 개인과 공동체, 인간과 피조물 전체를 새롭게 하는 총체적 치유이다. 성 이레네오는 구원의 이 온전함을 이렇게 설명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온전히 살아나기 위함이다.”(Adversus Haereses III, 20,2) 따라서 대림의 기쁨은 단순한 감정적 기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변형의 기쁨, 곧 구원의 기쁨이다.
2. 세례자 요한의 질문: 하느님의 방식에 대한 혼란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서 예수께 제자들을 보내어 묻는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선생님이십니까?”(3절) 요한은 종말의 메시아를 “심판자”, “정의의 불”로 기대했다.(마태 3,12 참조)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병자를 고치고, 가난한 이를 위로하며, 용서와 자비를 선포하셨다. 요한이 혼란스러워했던 이유는, 하느님의 방식이 인간의 기대와 달랐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하면서도 온유하시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5절) 이 말씀은 이사야의 예언(이사 35,5-6; 61,1)을 그대로 성취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심판하시는 메시아”가 아니라, “자비로 구원하시는 메시아”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해석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권능은 파괴가 아니라 치유에 있다. 그분은 죄인을 멸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러 오셨다.”(In Matthaeum homiliae, 36,2) 하느님의 권능은 온유함 속에서 드러나는 능력이며, 그분의 정의는 자비로 완성되는 정의이다.
3. 요한의 위대함: 기다림의 신앙
요한은 자신의 시대에서 하느님의 길을 준비한 사람이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7절)가 아니며, 세속적 안락이나 권력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위대함은 바로 진리 앞에서의 굳셈과 회개의 영성에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큰 이는 없지만,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그보다 크다.”(11절) 이는 요한이 새로운 계약이 시작되기 직전의 사람임을 뜻한다. 요한은 메시아를 증언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하느님 나라의 현실에 참여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하늘나라의 가장 작은 이도 요한보다 크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된 이들의 새로운 존엄을 드러낸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이렇게 풀이한다. “요한은 율법과 은총 사이의 다리이다. 그는 구약의 마지막이자 신약의 첫 목소리이다.”(Sermo 293,3) 요한의 위대함은 그의 행위보다, 그가 기다림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믿음의 인내에 있다.
4. 인내의 신앙: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기쁨
야고보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형제 여러분, 주님의 재림이 가까우니 인내하십시오. 농부가 땅의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듯이.”(야고 5,7) 하느님의 구원은 인간이 조급하게 당겨올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그분의 구원은 하느님의 때(kairos) 안에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완성된다. 그 기다림 안에서 신앙의 인내가 기쁨으로 변하는 것, 이것이 바로 대림 제3주일의 핵심이다.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이다. 기다림 그 자체가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Homiliae in Evangelia, 1,5) 따라서 참된 기쁨은 고난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의 때를 믿고 기다릴 수 있는 평화에서 오는 것이다.
5. 기쁨의 근원: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삶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분의 은총이 우리를 새롭게 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 “주님 안에서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립 4,4) 이 기쁨은 세상의 성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머무는 데서 오는 존재의 기쁨이다. 이 기쁨은 눈물과 고통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구원이 가까이 왔다.”(루카 10,9) 선포하셨을 때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완전한 기쁨’을 이렇게 설명했다. “형제여, 우리가 어떤 모욕과 고난을 받아도, 그 가운데 주님께 감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기쁨이다.”(Fioretti, cap. 8) 대림 제3주일의 “기쁨”은 바로 이 감사로서의 기쁨, 하느님이 가까이 계심을 아는 신앙의 기쁨이다.
✠ 맺음말
요한의 의문, 예수의 대답, 그리고 야고보의 인내는 모두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의 신앙”을 가르쳐 준다. 기쁨은 조급한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이 가까이 있음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것이다. “행복하여라,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6절) 대림 제3주일의 초대는 바로 이것이다. 의심 대신 신뢰로, 두려움 대신 기쁨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심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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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어 오가는 길>
마태오 11,2-11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답변하시다,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다)
그때에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이어 오가는 길>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마태 11,10)
오시는 믿음
믿고픈 사람
이어 오가는 길
믿음이 보내신
믿음의 사람
우리 또한 믿음
오시는 희망
희망하고픈 사람
이어 오가는 길
희망이 보내신
희망의 사람
우리 또한 희망
오시는 사랑
사랑하고픈 사람
이어 오가는 길
사랑이 보내신
사랑의 사람
우리 또한 사랑
오시는 살림
살리고픈 사람
이어 오가는 길
살림이 보내신
살림의 사람
우리 또한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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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메시아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한이 아니라.>
“그런데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2-11)
1)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은 메시아’ 라고 ‘증언’했습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2-34)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이 ‘증언’과 마태오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모순됩니다. 학자들은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1)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의심했다. 그래서 ‘직접 보고 믿으라고’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다.
