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장편소설 <즐거운 사라>(청하출판사) <작가의 말>
이 책은 내 세번째 장편소설 <즐거운 사라>의 개정판이다.
첫 작품 <권태>는 심리묘사에 치중하여 내 잠재의식속에 있는 관능적 판타지를 발가벗겨
본 것이었고, 두번째 작품인 <광마일기>는 사소설 기법을 사용하여 현실과 공상 사이를
넘나드는 현대판 전기(傳奇)소설을 시도해 본 것이었다. 그런데 <즐거운 사라>는 일인칭
기법을 사용하긴 하되, 화자를 여성으로 만들어보았다. 리얼리즘 기법을 기본으로 하여
일종의 성격소설을 꾸미되, 주인공의 심리적 내면풍경 묘사에 중점을 두어 지금까지 우리
나라 소설들이 보여줬던 상투적 여성상을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융통성있고, 적응력이 강
한, 말하자면 긍정적인 여성상의 전형을 창조해보려고 한 것이 내 의도이다.
여주인공 사라의 실제 모델은 없다. 그러나 내가 가장 사랑하고 싶은 여성이요 내가 늘 그
리워하며 꿈꾸고 있는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사라의 이미지 부각에 중점을 두다보니 그
녀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이 모두다 잠시 반짝이다 스러지는 비누방울처럼 약하
고 허전하게 그려진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을 이 세상 어디엔
가 실제로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로 형상화시켜 보려고 애썼다. 주인공 "사라"만 가
지고 봐도, 특정한 모델은 없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내가 만난 여성들로부터 추출된 갖가
지 성격의 파편들이 조합돼 있다. 물론 이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겉보기엔 다들 어딘지
모르게 가치관을 미처 정립하지 못해 방황하고 있는 인간들이다. 하지만 그건 내가 이 세
상을 오직 겉모습으로만 존재하는 인물들이나 당위론적인 인간형을 그리기보다는, 우리
들 각자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멍울처럼 자리잡고 있는 내재적 인간형을 그려내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독자가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산뜻한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애썼다. 대체로 우리나
라의 소설들은 이른바 야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음습하고, 산뜻한 느
낌을 주는 것은 대부분 결벽증적 정신주의에 치중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소설의 목적이 '계몽주의적 설교'에 있다고 보지 않기 때문에, 일체의 도덕적 코멘트
나 이른바 '전망의 제시' 같은 것은 무시하면서, 헷갈리고 방황하는 가운데 스스로의 아이
덴티티 (identity)를 확립해 나가려고 애쓰는 한 여대생의 시각을 통해 전환기의 우리 사회
가 안고 있는 가치관의 문제를 조감해 보려고 했다.
나는 여주인공 '사라'를 스스로의 이기적 욕구에 솔직하면서도 한편으론 천진스럽기도 한
여성으로 부각시키려고 노력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완전히 선하거나 완전히 냉철할 수
는 도저히 없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윤리'와 '반윤리', '절제'와 '일탈' 사이
를 넘나들며 왔다갔다하는 우리 모두의 내면세계를 가시화시켜 보려고 애쓴 것이다. 그래
서 나는 야한 부분이 들어가 있으면서도 산뜻하고 청신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 우리나라에
서도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려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는 한국의 현대문학이 이광수 이래로 고수해 온 도덕주의적 전통이, 한국소설을 정체
시키고 답보시켜 온 한 가지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허심탄회하게 인정해야만 한다.
위선적으로 고착된 도덕주의와 경건주의, 그리고 문학작품을 통해 작가의 인격이나 가치
관을 저울질해 보려는 태도는, 작가들의 상상력과 사회적 입지를 위축시켜 그들을 이중인
격자로 만들어 버리기 쉽다.
문학이 준엄하고 결벽한 교사나 사제의 역할, 또는 혁명가의 역할까지 짊어져야만 한다면,
문학적 상상력과 표현의 자율성은 질식되고 만다. 또한 소설의 근본은 역시 '리얼리즘'에
있는 바 (실제적 현실을 그리든, 내면적 현실을 낭만적으로 그리든, 모든 것은 다 리얼리즘
이다.), 그것의 소재가 혹시 퇴폐적이고 반동적인 부르주아적 상상력의 소산이라 할지라도
결코 매도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비판적 리얼리즘이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에 반대한다. 리얼리즘은 글자 그대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에만 충실해야 하며, 거기
에 작가의 당위론적 세계관이 절대로 개입돼서는 안된다. 그런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장르는
논설이나 평론 등 소설 말고도 얼마든지 많다.
