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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2014865586
-조금 있으니까 그 많던 차들이 딱 끊어졌어요. 그전에는 인도교를 차들이 6∼7겹으로 메워 내려왔는데…. 가만히 인도교 북쪽을 보니까 라이트를 켠 차들이 그대로 물 속으로 들어가요. 한 20분은 그랬을 거예요. 아마 50대이상은 빠졌을 겁니다.-
당시 한강교 일대에서 교통 통제를 하던 당시 헌병 대위인 박재영씨의 증언. 27일 저녁부터 헌병 1개 분대를 거느리고 남한강파출소 부근에서 작전차량을 유도하던 중 한강교 폭파를 목격하였고, 이 당시 적지 않은 차량들이 손실되었다고 증언함.
서울의 한강교 폭파에 대해서는 왈가왈부가 많으나 KMAG과 육군 본부 사이에서는 '육본 건물 앞까지 적 전차가 들이닥치면 그 때 한강교를 날려도 좋다.' 라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음.
따라서 전방의 1사단, 7사단, 2사단의 사단장들은 한강교 폭파를 지연하고자 했고 육군본부에 이를 건의함.
그러나 당시 육본에는 참모총장이던 채병덕이 부재했고, 대리인 김백일이 있었는데 이미 KMAG 참모장인 그린우드 중령과 육본 작전과 고문인 세드베리 소령이 그에게 '모든 부대와 군 보급품이 한강 이남으로 이동할 때까지 연기하라.' 라고 명령한 상태.
이 당시 KMAG 장교들이 미숙한 한국군 장교들 대신 야전부대들을 지휘하고 있었으므로 명령권이 분명히 있었고, 이에 따라 한강교 폭파는 당연히 지연되어야만 했음. 3개 사단 44,000명의 병력이 빠져나오지 못했고, 7사단 1연대와 9연대는 창동과 미아리에서 격렬히 싸우고 있었음.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군과 미군은 한강다리를 6∼8시간후에 폭파해도 무방할 것이며, 북한군이 서울 시가지로 돌입하는 것을 꺼려한다고 보고 있었음. 시가지 곳곳에서 한국군과 경찰이 격렬하게 저항했기 때문임.
실제로 28일 6시에 나룻배로 도강한 한 미군장교는 적은 아직 먼 거리에 있다고 말했으며 그후 적 포로 진술에서도 북괴군 주력부대는 28일정오 이후에 시내에 들어왔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이는 두고두고 한국군이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든 결정이 되어버림.
원래대로면 28일 오전 10시 넘어서 폭파해도 늦지 않았는데, 새벽 2시 경에 폭파하면서 너무 많은 장비와 병력을 상실한 것임. 이 때 입은 인명 피해는 미군 추산 800명이며, 당시 한강 다리 위에 4,000명의 군경 및 민간인들이 있었다고 언급함.
총 7,000파운드의 폭약을 제1공병단 창고에서 인수해 설치했으니 피해가 크게 발생할 수 밖에 없었음.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북한군 전차들은 이 당시 수유리 근처에 있었으니...
결과적으로 한국군은 44,000명의 병사와 1,500대의 트럭, 수백만 석의 군량미 및 다수의 군수품은 물론 무엇보다도 소중한 수십 만의 민간인을 한강 이북에 버려둔 채 조기 폭파를 해버린 셈이며, 이러한 결정은 동부전선에서 2군단을 상대로 선전하던 6사단과 8사단의 붕괴를 야기하였음.
-내 지프에는 10여명의 서원이 매달려 탔는데 처음에는 헌병제지로 강을 못 건너다가 옆길로 빠져 겨우 도강을 했지요. 노량진 사육신묘 앞에 왔을 때 천지가 진동하는 폭음을 들었어요. 처음에는 북괴병들이 추격, 도강해서 다리를 끊은 줄 알았어요. 수원에 가 서원 점호를 해보니 20여명을 태운 우리 서「트럭」이 간데온데가 없어요. 결국 다리폭파때 희생이 된 거지요. 서장이하 모두 부등켜안고 울었습니다.』-
한강교 폭파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동대문 경찰서 소속 병력들이었고, 서울 9개 경찰서 중 비극을 가장 많이 맞이함. 당장 동대문 경찰서 고위 간부들이 한강 다리 위에서 폭사해버렸으니...