(2) 요한은 메시아 예수님을 심판하려고 오신 분으로 생각했는데(마태 3,12), 예수님께서 심판은 하지 않으시고 구원하는 일만 하시니까 당황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해석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하기는 어렵고, 실제로는 두 가지 상황이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게 의심을 품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2) 4절-5절의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요한 10,25)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요한 10,37-38)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11)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표징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인간 구원이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그 뜻을 이루기 위한 일, 즉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 즉 ‘메시아’입니다.
3)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고, 그를 변호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요한이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위대한) 인물인 것은, 단순히 하느님 말씀을 전하기만 한 예언자가 아니라, ‘메시아의 일’을 미리 준비한 선구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메시아의 구원사업’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라는 뜻인데, 여기서 ‘사람들’을 ‘구약시대 사람들’로 좁혀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라는 말씀은, 신약시대, 또는 메시아 시대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메시아 시대가 위대한 것은, 사람들의 구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내가’ 구원받을 수 있게 된 ‘지금’이라는 시간이 가장 위대한 시간입니다. 물론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4)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보라고 가리키는데, 보라는 예수님은 안 보고 세례자 요한만 바라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정말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은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만’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5)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에게 하신 ‘첫 질문’은 “무엇을 찾느냐?”였습니다.(요한 1,38)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아” 라는 믿음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찾는가?”입니다. 방향이 잘못되면 목적지를 잃게 되고, 목적지를 잃으면 신앙생활은 무의미하고 허무한 ‘방랑’이 되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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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정말 예수님을 기다리십니까?>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우리가 당신 사랑을 살고 또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의 사랑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성탄을 준비하며 잘 준비된 마음 안에 예수님을 낳아 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제의 색깔은 장미색입니다. 오늘 불이 당겨진 대림초도 장미색입니다. 오늘의 이 색은 희망을 안겨줍니다. 얼마 남지 않은 성탄을 기다리며 남은 시간도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회개의 삶에 충실하여 기쁨을 간직할 수 있기를 다짐하게 하는 날입니다. 결코, 지치지 말고 중단하지 말며 천상을 바라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후손이 이집트에서 사백여 년의 노예생활을 했고 시나이 반도에서는 사십 년의 방랑생활을 하였으며 바빌로니아에 끌려가서는 오십년이 넘는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오늘 1독서의 내용은 바로 바빌론 유배 때의 이야기입니다. 유다인들은 오 천리나 떨어진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가 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무서운 징벌이었고 그들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이 희망을 잃고 살았습니다. 나라는 폐허가 되었고 백성들의 민족정신도 쇠퇴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는 포로생활에 짓눌려 있는 유다인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1독서의 내용을 보면, ‘나라가 망해 페허가 된 유다의 사막과 황무지는 꽃을 피우고, 주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것입니다. 맥 풀린 손에 힘을 넣어주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 주며 마음이 불안한 이들을 주님께서 오셔서 구원해 주십니다.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립니다.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 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게 됩니다....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집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제 본디 모습으로 돌아감을 뜻합니다.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던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며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는 타오르는 등불이었고 진리 안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헤로데한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바른말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 갇힌 요한은 예수님에 관한 이러 저러한 소리를 듣고 예수님께 제자를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물어보게 했습니다. 이때 요한의 마음은 착잡했습니다. 자신은 이제 죽을 것이 뻔한데 모두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신지 아닌지 궁금하고 한편으로 의심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아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속에 던져진다.”(마태3,10) 하며 회개의 절박함을 선언했던 요한입니다.
