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혁 박기찬 이순기념문집 '부처님의 비서실장'이라는 내용 가운데 현암 성백천 선배님의 글을 여기에 싣습니다.
현암 성백천 선배님은 부산지구 수석부회장을 역임하셨고, 지금까지 오랜 세월동안 만혁 박기찬 선배님과 남다른 친분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이 분들은 불교청년회 원로 선배로써 불청의 살아있는 역사나 다름 없습니다. 세월의 흐름속에 기록되지 않은 채 불청의 역사들이 희미해지고 묻혀지기 십상인 이 때에 이 문집은 소중한 불청의 역사서로 자리매김할 것이라 봅니다.
이런 사람이 현재 살고 있습니다
성백천(전 부산예총 사무국장)
늘 건강하다며 살아 왔지요.
솥발산에서 생산되는 무공해 양질의 생수를 실컷 마시다 못해 그 물로 목욕을 할 정도니까요. 덤으로 좋은 공기 또한 자기 것이니까.
그런데 어느 날.
입원 소식을 듣고 달려갔던 곳이 부산대학병원 중환자실.
‘형님도 편찮으실 때가 있으세요?’ 하기엔 평소 팔팔한 기력을 상실한 채 생사의 기로에 있는 상태로 뇌 수술 전이었다. 의사 선생님의 특별 당부는 수술 전까지 무조건 ‘절대안정’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철없는 철부지였는지 세상살이를 통달한 도인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간호하는 형수님과 간호사들을 한국에서 제일 피곤한 사람들로 만들었다.
입원하면서 카메라는 왜 들고 왔는지!
중환자실 선후배 환자들게 카메라를 들이대며 온갖 포즈를 요청했고 그의 꿈 이야기를 할 때엔 정신이 반 이상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 분명했던 것은 한형석 선생님 1주기 추모제를 삼고문화회와 광복회의 공동 주관으로 열기로 하고 준비하시다가 갑자기 입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행사를 내몰라라 하실 분이 아니었다. 행사 관련기사를 찾느라고 신문에 열을 올리고 여기저기 연락 등등으로 잠시도 가만 있지 않으니 형수님과 의사를 비롯한 간호사들이 그야말로 반쯤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이런 사람이 현재 살고 있습니다.
1937년 음력 8월 5일. 박학선, 이옥금 두 분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군 대송리 평동마을에서 태어났다. 불알이 빨간 때(3살) 돛단배를 타고 서생을 출발, 영도 헌다리를 통과 남포동 선착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밤이었다.
멀리 천마산 아래 판잣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수 십층 빌딩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고 했다.
토성초등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 때 서생이 그리워 전학하여 4학년을 마치고 5학년 때 다시 ‘말은 제주도에서’처럼 청운의 꿈을 안고 토성초등학교로 컴백했다.
서생초등학교 시절 최형우(한 해 선배) 정치인과 축구를 비롯한 공놀이를 함께 한 경력이 있다.
자유당 시절 고교 대 민족관, 국가관을 나름대로 정립하고 미래의 주인공 청소년들이 건전해야 된다며 대각사에서 목정배(동국대) 교수와 더불어 조국 통일을 위한 혈맹을 27명과 함께 가졌다. 존경하는 이법화(전 법화종 종정) 큰스님의 영향으로 불교관을 확립하고 학생운동시 녹화소년대 22대, 대한소년단 불교화랑대 경남 3대 대장을 중,고교 시절 역임했다.
군 입대 전 1961년 송도에서 국내 최초의 요트사업을 했으며 군 제대 후 경남 보이스카웃트 관리부장을 역임하고 경남 양산군 하북면 답곡리 형제농장이 있는 삼덕마을에서 농촌4H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농촌 계몽 및 예술 문화 활동으로 마을 청소년들을 모아 연극 ‘옹고집’을 기획, 연출, 제작을 한 바 있다.
이런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1983년 당시 중부경찰서 정보과 최형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최형사는 시민단체 담당으로 평소 친분이 있는 터였다. 최형사가 전해주는 내용은 대티터널 지나서 야간에 교통사고가 발생했는데 눈 크고 미남인 삐쩍 마른 사람이 봉생병원 중환자실에 있으니 평소 마당발인 박기찬 선생께서 병원으로 와서 만나보자는 것이었다.
간호사를 통해 신상카드를 보니 ‘♂’표시만 되어 있다.
남자는 분명한데 누군가 살펴보니 부산문화예술인들에게 기인시인으로 통하는 이인영씨였다.
원만한 사건 처리 및 피해 보상처리는 역시 박기찬씨 그의 몫이었다.
70년대 초반 무명시인 이정한씨 또한 박기찬 선생의 도움으로 당감동 화장장에서 영원한 세상으로 갔다.
1982년 ‘조국 통일은 청년들의 피로 목탁을 치며 삼팔선 넘자’라는 슬로건 아래 대한불교청년회 부산지구 불교청년회원들로 하여금 3월 13일 해운의 날 때 동삼동 해양대학교 앞바다에서 물을 떠 부산에서 임진각까지 도보행군으로 3월 14일 출발하여 1주일 후인 3월 21일 도착해 임진강물에 합수 통일기원 대법회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박기찬 선생의 수많은 사연과 일화는 굳이 더 이상 표현하지 않더라도 함께 했던 모든 지인들께서 더더욱 잘 아시리라 믿는다.
첫댓글 육연발 만혁형. 신의를 중히 여기시는 분. 건강하소서
형제농원에서 열정에 문학사랑이 곁들여지니 무릉도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