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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상대1.7동기회 원문보기 글쓴이: 海松
작년(2014) 5월 제47차 문화답사(전북 扶安지역) 이후 중단되었던 문화답사가 11.11(수)
北村한옥마을 답사를 계기로 문화답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북촌한옥마을은 2012.12.11(화) 제33차 문화답사 할 때 雲峴宮을 둘러보고 북촌의
동쪽지역(齋洞-嘉會洞)을 주로 보았는데 이번에는 전철 3호선 안국역에서 豊文女高 뒤쪽에서
시작하여 북촌의 서쪽지역(安國洞-三淸洞-昭格洞-八判洞)을 위주로 감고당길 서쪽을 주로
답사하고 삼청공원을 돌아 다시 안국역으로 돌아왔다.
답사를 마친 후 三淸路에 있는 옛날전통육개장 전문식당 ‘육대장’에서 식사 후 八判洞에 있는
34회 林光男 총무의 閑碧園 갤러리 카페에서 부부가 손수 내린 맛 좋은 原豆커피로 회원들을
즐겁게 해주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北村韓屋마을
景福宮과 昌德宮, 昌德宮後苑(禁苑) 사이 北岳山 기슭에 있는 한옥 보존지구로 淸溪川과
鍾路의 윗동네라는 뜻으로 ‘北村’이라고도 한다.
북촌은 조선시대 高官大爵들과 왕족, 士大夫들이 거주해온 고급 살림집터로 한옥은 모두
조선시대의 기와집이다.
日帝時代에는 金玉均 등 開化派들과 麗興 閔氏 세력과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거주하였으며
1970년대에는 江南지역 개발의 여파로 1976년 京畿高가 이전하자 그 건물은 正讀圖書館으로,
1978년 徽文高가 이전하면서 1983년 現代建設社屋이 신축되고, 昌德女高가 1989년 이전한
뒤에는 憲法裁判所가 들어섰다.
1980년대에는 경직된 한옥보존정책과 북촌길을 개설하고, 1990년대에는 보존정책이
완화되어 한옥이 사라지고 多世帶건축이 확산되었으며 2001년부터 북촌 가꾸기가 시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촌은 白岳(北岳山)과 鷹峰을 연결하는 산줄기의 남쪽 기슭에 있어 예로부터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좋은 곳이었고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북촌주변에는 북쪽에 북악산과 삼청공원 외에도 서쪽에는 景福宮(사적 117)이,
동쪽에는 昌德宮(사적 122) 등 史蹟 5곳, 서울시 민속자료 4곳, 서울시 유형문화재 3곳,
서울시 문화재자료 1곳 등의 文化財가 있는 곳이다.
북촌의 桂洞길, 嘉會路, 삼청동길, 창덕궁길 등이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많은
역사유적들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자원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갤러리와 카페가 많이 자리잡고
있으며, 傳統機能保有者 및 예술인들이 모여 살고 최근에는 건축가, 미술가들이 북촌 내부에
작업실과 사무실 등을 개설하고 있어 북촌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와 내용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현상이기도 하다.
*參考: 南村
조선시대에 청계천 북쪽 일대를 북촌이라 하고, 그 남쪽 일대를 남촌으로 불렀으며 남산 기슭을
중심으로 한 남촌은 沒落한 兩班의 자손, 科擧에 급제하지 못해 ‘남산골 샌님’, ‘남산골 딸깍발이’라
놀림을 받았던 불우한 선비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어 조선인들이 이 남촌 지역을 ‘왜놈들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2015. 11. 16 孤 山 朴 春 慶
景福34회 제48차 文化踏査: 北村韓屋마을 사진 (2-1)
(01) 전철 3호선 안국역 1번출구에 집결하는 踏査會 회원들
(02) 安洞別宮 터, 豊文女高 구내에 위치하고 수업 중으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안동별궁 터는 전부터 歷代 王室의 저택이 있던 곳에 高宗 18년(1881)에 지은 別宮으로
북부安國坊의 小安洞에 있다고 ‘안동별궁’으로 호칭하게 되었으며 일부 문헌에는
‘安國坊 別宮’이라도 했다.
1882년 2월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純宗이 王世子일 때 世子嬪 閔氏와 嘉禮를 치른 곳으로
1936년 金鑛業者 崔昌學에게 落札되어 이후 학교와 주택 등이 들어서게 되었다.
(03) 步道 블럭에 陰刻된 북촌일대 안내도
(04) 安國洞 돌담 길
(05) 감고당 길
안국동사거리에서 豊文女高-德成女高를 거쳐 昭格洞 아트선재미술관 앞까지의 길이다.
