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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 http://cafe.daum.net/Europa/1AT/22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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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0년 시리아를 정복하고 회군한 아르타바즈드는 그사이 태어난 다섯째 아이를 처음 보았다. 아기에겐 '레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르타바즈드는 카린 백작 다비트 헤툼을 메소포타미아 군관구 공작으로 임명했다. 다비트 헤툼은 카린 백작이었던 친척을 죽이고 자기가 그 자리를 뺐었다는 의혹을 받았던 인물이었지만 카린을 지키고 투르크족을 격퇴하면서 왕에게 묵묵히 충성을 바쳤다. 그런 다비트를 마음에 든 아르타바즈드는 그에게 메소포타미아를 총괄하는 공작위를 하사했다. 불과 일 년 후엔 그를 재상으로 임명하기까지 했다.
이로서 메소포타미아 군관구는 왕의 직할지에서 벗어났고, 아르타바즈드는 티그라노케르타 군관구(중 아르메니아)와 안티옥, 알렉산드레타만을 직접 통치하게 되었다. 또 타론 백작 톡테긴의 삼촌, 젊은 장군 아르샤크 루벤을 새로 얻은 시리아 절도사로 파견해 그곳을 지키게 했으며 톡테긴의 동생인 토룬타이는 알레포 성주로 임명했다. 보다시피 옛 아르메니아 명문가들을 우대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아르타바즈드가 내치에서 벌인 실패를 묻기 위해서였다.
<왕의 신뢰로 벼락출세한 메소포타미아 공작 다비트 예르반드>
<루벤 가문의 계보도. 아르샤크는 장군, 토룬타이는 알레포 백작, 아르타시르는 타론 백작으로 왕국의 중요한 직위를 차지하고 있다.>
아르타바즈드는 전쟁엔 깊은 관심을 보였고 외교나 인간 관계도 신경 썼지만 정작 내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영토를 다스리는데 세심한 노력을 했지만 아르타바즈드는 통치는 관료들에게 맡기고 보다 가시적인 일에 집중하고 싶어 했다. 파티마 왕조와 전투를 벌이는 것은 왕의 명예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왕국 금고에 구멍 내는 일이기도 했다. 아르타바즈드도 군사비를 줄여보고자 메소포타미아 군관구의 영지들을 백작들에게 나눠주었지만 미봉책에 불과했다. 선왕 티그라네스도 티그라노케르타 건설에 돈을 쏟아 붓느라 유산을 별로 물려주지 못했다.
파티마 왕조와의 전쟁이 계속 되자 티그라노케르타에서 돈이 줄줄이 새어나갔지만 왕은 새 아내를 들일 때마다 사치스러운 결혼식을 올렸다. 재무 관료들은 돈을 어떻게든 만들어보고자 유대인 상인들에게 돈을 빌렸다. 불만을 감수하고 영주와 백성들에게 추가적인 세금을 거두기도 했다. 1261년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자 그동안 참고 있던 귀족들이 승리의 공적을 같이 누리자고 주장했다. 아르타바즈드는 귀족들의 불만을 풀어주기 위해 약탈품을 하사품으로 나눠주거나 영지를 하사했고 루벤, 헤툼같은 명문가들을 후대해주며 그들을 다독였다.
특히 루벤 가문은 조금씩 불만을 토로하던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왕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소 아르메니아의 군주였던 루벤 가문은 아르메니아로 귀순한 뒤로 아르메니아 왕국의 정통성의 요소 중 하나가 되었지만 그들의 큰 입지와 명성은 예르반드 왕가에게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그들이 충성스런 태도를 보이자 감격한 아르타바즈드도 그들을 잘 대해주었다.
1262년 티그리스 강에서 알 자지라 도시 쪽으로 운하를 파다 봄에 강물이 불어나 운하가 파괴되고 도시 일부가 물에 잠기는 사고가 터졌다. 영지를 순회하고 있던 아르타바즈드가 직접 알 자지라로 가서 재건을 지휘했는데, 도시를 다시 건설할 때 자꾸 새로운 건축물을 짓거나 재료를 더 고급으로 쓰자고 하는 등 이것저것을 추가하는 바람에 공사가 질질 미뤄졌고 알 자지라 성주와 순회하던 왕을 보좌 중이던 재무장관 보고스 예르반드가 왕을 말려야했다. 나름 오랜만에 의욕적으로 내치에 신경써보고자 티그리스 유역의 도시들을 순회하던 아르타바즈드는 신하들의 태도에 실망했고 내치를 재상 다비트 헤툼에게 떠맡긴 채 대 아르메니아로 사냥을 가거나 반 호수로 유람 가는 일을 늘렸다.
