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003/13/2010031300447_1.jpg", "13일 오전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 법정스님의 다비식이 열렸다. / 이재호 기자 superjh@chosun.com /조선일보","2010031300448","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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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일 오전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 법정스님의 다비식이 열렸다. / 이재호 기자 superjh@chosun.com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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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과 동문수학한 사형 중 혼자 남은 법흥스님
“’비구 법정’이라고 딱 네 글자만 위패에 써서 돌아왔더라고. 그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내가 몇 자 더 붙여서 다시 썼어”
법정스님의 다비식이 열린 13일, 송광사 동당에서 만난 조계종 원로의원인 법흥(法興)스님(79ㆍ동당 수좌)은 같은 은사 밑에서 동문수학한 사형(師兄) 법정스님을 가리켜 “평소 성품대로 돌아왔더라”고 말하며 그리움을 나타냈다.
법정스님은 1954년 근대 한국 불교 최고의 선승 중 한 명인 효봉스님(1888-1966)을 안국동 선학원에서 만나 출가했다. 5년 뒤, 법흥스님도 역시 효봉스님을 은사로 동화사에서 출가했다.
효봉스님은 와세다대 법대를 졸업하고 판사생활을 하다 첫 사형선고를 내린 후 생사를 고뇌하다가 38세에 늦깎이로 출가, 치열한 구도의 노력 끝에 깨달음을 얻고 1937년 송광사에 이르러 선방인 삼일암 조실로 10년을 머무른 송광사 문중의 최고어른이다. 그는 1946년부터 5년간은 해인사 가야총림에서 방장을 지냈고, 1962년 통합종단 출범 후에는 초대 종정을 지냈다.
불가에서 같은 은사 아래의 상좌 스님들은 속가의 형제와 같다. 효봉스님의 맏상좌는 1969년 조계총림의 문을 열고 입적 때까지 방장을 지낸 구산스님(1909-1983)이었고, 환속한 시인 고은, 김완일 법사 등도 효봉스님의 상좌였다. 법정스님마저 이번에 입적하면서 스님으로 남은 효봉스님 상좌들 가운데 이제는 법흥스님만 생존해있다.
법흥스님은 13일 법정스님 다비식에도 거화(炬火)봉을 든 스님 9명 중 한 명으로 참석, 형제 같은 사형을 불길 속으로 떠나보냈다.
“법정스님이 1932년 생이어서 나보다 속가 나이는 한 살 어렸지만 5년 먼저 출가했으니 나의 사형이지. 난 1958년에 고려대 국문과 졸업하고 스물아홉이던 1959년에 대구 동화사에서 중이 됐어. 해인사에서 글을 쓰던 법정스님이 1960년 정월 보름에 내가 있던 동화사 금당에 왔기에 그때 처음 만났어”
“둘이 효봉스님 앞에 불려가 ’화두를 어떻게 드느냐’는 추상같은 질문을 받고 쩔쩔매곤 했지. 1961년 해인사 선방에서는 같이 지냈어. 그때 법정스님이 서산대사의 ’선가귀감’ 번역본을 냈어. 해인사 있을 때도 만날 신동아, 사상계 같은 잡지를 보고 있더군”
법흥스님은 법정스님을 가리켜 “이기적이고 독선적이었다. 주지, 삼직(절에서 총무ㆍ교무ㆍ재무를 맡는 스님) 한 번도 한 적 없고 자기 하고 싶은 공부만 했다”고 말했다. 그 말은 당연히 법정스님을 향한 무한한 애정의 반어법인 듯했다. 스님은 법정스님과 친하셨느냐는 질문에는 “당연히 친하지, 사형인데”라며 웃었다.
법흥스님은 일체의 겉치레와 감투를 싫어하던 법정스님을 회상하면서 “1980년 신군부가 10.27 법난을 일으킨 이후 수습하려고 꾸려진 비상중앙총회에 나와 함께 들어갔던 적이 있지만 그것도 2-3달 하고 그만뒀다”라고 회상했다.
법정스님은 스님들이 법호를 짓는 것도 질색했다고 법흥스님은 소개했다.