(06) 감고당터[感古堂址] 표석
조선 肅宗의 繼妃 仁顯王后 閔氏가 살던 친정 집으로 14살에 王妃로 揀擇되었다가 張禧嬪의
모함으로 廢 庶人이 되어 6년간 감고당에 갇혀 살다가 還宮하였다. 지금은 도봉구 雙門洞
德成女子大學校로 옮겨졌다.
*두산백과 자료: 숙종이 仁顯王后의 친정을 위하여 지어준 집으로 인현왕후의 부친 閔維重이
살았으며, 인현왕후가 폐위된 후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이후 代代로 민씨가 살았으며
高宗 3년(1866) 이곳에서 明成皇后가 왕비로 책봉되고 책봉된 명성황후는 인현왕후의 일을
회상하여 '感古堂'이란 이름을 붙였다. 본래는 서울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있던 것을
도봉구 쌍문동 덕성여자대학교 학원장 공관으로 옮겼으며, 이후 驪州市의 명성황후 유적
성역화 사업에 따라 여주시 명성황후의 生家 옆으로 이전∙복원되었다.
(07) 감고당 터-德成女高 校庭 농구대가 있는 지역.
(08)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종로구 昭格洞 옛 國軍機務司令部 자리에 2013년 11월 국립현대미술관 果川 本館,
德壽宮館에 이어 세 번째로 지하3층, 지상 3층 규모로 개관하였으며, 미술관 뒤편에는
조선시대 宗親府의 유적이 복원되었다.
(09) 宗親府 敬近堂과 玉牒堂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호-
宗親府는 조선왕조 역대 先王의 御譜(왕의 도장)와 御眞(왕의 초상화)을 보관하고
왕과 왕비의 의복을 관리하며 宗室諸君의 封爵承襲∙冠婚喪祭 등 모든 사무를
맡아보던 곳으로 조선 전기에는 ‘在內諸君所’라 하였으나 世宗 12년(1430)에 ‘종친부’라고
개칭하였다.
純宗 隆熙 1년(1907)에는 이를 폐지하고, 사무를 奎章閣으로 移管하였으며 건물은
삼청동에 있던 것을 1981년 원래 자리인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10) 宗親府 敬近堂
경근당은 왕실의 사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현판은 高宗의 御筆이라고 한다.
(11) 宗親府 玉牒堂
옥첩당은 고위 관리들의 執務處로 사용되었다.
(12) 종친부 이승당 터[貳丞堂址]
종친부는 최고 王族들의 사무를 처리하던 敬近堂, 고위 관리들의 집무처인 玉牒堂,
하급 浪人들의 집무처 이승당으로 이루어졌으나 경근당과 옥첩당 만 남아있다.
이승당 터의 흔적을 基壇과 주춧돌로 살려 그 당시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3) 소나무-보호수
고유번호; 서1-31호(2007.11.29)/ 수종; 소나무/ 壽齡; 100년(지정일 기준)/
너무 둘레; 190cm / 소재지; 종로구 昭格洞 165
(14) 멋진 담장
(15) 서울특별시립 정독도서관 입구
입구 왼쪽에는 3개의 標石(화기도감 터, 성삼문 선생 살던 곳, 중등교육 발상지)과
‘화동 구 경기고교’ 안내판이 있다.
(16) <화기도감 터[火器都監 址]> 표석
조선시대에 銃砲를 만들던 터로 壬辰倭亂 때 왜군이 鳥銃을 사용하여 아군이 크게
고전하였으므로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鳥銃廳을 만들어 총포를 제작하였고 그 후 북쪽의
女眞을 방어하기 위하여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개편하였다.
*光海君 6년(1614) 화기도감으로 개편하고 1615년 4월 1차 업무를 마친 뒤 별다른
역할이 없다가, 1904년 행정제도 개편에 따라 軍器廠으로 개칭되었다.
(17) <성삼문 선생 살던 곳> 표석
太宗 18년(1418)에 태어나 世祖 2년(1456)에 殉節한 梅竹軒 成三問이 살던 집이
이 부근(花洞 23번지)에 있었다.
(18) <중등교육 발상지(中等敎育 發祥地)> 표석
이 터는 중등교육의 발상지로 1900년 高宗皇帝의 勅令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中等學校로
건립된 京畿高等學校가 있던 자리이다.
*1900년 官立中學校로 개교하여 1906년 官立漢城高等學校로 교명을 바꾸고, 1911년
京城高等普通學校, 1921년 京城第一高等普通學校, 1938년 京畿公立中學校로 교명을
변경하고, 1951년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景福高等學校 연혁
1921년 京城第二高等普通學校로 개교, 1938년 景福中學校로 개칭, 1953년 경복중학교와
경복고등학교로 분리, 1971년 경복중학교 폐교, 1974년 경복고등학교 附設
방송통신고등학교 개교를 개교하여 오늘이 이르고 있다.