함무드는 시리아 북부의 상실을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여겼다. 함무드가 다니얄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한 뒤로도 아가톤은 경쟁심을 감추지 않고 다니얄은 견제하려는 행동을 보였다. 함무드는 나이가 60이 넘어 통풍에 걸려 고통을 겪고 있었고 홍해 너머 예멘의 라시드 왕조의 이맘 제이드는 칼리프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며 계속 싸움을 걸었다. 그럼에도 함무드는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했다. 그의 치세 초기엔 나일강 상류에 위치한, 흑인들의 나라에 부하 샤와르 2세, 일명 ‘현명한’ 샤와르를 보내 왕국을 정복하기도 했다.
<파티마 왕조의 명장. '현명한' 샤와르 아스 사디>
샤와르 아스 사디의 할아버지인 샤와르는 파티마 왕조의 장군이었는데, 십자군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여럿 세워 알렉산드리아 성주로 임명되었다. 결국 그는 예루살렘 왕 아모리 2세에게 살해되었지만 그의 후손들은 영지를 물려받아 잘 관리했다. ‘현명한’ 샤와르는 그의 손자였다. 할아버지를 닮아 뛰어난 전사였던 샤와르는 칼리프 함무드의 명령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기독교를 믿는 흑인들이 나일강 상류에 왕국을 세운지는 오래된 일이었지만 예루살렘 왕국이 그들과 접촉해 파티마조를 협공할 계획을 세웠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그들을 정복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1230년 샤와르는 마쿠리아 왕국의 수도 동골라를 정복해 불태웠고 많은 누비아인(마쿠리아인)들을 노예로 잡았다. 동시에 마쿠리아 동쪽에 위치한, 에티오피아 지역의 아바시니아 왕국도 선제공격해 그들이 감히 기독교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파티마에게 대적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또 마쿠리아인들을 개종시키는 작업도 맡았다. 이러한 계획은 수십년 동안 이뤄졌고 샤와르는 마쿠리아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어야 했다.
<샤와르의 원정 이전의 아프리카>
<샤와르의 원정 이후 아프리카>
<그 중 아스 사디 가문의 영지>
함무드는 마쿠리아 왕국이 있었던 땅은 아스 사디 가문의 영지로 하사했고 아바시니아 왕국은 여러번 공격해 기선을 제압했다. 마쿠리아 땅과 바다 너머 예멘에서 동시 공격이 들어오자 아바시니아 왕국은 굴욕적인 조약을 맺고 휴전해야만 했다. 하지만 칼리프에게 고문당하다 탈출한 제이드 라시드가 예멘에 도착하자 예멘인들은 외국의 칼리프가 보낸 대리인을 쫓아내고 전통적인 지배자인 라시드 가문을 지지했다.
파티마 왕조는 이집트와 시리아는 직접 지배했지만 그 외 지역에 있는 여러 시아파 소왕조들을 봉신국으로 두었고 라시드 왕조도 그 중 하나였다. 라시드 왕조의 이맘이 된 제이드는 파티마조로부터 독립하는 대신, 칼리프의 타락을 부르짖으며 반란을 일으켰다. 라시드 가문 역시 사이이드, 즉 위대한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니 칼리프를 될 권리가 있다는 것도 명분으로 내세웠다. 사실 사이이드는 수니, 시아를 가리지 않고 제법 많이 남아있긴 했지만 틀린말은 아니었다.
메디나와 메카를 포함한 아라비아 중부 서해안을 지배하던 하심 왕조는 파티마 왕조의 종속국이었고 몇 십년 전만 해도 라시드 왕조를 침공해 라시드 가문을 쫓아내고 예멘을 정복했으나 파티마 왕조의 군대를 끌고 온 라시드 가문에게 도로 퇴출되기도 했던 나라였다. 라시드 왕조와는 당연히 사이가 안좋았으나 파티마 왕조가 라시드 왕조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면서 홍해쪽에 영향력을 늘리자 위협을 느낀 하심 왕조는 제이드 라시드를 몰래 지원하며 라시드 왕조와 파티마 왕조의 전쟁이 지속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렇듯 파티마 왕조는 아프리카, 홍해, 시리아 세 군데에서 전쟁을 치러야했고 이는 국가에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아프리카 전선은 아스 사디 가문에게 통째로 맡기면서 반 정도 발을 뺐지만 파티마 왕조의 근거지인 이집트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라시드 왕조, 이집트 코앞이자 성지 예루살렘이 있는 시리아를 노리는 아르메니아 왕국은 칼리프의 정신을 빼놓았다. 한쪽을 상대하고 있으면 다른 한쪽이 치고 들어오길 반복했다. 1249년 제이드가 예멘으로 탈출한 뒤부터 1260년 초까지 양면전선이 지속되었다.
