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그리스도와 화평을 누리자
롬 5:1-11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롬 5:1-11 /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자라는 인정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참다운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가장 높은 특권을 가진 자리에 오르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실 모든 계획이 실제로 이루어져 나가는 것을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어떤 어려운 문제와 곤경에 처했을 때도 그것들이 가져다 줄 좋은 결과를 생각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시련은 오히려 우리에게 인내를 배우게 하고 4) 인내는 강인함을 길러 주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희망과 믿음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것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5) 그렇게 되면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모든 일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극진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가슴속에 채워 주시는 까닭에 우리는 이 따뜻한 사랑을 어디서나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6) 우리가 피할 길 없는 궁지에 빠져 있던 바로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당신에게는 아무 쓸모도 없는 우리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7) 설령 우리가 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입니다. 8) 그런데도 죄인인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대신 죽어 하나님의 그 깊은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9)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도 이렇게 피흘려 주셨으니 우리를 죄 없다고 선언하신 지금에 와서는 얼마나 더 많은 놀라운 일을 해주시겠습니까?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장차 올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10)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도 그 아들의 죽음으로 하나님께로 되돌아오게 하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가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는 지금에야 얼마나 더 큰 복이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겠습니까! 11)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친구로 만들어 주려고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진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누리게 될 축복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1-4) 모든 사람이 죄인이므로 자신의 힘으로 의롭게 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게 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 은혜에 들어가는 자의 삶에는 여러 가지 놀라운 변화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죄로 인해 세상과는 화평을 이루고 하나님의 원수 되었던 자들의 상태가 변화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도리어 세상과는 원수된 상태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존전에 서 있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의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그 환난을 인내로, 인내를 연단으로,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것을 알고 그것을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5-6) 세상은 이 소망을 가지고 사는 자들을 어리석다고 말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흔들림 없이 이 소망을 믿습니다. 이는 모든 것을 이루어내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부으실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놀라운 것이어서 우리의 상태가 연약하고 비록 경건치 못할 지라도 우리를 살리시는 소망입니다.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7-11) 인간사에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자는 드뭅니다. 상대가 선한 사람일지라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놀랍다는 것입니다. 죄인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죽이기까지 한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여 주시고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서 화목된 관계가 되게 하신 사랑은 그의 피, 즉 희생으로 말미암은 사랑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에 대한 확증을 입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매일 또한 매사를 세상으로 말미암는 삶을 거절합니다.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삶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은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적용: 당신은 자신을 죽이면서까지 당신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신 우리 하나님의 사랑을 순간순간 확인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입니다. 예배와 기도를 통해 그분과 교제하기를 기뻐하며, 그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는 자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하나님과 화목하는 자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 설 교 >
화평을 향유하라
로마서 5:1-5 / 이정익 목사
어느 교회에서 고난주간에 세족식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오른쪽 발부터 씻어야 하느냐 왼쪽 발부터 씻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은 문제가 결국 커져서 갈등이 발생하고 그 갈등은 마침내 교회 분열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른발부터 씻어야 한다고 강조한 파가 교회를 나갔습니다. 나가서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그 교회 이름을 오른발 교회라고 붙였다고 합니다. 오늘은 가는 곳마다 불화와 갈등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갈등의 원인을 보면 이렇게 하찮은 문제들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갈등이나 불화는 갈등으로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마침내 조화를 깨고 화평을 깨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잃고 난 후에 후회합니다.
우리들이 믿음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주어지는 복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믿음은 내가 가지려고 노력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싶어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믿음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큰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최고의 복을 받았고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들을 상속받는 삶을 말합니다. 그때 우리는 내 삶에서 가치관의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 때부터는 내 입장보다 하나님 입장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중심을 이해하고 따르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나는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을 바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의 가치관이 변화했기에 그로서 불가능한 일도 실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또 하나의 선물은 화평입니다. 1절을 보면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은 화평입니다. 사람들은 이 화평의 중요성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대부분 잃고 난 후에 후회하고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전쟁이 난 후에야 평화를 알게 됩니다. 잘 나가던 회사가 부도가 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건강하던 사람이 어느 날 병이 발병하여 중환자실에 들어가 봐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러면 화평은 무엇입니까?
화평
화평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적인 화평입니다. 이를 에이레네라고 말하는데 이는 영적 화평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되면 이 화평이 주어집니다. 그러면 내 안에 이 평안와 화평과 평강이 자리잡게 됩니다. 이것이 에이레네의 평강입니다. 또 하나는 외적인 평화로 샬롬입니다. 샬롬은 유대인들의 인사말입니다. 각 나라마다 그 나라의 인사말이 있습니다. 그 인사말은 그 나라의 환경, 염원, 역사, 문화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한때 “식사하셨습니까?”, 혹은 “진지 잡수셨습니까?” 라는 말을 인사말로 했었습니다. 지금도 가까운 이웃을 만나면 “밥 먹었어?” 하고 인사를 하기도 합니다. 우리민족은 한때 밥 먹고 사는 것이 어려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하루 밥 먹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안녕하십니까?”가 인사말이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도 평안한 날을 살아온 지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녕을 우선했습니다. 그 결과 “안녕하십니까?” 라는 인사말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샬롬이 인사말입니다. 샬롬은 “Peace be with you” 즉 “화평이 당신과 함께” 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평화입니다. 이스라엘은 현재 약 700만명의 인구가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인구가 2억명이 넘는 아랍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운명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지난 4천년 역사가운데 3천년이 억압과 압제와 포로생활로 이루어졌습니다. 항상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인사말이 샬롬이 되었을 것입니다.