“평소 ’중이 법명 하나면 되지 무슨 호가 필요하느냐’고 꼬집었어. 내가 ’도현’이라는 법호를 지었다고 했더니 질색하면서 혼내더라고. 이번에도 올 때보니 위패에 ’비구 법정’이라고 딱 4글자 적어왔어. 그래도 그건 아니다 싶어서 내가 ’비구 법정 대선사 강녕’이라고 몇 자 더 붙여 써서 분향소에 올렸어”
법흥스님은 법정스님이 1975년 송광사 불일암으로 내려올 때도 인연을 맺었다. 당시 송광사 주지였던 법흥스님은 법정스님이 불일암을 짓는 것을 돕고 곁에서 지켜봤다.
“법정스님이 야권이었잖아. 군사정권 때 비판글을 잡지에 자꾸 싣곤하니까 중앙정보부에서 편지 다 뜯어보고 도청했어. 그러다가 내려왔어. 그 즈음 1974년에 방장스님이 나를 주지를 시켰어. 그 이듬해에 법정스님이 왔더라고. 원고료 80만원 들고 와서 암자 짓겠다고 해서 나도 좀 보태서 지었어”
법흥스님은 1983년 구산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송광사 큰절에 자주 왕래하던 법정스님은 이후에는 불일암에만 주로 머물러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고 했다.
스님은 서가에 소중히 간직해온 법정스님의 글이 담긴 잡지와 저서들을 꺼내보이며 “10여년 전에 길상사를 얻지 않았어? 그 후 송광사 서점에서 한번 만났지. 그때도 광목 무명옷 입었더구먼”이라고 회고했다.
법흥스님은 “법정스님은 우리 은사 효봉스님에 대한 존경이 남달랐다”며 “효봉스님의 행장을 법정스님이 연구해 잡지에 실어줘서 원고료를 줬더니 받지 않았다”고 추억하기도 했다.
1931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난 법흥스님은 1959년 출가한 후 송광사 주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송광사 유나, 회주 등을 지냈으며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상원사 등의 선원에서 수행한 불교계 대표적 선승 가운데 한 명이다. 중요한 인연이 있었던 연도를 속사포처럼 줄줄 꿰는 비상한 기억력과 서예 솜씨로도 유명한 스님이다.
'30여년 교유' 법정 스님 떠나보낸 이해인 수녀
저는 "공양 주세요", 스님은 "성찬을 들자"며 서로의 믿음 포용했었죠
2008년에 암수술 하루하루 최선 다하며 '명랑투병'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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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이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듣던 날은 오히려 실감이 안 나고 멍해졌어요. 그런데 송광사로 가신 스님의 법구가 정말로 관도 없이 평상에 누워서 떠나시는 다비 장면을 보고 있자니 그분의 부재가 갑자기 사무칩니다."
법정 스님의 다비식이 치러지던 13일
이해인 수녀는
경기도 의왕의 성라자로마을에 머물며 그 장면을 TV로 지켜보고 있었다. 지난 2008년 암 수술을 받은 이해인 수녀는 평소 부산의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서 지내다 2~3개월에 한 번씩 상경해 검진을 받고 있다. 이해인 수녀는 "아흔 넘게 건강하게 사시며 세상에 좋은 글과 말씀을 전하시리라 믿었는데 너무 서둘러 가셨다"고 안타까워했다. 다비식이 치러지는 동안 이해인 수녀는 성라자로마을 부속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떠나는 스님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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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이후 수필가
장영희 교수, 그리고 법정 스님까지 국민적인 존경의 대상이거나 사랑을 받았던 분들이 지난 한 해 사이 잇달아 세상을 떴습니다. 공교롭게도 수녀님과 각별한 인연을 쌓으신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을 떠나보내는 심정이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종교마다 죽음을 대하고 해석하는 시각이 다르니 각자 신앙의 가르침에 따라 받아들일 일이지만,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슬프지 않을 수 없어요. 저도 투병 중이니 다음은 내 차례일까요? 그러나 허전함 못지않게 그분들과의 이별을 통해 깨달은 것도 적지 않아요. 추기경님은 스스로를 '바보'라고 낮추시며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쳐주셨어요. 절친한 친구였던 장영희 교수를 떠올리면 가슴이 저리면서도 그가 보여준 웃음과 씩씩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저도 씩씩하게 투병할 용기를 얻었어요. 관조차 마다하신 법정 스님은 생전에 '죽고 나면 빛이 바래니 살아생전에 나누며 살라'고 하셨다지요? 그 말씀을 곱씹으며 나는 남과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 내가 그들에게 주지 않고 움켜쥔 것은 무엇인가 돌아보게 됐어요."