1260년 아르메니아가 시리아 북부를 점령했고 라시드 왕조와의 전쟁은 파티마 왕조의 짭짤한 세금이었던, 인도로 통하는 홍해 무역을 망가트렸다. 라시드 왕조 역시 여러 번 패배하면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파티마 왕조도 라시드 왕조를 끝장낼 여유가 없었다. 제이드 라시드는 자존심을 굽히고 파티마 왕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종전 조약은 형식적인 내용뿐이었다. 예멘은 다시 라시드 왕조가 온전히 통치하게 되었고 파티마 왕조는 예멘을 직접 통치할 기회를 두 번 다시 갖지 못했다. 대신 라시드 왕조는 다시 파티마 왕조를 모시게 되었다. 홍해 무역길은 다시 열렸고 파티마조와 라시드조의 세금은 늘어났다. 하지만 제이드는 여전히 마음 속에 독을 감추고 있었고 함무드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당장은 시리아 전선이 먼저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옛 대부에게 오직 증오만이 남은 제이드 라시드>
아르메니아인들은 큰 규모든 작은 규모든 매년 시리아를 침공해왔는데, 1260년 시리아 북부를 점령한 이후론 전쟁을 멈추었다가 1263년 국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다시 전쟁을 시작했다. 몇 달 전 라시드 왕조와 외교적 협상을 한 함무드는 아시아의 기독교 국가들을 다시 한 번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1252년 시리아 원정 이후 11년 만에 처음으로 칼리프가 친정에 나서려고 했으나 64세나 된 함무드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카이로와 다마스쿠스에 모인 군대는 몇 주 동안이나 빈둥거리면서 칼리프의 회복을 기다렸다. 도저히 원정을 떠날 몸 상태가 아니라고 느낀 함무드는 다니얄에게 원정군의 사령관을 맡도록 했다. 전쟁이 다니얄의 공적 쌓기라고 느낄 수 있기에 함무드는 아가톤을 일부러 원정에 동참시키지 않고 시리아를 지키며 후방에서 보급을 맡도록 했다.
함무드는 지난 십자군 전쟁에 비견될 만큼 대군을 동원했다. 함무드는 다니얄이 이 전쟁에서 명성을 쌓고 후계자 자리를 굳히길 바랐다. 하지만 원정에서 배제된 아가톤은 그 반대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지난번 패전의 멍에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기에 아가톤은 대놓고 반발하진 않았다.
파티마의 대군이 시리아 북부로 다가오자 아시아 기독교 국가들은 위기감을 느꼈다. 어느덧 아시아 기독교 국가들 중 가장 강한 국가가 된 아르메니아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시리아, 조지아 왕국이 뭉쳐 연합군을 형성했다. 이미 시리아 북부에 주둔 중이던, 아르샤크 루벤이 이끄는 주력군은 파티마군의 규모를 확인하곤 기겁해서 팔미라에 틀어박힌 다음 원군을 기다렸다.
팔미라는 쉽게 함락되지도 않고 아르샤크 루벤이 튀어나올 생각도 없어 보이자 다니얄은 병사들을 풀어 근교의 마을들을 약탈했고 메흐타르에겐 군대를 떼주어 시리아 북부의 도시들을 공격하도록 했다. 첫 번째 목표는 알레포 서쪽의 도시 홈스-라틴인들은 ‘라 카멜레’, 고대 로마에선 ‘에메사’라고 불렀다.-였다.
기독교 연합군이 도착할 때까지 아르샤크 장군과 알레포 백작 토룬타이 루벤, 에데사 공작 타니엘 예르반드는 파티마 왕조를 상대로 시간을 끌기로 했다. 열흘 후엔 메흐타르의 파티마군에게 홈스가 함락되었고 시민들은 노예로 잡혀갔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근처에 있던 구호기사단의 성채 크락 데 슈발리에로 피신했다.