화평을 누리자
그런데 본문에서는 화평을 누리라고 말씀합니다. 화평을 누리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화평을 향유하라는 말입니다. 향유하라는 말은 즐기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물질은 즐겨야 뜻이 있습니다. 즐기라는 말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즐기라는 말은 많이 쌓아놓고 바라만 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물질은 많이 쌓아놓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오히려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오늘은 부동산 거지가 있다고 합니다. 땅은 많은데 팔리지 않아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금은보석이 많아서 집에 두기가 위험하니까 은행 금고에 넣어둡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 또는 한 달에 한번 면회를 가서 금고 문을 열어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은 쌓아두면 부작용이 나타나게 됩니다. 반드시 도적이 틈을 탑니다. 그런데 불의한 돈이기에 많은 돈을 털려도 신고를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도적들이 마음 놓고 부잣집을 터는 것입니다. 또 물질이 많으면 자식들이 심각한 불화를 겪게 됩니다. 현재 모 재벌 그룹의 형제간 반목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 좋은 형제가 원수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앞으로 그 두 형제가 화해하고 전처럼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차라리 재물이 적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랬다면 부자간에 형제간에 우애를 지킬 수 있었을 것인데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물질을 향유하고 즐길 수 있습니까? 즐기라는 말은 막 쓰고 사치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즐기는 것은 구제하는 것이고 기부하는 것이고 나누는 것이고 장학금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돈을 받고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신이 즐기고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람과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즐기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더 주고 싶고 더 나누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모습입니까? 무엇을 얻어서 그런 행복이 주어지겠습니까? 이 행복은 쌓아놓고 좋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행복입니다. 그것이 즐기고 향유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화평을 누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즐기라는 말입니다. 향유하라는 것입니다. 그때 주어지는 것이 세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이 긍정적으로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따뜻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에 화평을 누리면 멀리 보게 되고, 높게 보게 되고, 더 나아가 미래지향적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연적으로 미래지향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속된 미래의 나라와 천국과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3-4절을 보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했습니다. 여기 “앎이로다“라는 말씀이 중요한 말씀입니다. 안다는 것이 복입니다. 아무리 어려움이 와도 화평한 사람은 그 이유를 압니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려움이 왜 왔는지 모르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전도하다가 고발당해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는 무죄로 석방될 수 있는데도 스스로 로마에 가서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상소했습니다. 그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갈 수는 없고 죄수의 몸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상소하여 죄수의 몸이 되어 배를 타고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로마를 가는 길도 참 어려웠습니다. 항해 중에 풍랑을 만나 고난과 위험과 죽을 고비도 겪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고난의 의미와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풍랑이 일어서 죽을 고비에 있을 때에도 그는 태연했고 평안했습니다. 오히려 두려워 했던 사람들은 바다에 경험이 많은 인솔자와 선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두려워 말라 주께서 간밤에 말씀하시기를 터럭 하나도 다치지 않으리라 하셨다” 하고 담대하게 위로하였습니다. 얼마나 자신 있는 모습입니까? 이유를 알고 답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유를 모르면 그것처럼 아프고 불만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여기 나온 단어 환란, 인내, 연단은 하나같이 아픔을 주는 단어들입니다. 미래지향적인 사람이 아니면 환란, 인내, 연단을 이겨내기가 어렵습니다. 환란, 인내, 연단의 훈련은 사람을 강하게 만듭니다. 자생력을 갖게 하고 자신감과 인내력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이 훈련을 받는 가난한 사람들,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누가 포기하는가 하면 살만한 사람들이고 평안한 사람들입니다. 돈이 많고 지위가 높은 분들은 정신력이 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내나 연단이나 환란을 이기지 못합니다.
대한항공 파동의 주인공인 조현아라는 분을 아실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죽을 죄를 지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처음에 미안하다, 변명 안하겠다, 모두 내 잘못이다 하고 머리를 숙였으면 그 문제는 그때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했으면 오래 끌지 않았고 그런 수모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말 한마디를 못했습니다. 왜 못하였는가 그는 환란이나 인내나 연단의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런 어려움을 당해보지 않고 자랐습니다. 그러니까 감옥에 가서도 조용히 반성만 하고 기다렸더라면 그 사건이 서서히 잊혀지게 되었을 텐데 그 안에 들어가서도 못견뎌하고 편의를 봐달라고 별 수단을 다 쓰다 보니까 또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잊혀질만하면 신문에 그 사건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그동안 부하게 살면서 갑질만 하고 살았기에 빨리 끝내려고만 했지 빨리 끝내는 법을 몰랐던 것입니다. 빨리 끝내려면 한꺼번에 혼쾌하게 고개를 바짝 숙이고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찔끔찔끔 사과하다 보니 결국 다 빼앗기고 무릎 꿇고 사과하고 고개를 숙이게 되고 뭇매를 맞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화평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이루어지면 이웃과의 화평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나 자신과의 화평도 곧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상태가 가장 행복한 때이고 조화가 잘 이루어진 때이고 화평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영적 화평을 누리게 되고 즐기게 되고 향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화평의 이유
그러면 화평은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화평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화평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누군가의 수고가 필요하고 누군가가 십자가를 지며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때문에 오늘 이 세상에 화평이 주어졌고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시리아 난민들을 보면 6.25때 우리 부모들과 선조들의 모습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때 우리 선조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집터를 잃고 고향과 집을 놔두고 정처 없이 남쪽으로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지금 21세기에 시리아의 난민들이 그렇게 하염없이 목적지 없이 닥치는 대로 발걸음을 옮겨 중동 여러 나라로 구라파 여러 나라로 떠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는 곳마다 그들을 받아주는 나라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거부하고 그들이 유입되지 못하도록 장벽을 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시리아는 지금까지 5년 동안 내전을 치루고 있습니다. 알 아사드라는 독재자가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면서 마침내는 자기 백성들에게 독가스까지 퍼부어 살상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무신론자 독재자의 모습을 우리는 21세기에도 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 결과 2013년도에 9만명이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2014년도에는 그 숫자가 증가하여 19만 1,000명이 되었고 지금까지 22만명 이상이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IS라는 이슬람 국가 단체까지 출현하여 더 무자비하게 살상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인구 2,300만명 가운데 1,160만명이 피난길에 합류했습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거절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갈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평안을 잃었고 질서를 잃었고 샬롬을 상실한 채 떠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유럽이 장벽을 헐고 그 난민들을 받아들이겠다고 나섰습니다. 왜 그들이 갑자기 변했을까요? 그것은 터키해변에서 발견된 한 아이의 시체 때문이었습니다. 시리아 난민 자녀인 3살난 아일란 쿠르디라는 아이가 난민대열에서 바다에 추락하여 표류하다가 해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이모습이 신문에 보도되었고 그 사진을 보고 온 세계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동요하고 여론이 일더니 마침내 거부하고 장벽을 치고 유입을 막던 나라들이 자성하게 되었고 문을 열게 된 것입니다. 독일이 3만명을 받아들이기로 하였고, 영국이 24,000명을, 미국이 만명을, EU가 12만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입니다. 핀란드 총리는 난민을 위하여 자기 집을 내놓겠다고 하였고 이집트 통신재벌 나구이브 사위리스는 지중해에 있는 섬 하나를 매입해서 그 땅에 난민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난민국가를 창설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왜 어느날 갑자기 이런 해빙무드가 조성되었습니까? 그것은 한 아이가 희생되고 십자가를 졌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평화가 만들어지는 데는 반드시 제물이 요구됩니다. 누군가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지고 관계가 정상화 되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화평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에이레네의 화평입니다. 그 화평이 마침내 나의 내면에 천국화를 이루었고 이웃과의 관계가 정상화 되었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삶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화평은 너를 향한 너그러움이고 나를 향한 넉넉함과 성숙함이고 하나님을 향하여 더 가까이 나가가게 하는 자질입니다.