요한은 메시아를“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마태3,12), 잘못된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어울리고 병자들을 만나시며 먹고 마시고 하니까 그 궁금증이 더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즉답을 피하시고 자기에게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가서 요한에게 알려주라.’고 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11,5-6)
결국, 이 말씀은 이사야 예언자가 예고한 말씀이 그대로 당신에게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말씀 덧붙이셨습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11,6)
‘의심을 품지 않는다’는 것은 곧‘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요한6,47)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고 실천하는 가운데 행복해야 합니다. 물론, 요한이 의심한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와 섭리를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세주 예수님은 모든 비정상을 정상으로 회복하시는 일을 하셨고, 죄악으로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셔서 구원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는 내가 기대하고 바라던 방법대로 주어지고, 또 이루어지지 않으면 투덜대기도 합니다. 가정의 우환, 자녀의 문제, 이웃과의 관계는 물론 사업이 잘 안 풀리고 …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응답이 없어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믿어야 합니다. 믿음의 시험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위해 더 좋은 것을 마련해 놓고 계십니다.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 모습으로 오지 않으시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고’깨어있어야 합니다. 참고 기다리면 좋은 것이 반드시 옵니다. ‘더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스라엘의 ‘통곡의 벽’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유다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구세주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고 자기의 소망을 쪽지에 적어 돌틈에 끼워 넣고 있습니다. 그러면 랍비들이 그것을 거두어 가서 기도해 준답니다.
구세주께서 오셨지만, 아직도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들의 틀에 갇혀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갈 때는 남자는 머리에 모자를 쓰고 들어갑니다. 절대자 앞에 고개를 숙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지는 그냥 들어갑니다. 사람만 모자를 씁니다. 여자는 사람이 아니고 소유물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눈높이를 맞춰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행실대로 상급을 주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주시고 구원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만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은총의 선물은 많지만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서 그 충만함은 달라집니다. ‘같은 물이지만 꽃이 마시면 꿀이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되는 법입니다.’ 아직도 점집을 들락거리고 철학관을 찾으며 양다리 걸치기를 하시는 분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구원자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선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릇이 없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차지하면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것은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사람은 예수님을 차지한 사람입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11,11) 는 것은 하느님을 얻으면 모두를 얻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부나 명예나 권력이나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잃으면 모두를 잃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믿는 만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으로 바뀌길 희망합니다.
내가 기다리는 분, 주 예수님을 내 입에 맞게 기대하지 말고, 오히려 그분의 기대에 걸맞은 삶으로 기뻐하고 영원히 남을 것에 마음을 두시기 바랍니다. 콜로새서 3장 2절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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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영훈 베드로(일원동성당 부주임)]
<나에게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는 지혜>
예수님께서 세상에 전해 주신 기쁜 소식, 복음의 핵심은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나라에 많은 이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셨고, 그 나라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기에 이 기쁜 소식이 널리 전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특별한 만남을 떠올려봅니다. 요한은 이미 성모님의 엘리사벳 방문 때 태중에서 구세주를 알아보며 기뻐하였고(루카 1,44 참조),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는 삼위일체 하느님으로서의 예수님을 체험한 위대한 선구자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감옥에 갇힌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묻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
구약의 예언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이 기다려 온 메시아는 민족을 로마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줄 강력하고 영웅적인 지도자였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보고 들은 예수님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병자들을 치유하며, 온갖 고통을 받아들이시는 보편적인 구원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힘으로 군림하거나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명확하게 대답하십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11.4)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치유, 그리고 복음 선포 자체가 바로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음을 드러내는 증거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 응답을 통해 자신에게 다가온 하느님 나라, 즉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구세주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깨닫고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위대함을 칭송하시면서도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11.11)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가 그분의 구원 업적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여 얻게 될 놀라운 축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나에게 오신 예수님, 하느님 나라이자 복음 자체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을 믿고, 닮고, 따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대림 시기를 지내며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지금, 우리 삶의 모든 두려움과 위협에서 벗어나 예수님만을 발견하고 따를 수 있는 굳건한 믿음을 청합시다. 세례자 요한이 그랬듯이, 우리도 삶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체험하고, 그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서울주보》 2589호 '생명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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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양주용 바오로 신부님]
<이웃이 되어주는 사랑>
우리는 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랑이다. 그 사랑의 내용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다. 예수님을 믿는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일에서, 이웃의 개념에 대한 질문이다. 즉 ‘나에게 있어 이웃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도 복음에 있다.
