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문경희
턱, 말문이 막힌다. 미세한 전율이 등줄기를 사르르 훑어 내리고 팔뚝으로는 좁쌀 같은 소름마저 돋는다. 잠처럼 오래 덤덤하던 자율 신경이 덩달아 요동을 치는지 침이 마르고 가슴이 쿵쾅거린다. 소리 없이 물 위를 온통 장악한 저 낱낱의 점들이 진정 날것의 군상이란다. 작은 것이 때로는 이리 크다.
화려한 군무라 식상한 이름을 붙일까. 묵언중의 웅변이라 궁색한 포장을 입혀 볼까. 자칭 글쟁이라는 그럴싸한 치레를 걸치고서도 유유한 대자연의 섭리가 펼쳐 놓은 한 폭의 풍경 앞에 다만 '아!'하는 단말마의 감탄사조차 내지르지 못하는 실어증의 환자가 되고 만다. 가난한 호주머니를 뒤지듯 부산스레 자모음을 꿰어보지만 딱히 들이댈 구절이 떠오르지 않을 따름이다. 준비 없는 만남도 준비 없는 이별만큼이나 황망하다.
강폭을 천리 삼아 그리움에 눈이 먼 인연이라도 있는지, 삼월도 반 토막이 나버린 완연한 봄날에 때 아니게 오작교라도 만난 듯하다. 지구의 온난화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계절의 경계를 허물어 간다더니 때늦은 귀향을 앞두고도 저토록 느긋한 것을 보면 생태계에 적신호가 온다는 말이 경고성의 멘트만은 아닌가 보다 .
분주하던 날개를 접고 정적에 들어 유연한 금강의 허리께를 단단히 여미고 있는 두툼한 날짐승들의 띠. 인터넷을 떠도는 화보에서 몇 차례 보았던, 바로 가창오리떼다. 수천, 수만, 수십만…. 대충 어림잡으려 해도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다. 이 순간 세어 수치화한다는 일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이미 전체로서의 하나만이 있을 뿐 개체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 찰나다. 그저 '가히 천문학적'이라는 한마디로 갈무리를 할 수밖에. 저들이 일시에 날아오른다면, 섬뜩한 환상 체험에다 비할까.
둑방길에 차를 세우고 지분거리는 햇살 속에 쪼그리고 앉는다. 느긋해지리라 작정을 하면서도 피사체를 향해 초점을 맞춘 사진기처럼 두 눈은 비상을 준비하는 새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쫓기에 바쁘다. 무슴슴한 강바람이야 아는 척을 하든 말든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촉수들에 단단히 자물쇠를 채운 막무가내의 외사랑에 풍덩, 돌팔매질을 하듯 어느 섶에선가 꿩 한마리가 요란스레 날아오르지만 나의 장도에 딴지를 걸기엔 역부족임을 그도 눈치 챘으리라. 실눈을 뜨고 손차양을 한다. 희귀한 눈호사란 날이면 날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유로 장기전이라도 불사해 볼 참이다.
다시 한해의 농사일을 시작하겠다는 예령처럼 바지런한 농부들은 어느새 논두렁을 죄 태워 놓았고 검은색의 보색이 다름 아닌 쑥빛이라는 듯 해쑥이 발밑으로 성성하다. 굳이 예년보다 서둘러 온 봄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철새들에겐 더 이상 늑장을 부릴 여유가 없어 보이건만 마치 묵상에 들기라도 한 듯 시간으로 돌아앉아 미동도 없다. 세상속의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운수 좋은 날, 허락도 없이 그들만의 잔치에 들러리를 자처한다. 간밤 꿈자리야 뒤숭숭했지만, 번외편이 더 찡한 드라마처럼 번잡한 일상의 외진 모퉁이에서 생에 다시없을 장관을 목도하는 횡재수를 건질 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푸드득, 여기저기서 서너 마리씩 정탐병이 날아오른다. 이따금 수백 마리쯤 되는 일단의 무리들이 비밀스런 작전 수행이라도 하듯 서로 엇갈리며 자리바꿈을 한다. 그 와중에도, 지구를 돌며 지구의 행보에 맞춰 태양을 따라 도는 달처럼 붙박인 듯 멎어있던 거대한 하나는 끊임없이 편제를 바꾸어가며 서서히 물길을 거슬러 상류로 오른다. 장엄한 의식을 치르듯 이어지는 정중(靜中)의 동(動), 그 지극한 파노라마를 보고 있자니 애초에 읽었던 고요가 다만 고요 그 자체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겠다. 그들의 오랜 습성은 단순한 본능 이상도 이하도 아니리라 가벼이 치부하고 말았던 내 자신이 무색해질 만치 보이지 않는 질서가 안으로 더욱 정연했음을 이제서 깨닫는다.
사금파리처럼 부시게 명멸하는 수면을 화폭 삼아 그들이 그려내는 그림이야말로 진정 기네스북감이 아닌가 싶다. 아니, 어쩌면 인간의 잣대로는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숭고한 그 무엇이다. 사람의 이름을 달고서야 어느 절창이, 어느 무희가, 어느 화공이 제 한 몸 저어 육필로 그리는 저들의 명화(名畵)에 도전장을 던질까.
'행복한 눈물'이던가.
얼마 전, 한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는 그림을 매스컴으로 보았다. 뉴욕 출신의 팝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으로, 국내 최고를 자처하는 모기업에서 불법의 비자금으로 구입해 어딘가에 소장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는 바람에 세간의 곱지 않은 이목이 집중되었던 것으로 기억 한다. 원체 문외한이라 작품성이니 예술성을 읽어 내지 못하는 탓에 그 진가야 왈가왈부할 수 없으나 평범한 소시민의 입장으로서는 도무지 현실감이 없는 가격이다. 어마어마한 금전적 가치가 화가의 명성에 따른 것이든 인간의 허영으로 덧칠되어진 것이든 이해가 가지 않기는 매일반이다. 여하튼, 작가의 의도나 작품의 가치와는 별개로 검은돈에 연루된 오명을 덤터기 써 버린 그림 하나를 두고 가지지 못한 자의 불뚝성인지는 모르나 착잡하기 그지없다.
고인이 된 작가는 몇 십 억이라는 과분한 명찰 앞에 다만 뿌듯할 수 있을까. 대중과의 소통이 아니면 존재의 의미가 상실되어지는 것이 예술 작품이고 보면 작가의 본의와는 상관없이 고액이란 허명을 걸친 대가로 세상에서 지워질 운명에 처하고 말았으니, 태우면 재가 되는 한낱 종이 한 장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구태여 과유불급이란 오랜 말씀을 빌지 않더라도 진정한 가치 매김이란 그것이 가장 적절할 때 외려 빛나는 법이다.
순간순간 살아 꿈틀거리는 그림에 다시 눈을 맞춘다.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유명 짜한 평판도, 대단한 화구도 갖추지 못한 소박한 손길이 있어, 썼다 이내 지워버리는 낙서처럼 영감만으로 그린 그림이라한들 보는 이의 가슴에 오래 선연한 감동으로 채색된다면 있는 자들의 과시욕에 또한 그처럼 불을 댕길 수 있을지. 대자연의 착한 목숨들만으로도 차고 넘치는 저 소소한 화폭처럼 말이다. 가시적인 것들에 스스로 멱살이 잡혀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주소에 묵언의 경종을 울리듯 한 폭의 육화(肉畵)는 다시 일파만파로 번져간다.
앉은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선다. 지상의 언어로 가닿을 수 없는 가창오리떼의 웅장한 비상을 가슴으로 너끈히 읽은 탓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