이 화평을 지키십시오. 이 화평을 절대로 잃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이 화평을 곧바로 상실하게 됩니다. 이 화평은 우리가 세상에서 단순히 평안하게 살아가는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평은 구원받은 백성으로 성숙하게 살아가게 하도록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려는 힘 주심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시려는 능력 부여인 것입니다. 이런 화평과 평화의 은혜를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화해의 만남
로마서 5:1-11 / 조용기 목사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화해와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 동안에 부부의 만남, 부모자식의 만남, 형제자매의 만남, 이웃과의 만남, 원수와의 만남 등 인간의 삶은 피할 수 없이 만남으로 시작하고 만남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남이 귀중하지만 우리들은 만남을 위하여 특별히 관심을 가지거나 노력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연 그대로 내버려놓고 좋은 대화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우연히 잘되어 갈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만남의 노력 없이 대개 작고 큰 불화를 그냥 눌러버리는 것입니다. 집에서도 부부간에 문제가 생기면 눌러버리는 것입니다. 부모, 자식 간의 문제도 터놓고 만나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눌러버리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문제도, 국가적인 문제도,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무시하고 지나가버려서 자연적으로 해결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불화가 정신적인 암이 되고 파괴력을 가지고 큰 슬픔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 절대적인 중요성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여러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울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늘 거울을 들여다보시고 나와 같은 사람을 만들어야 되겠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드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봤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하나님 좀 보여주시옵소서. 그러면 하나님이 간단하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너 거울 있지? 예.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 보느냐? 볼 때가 있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바로 여러분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으실 때는 여러분과 사랑을 교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지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이 좋아하는 형상으로 만들지 않고 하나님이 매일같이 어떻게 데리고 살며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여러분과 대화를 통해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고 난 다음 우리에게 권력을 주셔서 하늘의 새, 땅에 있는 짐승, 바다에 있는 고기, 사물을 다스리게 하자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큰 능력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최소, 최고, 최선의 것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신 것입니다. 하나님 존재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며 만나기 위해서 우리가 비록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났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7절과 21절에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러분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를 위해서 만들었다. 그러므로 나를 찬송하게 하라.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에 묶여서 심히 더러워졌을지라도 주님은 나를 위해서 지은 사람들이니 내 곁에 오게 하라. 내가 그로 하여금 나를 찬미케 하도록 만들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3절에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매일 매일의 생활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엄청난 행복과 기쁨을 갖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그마한 기쁨을 가지고도 즐거워하는데 하나님은 기쁨이십니다. 사랑일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그 우편에는 즐거움이 넘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과 사귀고 산다면 우리에게 슬픔은 사라지고 기쁨이 넘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만남 중에 최고의 만남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나는 것이 우리 인생에 최고로 중요한 것입니다.
신명기 33장 29절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야훼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이런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하나님을 만나서 기쁨을 가지는 기쁨의 종교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잔칫집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서 하나님을 기뻐하니 찬양소리가 그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여하간 기쁨이 종교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는 기뻐하고 또 기뻐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해되면 그 마음에 기쁨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도 ‘기쁜 소식’이라고 우리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슬픔이 많은 것은 왜 그렇습니까? 혼자 있을 때 같이 있을 때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집단적으로 불평과 원망과 탄식이 기쁨보다 더 많습니다. 너무나 우리 마음속에 슬픔이 많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오랫동안 교제가 되어지지 않고 단절이 와서 끊어지고 마는 슬픔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마음이 같지 아니하고 상처를 주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2.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
불안과 불행과 슬픔과 고통이 다반사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일 잘못한 것은 아담과 하와가 마귀하고 만나지 말아야 되는데 잘못 만난 것입니다. 오늘날도 전문가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누구며 읽고 있는 책이 무슨 책인가에 따라서 5년 후에 우리 인생이 달라진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만났으니 하나님과 대화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나가서 마귀와 만나서 마귀와 대화했기 때문에 유혹을 받아서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사람을 만날 때 좋은 사람을 만나야지 나쁜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유혹에 끌려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만나야 그리스도를 따라서 교회를 나오게 되고 하늘나라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와 잘못된 만남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저주와 병과 가난과 죽음 등의 포로가 되고 만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로 19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아담보고 말씀하기를 너 아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지도를 하지 아니하고 아내의 말에 따라서 마귀가 시키는 대로 선악과를 따먹었으므로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저주를 받고 가는 곳마다 생활에 가시넝쿨과 엉겅퀴가 납니다. 가정에도 가시넝쿨과 엉겅퀴, 사업에도, 생활에도 가시와 엉겅퀴가 나서 찔리고 상처입고 고통을 당하고 결국 흙으로 돌아가고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과 만나지 않고는 인생에 아무것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은 목적이 없습니다.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잖아요. 그리고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삶의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은 또 죽음밖에 없으므로 죽음의 불안과 공포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로 재산만 있으면 잘사는 줄 아는데 우리 한국의 최대의 재벌이었던 이병철씨가 세상을 뜨기 전에 질문을 던져놓고 세상을 떴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계시느냐. 그 질문을 던져 놓고 대답을 얻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었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헛되고 말기 때문인 것입니다. 나이를 먹고 세상을 떠나게 되면 점점 더 헛된 것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영화를 많이 누리고 재물도 많고 쾌락을 많이 쫓은 솔로몬이라는 유대의 왕은 그가 죽기 전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전도서 1장 2절에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사람 철학은 간단해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2장 22절로 23절에 보면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는 삶의 목적을 찾을 수도 없고 만사가 허무하고 무의미하며 결국 절망과 죽음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 제가 이 강단에 서서 가만히 내려다보면 저와 함께 교회 개척에 애를 쓰고 힘을 쓴 서대문에서 온 성도들은 참 너무 마음이 안되었습니다. 다 청년 때 왔는데 할아버지가 되고 아줌마 때 왔는데 할머니가 되고 젊음을 좀 돌이켜 주셨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의 단절은 그보다 더 무섭습니다.
여러분 우리 다 하나님의 식구인데 하나님과 단절 되어서 교통이 없으면 우리의 삶속에 어디에서 기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사람이 교제를 나누어 살아야 참 행복을 갖고 살 수 있지 하나님과 단절되어 살면 큰 슬픔과 불안과 고통 속에 살다가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젊을 때보다도 나이를 먹으면 마음에 변화를 다스리기가 더 힘이 드는 것입니다. 젊을 때는 마음에 여러 가지 고통을 다스릴 수 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마음에 다가오는 슬픔을 다스리기가 힘이 들어요. 오직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고 간구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마음에 평안이 다가오지 인간적인 수단으로는 마음의 평안이 오지 않아요.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고 성령충만하여 하나님과 늘 같이 있기를 힘써야지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에게 행복한 삶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와 그 나라에 속해 있으면서 심신이 마귀에게 도적질당하고 어떻게 행복하게 살수가 있는 것입니까?