루카 복음 10장에는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쓰러졌는데, 그곳을 지나던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만난 그 사람을 보았지만, 그냥 지나친다. 하지만, 그곳을 지나던 사마리아인은 달랐다. 그는 용기를 내어 강도를 만난 이를 돌보아준다. 여기서 이웃의 개념이 나온다. 사실 유다인들에게 있어 사마리아인은 이웃이 될 수 없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 사마리아인은 동족이 아니라 외국인이다.
더욱이 순수 혈통을 지닌 유다인들에게 있어 사마리아인은 혼혈이었고, 역사적으로도 갈라졌으며, 원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사마리아인을 통해 참이웃에 대해 말씀하신다. 예수님에게 있어 이웃이란 대상이나 개념이 아니라서, 예수님은 스스로 이웃이 되는 실천임을 말씀하신다. 즉, 나에게 있어 이웃이란 동족이나,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나, 친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사람들과 사랑을 나눌 때 그는 나의 이웃이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자.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한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답하신다.“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그런데 오늘 복음 내용을 생각해 보면, 눈먼 이들, 다리 저는 이들, 나병 환자들, 귀먹은 이들, 죽은 이들, 가난한 이들은 유다인들에게 있어 죄인이다. 그리고 죄인은 유다인들에게 있어 사마리아인들처럼 이웃이 될 수 없는 이들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이들을 볼 수 있게 하고, 다시 걷게 하고, 깨끗하게 하고, 다시 듣게 하며, 복음을 듣도록 한다.
예수님에게 있어 눈먼 이들, 다리 저는 이들, 나병 환자들, 귀먹은 이들, 죽은 이들, 가난한 이들은 죄인이나 원수가 아니었다. 예수님에게 있어 이들은 사랑이 필요한 이들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스스로 이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이웃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세례자 요한에게 전하라 말씀하셨다.
오늘은 자선 주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자선이란 예수님처럼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자선이란 예수님처럼 사랑을 나누어 이웃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자선이란 예수님처럼 사랑을 나누어 참이웃이 되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라는 예수님 사랑의 구체적 실천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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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손지호 베드로 신부님]
<자비롭고 선한 사람>
대림은 기다림의 시기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우리가 기다리는 분이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맞을까요?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보고 만나야 할지를 말씀해 주십시다.
광야에 나간 이유는 갈대를 보기 위해서나,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언자를 보기 위함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를 넘어서서 예언자들이 전하는 바로 그 말씀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성전에 나아온 이유는 바로 그 말씀을 듣고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기다린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말씀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심을 채워줄 분을 기다렸습니다.
우리 또한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으로는 자신의 바람과 욕심을 채워줄 분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지 조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우리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나는 주님을 기다린다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뿐입니다.
대림 제3주일은 자선 주일이기도 합니다. 자선하면 제일 먼저 적당히 기부하는 것을 자선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하지만 자선은 무언가를 내어놓은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을 닮아가는 여정입니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하신 말씀처럼 되어가기입니다.
우리가 본성으로 자비롭고 선한 사람이 되고, 단순히 적당하게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행동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가 있는 여러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이 넘쳐 흘러나오는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참된 자선은 분노하지 않고, 짜증 내지 않고, 욕심내지 않고 자신을 비워내고 참아내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두 렙톤에 담긴 사랑을 칭찬하셨습니다. 바오로는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들은 자선의 행위가 자칫 자기중심의 행위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우리가 무엇보다 자비롭고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함을 알려줍니다.
참된 자선은 나눔을 통해 내가 더 나아지거나 높아지는 기분을 느끼기 위함이 아니라 누군가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물질을 나누는 자선을 넘어서 좀 더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하느님의 사람이 전해지는 통로가 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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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재중 베드로 신부님]
<자선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길>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요한 3,16 참조)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내어주신 외아들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 거저 베푸시는 자비를 드러내 주었습니다.
그 예수님의 탄생을 목전에 둔 대림 제3주일은 자선 주일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나의 것을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시간입니다. 그러기에 자선 주일은 성탄을 가장 합당하게 준비하기를 바라는 교회의 지혜로운 재촉이기도 합니다.