―법정 스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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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정 스님의 다비식이 있던 13일 이해인 수녀가 성 라자로마을 부속 성당에서 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는 작별 기도를 올리고 있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자신의 수행에는 엄격했지만, 좋은 문장을 지닌 수필가였고, 가끔 유머감각을 보이실 때는 장난치기 좋아하는 소년 같기도 하셨죠. 제가 먹는 것을 좋아해 그분 보는 앞에서 좀 과식하는 모습을 보여드렸더니, 대뜸 '수행자는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셔서 '참 까다로운 분이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편지로 '성베네딕도 규칙서'를 보내달라시기에 그리 해 드렸더니, '내 지령에 즉각 응답해 줘서 고맙소'라는 답장을 보내신 거예요. '지령'이란 단어에서 장난기가 느껴져 웃고 말았죠. 산에 사셔서 새의 이름을 많이 아시던 스님은 '수녀님은 뻐꾸기밖에 모르시지요?'라는 짓궂은 질문으로 나를 놀리신 적도 있어요."
―법정 스님의 첫인상은 어떠셨습니까.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낸 뒤 친구 권유로 시집과 편지를 스님이 계신 송광사 불일암에 보내드렸습니다. 스님께서 곧바로 고맙다는 답장을 보내주신 것이 우리 인연의 시작이었지요. 스님의 평소 인상은 지적이고 딱딱해 보이지만 언뜻언뜻 비치는 속내는 다정하신 면도 있고, 남을 돕고 싶어 하는 마음도 크셨어요. 그걸 말로 앞세우거나 겉으로 드러내면 자기자랑으로 비칠까 스스로 경계하고 조심하시며 사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법정 스님이 수녀님 계신 부산 성베네딕도 수녀원을 방문하셨고, 함께 광안리 해변도 걸으셨다지요. 쑥스럽거나 어색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제가 먼저 걷자고 했어요. 단둘이 걸었는데….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지 않은 것이 아쉬워요. 스님께서 그날의 해변 데이트를 밥과 국에 비유하신 게 지금도 생각나요. '내내 산만 바라보며 살면 국 없는 밥을 먹는 느낌인데, 이렇게 바다에 와 보니 밥그릇 옆에 국그릇도 있는 것 같아 좋다'고 하셨어요. 1978년쯤이니까 스님은 그때 40대였고, 저는 30대 초반이었는데, 스님이나 저나 약간 긴장했던 것 같기도 해요. 제가 불일암으로 찾아뵈었을 때는 둘이 함께 있는 걸 아주 멋쩍어하셨어요. 앞에 놓인 포도를 드시는데, 말도 없이 어찌나 빨리 드시는지 화나신 것 같더라니까요. 불일암을 떠날 때도 여자인 저를 순천역으로 배웅해야겠는데 그러자니 어색하고 해서 난감해하시는 게 표정으로 다 보이더라고요."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님, 수녀님은 종교를 초월해 교유하셨지요. 빈부와 지역·이념으로 찢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적지 않아 보입니다.
"길상사의 '맑고 향기롭게' 모임 10주년 때 제가 기념 축시(祝詩)를 썼어요. 길상사에서 2005년 열린 음악회에는 추기경님과 제가 초대받았습니다. 스님은 명동성당에서 강연도 하셨잖아요? 저는 스님을 찾아가면 '공양 주세요' 했고, 스님이 저를 찾으시면 '성찬을 들자'며 서로 상대 종교의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김 추기경님과 법정 스님은 자신의 종교와 신념을 유지하면서도 남의 믿음을 포용하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셨을 거라 생각됩니다. 우리 사회가 그분들의 뜻을 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만남을 통해 파악하신 두 분의 성격은 어떠했나요.
"김 추기경님이 가지를 넓게 펴고 세상을 품는 느티나무였다면, 법정 스님은 늘 푸르름을 잃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는 소나무라 할 수 있지요."