<시리아 북부의 총사령관이었던 아르샤크 루벤>
메흐타르의 다음 목표는 아사스 지방의 도시 라카였다. 라카 역시 홈스 못지않은 시리아 북부의 중요 도시였고 로마와 페르시아, 이슬람 제국 시절에도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곳이다. 심지어 하룬 알 라시드가 한 때 이곳을 수도로 삼기도 했다.(796 ~ 809년). 상징성 있는 도시를 정복해 기세를 올리고자 했던 다니얄의 의중이 강하게 드러난 공성전이었는데, 아르샤크 루벤 본인은 팔미라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으므로 에데사 공작 타니엘이 직접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했다.
타니엘과 메흐타르의 첫 싸움은 타니엘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어 포로로 잡혔던 홈스 시민들을 구출하기도 했지만 메흐타르의 군대를 추격하다 시아파 투르크 용병들의 기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시리아 북부에 흩어져있던 파티마군이 라카로 접근하자 포위를 걱정한 타니엘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후퇴했다. 라카 시민들은 타니엘에게 도망치지 말라고 애원했으나 타니엘은 왕의 군대가 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라고 말하기만 했다.
라카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함락되었고 시민들은 개종 혹은 노예화를 강요받았다. 파티마 약탈자들이 서서히 북으로 올라오자 알레포 백작 토룬타이의 기병대가 격퇴를 시도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토룬타이로선 파티마군이 알레포에 접근하는 것을 근근히 막아낼 따름이었다.
<유격전과 급습에 뛰어났던 메흐타르>
티그리스 상류의 요새 투르베셀-텔 바시르의 원래 이름. 텔 바시르는 아랍식 이름이다.-에 기독교 연합군이 소집되었는데, 과반수의 군대가 아르메니아인이었다. 예루살렘 왕국과 아르메니아군이 가장 먼저 도착했고 시리아 왕국의 소규모 군대도 아르메니아군을 따라왔다. 조지아는 가장 적은 수의 병력을 보내주었지만 조지아 나름대로 기독교 동포들에게 성의를 보인 것이었다.
조지아를 제외한 세 왕국은 파티마 왕조에게 공격받은 경험이 있었다. 아르메니아와 예루살렘 왕국은 군주인 아르타바즈드 예르반드와 부샤르 드 앙주가 직접 오기까지 했다. 파티마 왕조의 이번 공격이 진심이라고 확정한 그들은 두 왕이 공동사령관을 맡기로 결정했다. 파티마군의 규모에 맞서기 위해 최대한 빠르게 모인 연합군이었지만 그 사이 시리아 북부는 노략당한지 오래였고 아르샤크가 이끄는 현지 수비군의 대다수는 팔미라에서 말라죽어가고 있었다.
<아르메니아의 소유가 된 요새 텔 바시르는 투르베셀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연합군이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남쪽으로 진군하자 알레포 백작과 에데사 공작도 합류했다. 연합군은 라카에 다다랐으나 파티마군은 이미 도시를 약탈하고 떠난 다음이었다. 어찌되었든 기독교 연합군이 라카를 회복했을 때, 메흐타르는 오론테스 강변의 도시 하마를 공격하는 중이었다. 메흐타르에게 시달린 현지 영주들이 왕들에게 메흐타르를 공격할 것을 주장했고 메흐타르도 자신이 기독교 군대에게 퇴로를 막힐 것을 걱정했다. 메흐타르는 하마의 포위를 풀고 팔미라의 본대로 합류하려고 했지만 약탈품 때문에 행렬의 속도가 늦춰졌다. 메흐타르가 약탈품을 버리려고 하자 예하 투르크 부족과 에미르들이 거부했다.
부하들의 반발을 못이긴 메흐타르는 그대로 움직이기로 했지만 메흐타르 본인은 맘루크 기병대를 자기 주위에 배치한 다음 기습을 당하거나 전투에 패배할 시 먼저 도망칠 준비를 했다. 메흐타르의 예상대로 기독교 연합군이 메흐타르의 경로를 알아채고 기습해왔다. 아르메니아군에게 부하들이 속절없이 당하자 메흐타르는 잽싸게 달아났고 현지 귀족들은 메흐타르를 못잡은 걸 한스럽게 여겼다.