3.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마귀와 그의 나라
온 세상은 마귀의 정사와 권세가 지배하고 흑암의 나라가 꽉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모두 마귀 나라의 백성이 되어서 살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9절에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우리가 교회 문밖에만 나가면 저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속하여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불순종의 아들, 안 믿는 사람들의 배후에는 악령이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 뜻이 아닌 악령의 뜻을 쫓아서 인생에 불의를 가져오고 불행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마귀의 종이 된 인간은 죄의 주인인 마귀의 손아귀에 잡혀 꿈쩍하지 못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죄란 뭡니까? 하말티아라는 것이 헬라어인데 죄는 화살을 과녁을 향해서 쏘았는데 과녁을 맞추지 않고 빗나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이 세상에 빗나가게 만든다. 정의를 빗나가게 만들고 거룩함에서 빗나가게 만들고 행복에서 빗나가게 만들고 평안에서 빗나가게 만들고 모든 것 다 실패하게 만드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죄를 덮어 씌워서 우리가 모든 일에 실패하게 만들고 우리의 생애에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여 슬픔으로 인생을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8절에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우리는 마귀의 종이 되어 자유를 잃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아팠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으로 만든 우리가 마귀의 종이 되어서 온갖 더러움과 추함의 노예가 되어서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로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4. 우리와 화해하기를 원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구원하려면 죄 없는 인간의 탄생과 대신 죽는 사역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는 다 아담과 하와의 자손이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얻은 피는 다 죄에 물든 피인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물든 피를 유전 받아서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있는 사람이 다른 죄 있는 사람을 위해서 대신 속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살려주려면 죄 없는 사람이 태어나야 되고 그 사람이 또 자기 몸을 드려서 우리 속죄재물이 되기를 원해야 되는 것입니다. 죄 없는 사람이 어떻게 태어납니까? 아버지 없이 태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아담의 핏줄을 이어주는 아버지 없이 태어나야 되는데 바로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것은 인생의 핏줄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없이 성령으로 태어나게 하셨으므로 그는 이 세상에서 우리와 같이 살았으되 세상의 죄악의 피는 흐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가 굉장히 갈등을 느꼈습니다. 죽는다는 것도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내 죄가 아닌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라는 가장 극악의 고통을 당하면서 죽어야 하니 얼마나 괴롭습니까? 그는 여러 번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옮겨 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굉장히 갈등을 하고 고민을 했으나 우리를 구원하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서 견뎌냈던 것입니다. 죄 없는 하나님이 보내신 인생이 죄 있는 우리들을 대신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몸 찢고 피를 흘리므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마귀의 가장 큰 실패는 예수님 같은 분이 태어날 것이라고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태어나서 그 고통스러운 죄악의 재물이 될 것이라고 마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인생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담과 하와를 자기 부하로 만들고 죄인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영원히 이 지구상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기의 종노릇 할 것이요 인간의 삶은 마귀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밖에 없다고 하나님은 영원히 이 지구의 운명을 마귀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죄 없는 인간이 탄생하고 죄 없는 인간이 우리 위해서 대신 죽었으므로 이사야 53장 5절로 6절은 예수님 오시기 약 7백 년 전에 예언한 말씀입니다.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 보십시오. 예수님은 인간으로써 오셔서 죄의 값을 이처럼 지불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가만히 알지 못하고 있으면 큰일입니다. 여기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나 때문에 그가 나 때문에 죄악을 짊어지고 허물을 짊어지고 병을 짊어지고 저주를 짊어지고 죽음을 감당해서 십자가에서 다 지불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날 위해서 지불했으면 우리가 마땅히 그 열매를 받아야 될 것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의 용서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허물의 용서를 받아야 마땅하고 병에서 고침을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저주에서 해방되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죽어서 천당 가야 마땅합니다. 지옥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위해서 이 땅에 내려와서 33년을 계셨고 그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죽은 것은 여러분에게 이와 같이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하셨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 신앙보다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이 값 주고 사놓은 것을 여러분이 마땅히 취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한다는 말씀을 이루어야 되는 것입니다. 도적이 오는 마귀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는 것은 단호하게 저항하고 마귀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축복과 생명은 내 것이라고 주장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었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하고서 종교적인 신앙만 가지고 왔다갔다 한다면 참 슬픈 일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나를 위해서 몸 찢고 피를 흘려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은혜 베풀기를 원하는데 왔으면 우리가 기도를 하고 악착같이 주님이 주신 것을 받아야지요. 여러분 영혼이 잘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의와 평강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되고 범사에 형통하여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되고 건강하여 원하시면 100살까지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무리가 아닌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늘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걸머지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6절로 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의로운 사람인 것 같으면 죽어줄 사람이 있겠지요. 선한 사람 같으면 대신 죽어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죄인 되었을 때 엉망진창으로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여 버림받아야 할 이런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을 대신 죽으라고 내보냈으니 그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기에 그렇게 하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 맏아들을 내보낼 때 꼭 우리를 위해서 죽으라고 내보내신 것입니다. 몇 번이나 예수님은 안 죽고 그냥 천국 갈 수 없으냐고 간구해도 대답 안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얼마나? 예수님을 주어서 여러분 대신 죽게 할 정도로 사랑을 한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사랑하고 계십니다. 제가 종종 그런 말을 합니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조용기! 네가 보기에는 모양 없지만 하나님은 그대로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 속이 후련하고 좋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집에 가셔서 주무시기 전에 거울을 쳐다보시고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고 한번 외치십시오. 하나님이 정말로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6시간 고난당할 동안에 우주적인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몸 찢고 피 흘린 재물을 통해서 마귀의 정사와 권세를 빼앗으려고 한 것입니다. 마귀는 아담의 죄 때문에 죄를 이유로 해서 아담을 붙잡고 세상을 아담에게 주었는데 세상을 점령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인간의 모든 죄를 청산하고 불의를 청산하고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서게 되니까 이제 마귀는 아담의 자손들을 잡고 있을 권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마귀에게 이제는 너희는 나의 백성들을 붙잡고 있을 권리가 없으니 물러가라! 지구를 내 놓아라. 이 지상을 점령하여 다스리던 정사와 권세를 내놓아라. 마귀는 안 내놓겠다. 여러분 우리 눈에는 안보였지만 영적 거대한 전쟁이 갈보리산 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때 만일 예수님께서 아이구 내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못 견디겠습니다. 아버지 나는 십자가에서 내려 갈렵니다. 그렇게 했으면 마귀의 영원한 승리가 되고 인류의 구원의 희망은 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끝까지 참았다 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내가 다 이루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내가 다 이루었다. 마귀에 붙잡힌 인류를 구원하는 역사를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는 일도 이루어줬고 허물을 사하여 거룩하게 만드는 일도 이루었고 병을 고치는 일도 완성을 했고 축복해주는 것도 다 완성했고 천국 가는 것도 다 완성해서 모자람이 없이 내가 다 이루었다. 그러자 마귀의 정권은 무너지고 군대는 해산되었습니다. 우주에서 무너졌습니다. 그 하나님의 군대가 우리 세상을 점령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가 하나님의 군대의 집회 장소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끼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우리 하나님의 정사와 권세가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주의 천사들이 정사를 가지고 우리를 다스리며 권세를 가지고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와 같이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마귀보다 많습니다 이제는... 우리는 승리했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이제는 긍정적으로 먹어야 되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사랑받고 있다. 도움 받고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되고 항상 희망찬 꿈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좋아진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좋아진다. 나는 더 행복하게 된다. 희망찬 꿈을 가지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희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쳐서 여러분에게 희망을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믿어야 돼요. 우리 주님 백성들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어야 돼요. 여러분은 잘될 것을 믿어야 돼요. 좋은 일이 생겨날 것을 믿어야 돼요. 평안이 있을 것을 믿어야 돼요.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한마디도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매일같이 새로운 날이 다가올 때 오늘도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이 돌보아 주신다. 나는 부족함이 없다. 부족함이 없으니까 오늘도 만족하게 살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서서 그렇게 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정권은 이제는 공중에서 법적인 존재성을 잃어버리고 쫓겨났습니다. 정권은 바뀌었습니다. 마귀의 정권은 물러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권이 이 우주를 점령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마귀에게 속하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정권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여러분께 나타내서 여러분이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로 16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 우리가 다 화평을 가져올 수 있다. 