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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강혜란
관심
‘더 헤리티지’는 앞서 우리나라 대표적인 사립 명문 고려대(“인생은 파멸, 오후 6시 거사” 그는 왜 고려대박물관 노크했나)와 연세대(고종의 칼, 민비의 금팔찌…‘푸른 눈’ 금고서 꺼낸 비밀)의 사연 많은 유물을 차례로 소개했다. 두 학교는 한 세기가 훌쩍 넘는 역사 속에 수많은 유물과 함께 흥미로운 뒷얘기들을 지니고 있다. 이번 회차는 두 박물관의 특색을 비교하는 번외편 ‘박물관 연고전(고연전)’이다. 연세대박물관 윤현진 학예연구사와 고려대박물관 안소정 학예연구사의 도움을 받아 박물관의 성장 과정과 이색 유물을 알아본다. 기사의 뒷부분에선 우리나라 청년 정신을 대표해온 두 학교가 숙명처럼 공유하는 동시대 유물도 만난다.
📃기사 미리보기
◦ 리어카에 실은 '국보' 고려대 김성수가 샀다
◦ 사도세자 생모 묘지석이 연세대에 있는 까닭
◦ 순국지사 민영환의 핏자국서 자랐다는 '혈죽'
◦ 4·19 혁명 이끈 ‘피의 증언’ 나란히 문화유산에
📌[기사 속 기사] 6·25 참전 미군의 전리품…61년 만에 돌아온 교기
📌[기사 속 기사] 오세훈 서울시장 재산목록에 송영수 조각이 왜?
국내 ‘최초’는 연세…주막집 기부받은 고대 폭풍성장
지금도 다방면에서 라이벌 의식이 거센 두 대학이지만 박물관 역사를 놓고도 엎치락뒤치락 최고를 겨룬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연혁상 오래된 건 연세대, 일찌감치 박물관 규모를 키운 쪽은 고려대다.
고려대박물관의 출발은 1934년 남창 손진태(1900~?) 선생이 도서관 한쪽에 민속품을 전시한 것을 꼽는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민속·민족학의 기틀을 다진 손진태는 6·25 전쟁 중에 납북되기까지 소위 ‘SKY 대학’을 모두 거쳤다. 연희전문학교(연세대의 전신) 강사를 시작으로 보성전문학교(고려대의 전신) 강사와 도서관장을 맡았고 해방 후 서울대 사학과 교수에 임용됐다. 그가 보성전문 재직 시절 전국에서 수집한 민속자료가 고려대박물관의 기초가 됐다. 이에 앞서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촌 김성수(1891~1955)가 인수하고 근대적 본관 건물을 지을 때부터 박물관 역사가 시작됐다는 시각도 있다.
고려대박물관의 초창기인 1955년 전시실 모습. 사진 고려대박물관
고려대박물관 역사민속전시실. 사진 고려대박물관
어찌 됐든 본격 확장한 계기는 전북 고창에서 주막을 운영했던 안함평(1879~1973) 여사의 기부다. 일찍이 홀로 돼 사고무친(四顧無親)이던 그는 보성전문학교가 개교 30주년을 맞아 전국적으로 기부금 모금 운동을 벌이자 1936년 전 재산인 논 1만6000평과 밭 9600여 평을 대가 없이 기증했다. 고려대 측은 이 재산을 토대로 박물관 민속품을 추가로 수집했고 특히 여성생활사 관련 민속품도 강화했다고 한다. 6·25 전쟁이 끝난 뒤 본격적인 유물 수집과 기증에 힘입어 1962년 대학박물관으로선 처음으로 단독 건물을 지어 이전하게 된다.
연세대는 어땠을까.