메흐타르의 약탈 전략을 끝내야할 때가 왔다고 판단한 다니얄은 시리아 북부에 퍼진 병사들에게 팔미라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파티마군의 절반 이상이 다니얄과 함께 있었지만 다니얄은 방심하지 않고 수적우위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런 다니얄을 골탕 먹인 건 적인 예루살렘-아르메니아 연합군이 아니라 후방의 아가톤이었다. 아가톤은 처음엔 맡은 임무를 순순히 해냈지만 전쟁이 길어지려는 조짐을 보이자 다니얄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이집트에서 보낸 식량선단이 베이루트에 상륙, 현지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다니얄의 군대에 조달하는 것과 시리아에서 직접 보급대를 보내주는 것, 두 방법으로 보급을 유지하기로 되어있었지만 아가톤은 처음 몇 회만 식량선단을 호위하다가 곧 부하들에게 맡겼고 나중엔 게으름을 부렸다. 파티마군이 해이한 모습을 보이자 예루살렘 해군이 식량선단을 직접 공격하는 일까지 발생하자 이집트 해군이 출동해야 했다. 다니얄이 식량 보급 문제로 아가톤에게 항의하자 아가톤은 예루살렘 왕국의 기습으로 힘들다고 변명했다.
예루살렘 군대가 육해를 가리지 않고 식량 보급로를 기습하는 일은 분명히 있었지만 아가톤이 보급대 호위에 나태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가톤이 다니얄을 훼방 놓긴 했지만 원정의 실패까지 바란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 아가톤이 다니얄을 괴롭히려면 그보다 직접적인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다만 그는 다니얄의 공적이 ‘너무’ 커지는 걸 싫어했을 뿐이었다.
<맡은 임무를 태만하게 처리함으로서 간접적인 방식으로 다니얄을 방해한 아가톤>
입을 줄여보고자 병사들을 흩어지게 하고 약탈도 시켰지만, 약탈로 모은 식량도 다니얄의 군대를 먹이기엔 부족했다. 아르샤크의 수비군도 굶주리고 있었지만 먹을 입이 훨씬 많은 파티마군 쪽도 만만치 않았다. 팔미라 공성전은 계속 되었고 아르샤크도 몸에 화살을 맞으면서 싸웠다. 팔미라는 견고한 요새였고 손발이 안 맞는 아가톤과 다니얄 때문에 지난번 전쟁에서 아르메니아로 넘어간 것은 파티마 왕조에게 큰 손실이었다.
파티마군이 팔미라로 대부분 모여들었고 기독교 연합군도 가까이 왔다. 군대의 규모가 커졌단 것은 식량 부족이 더욱 심화된다는 것이었다. 다니얄은 빠른 결전을 원했다. 하지만 부샤르는 적의 식량이 이상할 정도로 부족하다는 걸 알자 지구전으로 태세를 전환하자고 했고 아르타바즈드도 동의했다. 팔미라로 슬슬 접근하던 연합군은 다니얄이 팔미라 포위를 풀고 연합군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마자 도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애가 탄 다니얄이 다가오자 연합군은 서쪽으로 슬그머니 움직였다.
팔미라 포위가 풀리자 아르타바즈드가 다른 길로 보냈던 일부 병력이 팔미라에 식량을 공급했고 수비군은 사기를 회복했다. 연합군이 계속 파티마군을 피하자 다니얄은 투르크 부족들을 동원해 기독교 군대를 공격해보기도 했지만 연합군은 활을 쏴서 반격할 뿐 싸움을 벌이려고 하지 않았다. 약탈당해 폐허가 되어있던 하마로 들어간 기독교 군대는 진지를 차리고 성채를 수리하면서 적을 기다렸다. 병사들은 싸움을 원했지만 두 왕은 입을 맞춰 인내를 요구했다.
이미 말했지만 하마는 오론테스 강변에 위치한 도시인데, 강가에 설치된 거대한 수차들이 유명했다. 이 수차들은 평시엔 물을 길어 올려 주변 농지에 물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했지만 전시인 지금은 병사들의 식수를 책임져주었다. 또 오론테스 강가는 남쪽, 바알베크와 홈스 사이의 산골짜기에서 출발해 홈스와 하마를 지나 안티옥에 이어졌고 마지막엔 지중해로 도착하는 강이었다. 즉 오론테스 강은 오직 예루살렘 왕국과 아르메니아 영토만 지나는 강이었고 두 왕국의 군대는 수운을 통해 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 파티마군이 오론테스 강을 이용하려면 예루살렘 왕국의 소유인 바알베크를 손에 넣어야할 판이었다.