가족이 화평하고 형제가 화평하고 이웃이 화평하고 원수가 화평할 수 있도록 보혈의 화평의 능력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5. 화해의 시작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와 화목하시기를 원하셔서 여러분과 나를 품에 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 죄가 하도 더럽고 추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우리를 보고서 밀어내고 저주하시고 끌어 안을 수가 없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가 보혈을 의지해서 나오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우리와 원수 된 담을 허물어버리시고 죄악을 다 멸해버리시고 여러분과 나를 품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걸머짐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나타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천국 내 천국, 예수 기쁨 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와 화목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로 19절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은 하나님이 친 아버지가 되시고 하나님의 친자식이 되시고 여러분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이 쭈삣쭈삣하고 두려움을 가지고 서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 큰 사랑으로 여러분을 품에 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아바 아버지가 되십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아바 아버지, 그분이 여러분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제는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부정적인 마음 없이 아바 아버지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나가니 붙들어 주시고 안아주시고 돌보아 주시옵소서. 탕자가 아버지를 떠났다가 회개하고 돌아오니 아버지가 뛰어나가서 탕자를 안고 환영을 해주었던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품어서 안아주시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산 의로운 옷을 입히시고 여러분과 나에게 성령으로 인을 쳐서 성령의 반지를 끼워 주시고 예비한 신발을 신기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나가자만 신발이 닳도록 일을 해야 되는데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셔서 이제 좋은 신발을 신게 해주시옵시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살찐 기쁨을 가지고 살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에 살지 않고 기쁨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살고 계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화목케 하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했으므로 우리에게 화목해 하는 능력을 주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말을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원수와 화목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가정에도 화목되고 부모 자식 간에도 화목되고 형제간에도 화목되고 이웃 간에 화목되고 원수하고도 화목되게 하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전혀 화목할 수 없는 사이에 화목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니 놀랍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누구와 원수 되더라도 화목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부터는 화목하십시오. 가족들과 화목하고 이웃들과 화목하고 심지어는 원수하고도 화목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주시고 있으니 그것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처절한 죽음 안에서 우리에게 화해의 두 손을 하나님은 내밀어주시고 예수님은 여러분과 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이매 화목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이 우리 속에 계시고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아버지 품에 안기고 아버지는 우리를 품에 품으시고 이제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으로 살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원수가 아닙니다. 친 아버지인 것이요 친 자녀들이 된 우리들은 하늘나라의 모습을 쫓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부족함이 없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운 환경에도 여러분과 같이 계시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수는 항상 있고 고난은 항상 다가오지만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원수 앞에는 오히려 주님께서 상을 베풀어서 여러분을 만족케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 외롭지 않습니다. 슬플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메마른 땅에 생수와 같이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광풍을 피하게 해주시고 폭풍우를 가리워 주시고 마른 땅에 샘물나게 해주시옵시고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같이 되어서 여러분과 항상 같이 계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천국을 이 땅에서부터 마음속에 누리며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9절로 11절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을 이루었으니 화목을 이룬 사람마다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천국에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기쁨이 화목된 사람들에게는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이제 기쁨을 주시는 역할을 하시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 하나님 앞에 매일 기도하고 기쁨을 요구하시기를 바랍니다. 화해의 십자가는 우리가 생각할수록 마음에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김준곤 목사님은 한국이 낳은 역사적인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CCC 대학생 연합회도 만들어서 젊은이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세상을 뜨셨는데 그가 한 말 중에 기억나는 것은 “십자가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나의 이름을 부르고 부르다가 죽은 곳이다. 예수님이 한 손으로 내 손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사랑의 심장이 터진 곳이 바로 십자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손 붙잡고 예수님은 내 손 붙잡고 아버지의 손 붙잡고 심장에 손을 얹어 화목을 시켜놓고 그 심장의 피가 터져서 죄를 갚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처절한 죽음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해의 두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했다는 것은 공짜로 화해한 것 아닙니다. 대가가 엄청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펑펑 쏟아서 우리 화목의 끈을 굳세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손을 잡기만 하면 하나님과의 화해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을 붙잡아서 죄를 씻어주고 의롭다고 해주고 화평을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 놀라운 일인지 이 모든 일이 선물로 주시고 믿음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의로운 행위를 해서 화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면 하나님이 선물로 용서와 화해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화해를 가로막는 마귀와 죄, 불순종 등은 다 십자가에서 청산되었습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 할 때 청산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어떠한 죄인이라도 예수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막을 힘, 막을 자가 없습니다. 마귀의 거짓에 속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화목과 사랑, 평안과 기쁨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목마르지 않습니다. 배고프지 않습니다. 다시 버림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과 화해한 결과로 기쁨도 평안도 소망도 우리의 것이므로 우리가 구하면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텅빈 가슴을 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시편 16편 11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그 오른편에는 즐거움이 넘치는데 우리는 이 분을 아버지로 부르고 화목해서 아침 저녁으로 만나고 항상 그분의 은혜 가운데 있으니 기뻐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뻐해야 돼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기쁨으로써 하루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기쁨은 양약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뻐하면 그것이 약이 되어서 장수하게 하고 건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어서 기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뻐하기 때문에 기쁨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시간에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내가 먼저 즐거운 웃음을 웃고 기뻐하면 기쁨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기쁨이 올 때 내가 웃겠다는 말을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한번 예수 이름으로 기뻐 해보십시다. 하나, 둘, 셋! 하하하.... 아, 진짜 기뻐지네요? 할렐루야~ 믿음으로 해보겠다고 나가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한없이 사랑하기 때문에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담대함을 가지고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큰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면서 나가는 우리들이 되십시다. 우리는 믿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축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러분은 다 새것이 되어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실 때 여러분을 위해서 좋은 일을 다 일어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의인이 되게 하셨고 거룩하게 되게 하셨고 치료받고 건강하게 만드셨고 잘살고 능력있게 축복받게 만드셨고 천국백성이 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믿으면 합니다. 믿음으로 여러분을 이끄시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충만한 기쁨을 가지고 영원한 즐거움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인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과 화해를 통한 엄청난 사랑과 기쁨과 행복을 갖고 내 이웃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속에 엄청난 사랑과 기쁨과 행복이 있으니까 이웃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내가 기쁜데 기쁨을 나눌 수밖에 없고 내가 기쁜데 이웃 사람하고 평안을 나눌 수밖에 없지요. 그러므로 나는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며 축복과 기쁨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크고 위대한 화해를 가졌으니 세상의 어떠한 불화도 끌어안고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기쁨의 사람입니다. 평안의 사람입니다. 화해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여러분을 그렇게 변화시킨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아버지를 마음속에 모시고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힘이 없고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지만 여러분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요. 저는 이번 동남아에 나가보고 느낀 것이 큽니다. 그분들이 다 한국교회를 배우자.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어요. 한국교회를 배우자. 한국교인들처럼 기도하자. 한국교인들처럼 찬송하자. 한국교인들처럼 믿자. 한국을 배우자. 그 마음이 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범으로 세워 주신 것입니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 이름을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환난 때 내가 저를 돌보고 위로해 주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서 동남아 일대에 모범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정성을 다해서 동남아 일대에 신앙이 아직까지 모자란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풀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굉장한 능력을 가지신 성도들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크고 위대한 화해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할 수 있습니다. 하면 됩니다. 해봐야 될 것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우리 주변을 화목하고 살 수 있는 좋은 세상이 되도록 힘을 써야 될 것인 것입니다.
