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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다테야마 알펜루트입니다. 일찌감치 숙소를 나서 전기버스 승차장으로 향합니다. 트롤리버스를 타고 해발 2,678m 아카자와다케(赤澤岳)를 관통하는 간덴(關電)터널을 지나면 구로베(黑部)댐이 나옵니다. 전망대로 가는 길도 있는데 우리는 케이블카 승차장 쪽으로 향합니다. 해발 1,470m 댐 상부에 도착했습니다.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가니 세찬 바람이 불어 우산이 금세 뒤집어집니다. 우산은 접고 비옷을 꺼내 입습니다. 평소 여름에는 관광용으로 방류도 해서 무지개가 보이는 전망대(레인보 존)에서 구경도 한다는데 오늘은 꿈도 못 꿀 일입니다. 계곡을 가로질러 댐 반대편으로 가서 해발 1,828m 구로베다이라(黑部平)까지 가는 케이블카를 탑니다. 여기서 말하는 케이블카는 유럽식 푸니쿨라입니다. 우리나라도 회현동 남산3호터널 근처나 용산 후암동, 부산 산록마을 등에 만들어놓았습니다.
성악가들이 즐겨 부르는 '푸니쿨리 푸니쿨라'는 이탈리아 민요나 가곡이 아니라 루이지 덴차가 작곡한 캠페인송입니다. 베수비오산에 설치된 강삭철도를 홍보하기 위해 만든 노래죠. "얌머 얌머~" 하는 후렴구가 인상적이죠. 80년대에는율동과 함께
"니꺼 내꺼 니꺼 내꺼다/ 니꺼 내꺼 니꺼 내꺼/ 니꺼 내꺼 니꺼 내꺼~"라고 가사를 바꿔 부른 기억이 납니다.
여기서는 해발 2,316m 다이칸보(大關峰)까지 가는 로프웨이(우리 식으로는 케이블카)로 옮겨 탑니다. 여기서 무로도(室堂)까지는 다시 트롤리버스로 이동합니다. 날씨가 맑았다 해도 다테야마 정상은 엄두를 낼 수 없지만, 한치 앞도 보이지 않으니 답답합니다. 그래도 원영적 사고로 받아들입니다. "오늘 맑았으면 덥기도 하고 얼굴도 탔을 텐데, 흐려서 너무 다행이야. 비바람이 부니까 정말 시원하네. 안개가 잔뜩 끼어 있으니 풍경도 신비적이면서 몽환적이고. 완죤 럭키비키잔앙!"
호수를 둘레길을 걷다가 산장을 거쳐 돌아오기로 합니다. 이틀 전 노리쿠라다케 올랐을 때보다 훨씬 바람도 거세고 시야도 뿌옇습니다. 그래도 큰맘 먹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최 소장이 돌아가자고 합니다. 옷차림이 부실한 대원이 있어서 걱정스러웠던 모양입니다. 저는 그저께 3,000m 고봉을 올랐으니 여한이 없지만 다른 대원들은 그렇지 않겠죠. 그래서 제가 "한 시간이라도 걷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3,000m 고봉을 올랐던 산악인 최 소장과 제가 맨 앞뒤에 서겠습니다. 걱정 마세요"라고 너스레도 떨었죠.
다들 제 의견에 동조합니다. 길은 돌로 잘 포장돼 있습니다. 계단도 잘 나 있고요. 그러나 중간에 눈으로 파묻힌 구간도 있습니다. 제주 한라산이나 울릉도 성인봉처럼 길을 잃지 말라고 긴 장대를 꽂아놓았더군요. 바람이 너무 세찹니다. 빗방울이 얼굴을 때려 두 뺨이 얼얼할 지경입니다. 신발도 흠뻑 젖었습니다. 괜히 트레킹을 강행하자고 했나 하는 후회도 밀려왔습니다. 다행히 나중에 만난 일행들은 "추워서 죽을 뻔했지만 그래도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며 즐거워 하더군요.