1926년 연희전문학교 졸업앨범의 행정조직도를 보면 도서부 안에 박물부가 속해 있고 1931년 발행된 연보에 “우리 대학은 1928년 역사유물과 민속유물을 수집하고 보관하기 위해 박물관을 설립했다”고 기록돼 있다. “민간으로서 역사적 보배를 보존하기 위하여 세워진 기관”(동아일보 1929년 1월 13일) 등의 보도로 볼 때 우리나라 사설박물관 1호는 연세대박물관이 확실하다. 참고로 교육기관이 아닌 민간이 세운 1호 사립박물관은 1938년 간송 전형필 선생이 설립한 간송미술관(당시엔 보화각)이다.
1936년 연희전문학교 졸업앨범에 실린 박물관 모습. 사진 연세대박물관
연세대박물관 토기실. 김병철 동문(1958년 정치외교학과 입학)이 평생 수집한 가야·신라 토기 1800여 점을 기증하면서 만들어졌다. 사진 연세대박물관
초창기 연세대박물관 규모는 소박해 언더우드홀에 유리진열장 3개를 마련한 것으로 돼 있다. 이때 소장품 규모는 파악되지 않고 있으며 그나마도 6·25 전쟁 중 대부분 참화를 겪었다. 본격적으로 확장된 것은 1964년 박물관 운영위원회를 구성하고 그해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을 발굴하면서다.
특히 당시 운영위원장을 맡아 오늘날 연세대박물관 초석을 마련한 파른 손보기(1922~2010) 교수의 공로가 결정적이다. 연희전문학교 동문(1940년 입학, 1943년 졸업)인 파른은 1965년부터 81년까지 박물관장으로 재직하면서 석장리 발굴을 계기로 일제 식민사관에 의한 선사편년을 뒤집는 등 한반도 선사 연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국보 숫자 고대가 우위, 연대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가지정문화재(국보·보물·사적 등) 숫자가 박물관의 ‘질’을 말하는 절대 척도가 될 순 없지만 자타가 의식하는 하나의 기준인 건 사실이다. 그 점에서 고려대박물관이 연세대에 비해 화려하다. 국보 3건 4점, 보물 6건 13점이다. 국보엔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지정 1974년), 혼천의 및 혼천시계(지정 1985년), 동궐도(지정 1989년)가 있다.
1985년 국보에 지정된 혼천의 및 혼천시계. 1930년 인촌 김성수가 당시 기와집 한 채 값에 구입한 것으로 고려대박물관 소장이다. 혼천시계의 구성품인 혼천의는 2007년 도입돼 현재 쓰이는 1만원권 지폐 뒷면 도안에 반영돼 있다. 사진 국가유산청
이 가운데 혼천시계는 1662년 조선 현종 때 송이영이 제작한 것으로 오늘날 통용되는 1만원권 지폐 뒷면의 한가운데 도안이 혼천시계의 혼천의 부분이다. 1930년 혼천시계를 실은 리어카를 끌고 다니던 고물상이 인촌 김성수를 찾아가 사달라고 하자 김성수가 당시 기와집 한 채 값을 주고 구입했다고 한다(『첨단×유산』, 고려대학교 공과대학 기획, 324쪽).
흥미롭게도 혼천시계를 먼저 주목한 쪽은 연희전문학교의 천문학과 교수 W.C. 루퍼스다. 1936년 『한국의 천문학』이라는 책에서 처음 소개해 서양에 알렸다. 안소정 학예연구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채 세월이 흐르다가 1960년 미국 예일대의 과학사학자 프라이스가 문의해 오면서 새삼스레 유물의 실체가 확인됐고 이후 전상운 교수(※한국과학사 연구의 선구자로 『한국과학기술사』 저술)가 집중 연구했다. 이와 함께 영국 케임브리지대 조지프 니덤 교수 등이 그 과학성을 극찬하면서 1985년 국보에 지정됐다”고 전했다.
연세대의 경우 국보 1건 2점, 보물 3건 3점이다. 유일한 국보는 손보기 교수가 소장했던 『삼국유사』로 유가족이 2013년에 기증했다. 『삼국유사』 파른본은 또 다른 국보 학산본 『삼국유사』(3, 4, 5권)의 전반에 해당하며 1394년(태조 3년) 판각·간행된 조선초기본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다. 2015년 보물로 지정된 후 2018년 국보로 승격됐고 2022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목록에 등재됐다.