구원을 누리는 삶
로마서 5:1-2 / 이규현 목사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그동안 로마서 1장부터 4장까지 계속 살펴보면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죄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빼앗았는가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고통과 비극의 이면에는 죄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의 삶을 다 망가뜨렸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들이 다 정상이 아닌 비정상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내면 깊숙한 부분에 죄가 있습니다. 부부 갈등이 일어날 때 단순히 세미나나 어떤 카운셀러의 상담을 받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그 내면 깊숙한 곳에는 죄가 있는 것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겪는 끝없는 불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나 친구와의 관계나 삶의 모든 관계 안의 불화 깊숙한 곳에서 사회학적, 심리학적, 때로는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이라든가 소통의 기술을 익히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이 깨어지게 만들었던 가장 근원적인 것 핵심 안에는 죄의 문제가 있고 그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깨어진 것 안에서 파생된 모든 문제가 오늘 우리의 삶의 불화와 다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관계입니다. 돈이 많으면 무엇하겠습니까? 관계가 좋지 않으면 고대광실에서 살아도 불행한 것입니다. 좋은 직장에 취직했는데도 사표를 내는 대부분의 요인이 어떤 일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은 관계의 문제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도 최고의 직장에 취직을 했는데 1년을 못 버티고 나왔습니다. 알고 보니 관계의 문제가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관계를 풀어가는 가장 key가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깨뜨렸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버린 우리에게 찾아온 첫 번째 결과는 나와 나와의 관계에서 불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갈등을 느끼고 나 자신이 마음에 안 들고, 내 안에서 일치와 통합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늘 불안한 것입니다. 내가 나와의 관계가 좋지 않기 때문에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맺어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의 가장 근원적인 부분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에서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원수가 되었던 관계라고 말합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원수가 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정립되지 않고 해결되지 않고는 우리 삶의 어떤 관계도 어떤 문제도 근원적으로 풀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1장부터 4장까지 살펴보는 가운데 핵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이제 5장부터는 새로운 단계로 넘어갑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 안에 일어나는 어떤 결과들에 대해서 5장부터 시작됩니다.
본문 1절을 읽어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합니다. 이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고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가 되었고 그 화평의 관계를 누리자, enjoy하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만날 수가 없고, 특별히 죄인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꾸시고 하나님과 우리와의 막힌 관계를 여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하나님과 함께 화평을 얻을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3~14절을 보면 「13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벽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허물어 버리시고 둘이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복음의 내용을 참 잘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한 지성소에는 일반 제사장이 아닌 대제사장만이 1년에 단 한 번 대속죄 일에 자기 자신을 위한 정결의 제사를 드리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들어갈 때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가끔 죽는 일이 생기는데 자신에 대한 속죄의 제사가 완벽하게 드려지지 않고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성소에 들어가면 현장에서 즉사합니다. 대제사장들의 옷은 방울들이 굉장히 많이 달려서 소리가 나게 되어 있는데 그 소리가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은 시신을 건지러 들어갔다가는 죽기 때문에 밧줄을 매고 들어갑니다. 죽었다면 밧줄을 밖에서 당기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죄인은 한 명도 없는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인간관계를 철저히 단절시키고 아무도 넘을 수 없는 벽이 가로막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새롭게 살 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20)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휘장이 찢기신 사건과 같습니다. 휘장은 성소 안으로, 하나님 앞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 휘장을 찢으시고 그 한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살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휘장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고 그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휘장이 찢어진 사건을 통하여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피를 믿으면 그 휘장을 뚫고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합니다. 여기 ‘담력을 얻었다’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담대히 나간다는 표현은 구약적인 제사제도 속에서 성전이 있었던 시대를 염두에 둔 이야기입니다. 아무도 감히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가 없는데 이제 그 피를 힘입어 성소에 나아갈 담력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주어진 특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에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합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축복입니다. 우리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나아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칭의,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내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력을 얻었기에 더 이상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주저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우리에게는 어떤 중보자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이름을 빌릴 필요도, 어떤 사제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이, 우리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입니다.
바울이 오늘 강조하고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었을 때는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긴장의 연속 속에서 하나님께 간접적으로 나아가려고 했던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오늘 이 “누리자”라는 표현은 독특한 시대가 우리에게 왔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화평을 누리는 삶이라는 것은 적극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입니다. “누린다”라는 표현은 특권입니다. 특권은 누가 누릴까요? 특권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누리는 것입니다. 만약 특권이 있는데도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면 특권이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돈이 많지 않아서 어렵게 항공료를 지불하고 첫 해외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돈이 많지 않아 여비를 아끼고 있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기내식이 나오자 돈을 주고 사 먹을 수는 없어 두 끼를 참고 내리고 나서야 항공료에 다 포함이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어진 특권을 알지 못하면 특권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청와대에 드나들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면, 그것도 언제든지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특권입니다.