우리나라의 현대문학은 비록 이광수의 계몽주의 (또는 교양주의)로 부터 시작됐지만 곧바
로 김동인의 리얼리즘에 의해서 극복되었다. 성문제 하나만 보더라도, 김동인은 <감자>나
<김연실전>을 통하여 이광수의 편협한 시혜의식과 비현실적 이상주의를 극복하고 있으며,
있는 그대로의 성을 그릴 뿐 거기에다가 섣부른 '진단'이나 '처방'을 첨가시키지 않고 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김동인으로부터 시작된 '문학적 주관의 확립'이 그 이후로 후계자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현대 소설은 그 이후 줄곧 이데올로기나 도덕의 슬하
에서 벗어나오지를 못했고, 지금은 오히려 더욱 심해진 '이광수주의(主義)'의 단면들이 여
러가지 가면들을 통해서 노정되고 있다. 이것은 분명 문학적 퇴보라고 나는 생각한다.
<권태>와 <광마일기>, 그리고 이번의 <즐거운 사라>에 이르기까지 나는 주로 사랑문제
만을 다뤄왔다. 나는 '사랑문제'와 '성문제'를 특별히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둘
다 인간의 보편적 행복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인자라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오로지 성만
이 인간의 모든 현상을 지배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다만 나는 성이 '사회적 삶'이 아닌 '개
인적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제껏 성에 대
한 일체의 논의나 표현은 구태의연한 조선조식 윤리와 엉거주춤 양다리 걸치기식 눈치보
기의 풍조 때문에 제한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이 '사회적 자아'뿐만 아니라 '개인적 자아'역시 동시에 가지고 있다
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개인적 자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성문제에
대해 툭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한시바삐 마련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나라에서 성문제는 마치 '쓰레기통에 뚜껑만 덮어 놓고 있는 양상'과도 같아서, 은폐
될 대로 은폐된 채 해결책을 전혀 찾지 못하고 속으로 썩어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
다보니 새 시대의 조류에 맞는 새로운 성의식이나 성철학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어 사
회 전체를 숨막힌 답보 상태로 몰아가고 있으며,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이중적 사
고방식에 기인하는 보수적 억압의 논리만이 판을 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얘기가 굳은 자유분방한 연애심리에만 집착하는 나의 문학세계를 변명하는 말로 들
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설사 욕을 얻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어쨌든 일체의 성문제
를 사상과 토론의 자유시장에 상장시키고 싶어서 주로 성문제에 치중해왔다는 사실을 다
시 한번 밝혀두고 싶다.
<즐거운 사라>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이번에 다시 제 2 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이
작품을 탈고한 것은 1990년 6월이었는데, 여러가지 사정 때문에 일년 뒤인 1991년 7월에
가서야 비로소 선을 보이게 되었다. 그런데 나로서는 꽤 신경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은 간행물윤리위원회의 판금 결정에 의해 나온지 한달만에 출판사측이 자진 절판을 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그때로선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어찌보면 내게 전화위복의 계기를 마련해준 것 같은 생각
이 든다. 내가 이 소설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손질하여 깁고 다음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어 주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결말부분을 바꾸고 전체적인 분위기와 문장 하나하나에 이
르기까지 세심하게 손질을 가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 진짜 결정본 <즐거운 사라>를
이제 독자 여러분들께 새로 선보이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번에 내는 <즐거운
사라>는 내가 쓴 책들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출판과정에서의
우여곡절말고도, 아무래도 내가 남자인지라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녀의 내면세계를
묘사해 내기가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이다.
출판을 맡아준 청하 출판사측에 감사하며, 나뿐만 아니라 부디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즐
거운 사라' 아니 '즐겁게 방황하는 사라'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이끌어주시기를 간절히 바
란다.
1992년 8월 마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