-나는 「드리쿼터」를 타고 김병두경감은 지프로 한강으로 달렸지요. 내 바로 앞에 김태선 국장의 차가 있었는데 한 육군대위가 강을 못건너게 막아요.「국장차인데 왜 통과시키지 않느냐」고 항의하여 겨우 다리를 건넜습니다. 막 건너온 순간「쾅」소리와 함께 내가 탄「드리쿼터」의 뒷부분이 공중에 떴고, 소방과장 신인우총경이 탄 지프유리창이 박살이 났지오. 또한 이때 종로경찰서원들이 타고 건넌 트럭이 하늘로 붕뜨면서 짐짝처럼 경찰관들이 차 밖으로 내동댕이쳐졌구요. 정말 악몽이었습니다.』-
이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산화하였음. 육군은 경찰에게 그 어떠한 협조를 하지 않았고, 더불어 폭파 계획은 육군 내에서도 제대로 모르던 사안임. KMAG은 분명 폭파를 연기하라 했고, 사단장들도 제발 아군이 후퇴할 때까지만이라도 폭파를 연기해달라고 한 것은 사실임.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70년 전 오늘인 28일 새벽 2시에 한강교가 폭파되었고 수많은 희생과 함께 한국군은 그대로 나락에 빠져버렸음.
잊혀져서도, 잊어서도 안될 비극임.
P.S. 자료를 제공해주신 늑대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출처
중앙일보사 - '민족의 증언'(1976) 등 다수
[출처] 70년 전 오늘, 6월 28일 한강교 조기 폭파|작성자 오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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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2172308954
-<우리 병참학교에서는 6월25일 비상소집과 동시에 야전 취사반을 편성, 26일 새벽 미아리로 나가 현지서 주·부식을 조달, 동원된 여학생·부인들과 같이 주먹밥을 만들어 일선에 보급해 주다가 후퇴를 못하고 참변을 당했습니다.
취사반은 부교장 조용일 소령(전사) 교무과장 길동준 대위(전사) 경리과장 김성배 중위(고인), 그리고 나로 편성됐었어요. 나는 약혼자를 만나러 외출했다가 출발 시간에 들어왔더니 상황이 급해 3시간을 앞당겨 떠나는 바람에 내 대신 김원준 소위(전사)가 나갔더군요. 여하튼 김 중위만 살아 나왔고 나머지는 모두 전사했어요. 나는 27일 밤 서울대 부속병원 지하실에서 길동준 대위가『적 탱크가 들어오니 빨리 생도들을 데리고 남하하라』라는 전화를 받고 한강교로 나갔는데 인파에 밀려 후미에 서서 대기하다가 끝내 못 건넌 채 교량폭파를 당했어요.-
이는 민족의 증언 중 내용인데, 개전 초기 가장 비극적인 최후라면 위 내용에 나온 병참학교의 야전취사를 지원해주던 여학생들을 비롯한 여자들임. 이들의 행적은 25일부터 찾아볼 수가 있는데 증언들을 보면 서울에서 주먹밥을 만들어서 전방의 한국군 장병들에게 이것을 공급해주고 있었음.
이를 위해서 육군본부의 명령으로 육군 병참학교 소속 장병들이 야전 취사반을 편성했고, 부족한 인력은 서울부인회나 인근 지역에서 지원받은 여학생들로 채웠음.
당시 한국군 제7사단 군수참모였던 윤영모 전 육군준장의 증언이 있는데, 27일 창동지서에서 제1연대장 함준호 대령이 가져다 준 식사를 했고, 미아리 방어선 당시 서울부인회 등에서 주먹밥을 해준 것을 먹었다고 함.
이 때 주먹밥을 너무 많이해서 쉬어서 내다버릴 지경이었고, 덕분에 장병들은 최소한 싸우다 굶을 일은 없겠다, 라는 안도를 했었다고 할 지경이었다고 함.
심지어 29일 새벽까지도 이들 야전취사반의 지원이 이어졌는데 미아리 방어선의 장병들에게 급식을 지원하라는 7사단장 유재흥 준장의 명령이 있었고, 실제 급식 준비를 마쳤으나 북한군이 미아리를 넘어와서 무산되었다고 함.
실제로 이들은 미아리까지 나가서 주식과 부식을 조달하고 있었었고. 주먹밥을 만들고 나르던 야전취사반은 물론 여학생들과 부인회 소속 여자들은 거의 다 탈출을 못했음.
이 때 병참학교 교무과장인 길동준 대위가 적 전차가 들어오니 당장 후퇴하라며 서울대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어 경고했고, 서둘러 철수 준비를 했으나 이미 교량폭파가 이루어진 상태.
야전 취사반 소속 대부분 대원이 사망했고, 이를 지원해주던 민간인도 참변을 당함. 어느정도냐면 병참학교 부교장도 탈출 못하고 전사한 상황이었고, 유일하게 야전취사반에서는 당시 병참학교 경리관이었던 중위 하나와 보급관이었던 소위 하나만 살아서 겨우 서울에서 빠져나갈 수가 있었음.