보급선을 확보한 기독교 군대가 시간만 끌자 파티마 군대가 하마를 공격해보기도 했으나 잘 훈련된 수비군에게 패퇴되었다. 다니얄은 기독교 군대를 도발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병사들을 풀어 현지를 약탈했으나 아르타바즈드와 부샤르는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다니얄은 식량부족과 사기하락으로 후퇴하기로 했다. 파티마 군대가 후퇴를 시작하자 신이난 기독교 병사들이 파티마군을 추격하길 원했다. 왕들은 반신반의하며 파티마군의 동태를 살폈는데, 한 번 찔러보는 셈치고 일부 병사들로 하여금 파티마군의 후위를 공격토록 했다. 공격당한 파티마군이 허겁지겁 도망치자 자신감을 얻은 왕들은 직접 추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실수였음이 드러났다. 거짓퇴각이었던 것이다.
기독교 군대는 고원 지대를 지나는 파티마군을 쫓아갔다. 특히 기사들과 예루살렘 왕 부샤르의 움직임이 가장 빨랐고 그 다음은 아르타바즈드의 아르메니아 기병대였다. 이들은 너무 빨리 움직이다가 뒤에서 따라오는 본대와 분리된 상태였는데 갑자기 후방에 파티마군이 나타났다. 메흐타르가 이끄는 별동대는 방심하고 있던 기독교 군대를 기습했고 특히 예루살렘 왕 부샤르의 깃발을 보자 그쪽을 노려왔다. 기독교 군대가 의외의 공격에 당황하자 매복이 통했음을 안 다니얄은 군대를 돌려 반격했다. 예루살렘 왕의 깃발이 부셔지고 부샤르가 낙마할 정도로 맹공을 당하자 아르타바즈드가 오십이 넘은 몸임에도 뛰어난 무용을 보여주며 낙마한 부샤르를 구출했다. 아르타바즈드는 한 투르크 장군의 목을 직접 베어 적들을 공포에 질리게 한 다음 카타프락토이 중장기병들과 기사들의 전열을 재정비한 후 단 한 번의 돌격으로 포위를 뚫고 메흐타르를 도망치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아르타바즈드가 칼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투르크족과 아랍인들이 겁에 떨면서 길을 비켜주었다고 한다. 부샤르는 아르타바즈드에게 감사를 표했지만 아르타바즈드는 같은 기독교 동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나도 독자들과 같은 생각이다. 허황되고 과장된 이야기다. 역사서에 기록되기보단 시인이나 방랑악사들이 떠들어대는, 전설 속 기사 무용담 같은 기록이다. 위 내용은 아르메니아 왕실에 남아있는 공식 기록, 혹은 아르메니아 시인들이 남긴 이야기이고 예루살렘 쪽의 기록과 교차 검증한 바, 메흐타르의 매복, 부샤르의 위기, 부샤르를 구하고 도망치는데 성공한 아르타바즈드 정도는 진실로 검증되었다. 사실 예루살렘 왕국 쪽 기록에는 저 세 네용만 간략하게 적혀있다. 그래도 아르타바즈드가 부샤르를 구출하고 도망친 것만으로도 다니얄의 계획을 망가트리기엔 충분했다. 왕을 사로잡아 지루한 전세를 끝장내보려고 했지만 실패한 다니얄은 정말로 후퇴를 시작했다.
<위기에 빠졌다가 간신히 살아난 예루살렘 왕 부샤르>
<자신의 무력에 자신이 넘쳤던 아르타바즈드. 윗 이야기가 진짜일지는 모르겠다.>
기독교 군대는 또다시 매복을 의심하여 이번엔 쫓아가지 않았다. 1266년 전쟁은 기독교 세력의 승리로 끝났지만 아르메니아 왕국이 입은 피해도 막심했다. 알레포와 투르베셀을 제외한 시리아 북부, 즉 유프라테스 너머의 아르메니아 영토가 모조리 초토화되었고 파티마군은 두둑한 약탈품을 챙겼다. 메흐타르는 현명하게도 약탈 도중에 여러 번에 나눠 약탈품을 파티마 왕조로 보낸 것이었다.