뜻밖의 행운도 있었습니다. 이곳의 상징물이자 천연기념물인 뇌조(雷鳥)를 발견한 겁니다. 암수가 모양이 다른데 우리가 본 건 암컷이었죠. 트레킹을 마치고 식당을 겸한 찻집에서 몸을 잠시 말립니다. 최 소장이 인솔자로서 책임을 느껴 또 쏘겠답니다. 따뜻한 코코아를 한 모금 들이켜니 마음까지 따뜻해집니다.
가져온 도시락이 있으니 찻집에서 먹을 수는 없죠. 물에 빠진 생쥐 몰골로 노숙자처럼 대합실에 쭈그리고 앉을 수밖에요. 그나마 자리도 없어 두세 명씩 흩어져 먹습니다. 도시락 내용물은 이틀 전보다 더 풍성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없으니 맛이 떨어지는 듯합니다.
심심함을 달래느라 또 개그를 늘어놓습니다. "일본 사람 중에서 가장 마음 좋은 사람은?" "내 벤또 니까무라" "그 사람보다 더 마음 좋은 사람은?" "내 마누라 니하라" 말을 꺼내고 보니 남자가 50대를 넘기면 마음씨가 나쁘더라도 "내 마누라 니 하라"라고 하고 싶은 사람이 적지 않을 듯합니다. 물론 저는 절대 단연코 결단코 아니고요. 그 후로도 이어집니다. "일본 수도국장 이름은?" "무라카와 쓰지마" "가장 인색한 일본인은?" "겐자히 아키네"
여기서 한참을 기다렸다가 비조다이라(美女平)로 가는 트롤리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버스 지나는 길 양쪽을 보니 유키노오타니, 즉 '눈의 회랑'이라고 불리는 설벽이 일부 남아 있습니다. 한창 때 보면 정말 장관일 듯합니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비는 여전히 내리지만 하늘은 맑아집니다. 원영적 사고로 생각하려고 해도 아쉽고 약 오르는 기분은 어쩔 수 없습니다. 꿈푸리가 "한 번 더 와야겠다"고 말합니다. 비조다이라에서 다시 케이블카(푸니쿨라)를 타고 다테야마역으로 내려가자 박 대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버스를 타니 내 집처럼 편안합니다. 전 샌들 모양의 크록스를 차에 실어놓아 타자마자 등산화와 양말을 벗고 갈아 신었습니다. 이제 등산화를 말릴 일이 걱정인데, 다행히 신문지를 여러 장 가져와 안에 구겨넣으면 됩니다.
도야마역 인근 더블트리 힐튼호텔에 여장을 풉니다. 사우나와 대중탕에서 몸을 녹이고 씻은 뒤 저녁을 먹습니다. 돼지고기를 메인으로 한 양식 코스 요리입니다. 2차로 이자카야를 가기 위해 숙소를 나섰는데, 부른 배를 꺼뜨리기 위해 잠시 산책을 합니다. 김 교수 부부에게도 동행하자고 권했더니 김 교수는 일찍 자야 한다며 사양하고 김 여사만 따라나섭니다.
20여 분 걸어가니 후간(富岩)운하 주변으로 예쁘게 꾸며놓은 간수이(環水)공원이 나타납니다. 비는 이제 그쳤습니다. 때마침 해가 떨어진 직후라 야경이 기가 막힙니다. 다테야마를 제대로 보지 못한 아쉬움을 살짝 달래고 이자카야에 둘러 앉습니다. 일본풍이 물씬 풍기는 선술집이 아니라 쇼핑몰에 있는 수산물 식당이지만 맛과 가격은 괜찮고 착합니다. 술을 못 마시는 박 대표는 안내만 한 뒤 숙소로 들어가고 최 소장이 처음으로 2차 술자리를 함께합니다.
대한민국 사회는 한 다리 건너면 다 연결된다고 하죠. 그렇지 않아도 김 교수 프로필을 찾아봤더니 신일고와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더군요.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에 근무하다가 세종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도 지냈네요. 59년생 이어서 올해가 정년이랍니다. 부인은 이화여대 출신으로 동갑인데, 대학 시절 만나 긴 연애 끝에 결혼했다네요.
