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기도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성경공부이다. 성경공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기도이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는 방식이다. 성경을 공부할 때,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반응하도록 이끌린다. 그리고 기도할 때 우리가 정말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그분의 길을 여시도록 허락하고 있다면 필연적으로 성령으로 다시 이끌릴 것이다. R. A. 토레이는 『이렇게 기도하자』 (How to Pary, 생명의 말씀사 역간)라는 책에서 기도가 중요한 이유들을 열거한다. ● 기도는 하나님이 정하신 수단이기 때문이다.(엡6:12,13). ●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필요로 하는 것을 얻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약4:2). ● 기도는 우리 주님의 삶에서 매우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막1:35 ; 눅6:12). ● 기도는 지금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는 우리 주님의 현재적 사역이기 때문이다(롬8:34 ; 히7:25). ●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발견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히4:16). ● 기도는 근심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으며, 근심 중에도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얻는 방법이기 때문이다(빌4:6,7). ● 기도는 하나님의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방법이기 때문이다(눅11:13). ●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깨어 있게 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눅 21:24-26). ●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 성장을 촉진시키시고, 우리의 일에 힘을 주시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인도하시며, 그리스도의 교회에 다른 모든 축복을 주시는 수단이기 때문이다(시139:23,24 ; 마7:7,8). 기도에 관한 모든 것을 모른다 해도 우리가 기도의 중요성을 인식했다는 것이 기도에 관한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기도에 관한 예화 가운데 하나는 위대한 두 전도자의 기도 이야기이다. 칼빈주의자인 조지 휫필드는 예정론을 강조했고, 알미니안주의자인 존 웨슬리는 자유의지를 강조했다. 두 사람은 함께 사역할 때가 많았다. 어느 날이었다. 두 사람이 아침 일찍 들판에서 설교를 시작했으며, 설교를 마친 후에는 하루 종일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밤에 또다시 함께 설교했다. 그런 후에 지칠대로 지친 채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두 사람 모두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휘필드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오늘 일어날 모든 일로 인해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손에 있으며, 우리는 당신께서 또다시 당신의 완전한 뜻에 따라 이 모든 것을 이루시리라 믿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한 후 일어나 침대로 올라갔다. 한편 웨슬리는 도저히 그 정도 길이로는 기도를 끝낼 수 없었다. 그는 침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휘필드 목사님, 목사님의 칼빈주의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나요?" 그러더니 그는 다시 머리를 숙이고 계속 기도했다. 휫필드는 이불을 덮고 잠이 들었다. 2시간쯤 지난 후 깨어보니 웨슬리는 그 때까지도 침대 곁에 가만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휫필드는 믿을 수 없었다. 침대에서 나와 웨슬리가 무릎을 꿇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를 툭 건드렸다. 웨슬리는 기도하는 자세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 휫필드가 무릎을 꿇은 채 자고 있던 웨슬리를 깨우며 말했다. "웨슬리 목사님, 목사님의 알미니안주의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나요?" 웨슬리와 휫필드는 기도에 관한 모든 해답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에 관한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주님께 맡기면서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분의 뜻을 행할 힘을 우리에게 주신다. 분명 기도에는 힘이 있다. 야고보서 5장 16절에은 이렇게 말한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같은 편지의 조금 앞부분에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4:2). 예수님은 여러 차례, 특히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담대한 기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라고 말하면서 사실은 하나님께 면책조항을 제시할 때가 많다. 우리는 종종 믿음의 확신 모습으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이 일이 정말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솔직히 하나님도 이 일을 이루시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다만 저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라고 기도할 겁니다. 그래야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 게 분명해"라 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런 태도는 옳지 않다. 우리는 마르틴 루터에게 담대하게 기도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배울 수 있다. 1540년 루터가 늙었을 때, 그의 친구이자 조력자인 미코니우스(Myconius)가 병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곧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루터에게 이별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은 루터는 이렇게 답장을 썼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죽지 말고 사시오. 교회 개혁을 위해서 내게는 아직도 그대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요. 결코 주님은 내게 그대가 죽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실 것이며, 그대가 나보다 오래 살게 하실 것이오. 나는 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소. 이것이 내 뜻이며, 이러한 내 뜻은 이루어질 것이오. 왜냐하면 나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오." 우리는 이런 글을 읽을 때 충격을 받는다. 왠지 "내 뜻이 이루어질 것이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 같다. 그러나 루터는 이렇게 덧붙였다. "왜냐하면 나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오." 그는 담대하게, 그리고 적절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루터의 답장을 받을 무렵, 미코니우스는 이미 말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그러 나 그는 곧 생기를 찾았고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는 6년을 더 살았으며, 루터보다 2개월 더 살았다. 물론, 우리는 기도할 때 교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이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자기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재를 유지하는 한, 우리는 기도할 때 아무리 담대해도 괜찮다.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버지, 저를 위해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저의 이기적인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제가 이것을 구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것을 구하오니 모두가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방법으로 이루어주십시오."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기도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과 세상에서 놀랄 만한 변화를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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