1262년 전쟁 초기에 아르샤크 루벤이 팔미라를 지키기 위해 입성한 것이 오히려 큰 피해를 냈다는 분석도 있다. 팔미라는 분명 중요한 요새였고 국경에 위치한 최전방 요충지였지만 그 역할은 영토를 방위하는데 있다. 하지만 전쟁 내내 아르메니아 영토는 약탈당할 만큼 약탈당했고 홈스, 하마, 라카 등의 주요 도시들도 파괴당했다. 정작 그곳을 지켜야 할 아르메니아 주둔군은 팔미라 성내에 포위당한 채로 갇혀있었고 이는 전쟁 초기 병력 부족으로 아르메니아군의 졸전을 만들어냈다. 알레포 백작과 에데사 공작도 전쟁 내내 근거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는데, 그나마 라카를 지켜보려던 에데사 공작 타니엘도 적의 군세를 보고 에데사로 돌아가버렸다. 결과적으로 팔미라를 너무 중요하게 여긴 아르샤크 루벤의 실책이 아르메니아 왕국에게 큰 피해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물론 팔미라가 파티마군의 주력이 3년 동안이나 잡고 있었던 점을 지적하며 반론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자기 영지를 약탈당한 시리아 귀족들은 아르샤크 루벤에 대한 불평을 감추지 않았다. 방어전이니만큼 전쟁에서 손해만 보고 이득은 보지 못했다는 점도, 아르샤크 본인의 성격이 독단적이고 오만한 점도 불만의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전쟁은 승리했고 아르샤크 루벤은 팔미라를 지킨 공으로 왕에게 상을 받았지만 그 후에도 현지 귀족들이 아르샤크를 심하게 비방했다. 자꾸만 화를 돋우는 귀족들에게 열 받은 아르샤크 루벤이 현지 귀족들과 군사적 충돌까지 벌이려고 하자 왕은 아르샤크를 시리아 절도사에서 해직하고 티그라노케르타로 돌아오도록 했다. 유프라테스 강 너머의 귀족들 중 오직 알레포 백작 토룬타이 루벤만이 그의 삼촌을 배웅했다고 한다.
<삼촌보다 성격이 유했던, 나이도 많았던 알레포 백작 토룬타이 루벤>
아가톤은 다니얄이 시리아 북부를 탈환하지 못하고 돌아오자 의외라고 생각하여 당황해했다. 하지만 다니얄은 아가톤의 그런 모습이 기만이라고 생각하여 크게 화냈다. 어쩌면 정말 기만이었을 수도 있다. 다니얄이 아가톤의 나태함에 대해 비난하자 아가톤은 난감한 꼴이 되었다. 아가톤은 예루살렘 왕국 탓을 했지만 다니얄은 아가톤에게 질려버려 그를 무릎 꿇게 만들든가 아님 죽이려고까지 했다. 분위기가 과격해지자 아가톤은 다니얄에게 싹싹 빌면서 목숨을 구걸했다.
함무드는 다소 실망하긴 했지만 다니얄이 아직 어림을 강조하며 다시 기회를 주기로 했다. 다니얄은 원정을 시작한 1262년엔 고작 18살이었고 전쟁이 끝난 1266년에도 22살밖에 안된 젊은이였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다니얄에게 경험 많은 장군을 보좌로 붙여주어 다니얄의 미숙함을 감춰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파티마의 명장으로 손꼽히던 사람은 ‘현명한’ 샤와르 아스 사디, 아가톤, 아르수프의 바드르였다. 샤와르는 주로 아프리카 전선에서 활약한 인물이었고 이미 1258년에 사망한 상태였다. 아가톤은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다니얄과 사이가 안 좋았다.
아르수프의 바드르는 함무드가 직접 등용한 인물로 경험도 나이도 충분했으며 능력은 지난 4차 십자군 전쟁과 홍해 전쟁에서 증명된 인물이었고 함무드의 신뢰를 받는 와지르(중신, 재상)이기도 했다. 또 그의 아버지도 이교도와 싸운 성전사였다.
그러나 그는 출신이 한미했다. 그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영지를 하사받고 성을 가진 신흥귀족이었기에 카이로의 귀족들에게 무시당하기도 했다.
또 그의 영지는 이름처럼 팔레스타인의 아르수프였는데 바로 옆 영지인 예루살렘 성주 메흐타르가 친구인 다니얄을 뒷배로 두고 영지를 확장하고 있었다. 바드르와 메흐타르가 영지 문제로 대립하자 다니얄은 바드르를 원정에 참여시키지 말라고 간청했다. 간청을 받아들인 함무드는 별다른 보좌도 없이 다니얄을 원정 보내야 했다.
그나마 메흐타르가 능력이 검증된 인물이었고 경력도 있었지만 그는 유격전에 특화된 재능을 선보였으며 실제 전쟁터에서도 본대와 분리하여 독자적인 작전을 펼쳤다. 그래서 다니얄을 보좌하는 임무는 성실히 하지 못한 셈이다.