그런데 혹시라도 어색해할까 봐 김 교수에게는 우리가 성대 신방과 동문들이라고 얘기를 꺼내진 않았습니다. 여러 차례 대화를 주워들으며 짐작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가 먼저 말하지 않는 한 굳이 그럴 필요는 없죠. 반면에 김 여사는 대화나 술자리 동석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이자카야에서도 이 교수 옆에 앉아 "선배님이시라면서요. 미국 노스웨스턴대 나오셨죠? 저희도 거기 있었어요." "어머 그래요. 반가워요." "그럼 누구 아시겠네요?" "그럼요"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집니다.
당초 계획은 이자카야에서 줄창 마실 수 없으니 숙소에 들어가다가 술을 사 갖고 또 방에서 마시자는 것이었습니다. 연속 술자리가 이어진 탓인지, 오늘 비바람에 고생한 탓인지 한 교수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합니다. 산바람과 저도 흔쾌히 동의합니다. 꿈푸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표정이네요.
이튿날은 얄밉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 날씨가 맑습니다. 아침을 먹고 간수이공원으로 다시 향합니다. 밤과 낮의 풍경을 비교해보기 위해서죠. 밤이 훨씬 예쁘더군요. 스타벅스가 아주 목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구레하야마(吳羽山) 전망대에 올랐습니다. 우리가 죽을 고생을 했던 다테야마 연봉이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박 대표는 이곳을 종주했다고 하네요. "스바라시이(엄청나네)!"
궁금증 많은 이 교수가 전망대의 안내판을 보고 또 질문 투척에 나섭니다. "어떤 건 산(山)이고, 어떤 건 악(岳)이고, 어떤 건 봉(峰)이고 왜 그래요?" 박 대표가 일본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 고유의 산악 신앙을 들어 설명하는데 충분치는 않아 보입니다. 꿈푸리가 "보통 험한 산에 '악'자가 붙잖아요"라고 했지만 질문에 맞는 답은 더더욱 아니죠.
제가 나섰습니다. "일본에서는 왜 그렇게 구분해 부르는지 저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큰 산에 딸린 봉우리를 '봉'으로 따로 부르고, 어떤 봉우리엔 '단'자를 붙입니다. 지리산 노고단, 마니산 참성단, 태백산 천제단, 모두 제사를 지내던 곳이죠." 아재 개그가 따라 붙지 않고 진지한 설명으로만 끝내니 뭔가 허전한 표정들을 짓습니다.
김 교수가 묻습니다. "그게 끝이에요? 뭐 더 없어요?" "아, 네. 노고단이란 이름은요, 노태우와 고르바초프가 회담을 한 것에서 유래했답니다." 그러자 모두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럼 그렇지" 하는 낯빛입니다. 쩝, 이젠 뭔가 설명할 때마다 개그를 곁들여야 하나요?
최 소장이 특파원 시절 기사를 쓴 적이 있다는 주석 주물회사 ' 노사쿠(能作)’에 들렀습니다. 시간이 일러 공장 견학은 못하고 체험실도 들르지 못한 채 기념품 매장만 구경했습니다. 처마 밑에 다는 풍경, 그릇, 장신구 등이 전시돼 있는데 매우 기품이 있어 보이고 일본 특유의 장인정신이 느껴집니다. 일행 중 몇몇은 비싼 가격인데도 선뜻 지갑을 엽니다.
이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기후현 최북단도시 히다(飛騨)의 시라카와고(白川鄕)로 향합니다. 출렁다리를 건너니 하회마을 같기도 하고 용인 민속촌 같기도 한 전통마을이 나타납니다.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어서 집마다 억새를 두껍게 이어붙여 뾰족한 맞배지붕을 얹었습니다. 지붕 모양이 두 손을 모은 형상을 닮아 일명 합장촌(合掌村)이라고도 합니다.
이곳은 지형이나 기후 탓에 논농사가 발달하지 못해 양잠이 성행했답니다. 그래서 누에를 치는 방과 뽕잎 저장 공간을 확보하느라 집을 높고 크게 지었다네요. 호빗족이나 스머프들이 살 것 같은 동화 속 마을을 연상케 하는데, 눈이 오면 참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실제로 가족이 사는 집은 눈에 잘 띄지 않고 식당, 찻집, 토산품점, 전시관 등이 많습니다.
