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중독 사회·한국이 잃어버린 것 [기고] / 9/28(토) / 조선일보 일본어판
폭염과 열대야에 시달리던 올여름도 이제는 끝을 맺으려 하고 있다. 더위를 이겨낼 수 있었던 일등공신은 대부분 에어컨이다. 하지만 며칠 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8월 전기요금 고지서에 담긴 방대한 냉방비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치권이 전기요금 포퓰리즘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전력산업의 구조적 문제는 외면한 채 역대 모든 정권이 전기요금을 싸게 책정해 놓은 결과다.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국내 가구당 에어컨 보급률은 2023년 현재 98%로 전기밥솥보다 높다. 1세대당 몇 대를 두고 있는 경우도 많아, 실제로는 이 수치를 다소 밑돌 것이다. 어쨌든 보유율이라는 말 대신 보급률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에어컨은 더 이상 사치품이 아닌 생필품이 됐다. 일반 가정은 물론이고 공장과 사무실, 학교, 호텔, 음식점, 상가, 문화시설, 자동차, 심지어 공중화장실과 엘리베이터에 이르기까지 에어컨의 냉기가 감돌고 있다. 번화가에서는 「열고 있는 냉방」이 보통이다. 템플스테이(한국 불교의 수행정신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나 고택스테이(고택에서 숙박하며 여행을 즐기는 것)도 에어컨 없이는 손님이 오지 않는다.
물론 이는 세계적인 풍조다. 짧은 여름과 낮은 습도, 신기술에 비협조적인 고풍스러운 건축물, 도시의 외관을 아름답게 유지하는 실외기 규제, 비싼 전기요금, 등을 이유로 오랫동안 에어컨을 무시했던 유럽 국가들도 지구온난화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노에어컨 올림픽을 내건 프랑스도 결국 휴대용 에어컨의 자비 반입을 허용했다. 중국 인도 동남아 중동에서도 에어컨 바람이 불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 10억 대가 설치돼 있으며 인구 7명당 1대라는 통계도 있다.
공기의 온도와 순환, 순도, 습도 등을 제어하는 현대식 에어컨은 본래 인간을 위해 탄생한 것이 아니다. 20세기 초 미국 뉴욕의 한 인쇄공장이 고온다습한 기후 때문에 제품 관리에 애를 먹는 과정에서 개발됐다. 처음에는 인공 냉방에 대한 거부감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창시자인 윌리스캐리어는 자신의 이름을 딴 에어컨 회사를 차리면서 쓰임새를 산업현장을 넘어 생활 전반으로 확대했다. 이윽고 인류사회는 에어컨 등장 전후로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1998년 타임지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 명으로 윌리스 커리어를 선택했다. 열대우림에 선진국을 만든 리콴유 싱가포르 초대 총리는 에어컨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치켜세웠다.
에어컨에는 장점이 많다. 온열질환 예방을 비롯해 산업 발전과 기술 혁신, 거주 가능 면적 확대, 의료 및 보건 증진 등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하지만 부산물도 적지 않다. 각종 냉방병이 대표적이지만 친환경 건축정신을 떨어뜨리고 도시 과밀과 난개발을 진행한다는 점에서도 해악을 부인할 수 없다. 무엇보다 더위퇴치와 관련해 에어컨은 자기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기후위기 시대에 생존 필수품으로 꼽히긴 하지만 사용할수록 그것을 가속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점은 기술의 진보에 의해 언젠가는 극복될지도 모른다. 문제는 오히려 사회문화적 차원에 있다. 에어컨은 인류의 보편적 숙원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특정 시공간의 사회적 필요성에 따라 '역사적으로' 등장했을 뿐이다. 에어컨에 의해 인류는 어느새 외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순종적인 신체로 개조됐다. 그러다가 마침내 인류는 스스로 에어컨 중독을 향유하고 소비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냉방 자본주의'는 쾌적한 노동 및 생활환경을 제공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효율성과 성과주의를 강박하는 사회시스템이다(Eric Dean Wilson, After Cooling: On Freon, Global Warming, and the Terrible Cost of Comfort). 에어컨이 궁극적으로 조절하는 것은 공기가 아니라 사람이다(Stan Cox, Losing Our Cool: Uncomfortable Truths About Our Air-Conditioned World).