자선이라는 단어와 연관되어 복음의 한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것은 바로 자캐오의모습(루카 19,1-10 참조)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자캐오의 모습은 키는 작지만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축적한 사람입니다. 비록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지만 세금을 거둘 때면 모든 사람들이 그의 눈치를 보는 권력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부유한 자, 권력을 가진 자였지만 자캐오는 누구보다도 외롭고 고립된 사람이었습니다. 자캐오의 외로움을, 그의 고독을 사람들은 자업자득이라 판단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를 눈여겨보시고, 다가가시어 그와 함께 머무셨습니다.
자캐오는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자비를 예수님을 통해 생생하게 체험합니다. 그런 그의 변화는 너무도 놀랍습니다. 그의 외침은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 그 자체였습니다.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루카 19,8)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느님을 닮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예수님을 닮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캐오는 예수님처럼 가난한 이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리고 자신으로 인한 상 처를 치유하는데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 상처받고 눈물 흘리는 이들에게 다가가기로 다짐합니다. 그러기에 자선은 예수님을 만난 이들의 가장 첫 번째의 변화입니다.
자문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지금 나는 얼마나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는지, 그분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하셨듯, 나 또한 눈길을 주며 눈여겨 보고 있는지, 그분이 먼저 다가가 손을 내민 사람들에게 나 또한 먼저 다다가 손을 내밀고 있는지, 그분이 무조건적으로 끊임없이 당신을 내놓는 것처럼 나 또한 무조건적인 그 사랑을 실천하고자 애쓰고 있는지.’
가난한 이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을 위해 어떤 봉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아직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실제적인 비움과 내어줌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작고 가난한 모든 것들에 대한 복음적 감수성을 키워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눈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다가설 때 우리의 삶은 예수님을 닮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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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세상의 모든 ‘미인’의 가장 아름다운 눈, 코, 입 등을 조합해서 하나의 얼굴을 만든다면 어떨까요? 실제로 이런 시도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하는데, 그 결과는 놀랍게도 ‘가장 완벽한 미인’이라기보다는 다소 평범하거나 ‘평균적인’ 얼굴에 가까웠습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가진 개성 있고 독특한 매력들이 서로 중화되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내면의 종합은 어떨까요? 지혜, 자비, 용기, 예술적 재능, 유머 감각, 따뜻한 인품 등 내면의 모든 장점을 포함한다면 어떨까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뛰어나고, 모든 이에게 사랑받으며, 흠잡을 데 없는 인격과 지성을 갖춘 존재가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완벽한 사람은 인간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완벽한 사람이지만 가까이하고 싶지 않게 됩니다.
부족한 단점들이 ‘나’ 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진짜 나만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세상에 발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모습이든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모든 장점의 집합체가 아니라, 나의 고유한 장단점,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모습이 바로 하느님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가끔 자기가 원하는 방식, 자기가 정해놓은 시간에 하느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때 실망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요한도 마찬가지로 의문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라고 묻습니다. 오실 분은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를 말합니다. 이 메사아의 모습을 세례자 요한은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 3,10)라고 말하면서, 심판의 메시아 상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모습은 사랑의 메시아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의 성취를 나열하십니다(이사야 35장, 61장의 메시아적 표징). 사랑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6)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기대했던 메시아 상과 다르다고 해서 예수님을 배척하지 않는 믿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메시아의 표징은 ‘파괴’가 아닌 ‘생명’이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른다면, 이웃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아픈 곳을 낫게 하고 가난한 이에게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가장 위대한 예언자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입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취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더 은총과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특권을 누리면서도 주님의 뜻에 반대하면 살면 안 됩니다. 철저히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다가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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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의 말씀(2016.12.14. 대림 3주일)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마태오. 11,7)
삶의 광야에서 우리는 희망의 오아시스를 찾습니다. 지친 삶 한가운데서 찾는 오아시스이기에 우리는 많은 신기루를 만듭니다. 오아시스를 찾을 때까지 우리는 신기루를 따라갑니다. 신기루를 오아시스로 혼돈하며 삽니다.