옛 성의 천수각이 있던 전망대로 향합니다. 표고 차가 30m에 불과한데 숨이 가쁩니다. 마을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유료로 운영하는 '나가세 하우스(長瀨家)'도 들렀습니다. 인당 400엔에 8명, 무려 3,200엔에 달하는 거금을 이 교수가 쾌척합니다. 3층으로 된 집인데 민속박물관처럼 옛날에 쓰던 생활도구를 모아서 전시해놓았습니다.
점심 장소는 유서 깊은 소바집입니다. 메밀국수 따뜻한 것 3인분, 차가운 것 9인분을 미리 전화로 주문하니 금세 음식이 나옵니다. 저는 미각이 둔해 일본에서 먹는 메밀국수 맛은 거기서 거기 같습니다. 그래도 이곳은 왠지 모르게 깊고 고급스러운 맛을 지닌 듯합니다. 솔직히 제 입에는 종로1가 미진 메밀국수가 가장 맞지만요.
김 여사가 일어나서 맥주를 쏘겠다고 합니다. 모두 박수로 고마움을 표시합니다. 김 여사가 "주물회사에서 주석 장신구 사 달라고 헸는데, 남편이 안 사줘서 삐쳤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주석 안 사주셔서 대신 주석, 술자리를 베푸시는군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마을에 온 김에 제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운동에 관해 설명합니다. 이집트가 1960년부터 아스완 하이댐을 건설하면서 람세스 2세 석상이 있는 아부심벨 사원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유네스코를 중심으로 보존 운동이 벌어져 사원을 해체해 상류 지역으로 옮겼고, 이 운동에 미국의 재클린 케네디 여사가 앞장섰으며, 한국도 돈을 냈다는 얘기 등을 들려주었습니다.
이후 보존 가치가 높은 세계유산을 지정하는 움직임이 시작됐고, 1978년 폴란드 비엘리치카 소금광산 등이 가장 먼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으며, 유네스코 심벌에 새겨진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은 세계유산 1호가 아니라는 등의 얘기도 곁들였습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찜찜한 표정입니다. 여기저기서 "이게 끝이에요?" "진짜 더 없어요?"라고 묻습니다. 당혹스럽지만 금세 떠오르는 개그나 마땅한 드립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조금 있다가 썰렁한 분위기를 만회할 심정으로 다시 입을 엽니다. "아까 주석회사에서도 보시고 여기 소바집에서도 보시는 것처럼 일본은 사농공상 신분제도가 엄격해 가업으로 물려주는 전통이 강합니다. 아들이 없으면 당연히 사위에게, 아들이 있어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사위에게 물려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인정신이 발달했다고 하죠. 장인이 사위에게..."
오후에는 시라카와고와 함께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인근의 닮은꼴 마을을 찾았습니다. 규모는 훨씬 작지만 사람이 없어 한적해 전통적 분위기가 더욱 진하게 느껴집니다. 카페에서 정 이사가 한턱 냅니다. 찹쌀떡을 곁들인 아이스크림을 먹습니다. 오랜만에 먹으니 맛있네요. 마을을 둘러본 뒤 보행용 터널 안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도 올라갔습니다. 40m 앞에 조망 포인트가 있다고 해서 내려갔는데, 별다른 건 없더군요.
걷는 도중 송충이 비슷한 벌레가 길바닥에 떨어져 있습니다. 꿈푸리가 이걸 보고 "벌레가 나뭇잎을 너무 많이 먹었네요. 몸이 무거워져 떨어졌나봐요. 그걸 먹고 떨어졌다고 하죠"라고 하네요. 이 말을 들은 가상이가 제게 핀잔을 줍니다. "형이 사람들 다 버려놨어!"