도망치라고 경고를 받았지만 이미 한강다리가 무너진 상태라서 그럴 수도 없었음. 결국 거의 다 전사하거나 혹은 죽음을 맞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
내가 본 가장 비참한 최후 중 하나임. 동시에 가장 비극적인 장면이기도 하고. 무책임한 한강교 폭파가 가져온 재앙이었으며, 저 당시 탈출하지 못한 민간인들은 죽음을 맞이하거나 혹은 도강치 못하고 3개월 간 북한의 통치 하에 살아야만 했음.
어떻게든 빠져나가려는 시도는, 북한군 전차들의 진입이 완료된 시점에서도 이루어졌으나 이를 눈치챈 북한군 전차들이 한강 근처까지 진격해서 피난 인파에게 사격을 가해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을 보면 어떤 비극도 이에 견줄 수가 없었음.
이는 용서받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던 당시의 행동이었던 것. 그렇게 버려진 이들은 이후 서울이 탈환되고나서 부역자라며 핍박까지 받았으니 이래저래 엄청 고통을 받았던 것임.
P.S. 자료를 제공해주신 늑대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출처] 한강교 폭파 당시 가장 비극이었던 장면을 꼽자면|작성자 오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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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joongang.co.kr/article/1243657#home
(37)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가장 길었던 3일(37)
중앙일보
입력 1970.06.24 00:00
28일상오 l시40분쯤 채병덕소장이 육본을 빠져나간 후 서울에서 사실상 참모총장 권한을 행사하고 있던 참모부장 김백일대령은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미아리에서 육본에 온 전방사단장인 이응준소장과 유재흥준장이 아직 휘하부대가 그대로 남아있으니, 이들이 도강후 다리를 끊어야한다고 강력히 건의한 것이다. 의정부 전투에서 참모총장과의 의견대립으로 구두해임 된 제2사단장 이형근준장도 이 자리에 나타나 같은 의견을 말했다.
<전방사단장들 연기건의>
직책상으로는 자기가 상위지만 세 사람이 모두 계급은 위인데다가 건의사항도 정당한 만큼, 김백일대령은 어떤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적탱크가 시내에 들어오면 다리를 끊으라는, 그리고 육본 철수직전에 공병감에게 곧 현장에서 가서 폭파를 지휘하라는 채참모총장의 명령을 뒤엎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김대령은 이들 세장군의 의견을 받아들여, 작전국장 강창국대령을 보고 현장에 빨리 가서 폭파를 중지시키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을 집행하려고 장대령 일행이 지프로 현장으로 가다가 북한강파출소앞에서 폭파를 목격한 것은 이미 본 연재기사에서 기록한 대로이다. 결국 김백일대령의 폭파연기명령은 몇분의 차로 불발탄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유의할 점은 자기 휘하부대가 후퇴 도강한 후 다리를 폭파해야 한다는 일선 사단장의 의견은 백번 지당하지만 28일새벽 이 때의 일선상황은 혼효의 한 단어로 표현될 수 있었다. 지휘관의 휘하부대 장악이 전혀 돼 있지 않았다. 말하자면 지휘계통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조직적 후퇴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통신수단 이용 안한 것 의아>
그건 그렇다고 치고 김백일대령의 폭파연기명령이 집행됐더라면 6월28일 미명의 한강 참극은 미연에 방지했을 지도 모른다.
여기서 일반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때 육본에서 왜 통신수단을 소홀히 했는가, 즉 군 직통전화선을 한강폭파 현장과 가설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과 그것이 힘들 때엔 경찰경비전화라도 이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면 이제 각도를 돌러 한강교 조기폭파가 얼마나 한국군전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는가를 T·R·페런바크 저 『이런 전쟁』(This Kind of War)에 기록된 것을 인용하기로 하겠다. 『미군 고문 스코트중령은 28일 새벽에 육본작전과에 앉아 있었다. 서울시 북방의 저지선이 모두 무너졌다는 전화보고가 계속 들어 왔다. 이 보고를 받을 때 한국군 작전과 장교들은 서류를 덮어버리고 짐을 채기는 중이었다. 스코트중령은 채참모총장에게 육본철수를 명령했느냐고 물었던 바 아니라는 대답이었다. 거의 같은 시각에 KMAG단장 대리 라이트대령은 고문단 장교들에 잠시 휴식을 명령했다. 모두가 적 남침이래 잠을 못자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이때 KMAG 참모장 그린우드중령의 전화벨이 요란히 울렸다. 육본작전과 고문 세드베리소령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내용은 한국군이 한강다리를 끊으려 하므로 김백일대령에게 모든 부대와 군 보급품이 강이남으로 이동할 때까지 연기하도록 말했다는 것이었다.