사도세자 생모 묘지석이 연세대에 있는 까닭
현재 연세대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는 백주년기념관 뒤뜰엔 오래된 정자각과 한옥이 자리 잡고 있다. 목조한옥은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전신인 제중원(1885년 설립 당시엔 광혜원)을 재현한 것으로 실제 제중원의 위치와는 무관하게 상징적으로 지어놨다.
연세대박물관 뒤뜰부터 루스 채플 자리까지는 원래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묘(수경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왼쪽 정자각이 수경원의 부속 건물이고, 오른쪽 목조한옥은 세브란스병원의 효시인 제중원(광혜원)을 재현한 건물이다. 강정현 기자.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묘(수경원)가 있었음을 알리는 정자각. 강정현 기자
반면에 정자각은 각별한 사연이 있다. 이곳은 원래 사도세자(1735~1762)의 생모 영빈 이씨(1691~1764)가 묻힌 수경원(綏慶園) 터였다. 서울시의 대대적인 개발 과정에서 영빈 이씨 묘가 1970년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으로 이장됐고 연세대는 봉분이 있던 자리에 1973년 루스채플을 건축하기로 했다. 그런데 터를 파는 과정에서 미처 옮겨가지 않은 석함이 출토됐다. 안에는 청화백자로 된 영빈 이씨 묘지(墓誌) 두 벌과 명기(明器) 20점이 들어 있었다.(묘지란 망자의 이름과 행적, 신분 등을 기록한 묘문으로 주로 돌판에 새겨 무덤에 같이 묻는다. 명기란 내세를 위해 무덤에 함께 묻던 그릇, 인형, 생활 용구 등 기물을 말한다.) 연세대는 이를 모두 박물관 수장품으로 귀속시키고 수경원이 있던 자리임을 나타내고자 정자각과 비각을 보존해 왔다. 두 건물은 고종 대에 와서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면서 1900년 완공된 터라 조선 후기 목조 양식을 보인다.
앞서 고려대박물관의 현대미술실을 소개한 바 있지만 연세대에도 적잖은 근현대 미술품이 있다. 이 중 눈에 띄는 게 청전 이상범(1897~1972)의 대작 ‘춘경산수’와 ‘추경산수’다. 각각 세로 3m27㎝, 가로 2m10㎝로 현재 전해지는 이상범 작품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윤현진 학예연구사는 “이 작품들은 1959년 대강당을 지으면서 백낙준 총장(재임 1957~1960년)이 작가에게 직접 의뢰해 맞춤형으로 제작했다”면서 “대강당 양쪽 벽면에 걸려 있다가 보존 문제로 1990년대 초에 박물관으로 옮겨져 소장됐다”고 설명했다.
연세대박물관(백주년기념관) 1층 상설전시실에 걸려 있는 청전 이상범의 '추경산수'(왼쪽)와 '춘경산수'. 강정현 기자
6·25 참전 미군의 전리품…61년 만에 돌아온 연세 교기
6·25 전쟁 당시 미군 병사가 가져갔다가 61년 만인 2011년 모교 품으로 돌아온 연희전문학교의 교기(校旗). 깃발을 자세히 보면 교표의 십자가 문양이 애초엔 일자였다가 천을 덧붙여 십자가 문양으로 완성한 듯한 흔적이 보인다. 이는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0년대 일제에 의해 연희전문학교가 경성공업경영학교로 바뀌면서 교표에서 십자가를 금지하던 시기와 맞물린 것으로, 해방 후 연희전문이 재건하면서 다시 십자가로 원복시킨 흔적으로 추정된다. 사진 연세대박물관
연세대박물관 소장품 중 또 하나 눈에 띄는 건 61년 만에 모교 품으로 돌아온 연희전문학교의 교기(校旗)다. 6·25 전쟁 당시 연희전문학교는 1950년 9·28 서울수복작전의 격전지였는데 이때 참전했던 한 미군 용사가 2011년 그간 간직해온 교기를 연세대에 기증했다. 미 해병대 소대장으로 참전했던 르 피버(Raymond J. Le Fever)는 기증 당시 “서울수복 전투 중에 도망가는 인민군을 쐈는데 죽은 병사의 가방을 열어보니 깃발이 있었다. 기념품으로 가져갔는데 최근에야 이게 연세대 교기란 걸 알게 돼 돌려주는 것”이라고 학교 측에 말했다. 이 교기는 1940년대 초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연세 교기다. 학교 측은 흑백사진으로만 전해지던 ‘원조 교기’의 색채 배합을 실물을 기증받으면서 처음 확인했다고 한다.