여러 일이 발생했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음에도 함무드는 기본적으론 가족들에게 관대한 인물이었다. 다니얄은 다시 기회를 얻었고 아가톤은 목이 안날라간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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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킹2가 밸런스를 위한 것인지 이슬람 소왕조의 경우 구현안한 경우가 많더군요. 하심 왕조와 라시드 왕조(라시드 이맘국) 둘 다 실제로 있던 국가입니다. 다만 이런 소왕조들을 토후국(에미리트)으로 일괄 처리하다보니 파티마 왕조에 흡수되어있네요. 실제로도 파티마 왕조의 봉신이긴 했지만 자기 영토에선 자기 내키는 대로 통치하던 국가들입니다.
오론테스 강도 실제로 있는 강으로 윗글에 서술된 지리 설명은 사실입니다. 다만 크킹 2엔 표현이 안 되어 있네요.
점점 소설이 되가고 있네요;;
나름 아르타바즈드의 미친 무력을 잘 써보고 싶은데 묘사를 잘 못하겠습니다.
이번 전쟁이 유난히 치열했습니다. 연대기에서도 세 페이지 가까이 먹는 전쟁이었습니다.
먹고 뺐기고 먹고 뺐기고, 파티마 대군 오면 저 멀리 도망치고.(...)
...아, 아니 파티마 6만 대군이 몰려오면 일단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든다니깐요.
아르타바즈드 병력은 무력빨로도 3만 5천 정도라고요. 그냥 붙으면 일방적으로 집니다.
게다가 파티마군은 저 병력도 다가 아닙니다. 히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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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시리아인이 없는 연재가 아쉽네요ㅜㅜ 2.7.2버젼에 없는 아시리아인을 찾는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요..
오옷, 옥룡에 아시리아인도 추가됬나보군요. 현대에도 아시리아인이 남아있다는 게 놀라웠슴다.
근데 주배경인 시리아 북부~메소포타미아 북부가 아시리아인 주거주지라 아시리아인 추가되면 연대기가 더 복잡해져요. 으악!
@회색실패작 저도 찾아보니 아시리아 소규모자치지역이 있을정도로
아직도 존재하고있죠.
연대기복잡해진다면 기존연대기를 위해 아시리아인은 생략ㅜㅜ
십자군이 한 번 이집트나 시리아에 터져야 할텐데
지난 십자군이 왕들은 참가도 별로 안하고 파티마한테 완전 박살나서 신뢰가 안갑니다.ㅠㅠ.
@회색실패작 AI 왕급이상들은 믿을게 못됩니다.
라시드왕조는 과도하게 괴롭히지만 않았으면 파티마한테 계속 충성을 바쳤을텐데 너무 괴롭히기만 해서 원수가 된거네요
(소근소근) 사실 제이드 라시드 영지 뺐고 팔 자른 게 제일 큰 원인.
제 크킹세계에서 아르메니아는 실질적으로 멸망 상태인데(땅은 아이유브에게 작위는 이탈리아쪽으로) ㅠㅠ 여기서는 잘 나가네요
이슬람에게 비잔티움보다 더 가까이 있으면서 힘은 훨씬 약하니 맨날 두들겨 맞는게 일상인 아르메니아.
그래도 플레이어의 힘은 위대합니다.
@회색실패작 콘솔로 복구시킨다음 속국(ㅎㅎ)으로 만들까말까 고민중입니다(...)
최신버전으로 아시리아제국 복원도 해보시는거는 어떤가요?
아시리아 뽕은 없어서리;;
그리고 플레이할 때마다 색다른 문화권과 환경을 좋아하는데 아시리아는 플레이하면 아르메니아 하드 버전 정도로 느껴질 것 같아서요.
@회색실패작 아시리아로 하느니 안달루시아플레이로 편하게 하시는게 더 나을것같지만 왜인지 회색실패작님은 무슬림안하실것같은건 기분탓?
@심심타파이야 일부다처의 페르시아인 이슬람 영주가 되는 게 제 소원입니다.
..는 반농담이고 사실 이슬람도 하긴 하는데 역사적으로 매력을 느낄만한 세력이 중세에 별로 없더라고요. 북아프리카, 특히 튀니지를 좋아하는데 거긴 세력구성도가 뻔하고 프로방스도 적어서 하다가 중간에 물리더군요.
@회색실패작 무슬림하려면 뎌4로 가셔야 할만하실것같아요..
무슬림은 사생아 잘못가지면 빼도박도 못하고 겜오버될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