광야의 신기루는 오아시스처럼 우리를 현혹합니다. 오아시스를 갈망하는 만큼 신기루는 강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없을 만큼 신기루는 때로 합리적입니다. 신기루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신기루는 우리에게 거짓 희망을 품게 합니다. 우리에게 좌절만 안겨주지만 신기루는 늘 진실처럼 보입니다. 신기루를 따라가다 좌절하더라도 우리는 또 다른 신기루를 따라갑니다. 끝없이 왔다가 사라지는 광야의 신기루를 우리는 희망으로 여깁니다.
헛된 행복을 약속하는 수많은 신기루들은 우리에게 헛된 꿈을 심어줍니다. 진정으로 바라는 광야의 오아시스가 아니라 신기루를 오아시스처럼 여기도록 만듭니다. 신기루가 당장 주는 묘한 매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신기루에 이끌려 삽니다.
‘흔들리는 갈대’는 보지만 ‘바람’을 보지 못합니다. ‘갈대’처럼 보이는 신기루는 보이지 않는 ‘바람’을 거부합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기에 거부합니다.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는 오아시스를 거부합니다.
지금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바람’ 같은 오아시스는 현존하는 희망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갈대"같은 신기루는 허상입니다. 우리는 ‘흔들리는 갈대’보다 갈대를 흔드는 ‘바람’을 희망해야 합니다. 허상으로 보이는 신기루보다 우리를 기다리며 존재하는 오아시스를 희망해야 합니다.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열어 ‘갈대’를 흔드는 ‘바람’ 같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대림절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말씀을 따라 걸을 때 우리는 광야의 삶에서 신기루가 아닌 오아시스를 발견하게 됩니다. 곧 보게 될 오아시스 근처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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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디트리히 본회퍼는 독일 고백교회의 목사이자 행동하는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목자이자 신학자로 자신의 존재와 삶을 처절하게 살고자 깨어 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신에게 묻고 답했습니다. 『 왜 사람들이 교회에 오지 않는가? 그 까닭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그는 『히틀러 정권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유대인을 보호해 줄 것인가? 사회의 잘못을 눈감고 살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잘못을 바로잡고 생명을 구하는 교회가 될 것인가?』라는 실제적인 문제 앞에 고뇌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오랜 고뇌와 기도 끝에 『미친 사람이 모는 차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을 돌보는 것만이 나의 과제는 아니다. 이 미친 사람의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이 나의 과제이다.』라고 결론짓고 반나치 운동과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1945년 4월에 플뢰센베르크의 수용소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가 옥중에서 쓴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는 본훼퍼의 깊은 신앙을 극명하게 보여 줍니다. 『 나는 누구인가? 이 고독한 물음은 나를 비웃는다. 내가 누구이건, 오, 하느님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본회퍼는 남들이 말하는 내가 나인가,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내가 나인가를 고뇌하면서 결국 하느님 시선에서 본 내가 아니면 참된 내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앞에서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오늘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 부분은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것이고, 둘째 부분은 세례자 요한의 신원에 관한 것입니다. 앞부분에서는 요한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확인하려 합니다. 어쩌면 요한만큼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도 드물었습니다. 요한은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던 이들에게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심을 알려주었고,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드리기에 부당함을 알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분께 세례를 드렸으며, 그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이라는 하느님의 목소리까지 들었습니다. 그렇게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을 알려 주던 요한 자신이 지금은 마치 그 확신을 잃어버린 듯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 (11, 3) 라고, 질문하도록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이 그의 의혹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 감옥에 갇혀 있었기에, 그가 예수님이 오실 그분이라면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아니면 세례받은 후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요한의 예상과 달랐던 것일까요 ? 어쨌든 요한은 믿음의 어둠을 겪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볼 수 있는 표지가 무엇인지를 밝혀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가 보고 듣는 것’ 곧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입니다. 눈먼 이들, 나병환자들, 귀먹은 이들이 치유를 체험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 그 외에 다른 증거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다른 어떤 설명보다도 그 응답을 끝맺는 예수님의 말씀이 복음을 읽는 제 눈길을 멈추게 합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6절) 이 말씀은 요한 20장,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말씀하신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선포가 보고 믿었던 토마스 사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뵙지 못하는 다음 세대, 곧 우리에게 우리의 믿음이 복되다고 선언하는 것이듯,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는 말씀 역시 이미 의심을 드러낸 세례자 요한보다 오히려 우리를 향해, 우리가 의심을 품지 않는다면 요한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듯 싶습니다. 