―수녀님과 법정 스님은 각각 시와 산문으로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은 문인이기도 합니다. 동료 문인으로서 스님의 글이 지닌 특징을 어떻게 보시나요.
"글로는 '어린 왕자에게 보내는 편지'로 처음 만났지요. 글이 원래 그 사람 자체라고 하는데, 스님의 글은 따뜻하고 인간적이면서도 문체는 무르지 않고 깔끔하기 그지없어 딱 스님의 성격 그대로더군요. 제가 시인이니까 시인의 언어로 표현해 보자면 스님의 글은 '눈 쌓인 산기슭에 서 있는 소나무'입니다. 스님께서 투병하시며 '맑고 향기롭게' 회지(會誌)에 쓰신 글도 제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사람이 아프게 되면 그 사람만 아픈 게 아니라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친분의 농도만큼 같이 앓게 된다'는 내용이었어요. 평소 우리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것을 스님은 적절한 언어와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시선으로 표현하셨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스님의 글을 사랑하고, 그 글과 어울리는 그분의 인간적 성품을 사랑한 것 아닐까요."
―법정 스님의 산문집 '무소유'에는 스님이 아끼던 난(蘭) 화분을 잃어버린 것을 계기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무소유의 가치를 깨닫는 얘기가 나옵니다. 수녀님에게도 법정 스님의 난 화분 같은 집착의 대상이 있었습니까.
"저희 수녀들도 평생 소유하지 않고 살겠다는 '청빈서원'을 합니다. 저는 자가용은 물론 카드도 한 장 없어요. 아무리 제 시집과 산문이 잘 팔려도 그 돈은 저 혼자 쓰는 돈이 아닙니다. 심지어 명예조차도 소유하지 않으려 조심하는 것이 수녀가 지향하는 청빈의 삶입니다."
―명예도 소유하고 싶은 가치라는 점에서 법정 스님의 마음을 한때 사로잡았던 난과 다를 게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명예욕이 뭡니까. 명예를 향한 '욕심'이잖아요.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마음속의 욕심도 버려야지요. 그래서 베풀 때도 '이해인' 개인이 아니라 제가 속한 단체 이름으로 합니다. 그 베푸는 행위가 내가 평소 더 좋아하고 사랑했던 사람에 집중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명예욕만 버려서는 안 되고 관계를 독점하거나 특정한 관계를 좀 더 정성스럽게 가꾸거나 유지하려는 욕심까지도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느 한 사람만을 편애하지 않으시고 골고루 사랑을 나누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수녀가 지향할 무소유의 삶이라 할 수 있지요."
―수녀님은 추도시를 많이 쓰시는 편입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선종하셨을 때 봉헌한 시에는 '스스로를 서슴없이 바보라고 말했던 현자(賢者)'라고 하셨고, 장영희 교수에게는 '하늘나라에서도 우리 꼭 한 반 하자'고 하셨죠. 일부에서는 수녀님이 추도시를 너무 많이 쓰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가신 분들과 평소 쌓았던 친분을 바탕으로 작은 선물을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추도시를 씁니다. 그런데 그런 시를 쓰면 삶의 유한성을 묵상하며 마음이 정리되고 제 마지막을 준비하는 성찰의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꼭 인연 있는 분들을 위해서만 추도시를 쓰는 것은 아닙니다. 대구지하철 방화 사건, 중국 민항기 추락사고, 태풍 매미로 인해 희생당한 분들처럼 저와 친분이 없는 분들을 위해서도 추도시를 썼어요."
―수녀님도 2008년 7월 암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그해는 종신서원 4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였는데 힘든 일이 겹치고 말았더군요. 수술 후 경과는 어떠하신지요.
"그해 5월 23일 수녀 동기 11명과 서원 40주년을 맞았는데 두 달 후 수술을 하느라 함께 여행을 가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요. 그런데 병 걸린 나를 지극정성 간호해 주는 동기 수녀들의 사랑을 확인하고 아픈 중에도 행복했어요. 지난 1월 발표한 산문집 '희망은 깨어있네'에 투병에 임하는 심정을 밝혔듯이 저는 '명랑투병'을 할 겁니다. '오늘 하루가 내 모든 생애'라고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살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