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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 1. 큐티
시편 1:1 ~ 6
복 있는 사람
관찰 :
1) 복 있는 사람의 삶
- 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복 있는 삶은 악이나 죄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자유자재로 선을 택하고 악을 거부할 수 있는 삶이 곧 행복한 삶입니다. 이런 사람이 우상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부정을 거부하고 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불의를 거부하고 공의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불의에 속한 사람은 다릅니다. 불의에 속한 사람은 불의의 노예입니다. 불의의 노예가 된 사람은 선을 택할 자유가 없습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참되 자유(요 8:36)’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불의의 노예가 되어 참된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복을 누리지 못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 삶이 악화되는 과정을 살아갑니다. 악인은 처음에는 악한 ‘꾀’를 좇아 행합니다. ‘꾀’는 숨겨진 것들로 비밀리에 이행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처음 악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은 주로 비밀리에 악한 꾀를 좇아 걷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한번 악한 ‘꾀’를 좇아 걷게 되면 그 다음 그 ‘길’에 서서 공공연히 죄를 짓는 자리에까지 가게 됩니다. 이를 ‘자리’에 앉는다는 말로 시편 기자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악을 택하는 사람은 악한 길에 앉아있는 것처럼 악의 노예가 됩니다. 대개 이런 사람은 자신의 마음대로 악을 조금만 범하고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행실이 내리막길을 향해 달려가게 됩니다. 악인은 그 행실만 악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을 계속 가면 그 인격까지 타락하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악인”, “죄인” 및 “오만한 자”라는 말로써 도덕적으로 내리막길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거짓된 자, 불의한 자, 정함이 없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의의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간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소돔 사람의 악함을 설명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적극적으로, 습관적으로 악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만한 자”는 공개적으로 악을 공공연하게 행하는 자를 설명할 때 쓰인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집에서 살고, 아무리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아무리 많은 명예를 갖고 있다고 해도 그 인격이 악하고,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교만이 넘쳐흘러서 오만함을 나타내게 될 때 성경은 그가 복 없는 자라고 단정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인격의 소유자는 언제 악을 행할지 모르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명예를 맡길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께서 차지해야 할 마음의 공허를 메꾸기 위하여 하나님 이외 다른 우상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생활은 성경에서 말하는 복 있는 삶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2) 복 있는 삶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으로써 체험될 수 있다
-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삶”을 “여호와의 율법”에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자칫 율법이 거추장스러운 것, 속박, 정죄하는 요소 등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의 여호와의 율법은 “율법서”(토라)를 의미합니다. 좁은 의미로는 계명들이 되고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부분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부분들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항도 있으나 오히려 자유케 해주시고 복을 주시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율법서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가도 알려 주십니다. 복된 삶은 우리가 율법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더 나아가서 이에 순종할 때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악한 길로 들어서지 않고,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은 삶은 물론 거룩한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이야말로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의도했던 삶의 형태입니다. 우리는 에덴동산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여호와의 뜻을 순종함으로써 원래 하나님이 의도했던 복된 삶을 지금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데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성품이 변화하여 여호와의 뜻을 순종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시편 기자는 두 가지의 처방을 내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여호와의 율법서를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율법서를 즐거워한다는 말은 우리의 속 사람 전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며 그 하나님의 뜻에 회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여호와의 율법서를 주야로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좋지 않은 내용의 동영상이나 웹툰, 혹은 책들의 내용들을 자신의 머리 속에 채우는 사람들은 좋지 않은 삶을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율법서를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율법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중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 속을 조금이라도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그 아름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뜻을 좇아 살아가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복 있는 삶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결실을 맺음으로써 입증된다
- 3절.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 나무의 종류에는 열매가 열리는 것도 있고 열매가 열리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반드시 성령의 열매 혹은 육신의 열매 둘 중에 한 가지 열매를 맺고 삽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공급원이 되었을 때 우리의 삶이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나무가 시냇가에 뿌리를 내려서 사시사철 싱싱하게 자라고 열매를 맺듯이 우리도 하나님께 우리 인격의 뿌리를 내리면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첫째,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단지 한 계절에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사시사철 다 열리는 열매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한두 개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풍성히 열립니다. 기쁠 때만, 축복 받았을 때만, Q.T.할 때만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생활 전반을 통하여 열매가 열리는 생활은 실로 복된 생활일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고자 했던 그 삶 그대로를 의미합니다. 둘째, 약동하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나무의 경우, 풍성한 열매가 열릴 때 그 줄기나 잎도 같이 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공급원이 될 때 열매만 열리지 않고 나의 인격 자체도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흔들리지 않는 안정성이 있습니다. 나무가 성장하고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것도 중요하나 그 나무가 태풍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는 안정성을 갖는 것은 더욱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인격이 여호와께로부터 그 양분을 공급받을 때 우리는 어떤 세파에도 뿌리가 뽑히지 않는 강인함을 유지하게 됩니다. 복된 삶은 여호와께 우리 인격의 뿌리를 내림으로써 풍성한 열매와 약동하는 생명력과 흔들리지 않는 안정성이 나타날 때 입증됩니다. 그런 사람에 대하여 본 절은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요약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삶”입니다.