하나님을 거리낌 없이 담대하게, 나의 행위와 조건과 상황과 상관없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특권이 열렸다는 것은 흥분할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리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라도 1년에 단 한 번 자신의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들어갔다가도 잘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구약의 환경 속에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를 누릴 수 있는 것이야말로 특권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누리자!”, “enjoy"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을 누리지 못하면 너무 억울한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을 다 치우고 누구든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 글을 쓸 때에는 흥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 단절된 관계를 여는, 하나님과의 화평의 관계를 누릴 수 있다는 축복의 이야기.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한 비극의 크기를 아는 사람은 이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글을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쓰면서 얼마나 흥분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교제를 마음껏 즐기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날마다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는 순간이 한순간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니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라 합니다. “담대히”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가 구약적 배경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조건과 자격이 없음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제 때를 따라, 내가 도움이 필요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가 정립된 것을 알려줍니다. 이제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음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특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부담스러운 관계가 아닙니다. 더 이상 어떤 것도 걸림돌이 없습니다.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도, 주저할 이유도 없이 우리 삶의 순간순간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 은혜를 우리가 얻게 된 것입니다. 이제 기도할 때 괜히 나 자신의 행동 때문에 주눅 들 필요 없이, 우리 자신을 정죄하거나 죄책감에 빠져 물러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의지하고 나아가면 하나님은 우리 자신의 행위의 모습을 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온 하나님의 백성들을 당신의 아들처럼 여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래서 “당당하고 담대하게 그에게 나아갈지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에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 이상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근원적인 두려움이 다 제거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우리 안에 찾아오는 변화는 한둘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꼬였기 때문에 모든 인생의 문제가 시작되었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평의 관계로 변화되어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누리기 시작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짐으로 찾아왔던 우리 삶의 모든 고민과 아픔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확하게 해결되고 화평을 이루는 관계가 되면 사람들과의 관계도 풀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근본적인 매듭이 풀리면 파생될 수 있는 많은 효과가 있습니다. 인간관계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풀어나가기는 어렵습니다. 근본적으로 묶여있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풀려지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에 묶여있는 영역들이 있어서 절대로 사람들과 온전한 관계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온전한 용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 자신 안에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은 용서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풀려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화평을 누리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2절을 보면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라고 합니다. 바울은 1절에서 “enjoy, 누리자”고 하고 2절에서는 “즐거워하느니라”, 3절에서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는 표현을 씁니다. “누리자” “즐거워하자”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가 가져다주는 축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무엇을 즐거워한다고 말합니까?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칭의,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하는데 이것은 “영화”라는 고대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결론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해서 이제는 죄의 문제가 끝나고 우리의 삶에 고통이 찾아오지 않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여전히 우리 삶에 죄의 지배를 받고 넘어지고 깨어지며 연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완전한 상태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은혜에 들어감을 통하여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에 하나님께서 이르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약속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삶에 찾아온 비극 가운데 하나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우리가 망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시력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올 영광스런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코를 박고 이 현실이 전부인 것처럼 바라보고 살아가는 연약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3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지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알 수가 없고 우리의 삶에 찾아올 수 있는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눈을 완전히 멀게 만들고 영광이라는 사실 자체를 전혀 알지 못하게 합니다. 죄가 우리에게 찾아옴으로 가장 무서운 것은 우리뿐 아니라 이 세상을 완전히 망가뜨렸다는 사실인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실조차도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이 열리기 시작하면 망가진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게 되고 미래에 주어질 완성된 영광의 회복이 무엇인가를 보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손상된 우리의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화되고 영화롭게 되는 멋진 회복의 장면들을 오늘 바울이 잠시 소개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다만 이뿐 아니라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고 합니다. 이런 단어는 좀 생소합니다. 세상에서 이해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어떻게 환란 중에도 즐거워합니까? 환란이면 환란이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것은 도무지 세상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아프지도 않고, 암에도 걸리지 않고, 사업만 시작하면 다 잘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받았다고 해서 당장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여전히 문제가 많고 우리 삶에 골치 아픈 문제가 많이 생기지 않습니까? 환란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것은 예수 믿는 우리에게도 환란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전제하는 말씀입니다. 고난의 면죄부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믿음의 선조들을 보면 예수를 믿는 순간 환란과 핍박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환란 중에 즐거워할 수 있는 비밀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는 것이 가능한 것이 2절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현재 당하고 있는 환란보다 더 강력한 미래의 영광이 나를 사로잡을 때, 비록 환란 속에 있고 그 환란 자체가 고통과 어려움을 주지만 그럼에도 지금 현재 일어나는 이 상황보다 더 강력하게 나를 사로잡고 내 눈을 사로잡고 있는 세계가 있는데 그것이 하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먹구름이 끼어 있어서 아무 소망이 없는 것 같은데 그 먹구름 사이에 빛줄기가 내리쬐고 조금만 지나면 그 먹구름이 지나가고 찬란한 태양으로 가득 차게 될 소망. 믿음의 사람들이 이것을 본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모든 것이 다 일사천리로 되고 아무 어려움이 없다면 대한민국에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떤 때는 예수를 믿지 않고 있다가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어려운 일이 자꾸 생기기도 합니다. 로마서 8장은 너무나 귀한 말씀인데 8장 18절을 보십시오. 말씀의 시작이 “내가 느끼건대”가 아닌 “생각하건대” 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느낌에 속지 마십시오. 현실에는 조여 오는 아픔이 있고 불행스러운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합니다. 존 칼빈은 이 구절을 붙잡고 일평생 살았다고 합니다. 지병을 앓으며 종합병원 같이 살았던 존 칼빈은 이 한 구절을 바라보며 살았다고 합니다. 교부 크리쏘스톰은 우리 삶 속에 모든 사람이 겪고 있는 모든 고난의 무게를 다 합하여도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무게에 비교할 수 없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믿음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현재의 상황보다 장차 우리에게 다가올 영광스런 미래가 더 선명하고 확실하게 보일 때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김연아 선수는 오랫동안 쉬다가 나와도 아름다운 연기를 얼음 위에서 펼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좋지만 본인은 얼마나 고난의 삶을 살았겠습니까? 하나의 테크닉을 익히기까지 고난의 삶이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고난을 견뎌낼 수 있습니까? 금메달을 딸 때, 단상에 올라가는 영광스런 그날이 없다면 왜 그것을 하겠습니까? 메달을 목에 걸고 있는 것 같은,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현실의 짜릿한 유혹이 있지만 엄청난 자기 절제와 극복을 하는 것입니다. 숱한 날 눈물의 세월을 보내는 이유는 다가올 영광의 날을 너무나 선명하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오늘날 살아가는 현실이 실체가 아니라 장차 다가올 미래의 영광의 그날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힘들지만 믿음의 삶을 뚜벅뚜벅 걸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미래의 영광을 보는 그 눈이 열리지 않으면 현실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현실은 망하는 것, 사라지는 것입니다. 실제가 아닙니다. 금방 쇠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목회를 하는 동안 다양한 성도들을 만나는데 가장 힘들 때는 성도들 가운데 독특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목사로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입니다. 이 세상의 숱한 언어가 있음에도 한마디도 해 줄 말이 생각나지 않는 기가 막힌 어려움에 빠져 있는 성도들을 만날 때입니다. 특별히 누구보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모범적인 성도에게 의문의 고난이 찾아왔을 때 해 줄 말이 하나도 없을 때 고민에 빠지고 목회의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목사라는 존재가 이 순간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현실에서는 답이 없습니다. 목사가 목회의 본질로 들어가 할 일은 평소에 성도들의 눈을 열어 현실을 넘어선, 장차 다가올 미래의 구원의 완성. 하나님의 나라, 그 영광, 우리의 모든 한계와 연약과 모든 인간의 부조리가 끝이 날 완벽한 나라, 그 보이지 않는 세계. 그러나 눈을 열면 지금도 내 삶에서 쏟아질 것 같은 구체적이고 분명한 그 나라를 보여주는 일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현실의 문제만 부지런히 설명하는 목회자가 되면 어느 날 딜레마에 빠질 수 있습니다.
