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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는 ‘십여시(十如是)’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여시’는 ‘방편품’에서 또 하나의 요점입니다.
‘십여시’란? 여시상(모양), 여시성(성질), 여시체(주체), 여시력(능력), 여시작(작용), 여시인(원인), 여시연(조건), 여시과(결과), 여시보(영향), 여시본말구경등(궁극에 있어서는 모두 평등함)을 말합니다.
이 십여시는 산스크리트 원전(原典)에는 찾아볼 수 없으며, 구마라집이 역경 과정에서 삽입한 것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이 대목에 대한 원전(梵本, Samskrta)을 참고삼아 여기에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래만이 모든 현상을 올바로 알고 있다. 곧 ‘그들 현상이 무엇인가, 그들 현상이 어떤 것인가, 그들 현상이 어떤 특징을 가졌는가, 그들 현상이 어떤 본질을 가졌는가’ 하는 것이다.‘그들 현상이 무엇이며, 어떤 것이며, 무엇과 비슷하며, 어떤 특징이 있으며, 어떤 본질을 가졌는가’하는 것을 여래만이 알고 있다. 여래만이 모든 현상을 명백히 깨달음 분이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법화경>은 참다운 깨달음의 길로 우리들을 인도하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깨달을 바를 그대로 전하려고 노력하셨지만, 언어의 부적합으로 말미암아 그 목격한 것을 이거다 저거다 하고 드러내 보이실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통찰로 인해 목격 또는 체험된 것이 어떤 물질적인 현상이 아니고 다만 어떤 상태[ta]였기 때문에 부득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오직 제자들로 하여금 어떻게 하더라도 그 실상을 자기와 동일하게 깨닫게 할 수 있도록 애써 설명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8만 4천의 갖가지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는 이 다섯 가지의 '무엇[何]’을 밝히신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라는 길[道]을 설하신 것입니다. 일찍이 이 가르침을 두루 섭렵한 구마라집은 <법화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 경전 전체 흐르고 있는 평등사상이 그대로 부처님의 근본 사상임을 간파한 나머지 나름대로 이 십여시를 삽입하게 된 것이나, 부처님의 뜻에 아주 부합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했든 이 ‘십여시’의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십여시’의 순서를 뒤집어서 ‘본말구경등(궁극에 있어서는 평등한 공)의 존재(실재 또는 절대)는, 기필코 인(因:원인) - 연(緣:조건)의 법칙에 따른 과(果:결과)와 보(報:영향(응보)로서, 상(相:모양)과 성(性:성질)과 체(體:주체)와 역(力:능력)과 작(作:작용)을 가진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라고 해석하면, 거기서 우리들은 인생의 커다란 교훈을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로, 현상으로서 나타난 우리들에게는 제각기 개성(個性)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각기 다른 상-성-체-역-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 평등한 공성으로 생겨난 것이므로 결코 고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쪽으로도 유동-변화될 수 있는 불확정적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걸핏하면 자기의 개성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체념을 섞어 뇌까리고 있지만,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 어떤 원인(因)과 조건(緣)만 주어지면 거기에 알맞은 결과(果)나 영향(報)이 나타나는 것으로, 인간성이라고 하는 것도 변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성역동(生成力動)인 것입니다.
다음은 ‘일념삼천(一念三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 가진 마음의 가능성(불확정적)에 따라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할 수도 있고, 지옥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천태대사 지의(智顗)는 확대 해석하여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사람의 마음가짐 하나 속에 삼천의 세계가 들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이(理)의 일념삼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념삼천’에는 ‘이(理)의 일념삼천’과 ‘사(事)의 일념삼천’이 있는데,
‘이(理)의 일념삼천’에 의하면 우리들의 한 생각(一念)에는 3천의 세계가 있다고 합니다.
즉, 우리의 마음에는 열 가지의 법계(十法界)가 있고, 이 열 가지의 법계 하나하나에는 또 각각 열 가지의 법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를 십계호구(十界互具)하고 합니다.
여기에서 십계에 대하여 잠간 언급하겠습니다.