마지막 숙소는 다카야마(高山)의 아소시아리조트 호텔입니다. 여기도 노천탕이 멋집니다. 목욕을 마치고 뷔페식으로 저녁을 먹은 뒤 제 방에 모였습니다. 김 여사도 합류합니다. 남편 재워놓고 왔다고 하네요. 빨리 술자리에 오고 싶은 마음에 혹시 몰래 수면제를 먹인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밤인 만큼 흥겨움과 아쉬움이 교차합니다. 북알프스 풍경을 정상에서 제대로 보지 못한 건 애통하지만 그래도 당초 예보보다 날씨가 괜찮았고, 10명 남짓한 인원이 미니버스로 이동하니 오붓하고 정겨워서 참 좋았습니다. 첫날에는 5박6일이 꽤 길다고 생각했는데, 돌아갈 때가 되니 닷새가 훌쩍 지나간 듯합니다. 큰 사고나 말썽 없이 무사히 여정을 마친 것에 서로 감사를 표시합니다.
생각보다 많이 걷지는 않아 다리의 피로도는 덜했으나 김 교수를 제외한 남자 4명은 연일 술자리가 늦게까지 이어져 간은 혹사했습니다. 저야 술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는 적이 잘 없지만, 저와 함께 방을 쓰는 꿈푸리는 최대의 피해자가 된 듯합니다.
이튿날 아침 느긋하게 일어나 히다 전통보존지구를 돌아봅니다. 인사동의 확장판입니다. 개천 옆으로 노점상도 늘어서 있습니다. 히다 다카야마 역사미술박물관도 답사했습니다. 전시실이 14개나 되는데 고맙게도 무료입니다. 축제(마쓰리) 때 쓰는 각종 도구를 비롯해 생활용품, 글씨와 그림, 옛날 갑옷과 무기 등이 다양하게 전시돼 있어 흥미롭게 관람했습니다. 카페에 들러 차와 케이크를 먹습니다. 5명이 모은 공금이 7,000엔가량 남아서 그걸로 지불합니다.
이제 나고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가다가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고 거대한 쇼핑몰에 들릅니다. 각자 가족과 친구에게 줄 선물을 고릅니다. 저는 아내가 부탁한 건강식품 아리나민을 이틀 전에 구입해 느긋합니다. 그래도 빈손으로 갈 수는 없어서 아들과 함께 마실 보리소주, 친구들과 마실 위스키, 딸과 며느리에게 줄 보온병과 등산용 깔개 등을 챙겼습니다. 공항에서도 와사비과자를 샀습니다. 선물 필요없다고 해놓고도 막상 가져가면 반가워 하더군요.
하루 더 나고야에 머물 이 교수를 인근 역에 내려주고 공항으로 향합니다. 박 대표와도 미리 인사를 나눕니다. 며칠새 정이 들어 헤어지려니 서운합니다. 비행기 출발 시각은 50분 지연된 오후 7시 50분입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몇 명은 식당에서 요기를 합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한밤중이어서 먹을 틈이 없습니다. 피 선배가 맥주를 쏘고 한 교수가 밥을 삽니다. 우동, 카레 돈까스, 라면 등을 골랐습니다. 오늘만큼은 술을 안 마시고 넘어갈 줄 알았다가 배신 당한 느낌입니다. 저는 바로 다음날도 술 약속이 있는데 큰일입니다. 그래도 맥주 한 컵 정도야 어떨라구요. (실제로 큰 문제 없이 26일 저녁 술자리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김 여사가 저희 곁에 다가옵니다. "서울 가서 뒤풀이하시면 저도 꼭 불러주세요." "네, 그럴게요." 당초 계획이 없었는데 김 여사 때문에라도 한번 모여야겠습니다. "사요나라, 기타아르푸스(북알프스)"
우리보다 하루 뒤에 비행기를 탄 이 교수가 단톡방에 소식을 전해옵니다. 나고야 구경을 잘했고, 인천공항 도착하자마자 대전에 내려가야 하는데, 또 50분 지연 출발이어서 버스를 탈 수 있을지 걱정이랍니다. "진에어가 아니라 지연에어인가 봅니다"란 글도 남겼네요. 이분도 제게 옮은 듯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