에어컨 시대를 맞아 우리는 여름 특유의 계절감을 잊고 자연을 추상적으로 경험하게 됐다. 예전에는 너무 더울 때 낮잠을 자거나 일찍 퇴근하거나 며칠 일을 쉬곤 했다. 땀을 흘리는 것도 인생의 중요한 일부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더위를 이겨낼 심리적이고 생물학적인 내성을 잃어가고 있다. 게다가 에어컨은 사회적 관계를 단절한다. 예전 여름날은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늘이나 마당, 옥상이나 골목에 모여 더위를 함께 이겨냈다. 그러나 에어컨 천국의 집콕 방콕 문화는 사람들을 섬처럼 분리한다. 1995년 시카고에 기록적인 폭염이 닥쳤을 때 생사를 가른 것은 에어컨 설치 여부가 아니었다. 핵심은 사회적 고립과 지리적 단절(Eric Klinenberg, Heat Wave: A Social Autopsy of Disaster in Chicago)이었다. 에어컨이 없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현실을 알고 에어컨을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서울대 정상인 명예교수(사회학)
https://news.yahoo.co.jp/articles/5781fcd72ded51a4a2956c356575d4fe9796c5a3?page=1
エアコン中毒社会・韓国が失ったもの【寄稿】
9/28(土) 17:05配信
朝鮮日報日本語版
(写真:朝鮮日報日本語版) ▲イラスト=朝鮮デザインラボ・Midjourney
猛暑と熱帯夜に悩まされた今年の夏も、そろそろ終わりを告げようとしている。暑さを乗り切ることができた立役者は、ほとんどの場合でエアコンだ。しかし、数日後にはその代価を支払わなければならなくなる。8月の電気料金告知書に盛り込まれた「膨大な冷房費」のことだ。それでも幸いなのは、政界が「電気料金ポピュリズム」に陥っているということだ。電力産業の構造的な問題にはそっぽを向いたまま、歴代の全ての政権が電気料金を安く設定しておいた結果だ。
「韓国ギャラップ」の調査によると、韓国国内の1世帯当たりのエアコン普及率は2023年現在で98%と、電気炊飯器よりも高い。1世帯当たり数台を置いているケースも多く、実際にはこの数値を多少下回るだろう。ともかく「保有率」という言葉に代わって「普及率」という言葉が出回るほど、エアコンはもはやぜいたく品ではなく、生活必需品となった。一般家庭はもちろんのこと、工場やオフィス、学校、ホテル、飲食店、商店街、文化施設、自動車、さらには公衆トイレやエレベーターに至るまで、エアコンの冷気が漂っている。繁華街では「開けっ放しの冷房」が普通だ。「テンプルステイ」(韓国仏教の修行精神が体験できるプログラム)や「古宅ステイ」(古宅に宿泊しながら旅行を楽しむこと)もエアコンなしでは客が来ない。
もちろん、これは世界的な風潮だ。短い夏と低い湿度、新技術に非協力的な古風な建築物、都市の外観を美しく保つ室外機規制、高い電気料金、などを理由に長い間エアコンを無視してきた欧州諸国も、地球温暖化以降、事情が変わった。「ノーエアコン」五輪を掲げたフランスも結局、携帯用エアコンの自費搬入を許可した。中国やインド、東南アジア、中東でもエアコンブームが巻き起こっている。現在、全世界に10億台が設置されており、人口7人当たり1台という統計もある。
空気の温度や循環、純度、湿度などを制御する現代風のエアコンは、本来人間のために誕生したものではない。20世紀初め、米国ニューヨークのある印刷工場が高温多湿な気候のために製品管理に苦労した過程で開発された。初めの頃は、人工的に冷房することに対する拒否感が否めなかった。しかし、創始者であるウィリス・キャリアは、自分の名前から取ったエアコン会社を立ち上げ、使い道を産業現場を超え、生活全般にまで拡大した。やがて人類社会は、エアコン登場の前後で全く異なる様相を呈することとなる。1998年、タイム誌は20世紀で最も影響力のある100人のうちの1人としてウィリス・キャリアを選んだ。熱帯雨林に先進国を創り上げたシンガポールの李光耀・初代首相は、エアコンを「人類史上最も偉大な発明品」と褒めたたえた。
エアコンには長所が多い。温熱疾患の予防をはじめ、産業発展と技術革新、居住可能面積の拡大、医療や保健の増進などに多大な貢献を行っている。しかし、副産物も少なくない。各種の冷房病が代表的だが、環境に優しい建築精神を低下させ、都市過密や乱開発を進めるという点でも害悪は否めない。何より暑さ退治に関して見ると、エアコンは自己矛盾を内包している。気候危機の時代における生存必需品とされてはいるが、使えば使うほどそれを加速化しているためだ。
これらの欠点は、技術の進歩によって、いつかは克服されるかもしれない。問題はむしろ社会文化的レベルにある。エアコンは人類の普遍的宿願を解決したのではなく、特定の時空間の社会的必要性に応じて「歴史的に」登場しただけのことだ。エアコンにより、人類はいつの間にか外気の影響を受けない従順な身体に改造された。そうこうしているうちに、ついに人類は自らエアコン中毒を享有し、消費するに至った。いわゆる「冷房資本主義」は、快適な労働、および生活環境を提供しつつ、それに相応する効率性と成果主義を強迫する社会システムである(Eric Dean Wilson, After Cooling: On Freon, Global Warming, and the Terrible Cost of Comfort)。エアコンが究極的に調節するのは空気ではなく、人なのだ(Stan Cox, Losing Our Cool: Uncomfortable Truths About Our Air-Conditioned World)。
エアコンの時代を迎え、われわれは夏特有の季節感を忘れてしまい、自然を抽象的に経験するようになった。以前は、あまりにも暑い時に昼寝をしたり、早く退勤したり、数日仕事を休んだりしたものだ。汗を流すことも人生の大切な一部だった。しかし、今日われわれは暑さを乗り切る心理的で生物学的な耐性を失いつつある。さらに、エアコンは社会的関係を断絶する。かつての夏の日は外に向かっていた。人々は日陰や庭先、屋上や路地に集まって暑さを共にしのいだ。しかし、エアコン天国の「巣ごもり」、「部屋ごもり」の文化は、人々を島のように分離する。1995年、シカゴに記録的な猛暑が襲った際、生死を分けたのは、エアコンが設置されているかどうかではなかった。鍵となったのは、社会的孤立と地理的断絶だった(Eric Klinenberg, Heat Wave: A Social Autopsy of Disaster in Chicago)。エアコンのなかった時代に戻るのは難しい。しかし、少なくともこうした現実を知った上でエアコンを使おうではないか。
ソウル大学チョン・サンイン名誉教授(社会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