순국지사 민영환의 유서·군복, 고려대 후손이 기증
지난 4월 일제의 침략에 죽음으로 항거한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의 유서(명함)가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 예고됐다. 유서는 일제가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5년 11월 30일 민영환이 자결하면서 남긴 것으로 가로 6㎝, 세로 9.2㎝ 크기다. ‘결고(訣告) 아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로 시작되는 유서에는 동포 형제를 향해 ‘죽어도 죽지 않는다(死而不死)’고 외치며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유서는 유족이 봉투에 넣은 채 보관하다 1958년 고려대박물관에 기증했다. 왜 하필 고려대였을까. 민영환의 손자 민병기(제9대 국회의원)가 1956년부터 1970년까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역임했기 때문이다.
2023년 국가등록문화유산에 지정된 '민영환 서구식 군복'. 웃옷과 바지, 모자, 견장 등 모두 14건 17점의 복식과 착용물이며 2005년 민영환의 순국 100주년을 맞아 유족이 고려대박물관에 기증했다. 사진 국가유산청
민영환 유족은 이후에도 자결 당시 핏자국에서 자라났다는 ‘혈죽’ 등 관련 유물을 기증했다. 2005년엔 순국 100주년을 맞아 그의 서구식 군복을 기증했다. 민영환의 군복은 웃옷과 바지, 모자, 견장 등 모두 14건 17점의 복식과 착용물로 1897∼1900년 제작으로 추정된다. 이 유품은 우리나라 서구식 군복의 초창기 형태를 보여주는 등 가치가 인정돼 2023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고려대 교우가 기증한 덕에 박물관이 소장하게 된 역사적 사료 중에는 유진오(1906~1987) 제헌헌법 초고도 있다. 우리가 제헌절로 기념하는 1948년 7월17일 공포된 대한민국 제헌헌법의 밑그림에 해당한다. 유진오는 1947년 가을부터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 조선법전편찬위원회의 헌법기초분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헌법을 집필했다. 1948년 5월 초 그간 작업해온 초안을 손질해서 전문을 빼고 본문만 조선법전편찬위원회에 제출하는데 이것이 유진오의 제1회 초고다. 유진오는 1952년부터 1965년까지 고려대 2·3·4대 총장을 지냈는데 그의 사후인 1999년 부인 이용재 여사가 이를 고려대에 기증했다. ‘이명래고약’을 대량 생산했던 명래제약의 창업주이도 한 이용재 여사는 고려대 의대 전신인 경성여의전을 졸업했다. 유진오 헌법 초고는 2008년 7월 1일 국가지정기록물 제1호로 지정됐다.
국가지정기록물 제1호인 유진오의 제헌헌법 초고(1948). 사진 고려대박물관
초창기 고려대박물관을 풍성하게 한 것은 1958년 신창재·박재표 소장 유물 기증이다. 당시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던 신창재는 박재표가 수집한 서화 및 도자, 골동품을 넘겨받아 소장하다가 고려대 유진오 총장 등의 권유로 기증을 결심했다. 신창재 기증품은 총 587점으로 20세기 전반기의 대표적 화가인 안중식·조석진·김응원·김규진 등을 비롯한 수십 명의 산수화, 인물화 및 사군자 그림들이 포함됐다. 고려대는 이 고서화 컬렉션을 바탕으로 훗날 근현대미술 수집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오세훈 서울시장 재산목록에 송영수 조각이 왜?