십법계(十法界)란? 위로부터 부처님, 보살, 연각, 성문 - 사성(四聖)이 있고, 육도(六道)인 천상, 인간, 수라, 아귀, 축생, 지옥을 합하여 십법계라 합니다.
그러므로 10법계에 또 10법계를 곱한 것이 되므로 100법계가 되며, 이 하나하나의 법계에 각각 10여시(如是)가 있으므로 1,000여시(千如是)가 됩니다. 이 천여시에 3세간(三世間)이 있으므로 3,000여시가 되는 겁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단 한 생각 속에는 3,000의 여시가 내포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역시 삼세간(三世間)에 대하여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가 오음세간(五陰世間)입니다. - 우리 개인의 마음과 마음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 관계의 세상, 좁은 의미의 생활환경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둘째가 중생세간(衆生世間)입니다. - 중생이 함께 모여 생활하고 있는 사회(또는 국가)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셋째가 국토세간(國土世間)입니다. - 그 사회나 국가가 간의 관계(좋은 사이이든, 싸움하는 사이이든 국가간의 사이, 사회(단체)간의 사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우리들 마음에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생각(일념)에 까지 이 삼천의 종횡관계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일념삼천’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저기 오는 남자는 보기 싫은 표정을 짓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문뜩 떠올랐다고 합시다. 또는 ‘저 담장의 꽃은 예쁘구나.’라는 마음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그러한 ‘생각’을 분석해 보면 자기 자신이 윤회하며 멀고 먼 과거에서 현재까지 거쳐 온 길이라는 종적인 영향과, 타인이나 사회나 그 밖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사물로부터 받은 횡적인 영향이 모두 남김없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 생각에는 지옥으로 떨어질지 모를 성질도 포함되어 있고,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성질도 포함되어 있으며, ‘보기 싫다’고 하는 생각에도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성질이 포함되어 있고, ‘예쁘다’고 하는 생각에도 지옥으로 떨어질지도 모를 성질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면, 왠지 불가사의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절대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닙니다. ‘보기 싫은 표정이다’고 하는 생각이 ‘후려갈기고 싶어진다.’고 하는 생각으로 발전하면 곧 지옥이지만, ‘이것은 역시 나의 수행이 부족한 탓이다, 보기 싫다고 느끼는 것의 나의 마음에 『보기 싫다』고 하는 씨앗이 있기 때문이다. 좀더 수행에 정진하여 이 번뇌의 씨앗을 없애야겠다.’고 깨닫는다면, 이는 이미 독각(獨覺:연각)의 경지입니다.
그리고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은 반드시 마음이나 생활에 큰 결함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저와 같은 사람을 한사람이라도 많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라고 마음의 결정을 굳건히 한다면, 그것이 곧 보살의 경지이며, 부처님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또 ‘저 담장에 핀 꽃은 예쁘다.’하고 생각했을 때, 무심코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것은 천지에 용해되어 버린 성자의 경지입니다만, ‘저 꽃을 한송이 꺾어가서 내 책상 위에 꽂아 놓자’고 생각했다면, 조금씩 아귀도(탐욕)에 떨어지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며, ‘어떤 부자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렇게 뼈 빠지게 일하는데, 저 인간은 담장에 가득 장미꽃으로 꾸며놓고 저렇게 희희낙락 인생을 즐기는구나…….돼지 같은 놈!’하면서 화를 낸다면 이것은 이미 완전한 지옥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념삼천’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은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만, 이 법칙을 오직 머리 속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이(理)의 일념삼천’이라 하며 아직 진정으로 나를 구하고 남을 구하는 힘으로는 성장하지 못한 것입니다.
남을 구하기는커녕 그 이론에 얽매여 생각마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결론을 못 내려 괴로워하다가 결국 노이로제에 걸리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가르침을 대법하여 밝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첫째 이 가르침은, ‘우리 인간이 위를 향해서도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아래를 향해서도 무한히 추락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확고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행해 간다면 반드시 부처가 될 수 있다’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의 형용할 수 없는 큰 희망이요, 나갈 방향입니다.