결국 이 마지막 말씀이, 오늘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입을 통해 예수님께 드린 질문은 결국 우리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러기에 요한에게 한 예수님의 응답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묻는 우리를 위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문이 생깁니다. 지금 우리에게 너희가 보고 듣는 것 이 믿음의 근거라고 하신다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보고 믿으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 2천 년 전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를 저는 이들이 걸었다는 것 ? 그것은 너무 멀리 있는, 확인할 수 없는 증거가 아닐까요 ? 복음의 뒷부분은 이러한 우리의 의심을 확신으로 이끌어 줍니다. 군중이 떠나간 다음 예수님은 이제 세례자 요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어느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고,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사자였습니다. 그가 바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인물입니다. 그 요한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은 군중에게,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하고 물으십니다. (7절) 다른 말로 하면 너희는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았느냐 ?, 라 는 것이겠지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이를 나는 알아볼 수 있을까요 ? 예수님보다 앞서 왔던 세례자 요한이 아니라 지금 세상 안에서 눈먼 이들을 보게 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또 그들 안에서 오실 분 이 와 계심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 「믿음은 환하지만 믿음의 길은 어둡다.」라는 노래 가사가 생각납니다. 요한이 감옥에서 겪은 것과 같이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도 믿음의 근거를 찾습니다. 그들한테도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근거는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는 것입니다. 고운 옷을 입은 자들을 보러 왕궁에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구석구석에 눈길을 돌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거기에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고 믿기 어렵다면, 그것을 보고 들을 수 없다면,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세상의 한 자리, 내가 있는 그곳에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그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행실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모습을 행실로 보여 주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 그분은 눈먼 이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눈먼 이들을 보게 해야 합니다. 탐욕에 눈먼 사람들을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ㅡ 그분은 다리 저는 이들을 제대로 걷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리 저는 이들을 제대로 걷게 해야 합니다. 이기심으로 균형을 잃어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람들을 너그러움으로 걸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 그분은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교만함의 종기로 더럽혀진 사람들을 겸손의 약으로 깨끗하게 치유해야 합니다.
- 그분은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해야 합니다. 자기 이야기만 하고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귀먹은 사람들에게 경청하여 그들도 듣게 해야 합니다.
- 그분은 죽은 이들을 되살리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죽은 이들을 되살려야 합니다. 살 맛나지 않아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 살게 해야 합니다.
-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마다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그분의 몸을 양식으로 먹습니다. 그래서 그분과 한 몸을 이룹니다. 그분이 우리가 되고, 우리가 그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에 보이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실로 예수님은 평가받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또 하나의 예수님입니다. 왜 사람들이 교회에 오지 않는가? 그 까닭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해서, 라고 결론짓고 실천에 옮겼던 본훼퍼처럼 우리도 우리의 믿음의 실천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 특별히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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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로또의 기쁨과 행복>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대림 2주일은 ‘회개하라!’ 주일이고, 대림 3주일은 ‘기뻐하라!’ 주일입니다.
대림 2주일 가르침대로 회개하였다면 이제 기뻐할 수 있게 되었으니 기뻐하라는 얘기입니다.
왜냐면 우리의 회개가 세속인의 회개가 아니고 신앙인의 회개라면 세상을 향했던 내가 주님께로 돌아선 것이기에 이제 주님으로 인해 희망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그러니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로또의 행복을 예로 들어 오늘 희망과 기쁨을 얘기하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매주 로또를 산다고 제게 얘기하였습니다.
그래서 일확천금의 꿈을 꾸고 있고 그것이 이루어지리라고 믿기에 사느냐 물었더니 자기는 그런 꿈과 믿음 때문이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세속적인 행위가 아니니 다행이다 생각하며 그러면 왜 사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로또를 사서 부적처럼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한주의 희망이 생겨서 한주 내내 뿌듯하고 희망을 지니고 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로또의 행복이 두 가지인데 로또에 당첨돼 기쁜 행복이 하나이고, 로또에 당첨될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기쁜 행복이 다른 하나이며, 완료형이 하나이고 미래진행형이 다른 하나입니다.