고려대학교 현대미술전시실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조각가 송영수(1930~1970)의 작품 '승화'. 사진 고려대박물관
고려대 현대미술실 입구엔 우리나라 ‘철 조각의 선구자’로 불리는 송영수(1930~1970)의 ‘승화’가 우뚝 서 있다. 1989년 송영수 유족이 기증한 것이다. 이를 포함해 고려대엔 송영수 작품이 5점이나 소장돼 있는데 이 중 ‘순교자’와 ‘새’는 1970년대 박물관에 근무하며 현대미술실 개관을 추진한 이규호씨가 구입했다.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나온 송영수는 모교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송영수의 가족 중에 ‘안암인’이 많다. 송영수의 부인 사공정숙은 고려대 수학교육과 교수를 지냈고 이들의 아들 송상기도 고려대 서반어학과 교수다. 딸 송현옥 세종대 교수도 고려대 출신인데, 남편이 오세훈 서울시장이다. 오세훈의 공직자 재산 신고 때 송현옥 교수가 물려받은 부친의 조각품도 목록에 오른 바 있다.
4·19 혁명 이끈 ‘피의 증언’ 나란히 등록문화유산에
“곤봉 엇개(어깨) 맞다”
“깡패에 다리 부상 7일 치료”
“머리 터지다”
“천일백화점 근처에서 깡패의 몽둥이로 후두부를 맞고 失神(실신)”
벽돌로 머리를 맞았다, 경찰봉으로 옆구리를 맞았다 등의 증언이 이어진다. 장소는 안암동, 천일극장 앞, 동대문서, 국회의사당 등 제각각이다. 이들을 기록한 글씨도 빨간 가로 쓰기, 세로 쓰기, 한자 혼용 등이 섞였다.
이들은 ‘4·19 혁명 참여 고려대 학생 부상자 명단’이라는 자료의 일부다. 1960년 4월 19일 전국적인 시위는 전날 벌어진 ‘4·18 고려대 데모’의 파급 효과였다. 명단은 4월 18일 학생들이 국회의사당까지 시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정치깡패의 습격을 받은 상황과 부상 정도를 학과·학년·번호·이름별로 꼼꼼히 작성한 초안 2종과 이를 정리한 정서본(1종)으로 이뤄졌다. 초안 1은 필체와 필기도구가 다양해 작성자가 여러 명인 것으로 보이고 초안 2는 한 사람의 글씨체다. 이들은 모두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0년 8월 등록문화유산이 됐다.
1960년 4월 18일 시내에서 가두 시위 중인 고려대 학생들. 이른바 ‘4·18 고려대 데모’에서 불붙은 전국적인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사진 고려대박물관
1960년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촉발된 4·19 혁명 당시 연세대 교정 내에서 시위 중인 학생들 모습. '학도여 깨여라(깨어라)'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든 맨 오른쪽이 58학번 정치외교학과 김병철 동문이다. 사진 연세대기록관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연세대에서도 은밀한 기록 작업이 있었다. 당시 연세대 정치학과 4학년생이던 김달중·안병준이 주축이 된 ‘4월혁명연구반’은 4·19 직후 서울과 대구·마산·부산 등의 시위 참가자·목격자 등을 만났다. 4월 23일부터 7월 초까지 계속된 면담은 총 185명을 아울렀으며 부상자·데모 사항·데모 목격자·연행자·사후수습·교수 데모 등 9건 195점의 기록으로 남았다. 이들은 면담자들에게 “10년간 비공개할 것이니 신변 위협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고 실제로도 지켰다.
이렇게 채집된 수기(手記) 역시 ‘연세대학교 4월혁명연구반 4·19 혁명 참여자 조사서’라는 이름으로 2020년 8월 등록문화유산이 됐다. 연·고대는 이렇듯 민주화 유산 경쟁마저 팽팽하다.
고려대 vs 연세대 박물관을 더 알고 싶다면
에디터
관심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