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로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노동자들
우리는 과연 우리 스스로를 규정지으면서 살고 있는가.
우리의 삶은 과연 주체성을 가지고 상호보완적이며 그만큼 진보적인가.
나는, 이런 물음에 긍정적이지 못하다면 우리의 삶은 민주적이지 않다고 단언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규정짓지 못하면서 살고 있다.
우리의 삶은 외부로부터의 권력과 상품에 의지하면서 살고 있다.
심지어 스스로가 상품이 되어 자신의 개성과 양심을 내버린지 오래다.
그래서, 아무리 우리가 선거를 통해 진보적인 정당과 정치인을 선택한다고 해도
우리의 삶이 그렇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선거와 정당과 절차적 과정을 통해 선택한 정치인으로 이해하고 있다.
사실, 민주주의는 공기와 같아서 권력이 잘게 잘게 쪼개져서 마치 공기의 입자가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를 살게 해주듯이, 그렇게 전혀 권력을 느낄 수 없어야 그게 민주주의다.
그런데, 우리가 믿고 있는 지금의 민주주의는 하루 종일 권력의 냄새를 맡고 살아야 한다.
아무리 3 권 분립을 한들, 아무리 절차적으로 권력을 제한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 이유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하지 못하고 외부의 힘에 의지 하기 때문이다.
내가 자주 인용하는 부탄이라는 나라는, 우리에게 몇 년전에 축구시합을 하여 몇 백대 꽝으로 깨진 적이 있어 웃음거리가 된 나라다. 우리는 우리의 택극전사를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그나라는 그런 식의 국가주의를 우습게 여긴다.
하여간, 각설하고 그나라 왕은 몇 년전 왕을 안하고 다른 나라처럼 민주주의를 하자고 국민들에게 이야기 했으나 국민들은 싫다고 그냥 이대로 왕정을 지속하자고 했다.
바로, 여기에 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가 숨어 있는 거다.
민주주의는 유럽인들이 만들어 놓은 형식적인 의미가 아니라, 권력을 권력으로 느끼지 못하고 그것이 평화와 사랑으로 변화되어 공동체 속으로 퍼져 있는 것이다.
부탄의 국민들은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결정한다.(자급자족) 그까짓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 지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문제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짓고 그 삶이 공동체에 온전히 안착되는 과정이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신앙처럼 여기고 있는 민주주의는, 유럽의 자본주의가 완성되는 과정과 같다.
그 저변에는 자급자족하던 공동체의 삶을 파괴하고, 그들이 원하는데로 우리의 삶을 외부의 권력으로 결정짓게 만들어 버렸다. 그것이 선거이고 국회이고 법원이고 정당이고 국회의원이고 대통령이다.
유럽 제국들이 제 3 세계에서, 프랜테이션 커피 농장을 운영하면서 그들이 저지른 가장 큰 만행은 그 나라 공동체의 파괴였다.
원주민들은 임금을 받자 마자 일을 하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과 달리 과거의 인간들에게는 소비의 개념이 없었다. 생존할 수 있는 식량만 있으면 충분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그들에게 일을 하지 않으면 식량을 주지 않고 굶기기 까지 했다. 결국에는, 유럽인들은 농장을 경영하기 위해, 그들의 삶의 방식을 철처히 관리하고 그들의 공동체를 파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완성시킨 영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교구의 장원에서 생존의 위협없이 살던 농민들이 종획운동으로 농토를 빼앗기고 삶의 근거지를 잃어버리고 공장으로 전전하면서 거지와 굶어 죽는 사람들이 생기자 구빈법을 만들고 직인법을 만들어 그들을 보호 할 수 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스피넘랜드법을 만들어 지금으로 얘기하자면 기초생활 기본법 같은 것을 만들어 그들의 생존권을 보장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럽 사민주의 국가들의 사회복지정책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즉, 유럽의 사회복지정책은 철저히 자본주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봉권 귀족이 자본가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거나 그들의 가부장적 온정주의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지금의 인간과 다르게 과거의 인간들은 단지 먹는 것 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의 공동체적 삶을 파괴당한 다음에 머고 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가 규정 짓지 못하고 타의에 의해 거지 처럼 먹고 사는 것은, 그 사람들을 인간이 아닌 좀비를 만드는 것이었다. 지금의 인간들은 확대된 시장에서의 상품의 소비에 미처 있다. 그래서, 과거의 인간들처럼 부랑자가 되기 이전에 아무런 꺼리낌 없이 상품에 미쳐 있을 뿐이다.(물신주의(Fetishism)
현재도, 미국, 호주의 원주민들에게 그들의 생존권을 보호해주기 위해 그들에게 기본적인 생활비나 주거환경을 제공해 주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들의 공동체를 파괴당한 다음에 그들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현재 삶의 희망을 잃어버리고 알콜중독자가 되거나 부랑자 처럼 살고 있다.
그런데, 현대의 노동자들은, 산업혁명 당시의 노동자들과는 다르다. 농노에서 해방되어 도시의 빈민으로서의 노동자가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소비자로서 규정짓고 산다는 것이 오늘날의 노동자들이다. (제가 굳이 스스로의 삶을 소비자로서 규정짓는 다는 말을 강조한 이유는, 오늘 날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규정짓는 것은 소비 이외에는 없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맑스의 19 세기 노동자들과 현대의 노동자들의 삶과 가치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아마, 오늘날 맑스가 살아있었다면, 노동자들의 계급이니 하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겁니다. 오늘날의 노동자들은 계급을 논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19 세기, 영국의 귀족들과 세력 싸움을 했던 자유시민 부루주아지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을 욕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들의 소비는 결국은 자본가들을 도와주고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을 강고하게 해 줄 뿐입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소비자들은 어떤 면에서는 자본가들보다 더욱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비자는 왕이다!)
맑스의 노동자와 현대의 노동자는 다른 의미입니다. 현대의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소비행위로 스스로의 노동을 소외 시키고 있습니다. 19 세기 맑스의 환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파도 썩었지만, 좌파도 너무나 썩었네요. 서울대 교수로 퇴직하신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에 일부 좌파들이 목을 메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