그런데 통계에 의하면 당첨된 사람은 엄청 기쁘고 행복한 순간이 있었지만 그 기쁨과 행복은 당첨된 순간이었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불행하게 된답니다.
그 이유를 보면 하나는 그 돈으로 방탕하게 살기 때문에 다른 하나는 돈을 욕심내는 주변 사람들 때문에 돈도 건강도 사람도 다 잃기 때문입니다.
저도 군대에서 그런 체험이 있었습니다. 고된 훈련으로 배가 너무 고프고 늘 고팠으며 집단 허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식사 종이 울리면 친구들은 쏜살같이 달려가고 그래서 긴 줄이 생기는데 저는 일부러 늦게 가 맨 뒤에 섭니다.
속으로 먼저 먹으려고 하는 놈들 한심하다고 하며 영적 우월감을 즐기지만 한 꺼풀 속으로 더 들어가면 저만의 희망 연장책이었던 것입니다.
경험으로 볼 때 일찍 먹고 나면 먹으리라는 희망은 사라지고 또 먹고 싶습니다. 실제로 먼저 먹은 친구들을 보면 먹고 나서도 또 주변에서 껄떡거립니다.
그걸 아는 저는 맨 뒤에 서서 얼마 안 있으면 먹게 되리란 희망을 오래 즐깁니다. 그때는 100m 뒤에서도 배급하는 곳을 뚫어지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집중합니다. 옆에 꽃이 폈어도 그것 눈에 들어오지 않고 누가 지나가도 보지 못할 정도입니다.
사실 한순간의 기쁨과 즐거움,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한순간일 뿐 더 이상이 없는 기쁨과 즐거움은 오히려 더 허기지게 할 뿐이니 우리는 완료형의 희망과 기쁨보다는 현재진행형의 희망과 기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희망 고문이 아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확실하고 틀림없는 희망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돈도 로또도 성공과 성취도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가 희망하고 우리에게 현재진행형의 기쁨과 행복을 줄 것은 하느님입니다.
돈과 로또와 성공과 사람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하느님은 다 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우리 신앙인들이고 우리는 그 하느님께 희망을 걸며 기뻐합니다.
이 하느님을 믿습니까?
이 하느님을 사랑합니까?
이 하느님을 희망합시다! 그리고 기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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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
<자선과 자비 자체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마태 11,2-11)은 '세례자 요한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즘 때가 때이다 보니 주님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에 대한 말씀을 자주 듣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는 사명에 충실했던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구약과 신약을 연결해 주는 예언자였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0.26-27)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고, 또 겸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제42회 자선주일'입니다. '자선의 본질'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사랑'입니다. 자선이 삶 자체였던 토빗은 말합니다.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빗 12,8) '자선은 사랑이고 나눔이고, 희생입니다
지금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어놓으셨습니다. '모두의 구원을 위한 자선 그 자체'이셨습니다. 그 표지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때문에 우리도 '자선'이 되어야 합니다. '충실하고 겸손한 자선'이 되어야 합니다. 자선은 단순히 물질적인 나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웃이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에 마음으로 함께 하는 것도 큰 자선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12,7)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예수님을 닮은 자선이 됩시다!
예수님을 닮은 자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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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마태 11,3)
물음은 이미
어떤 의미를
향해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멈추지 않는
우리의 물음이며
우리의 사랑입니다.
기다림은
우리의 물음과
사랑을
정화합니다.
기다림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선택입니다.
자선은 우리의
기다림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자선은
인간 존엄을
회복시키는
행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가난함 안으로
먼저 내려오십니다.
이렇듯 자선은
사랑의 방식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자선은
기쁨을 혼자의
소유가 아니라
함께 누리는
현실로 만듭니다.
기쁨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에서
태어납니다.
우리의
의심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이미 기쁘게
일하고 계십니다.
의심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하느님 앞에
드러내는
용기입니다.
기쁨과 자선은
나를 넘어설 때
깊어집니다.
자선은 우리
물음에
가장 정직한
응답입니다.
기다림은
기쁨을 담을
그릇을 넓히는
시간이며,
기쁨을 선물로
만드는 시간입니다.
물음은 사랑으로
자라고,
자선은 기다림을
견디게 하며,
기다림은
기쁨으로
완성됩니다.
오늘의 물음이
자선이 되고,
오늘의 기다림이
기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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