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증시 부진 반도체 피크론으로 한달새 10조원 증발 / 9/28(토) / 중앙일보 일본어판
반도체의 겨울이 또 찾아왔는가.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 수요 부진·공급 과잉 진단과 인공지능(AI) 버블론, 미국·중국의 경기 침체 우려가 겹치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지난 한 달간 삼성전자·SK하이닉스 주식을 10조원(약 1조800억엔)가량 순매도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는 전체 주식시장 영업이익의 29%를 차지하는 만큼 양사의 시장 흐름은 한국 주식시장 성적과 직결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 같은 위기론이 시기상조라는 진단도 나온다. 마이크론 등 반도체 기업들이 호조를 유지하고 있는 데다 미국 경기가 연착륙할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반도체 고전론이 나오는 가운데 삼성전자의 3분기 실적이 반도체 시장의 흐름은 물론 한국 주식시장의 방향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한 달간 외국인은 한국의 삼성전자 주식을 8조원 넘게, SK하이닉스 주식을 1조원 넘게 팔았다. 이 여파로 지난달 26일 7만 6100원이던 삼성전자 주가는 27일 6만 4200원까지 떨어졌다. 25일(현지 시간) 미국 마이크론의 예상치 못한 실적으로 반도체 주가가 급등했는데도 말이다.
외국인이 한국에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서 손을 떼면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정책금리 인하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미국 증시와 달리 한국 증시는 보합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5일에는 중국 인민은행의 금리 인하로 글로벌 증시가 대부분 상승했지만 코스피만 1% 이상 하락했다. 통상 중국의 금리 인하는 중국 내수시장 활성화에 따른 수출 확대 기대감 때문에 많은 나라에 호재로 작용한다.
중국에 대한 수출 비중이 높은 한국은 그 수혜국임에도 불구하고 이날 코스피는 전날보다 35.36포인트(1.34%) 하락한 2596.32로 장을 마쳤다. 코스닥도 8.05포인트(1.05%) 하락한 759.30에 장을 마쳤다. 이 같은 한국 주식시장의 부진 뒤에는 '반도체 피크론'이 있다. 메모리 반도체 업황이 10~12월 분기에 피크아웃(피크 후 하락)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스마트폰과 PC용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예상보다 부진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의 반도체 업황은 한층 약화되고 있다. 지난달 산업연구원의 반도체 업황 전문가 서베이지수(PSI)는 156이었다. 여전히 기준치인 100을 웃돌고 있지만 6월 185까지 올랐던 반도체 업황 PSI는 이후 하락세다. 이런 가운데 모건스탠리가 D램과 고대역폭메모리(HBM) 업황이 2026년까지 과잉공급 상황을 맞을 수 있다고 전망하면서 외국인의 매도세가 가속화됐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최근의 외국인 매도는 패닉셀(공포에 의한 투매)로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최근 미국의 '투기등급 회사채' 가산금리는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보통 투기등급 회사채 펀드에서 자금이 유출될 때 한국 등 신흥국에서 패닉셀을 볼 수 있는데 투기등급 회사채의 가산금리가 낮다는 것은 뚜렷한 자금 유출은 없다는 것이다. 최근 확산된 인공지능(AI) 버블 피크론에 대해서도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많다. 노무라증권도 최근 보고서에서 HBM 공급과잉 등 메모리 시장에 대한 우려는 일부 과장됐다고 평가했다.
여기에 25일 마이크론의 호실적으로 매도세가 일단 진정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고 상황을 낙관하기는 어렵다. 국제금융센터는 보고서 '한국 수출 증가율 둔화 우려'에서 중국 기업의 반도체 생산·공급이 늘면서 한국 반도체 수출 증가세가 꺾일 수 있다고 진단한다. 관건은 미국과 중국의 경기가 어디로 향하느냐다. 미국에서는 경기 위축과 노동시장 위축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FRB가 빅컷(정책금리 0.5%포인트 인하)을 단행한 이유도 경기 둔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려는 성격이 강하다.
미국 민간경제조사기관 컨퍼런스보드가 19일(현지시간) 발표한 8월 미국 경기선행지수(LEI)는 전월보다 0.2% 낮은 100.2로 6개월 연속 하락세를 보였다. 미국공급자관리협회(ISM)가 미국 20개 업종 4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산출하는 제조업 구매 담당자 경기지수(PMI)는 47.2로 5개월 연속 위축 상황이다. 미국의 8월 고용 증가폭은 14만 2000명으로 전월 대비 늘었지만 직전 12개월 평균(20만 2000명)에는 미치지 못한다. FRB의 빅컷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기가 기대만큼 회복되지 않을 경우 실물경제에 대한 충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중국은 내수와 부동산 시장 침체가 이어지고 있다.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8월 소매판매(전년 동기 대비 2.1%)와 산업생산(4.5%)은 예상치를 밑돌았고 실업률도 5.3%로 전월 대비 0.1%포인트 상승했다. 특히 8월 집값은 5.3%나 급락해 9년 만에 최대 하락폭을 나타냈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최근 5% 성장 목표를 위해 경기부양책을 연일 내놓고 있어 내수 살리기에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효과가 있을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구리 가격도 참고가 된다. 자동차 전동화 등으로 최근에는 구리 가격과 한국 반도체 수출금액지수가 긴밀한 관계가 되고 있다. 2021년 자동차용 반도체 부족 사태가 잘 보여주듯 이제 자동차는 움직이는 가전제품으로 변신하고 있다. 전기차뿐 아니라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마저도 노트북보다 큰 디스플레이 화면을 설치하는 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가전제품은 물론 자동차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면서 동·은 같은 핵심 전도체의 가격이 상승할 때마다 반도체의 가격 상승 흐름이 관측된다.
세계 최대 구리 생산국인 칠레 구리위원회(COCHILCO)는 10일(현지 시간) 올해 구리 평균 가격 전망치를 1파운드당 430센트(5월 추정치)에서 418센트로 하향 조정했다. 미국과 중국의 제조업황이 위축되고 경기 둔화 우려가 커진 영향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2025년 평균 가격 예측치는 1파운드당 425센트로 유지했다. 이를 감안할 때 외국인의 반도체 매도 공세는 좀 더 이어질 수 있지만 조만간 끝나지 않을까 기대한다. 다음달 삼성전자의 실적 공개가 중요한 변곡점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