둘째, ‘우리 인간을 비롯한 우주의 일체 만물은 『전체』를 떠난 『개인』이란 없고, 모두가 그물의 망과 같이 서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자신만이 구제받는 것은 결코 진정한 구제가 아니다.’하는 것을 이 가르침에 의해서 확실히 깨닫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상 두 가지를 머리만이 아닌 몸 전체로 이해한다거나, 혼으로 이해한다거나, 어쨌든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저절로 자신을 성장시키고, 남을 구하는 행동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을 ‘사(事)의 일념삼천’이라 하며, 이것이 진정한 ‘일념삼천’의 의의입니다.
‘사(事)의 일념삼천’은 일본의 일연대사가 새롭게 주장한 것으로, 앞에서 말한 우리들의 오직 한 생각으로 3천 대천세계가 만들어진다는, 이른바 ‘자기는 아무리 애써도 변치 않는다.’라는 생각에서 ‘아니다, 무엇으로라도 변할 수 있다. 훌륭한 인격자나 부처님도 될 수 있다’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들의 가슴속에서 ‘어디 해보자’고 하는 희망에 찬 커다란 결의가 용솟음치게 될 것이라는 사상입니다.
이것은 천태대사의 ‘이(理)의 일념삼천’보다 한 걸음 진보한 생각으로 <화엄경(華嚴經)>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사상과 <원각경(圓覺經)>의 ‘무변허공(無邊虛空)이 각소현발(覺所顯發)한다.’는 말과 맥락을 함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변허공(無邊虛空)이 각소현발(覺所顯發)한다.’ - 무변허공이 깨달음에서 현발한다. 즉 나툰것이라는 뜻으로 무변허공보다 더 크고 무한 광명으로 빛나는 불신이기에 그것은 오직 깨달음에 의해 정체를 드러냅니다.
부처와 조사가 이구동성으로 설하신
중생이 곧 부처요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차별 없음을
굳게 믿고 생활하는 가운데
우리들의 삶은 법계에 충만한
부처의 마음과 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결의와 더불어 ‘십여시’의 가르침을 알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지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표면에 나타난 개성의 배후에 있는 평등한 불성[여래장(如來藏)], 즉 실상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쓸모없는 사람이다’ 또는 ‘구제불능인 인간이다’하고 경멸하고 단념했던 마음이 바뀌어서 ‘저 사람도 부처님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구나.’하는 인간 존중의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인간존중’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재로 여기까지 이르지 못하면 참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참다운 인간 존중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 미혹하여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나 또는 괴로움에 빠져 있는 사람을 보게 될 때, 은연중 그 사람이 ‘참다운 자기 자신’을 깨닫도록 도와주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참다운 인간의 길’ 즉 부처님이 되는 길을 손과 손을 마주 잡고 걷고자하는 깊은 우애의 정이 철철 솟아오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마음이며 자비심입니다.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이 보살의 마음을 일으켜서 보다 많은 사람을 보살의 길로 인도함으로 말미암아 인간 세상은 향상되어갈 것입니다.
이 길 밖에는 참다운 이상사회 건설의 지름길이 없으리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방편품 끝으로 <법화경>의 사구게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 모든 것은 본래부터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 적멸(寂滅)한 것이니라.
불자행도기(佛者行道己) 불자야, 도를 행하면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 내세에는 부처가 되리라.
여기서 주의할 점은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의 ‘내세(來世)’인데, 이것은 결코 ‘죽은 후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점차 수행을 쌓아 가면, 언젠가는 성취하리라.’라는 의미입니다.
<법화경>의 가르침은 ‘깨달으면 이 몸이 곧 부처이고, 이 세상이 곧 적광도(寂光土)이다’라는 가르침입니다. 죽지 않으면 극락에 갈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으며, 극락도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 있다고 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일대사 인연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모든 중생들을 부처님과 같은 경지로 이끌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고구정령하게 우리들을 이끌어 주신 위대한 분이십니다.
이것으로 방편품 해설을 마치고 이 의미를 잘 생기며, 원문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방편품의 삼매에서 일어나시어 법을 찬탄하신 대목과 삼지삼청하는 대목까지 원문을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시간에는 묘법을 바로 설하신 대목을 마저 올려 방편품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첫댓글 너무 감사합니다 법화경을 독송하고 있는데 깊이 있는 말씀주셔서 가슴속에 새기면서 기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