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어다까지 왔는가
옆집 할머니에게 또 다시 큰 일이 생겼다. 작년, 당뇨병을 앓던 큰 아들이 사망하고 실의에 빠져있던 할머니의 작은 아들 며느리가 도망을 간 것이다. 큰 아들 역시 며느리가 도망을 가서 혼자 살고 있었고, 큰 아들의 아이를 작은 며느리가 키우고 있었다. 큰 아들이 병치레하느라 벌이를 못하자 할머니는 생활전선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부둣가에 작은 포장마차를 차려놓고 장사를 했지만, 겨우 할머니 용돈을 벌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할머니는, 자신의 돈을 아껴 손자들의 학비도 보태주던 처지였다.
작은 아들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지 않고 보험회사를 다녔는데, 시골의 틀성상 아는 사람이 한계가 있기에 오래갈 수도 없었다. 농사를 지을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시골 사람들 조차도 농사 알기를 우숩게 알고 있다. 그래서, 작은 며느리가 온통 생활을 책임 질 수 밖에 없었다. 칭찬이 자자하던 며느리였다. 그런 며느리가 도망가다니. 할머니를 비롯해서 마을 사람들은 아연해질 수 밖에 없었다.
며느리는, 면내에 작은 건설회사 경리로 일을 했는데, 아무리 시골 살림이지만, 백만원 남짓 벌어서, 두 아이 키우며 살기는 불가능했으리라. 그래서, 나는 그녀의 야반도주에 대해 불만을 가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겉으로는 욕을 해도 속으로는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요즘, 시골의 5일장은 갈수록 엉망이다. 지방정부에서 아무리 기를 쓰고 살리려고 해도 역부족이다. 면내의 장을 살리려고 10억대 가까운 돈을 쏟아 부어도 마찬가지다. 그 돈이면, 시골사람들 골고루 나누어주면 팔자가 펼텐데 쓸데없는 지꺼리를 해서 시의원과 결탁이 된 건설업자의 배만 불려주고 말았다. 지방정부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늘 이런 식이다. 명분이야 시골장 살리기에 시의원들이 앞장서서 예산을 세웠지만, 실제로는 아까운 세금만 낭비하고 도둑놈들 손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시골 5일장을 살리는 길은 너무나 쉽다. 그 간단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이제 정부의 역할은 이거대한 자본주의 시스템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시골 면내에 가보면 어디를 가더라도 중심지에는 농협 하나로 마트가 버티고 있다. 도시에서도 대형 마트가 주위 상권 작살내듯이, 시골에서의 농협 하나로 마트는 도시에 비해 더욱 심각하다. 다만, 경제의 규모가 너무나 미미해서 크게 부각되지 않을 뿐이지만, 오히려 시골을 황폐화 시키는데는 도시 보다도 더 심하다.
그래서, 아무리 5 일장이 열린다고 해도, 그 중심에 온갖 상품 차려놓고 헐값에 팔아대는 하나로 마트를 이길 재간이 없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면내의 상가들도 도저히 하나로 마트를 어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시골 농협은, 농협으로서의 의미를 실종한지 오래다. 오히려, 시골을 망치는 주범이 되었다. 특히, 농협 조합장 선거라도 하게되면, 온갖 불법이 판을 쳐서 시골 사람들의 민심을 더욱 거칠게 몰아 넣는다. 시골 사람들을 상대로 돈장사를 하고 반대 급부로 보험을 팔고 농약과 비료를 독점하고, 농산물을 독과점하고, 도무지 이건 도시의 대기업보다도 더한 괴물이 되고 말았다.
농촌은, 이제 도시 보다 더욱 흉흉 해졌다. 농촌이 가졌던 공동체의 의미도 사라진지 오래다. 농번기 때 서로 도와주던 두례의 미덕도 사라지고 용역회사에서 버스로 사람들을 몰고와서 시간만 되면 쏜살같이 사라진다. 농업의 의미도 이제, 본래의 농사가 아니다. 오히려 도시에 물건을 팔아서 생존하는 제조업이 된지 오래다. 과거, 자급자족하던 농사의 여러품목은, 공산품을 대신하여 농산물 개방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경쟁력이 약하다는 이유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농촌 사람들도 역시, 하나로 마트에서 시장을 볼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보수파들이 좌파라고 떠들어대던 노무현 정부시절에 가장 많은 농업인구가 감소했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우리나라는, 진보고 보수고 떠나서 모수 농촌 알기를 우숩게 알았다는 것이다.
이제, 농촌에는, 자본주의의 식민지로서의 의미와, 잘못된 유교의 잔재만이 존재하는 이상한 곳이 되고 말았다. 시골의 노인들은, 자본주의와 자신들이 잘못 인식하고 있었던 유교적 전통 때문에 정체성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다.
농촌은 도시를 위해, 자본주의의 온갖 피해를 안고 살아야 하고, 도시 사람들은 이미 훌훌 내던진 유교적 전통의 끄트머리를 겨우 끌어 안고 사는 것이다. 그나마, 그것 마저도 그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 개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간혹, 귀농을 하여 성공한 사람들의 스토리는 사기다. 그들은 귀농을 한 것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전원주택을 짓고, 경제성 있는 작물을 비닐하우스에서 심어 대형 유통업체와 결탁을 한 것 뿐이다. 그들은, 농촌이 가지고 있었던 본래의 의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시골의 장점(공기,물,싼 주택지)과 도시의 장점(유통과 판매)를 적절히 이용한 약삭 빠른 사람들일런지도 모른다. 그들은, 지방정부의 도움까지 받아내며 지방재정까지 축을 내서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고 있을 뿐이다. 지방정부는, 겨우 인구가 늘어난다는 것으로 그들의 퍼부어대는 천문학적 비용을 엉뚱한데 쓰고 있는 것이다.
농촌을 살리기 위해서는, 농협을 없애고 도시의 식민지가 아닌, 농촌이 본래 가지고 있던 자급 자족의 경제시스템을 살려서 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 오히려, 귀농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농촌의 도시화는 급격하게 진행 될 뿐이다. 농토는, 지목변경이 되어 택지가 되어 그들의 친환경 건물을 짓는데 동원이 되고, 농토는 그들의 환금 작물을 위해 비닐하우스가 쳐지고 제조업 부지가 되고 만다.
할머니 작은 며느리의 가출은 그래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미 도시인의 삶에 익숙한 것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겨우 실올라기 처럼 가느다란 유교적 복종은 그래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어쩌면, 그녀로서는 최선을 다해 인내심을 발휘하다가 그녀의 행복한 삶을 위해 도시로 훌쩍 떠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모르고 있다. 파라다이스를 찾아 아이들 까지 버리고 간 그곳 도시는 이미,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시골만큼이나, 아니 그 보다 더 곪아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