(19) 화동 구 경기고교 -등록문화재 제2호-
1900년 한국의 첫 근대 중등교육기관으로 출범한 경기고등학교의 本館건물로 1938년에
건축되었으며 1976년 학교가 江南으로 이전한 후 서울시립 正讀圖書館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 花洞일대에는 조선말기 開化派 官僚들의 거주지로 처음의 학교 터는 古筠 金玉均의
집터였고, 이후 松齋 徐載弼과 平齋 朴齊純의 집이 합쳐지면서 넓은 敷地에 자리잡게 되었다.
(20) 서울특별시립 正讀圖書館
서울시민에게 최신의 정보를 제공하고, 교양∙학습 등을 지원하여 문화발전 및 평생교육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서울시에서 1976년 경기고등학교 건물을 인수하여 1977년 1월
개관하였다.
(21) 김옥균 집터[金玉均 家址]
조선말 開化派의 지도자인 古均 金玉均이 거처하며 甲申政變을 논의하던
집 터(종로구 화동 260번지)이다.
(22) 김옥균 집터 동쪽 담 너머에 있는 멋진 韓屋지붕
(23) 白九 金裕元 동문의 格調 높은 해설과 경청하는 동문회원들
(24) 謙齋 仁旺霽色圖 碑
조각 又湖 金泳仲 / 글씨 如初 金鷹顯 / 1992년 문화부 세움
*인왕산은 조선이 건국되고 都城을 축성할 때 白岳(北岳山)을 主山, 南山을 案山,
駱山을 左靑龍, 仁王山을 右白虎로 삼았던 朝鮮朝의 명산으로 이곳에 仁王寺라는
불교사찰이 있었기 때문에 仁王山이라고 불렀다.
日帝强占期에 인왕산의 표기를 ‘仁旺’이라 하였으나 1995년 ‘仁王’으로 옛 지명으로
환원되었는데 ‘旺’이 ‘王’으로 환원되기 전인 1992년에 碑가 건립되어
<謙齋 仁旺霽色圖 碑>라고 표기하였다.
(25) 鄭敾 筆 仁王霽色圖 –국보 제216호(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복사본-
*인왕제색도는 조선 후기 화가 謙齋 鄭敾(1676∼1759)이 비 온 뒤의 仁王山 모습을
안개가 피어 오르는 인상적 순간을 포착하여 그 느낌을 잘 표현한 그림으로
가로 138.2㎝, 세로 79.2㎝이다.
英祖 27년(1751)에 그린 이 그림은 이제까지의 山水畵가 중국 것을 모방하여 그린 것에
반하여 직접 경치를 보고 그린 實景山水畵일 뿐만 아니라 그 畵法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의
山水를 너무나 잘 표현하였으며 그의 400여점의 遺作 가운데 가장 크고 그의 화법이
잘 나타난 조선 후기 작품으로 실경산수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하고 있다.
(26) 謙齋 仁旺霽色圖 碑-如初 金膺顯 글씨
如初 金膺顯은 우리가 고등학교 때 국어를 가르치셨던 白牙 金彰顯 선생님의 季氏이며
白牙 선생님의 伯氏인 一中 金忠顯을 비롯하여 一中, 白牙, 如初 세 형제 분 모두가
1970년대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書藝家 집안이다.
(27) 謙齋 自畵像 <讀書餘暇> /畵聖 謙齋 鄭敾의 집터 -2013.05.25 사진-
겸재가 태어나서 五十代 초반까지 살았던 집터로 景福高等學校 교정에 있다.
이곳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때 속해있던 2학년 1반과 2반의 판자집 교실이 있던 곳으로
현재 학교 本館 앞마당에 있다.
*판자집 교실에서 공부시간인 여름에 창문을 모두 열고 놓으면 본관 3층에서 강의하시는
白牙 金彰顯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커서 황송하게도 선생님의 별명이 ‘엿장수’ 였다.
(28) 붉게 물든 단풍나무
(29) 가이쓰까 향나무(나사백∙螺絲柏). 측백나무科/ 일본에서 개발
(30) 등(藤)나무(갈잎 덩굴나무)
*葛藤: 칡[葛]과 등나무[藤]가 서로 얽혀 자라기 때문에 칡과 등나무가
얽힌 것같이 일이나 사정이 서로 복잡하게 뒤얽혀 화합하지 못함을
비유한다.