4) 복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
- 4절.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4 ~ 6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복되지 못한 삶의 비인격성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않음이여”라는 표현은 좀 약한 표현입니다. 원어를 직역하자면 “악인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혹은 “결코 그렇지 않다”라는 강한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악인들의 삶이 그렇게 복될 수 없는 삶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는 악인들의 삶이 마치 “바람에 나는 겨”와 같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겨”는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있는 것으로서 가벼워서 바람이 불면 사방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겨와 같은 인생은 껍데기 뿐이요, 무가치한 것입니다. 텅 빈 것이고 알맹이가 없으므로 허무할 뿐입니다. 이런 인생은 바람에 따라서 좌우되고 영구성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악인은 비록 인간의 기준에 따라서는 복된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저 무가치하고, 허무하고, 영구성이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복 되지 못한 삶을 사는 자들의 종말
- 5절 ~ 6절.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 시편 기자는 악인들을 계속 의로운 무리로부터 분리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은 자신이 의인을 피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실은 하나님께서 서서히 이들을 제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에는 최종적인 심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될 것입니다. 악인들은 영원한 세계에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현세상과 생애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명이 끝나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틀렸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후의 세계가 존재하며 겨와 같은 자들은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악인은 세상에 살 때에도 복되지 못하나 죽은 후에는 더욱 복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악인의 생애를 망할 것이라 평가하십니다.
가르침 :
1) 인생은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복 있는 자의 삶의 길과 복 없이 망하는 자의 삶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철학이나 종교의 경전에서도 언급하는 바이기는 합니다만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기에 반드시 들어야 하고 깨달아야 하는 인생의 원리입니다. 이것을 망각하고 사는 것 자체가 복을 잃어버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2) 복 있는 자의 삶은 사실은 하나님과의 무너진 관계가 회복된 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악인들의 길,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들의 길을 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기를 원하시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3) 복 있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열매를 맺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형통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존재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세상의 관점으로서의 시간과 공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을 따르게 되고, 결국은 열매를 맺는 존재가 됩니다. 그것을 사람이 계획하고 추구함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루실 것임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4) 복 있는 자의 삶이 아닌 인생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무가치하고, 허무하고, 영구하지 못한 삶을 살 뿐입니다. 한 번 사는 인생이 가장 가치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미암는 형통하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5) 복 있는 삶을 살지 못한 자들은 결국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자기 판단과 생각대로 살아가기에 결국 그 방향이 없이 살아가는 삶의 형태는 어그러지고 무너지게 될 뿐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제시해 주시는 길이 바른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의 길이고, 소망스러운 길인 것입니다.
적용 :
1) 복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2024년에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복이 주렁주렁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 길이 무엇인지 나이를 한 살 더 먹은 만큼 알아가게 되고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올 한 해 더욱 그 가치를 알아가고 열매를 맺어가도록 하겠습니다.
2)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악인들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결코 가까이 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 주시는 지혜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매사에 함께 해 주시고, 악인들의 꾀와 죄인들의 길과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서 저를 멀리하도록 이끌어 주시길 간구드립니다.
3) 2024년 망하는 길이 아니라 풍성한 열매 맺는 길을 걷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고 선하게 인도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