본문 2절에서 바울이 설명하는 것은 우리가 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그 영광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내 눈앞에 있는 현실보다 더 정확하게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믿음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고,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영광이 없습니다. 영광은 언제나 하나님과 관련될 때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실 때 우리 삶에 회복이 일어나고 그것이 진정한 영광이 될 것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6,8)」 세상에는 영광이 없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바라본 자들만이 오늘 환란 중에서도 즐거워하는 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이 열려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신앙은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현실에 눈을 부릅뜨고 눈앞에 닥친 이익과 자신의 현실의 축복 너머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열리지 않으면 우리는 한순간도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없고 진리를 따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환란 중에 즐거워하나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린 것입니다. 이제 즐거이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를 즐기시기 바랍니다. 마음껏 찬양하시고 예배하시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때로 한 주간 동안 내가 실수하고 범죄했다 할지라도 여전히 나의 행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가는 자신감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언제든지 그분과의 교제를 통하여 안식을 누리고 기쁨을 누리며 평강을 누리고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활력이 넘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 복음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 이상 어둡지 않습니다. 밝고, 소망이 넘칩니다. 아무도 풀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하나님께서 풀어내셨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시온의 대로가 열렸습니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 당당하게 그분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때 그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여러분의 삶에 꼬였던 모든 문제가 풀려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보좌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우리의 눈이 열려 하늘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다가올 구원의 완성, 우리의 모든 연약함이 떠나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의 그날이 다가올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낙심치 않고 환란 중에서도 즐거워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으니
롬 5:1-4 / 김광일 목사
알리스터 맥그래스 (Alister McGrath)는 ‘예수를 경험하는 영성훈련’이라는 저서에서 영혼에 대한 자서전을 썼습니다. 그는 22세에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분자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대학에 다니면서 기독교를 알게 된 그는 복음을 인식할 필요를 느꼈지만 건조하고 지식적인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 후 기독교를 더 알기 위하여 캠브리지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루터의 십자가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 것을 지식적으로 인지하는데 머물렀습니다. 루이스(C. S. Lewis)의 경건 서적을 읽으며 도전을 받았으나 여전히 지식적으로 기독교를 인식하는데 그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하면서 비로소 기독교에 대한 믿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정보만 축적했지 그 분을 인격적 관계로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 속에 살아 계셔서 만나주시고 교제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맥그래스가 대학에서 강의한 내용은 기독교 영성이었습니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성 버나드, 캔터베리의 안셀름, 마틴 루터, 존 칼빈, 로욜라의 서적들을 탐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교제하였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그때까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알았으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듯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책을 연구하면서 기독교는 이론적이거나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교제하는 체험적인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자신도 그들의 방법을 따라 한 결과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의 핵심적 교리는 ‘이신칭의(以信稱義)’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피조물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절대주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따먹는 반역을 저질렀습니다. 그 결과 스스로 운명을 주관할 수 없는 인간은 사탄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사탄의 종노릇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인생을 구원하는 계획을 세우시고,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를 사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바울은 인생들이 예수 믿고 영접하는 순간 인생은 모든 죄로부터 벗어나며,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주권 아래 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칭의(justification)입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을 본문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로 화평을 누리며
미국 역사상 제일 지독한 구두쇠로 알려진 사람이 있는데 1916년에 죽은 헤티 그린(Hetty Green) 여사입니다. 그녀는 얼마나 돈을 쓰지 않고 인색하게 살았는지 기본적으로 써야 하는 것도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음식을 데워서 먹는 것조차 전기가 든다고 일평생을 차갑게 먹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외아들이 다리를 다쳤는데도 조금 있으면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병원비용 때문에 미루다가 결국 다리를 절단하게 되어 평생 장애자로 살게 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다가 자신은 영양실조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놀란 일은 그녀가 죽은 후 옷장에서 통장이 발견되었는데 무려 1억달러의 거액이 저금되어 있었습니다. 헤티 그린은 평생 돈을 모으고 쌓아 두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누리지 못하고 죽은 불쌍한 여자였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역시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구하지 않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본문 1절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여기서 화평은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할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의 죄악으로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이를 믿는 자마다 관계를 회복시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상태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 불편함이 있거나 거리감이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아직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기쁘고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좋을 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상태인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영광을 바라며
키에르케고르의(S. Aabye Kierkegaard) 글 가운데 ‘마차에 탄 부자’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부자는 불이 켜진 마차 안에 앉아 있고, 마부는 차가운 바깥바람을 쐬며 말을 몰고 있습니다. 부자는 불빛 때문에 바깥에 펼쳐진 하늘의 영광, 별들의 전경, 마부가 놓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세상 영광의 불빛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소중한 것을 잃으면 고통스러워 합니다. 돈이나 명예, 자녀나 가족, 건강을 잃을 때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졌을 때, 은혜의 감격이 사라졌을 때도 고통스러워합니까?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식을 잃었을 때보다 더 고통스럽습니까? 돈을 잃어버렸을 때보다 더 안타깝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은혜의 끝자락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모름지기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들은 세상의 영광을 바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은혜를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본문 2절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은 은혜를 통해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에 들어갔지만 종말론적인 영광은 아직까지 바라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장차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로 즐거워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아직까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을 완성해야 할 책임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다시 마귀의 지배를 받아서는 결코 안 됩니다. 더 이상 세상의 명예나 재물로 기뻐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해야만 합니다.
셋째로 환난을 즐기며
백악관 정책 보좌관을 지냈던 자랑스러운 한국인 강영우(姜永祐)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기자가 “박사님은 시각장애자인데, 어떻게 백악관까지 진출할 수 있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강박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오해를 합니다. 인내심이 많아서 시각장애의 고난을 딛고 일어선 것처럼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나는 시각장애인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런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환난과 역경이 없었더라면 내가 이런 자리에 결코 오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은 환난을 슬퍼할 것이 아니라 즐거워해야 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하나님은 예수를 영접한 믿음의 사람들을 의롭다고 여겨 주시고 죄의 종노릇하던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감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환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만드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마땅히 환난 중에도 기뻐해야 합니다.
환난은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다듬어 소망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환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혹시 환난과 어려움으로 지금 고통을 받고 있습니까? 고통스럽고 힘들다고 할지라도 더 크고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과정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은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심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007년 국민일보에 실린 이상춘 장로의 기사입니다. 30여년의 교정 공무원 생활을 마친 그는 다시 교도소를 찾아가 재소자 전도에 헌신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2006년 7월 간암 3기라는 선고를 받게 됩니다. 그 날 이상춘 장로는 병원을 나와 여주 교도소로 향하면서 “침상에서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으며 죽음과 싸우기보다, 마지막 남은 나의 심지를 불태워보자”라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주의 뜻대로 하소서.” 하나님은 이상춘 장로를 통하여 엄청난 일을 하셨습니다. 많은 재소자가 하나님을 만났고, 그들은 “덕분에 다시 힘을 얻었다”는 감사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상춘 장로의 암도 치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증거가 있습니다. 기사에 실린 것처럼 “교정 공무원 시절 굳어 있었던 그의 얼굴이 '미소 천사'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굳어있던 얼굴이 미소 천사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두려워하고 염려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은 자들이 누리는 복이 아닙니까?
우리는 과연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며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질 영광을 바라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닥치는 환난을 소망으로 극복하며 즐거워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