(31) 소격서 터[昭格署 址], 삼청파출소 앞에 있다.
*昭格署는 道敎의 日月星辰을 具像化한 上淸∙太淸∙玉淸 등을 위하여 三淸洞에 星祭壇을
설치하고 醮祭(星辰에게 지내는 제사) 일을 맡아보았다. 太宗 이전에는 昭格殿이라 하여
하늘과 별자리, 산천에 복을 빌고 병을 고치게 하며 비를 내리게 기원하는 국가의 제사를
맡았는데 世祖 12년(1466) 官制개편 때 소격서로 개칭하였다.
그 후 도교를 배척하는 儒臣들의 조직적인 운동과 趙光祖의 끈질긴 폐지 주장에 따라
中宗 13년(1518)에 폐지되었으며 이때 祭服∙祭器∙神位까지 땅에 파묻었다.
(32) 복정(福井)우물
조선시대 물이 맑고 맛이 좋아 宮中에서만 사용하던 우물로 평상시에는 뚜껑에 자물쇠를
채우고 군인들이 지키게 하여 일반인들의 사용을 금했으나, 정월대보름에만 개방했는데
이 물로 밥을 지어 먹으면 일년 내내 행운이 따른다고 했으며 주민들의 건의로 근간에
예전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33) 三淸洞에서 본 仁王山(해발 338m)과 北岳山(해발 342m)
(34) 삼청동에서 본 인왕산
(35) 삼청동에서 본 북악산
(36) 삼청동 뒤로 북악산과 肅靖門 쪽으로 서울 漢陽都城이 이어지는 능선
(37) 돌계단길, 北村八景의 제8경이다.
(38) <三淸洞門> 刻字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58호-
三淸洞의 마을 입구에 있는 병풍바위에 새겨진 글씨로 조선시대 文集 및 古地圖에서
확인되는 서울의 주요 景勝地 삼청동의 입구를 상징하는 지표이며, 元나라의 雪菴 筆法을
받아들인 石峯 韓濩 이후 우리나라 懸板大字의 전형을 보여주는 뛰어난 글씨로
英祖∙正祖 시대의 대표적 實學者로 經學에 정통했던 硏經齋 成海應의 글씨라고 한다.
(仁祖 때의 名筆 서예가 金敬文의 글씨라고 하는 설도 있다).
*三淸洞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道敎의 三淸星辰(太淸∙上淸∙玉淸)을 모신 三淸殿이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으며, 이 지역이 산이 맑고[산청(山淸)], 물이 맑으며[수청(水淸)], 그래서 사
람의 인심 또한 맑고 좋다[인청(人淸)]는 뜻이기도 하다.
(39) 한국금융연수원, 구내에는 기기국 번사창이 있다.
(40) 機器局 飜沙廠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1호-
조선 말기 근대식 무기를 제작하던 機器廠 건물로 강화도 조약 체결 8년 후 인
高宗 21년(1884)에 건립하여 조선 말기 근대식 무기를 제작하던 관청인 機器局의
武器庫로 사용한 건물이며, 조선 초기에 설치한 군기시(軍器寺)의 창고인 別倉이
있었던 곳이다.
‘번사(飜沙)’라는 말은 흙으로 만든 틀에 금속용액을 부어 만드는 것을 말한다.
(41) 기기국 번사창 내부
(42) 기기국 번사창 내부
(43) 기기국 번사창에서 본 북악산
(44) 기기국 번사창의 단풍나무
(45)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잎
(46) 기기국 번사창 건물 측면
(47) 단풍 잎
(48) 지청천 장군 집터[池靑天 將軍 家址]
滿洲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抗日 독립투사
池靑天 장군의 집 터이다.
*池靑天(1888-1957)은 서울 三淸洞 출생으로, 본명은 錫奎 또는 大亨이다. 培材學堂을
중퇴하고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다니다 일본으로 유학, 1914년 일본 육사를 졸업,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20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있다가 西路軍政署의 병력을 이끌고
沿海州에서 韓人 무장세력이 연합해 대한의용군 총사령부 대한독립군단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總司令에 취임하였으며
광복 후 귀국하여 1947년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으며, 이듬해에
제헌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
(49) 삼청동길 돌담
종로구 中學洞 東十字閣에서 성북구 城北洞 삼청터널에 이르는 街路로 길이 2.9㎞로
1966년 11월 중앙청에서 삼청공원까지 길이 2.1㎞의 三淸路로 제정되었다가
1984년 11월 ‘삼청동길’로 이름을 바꾸고 삼청터널까지 종점을 연장하였다.
(50) 삼청동길 돌담
北村韓屋마을(2-2)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