<KMAG과 폭파연기 합의>
KMAG과 채참모총장 사이에는 괴뢰군 탱크가 육본앞에 당도할 때까지는 한강교를 폭파하지 않는다는 굳은 합의가 돼 있었다. 그러나 그린우드중령이 육본으로 달려갔을 때에는 채총장은 보이지 않았다.
서울을 지키고 있는 한국군은 모두 3개 사단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무기와 수송장비를 가지고 있었다. 28일 상오중으로는 북괴군이 서울시 도심가에 들어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나중에라도 다리를 폭파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KMAG의 해즐리트대령과 하우스먼대위는 동경과의 연락을 취하려고 한 밤중에 수원으로 내려갔다. 그들이 인도교를 건너고 시계를 보니 상오 2시15분이었다. 그때 다리가 폭파되었다.
이 폭파로 얼마나 많은 군대와 시민이 죽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짐작으로는 1천명에 이른다고 보고 있다.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사전 경고도 없었다.
<4만4천여 병력을 손실>
한강다리의 조기폭파로 강이북에 있던 4만4천명의 병력은 죽거나 실종됐다.
물론 장비도 함께 잃었다. 탈출한 부대는 적었다. 치열한 전투를 했던 유재흥준장의 7사단은 겨우 1천5백명과 기관총 4정밖에 한강이남으로 넘어오지 못했다. 육탄으로 탱크와 싸운 백선엽대령의 제1사단은 겨우 5천명이 김포쪽으로 넘어오고 포병대는 남겨두고 왔다.
<외국기자 2명도 부상>
동부의 춘천에서 용감하게 싸우던 제6사단은 한강교 폭파소식을 듣고 진지를 버리고 후퇴준비를 했다. 동해안의 제8단도 스스로 후퇴했다. 6월28일에 한강 남쪽에는 분산된 한국군부대들이 엉성하게 진을 치고 있었다』
미전사가 로이·애플먼 저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Yalu)에서도 한강교의 조기폭파로 한국군이 입은 손실이 아주 컸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다리가 폭파됐을 때 피난민과 차량은 생명의 탈출구인 인도교에 홍수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당시 폭파를 목격한 미군장교는 5백명내지 8백명이 폭사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4천명이상의 사람들이 다리위에 있었다고 한다.
그때 3명의 미국기자인 버튼·클레인 프랭크·기브니 카이즈·비치도 바로 눈앞에 있던 한국군 트럭이 폭풍으로 박살이 나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였다. 기자들이 탄 지프도 폭풍으로 유리창이 부서지고 앞에 탔던 클레인 가브니 두 기자는 이마에 상처를 입었다.
<6∼8시간뒤 끊어도 무방>
당시 피아의 상황으로 보아 한강다리를 6∼8시간후에 폭파해도 무방했를 것이며 그랬으면 3개 사단의 병력과 중장비·차량을 충분히 후송했을 것이다. 28일상오 6시에 나룻배로 도강한 한 미군장교는 적은 아직 먼 거리에 있다고 말했으며 그후 적 포로 진술에서도 북괴군 주력부대는 28일정오 이후에 시내에 들어왔다는 것이 밝혀졌다
다리의 조기폭파로 한국군이 입은 타격은 컸다.
<뗏목으로 질서없이 도강>
주력부대와 대부분의 차량보급품 및 중화기는 아직도 한강이북에 있었다. 철수를 강요당한 전투부대는 뗏목이나 나룻배로 제멋대로 도강하였기 때문에 전투서열의 유지가 곤란했다. 당시 한국군은 대대훈련을 마쳤고, 비록 소화기로 무장돼 있으나 전투요원들의 개인투지는 충천 왕성했다.
그러나 제6사단과 제8사단을 제외한 한국군 각 사단은 개전 3일만에 막심한 타격을 받고 반격능력을 상실했다. 초기 작전에서 살기등등한 괴뢰군에 대항하여 한국군은 오직 그들의 선천적인 투쟁심과 애국애족심만이 지연방어전의 전력이었다.』
이 두 외국자료의 기록을 더 볼 것도 없이 한강교의 조기폭파가 개전초에 물심양면으로 얼마나 큰 손해를 주었는가는 재언할 여지가 없다. 책임자는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엄단했어야 했을 것이다. 공병감 최창식대령에게만 책임을 지운 것은 아무래도 정치재판의 인상을 짙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대령의 미망인 옥정애여사는 4.19후에야 비로소 남편의 재심청구를 냈던 것이다. 이 재심을 맡아 변론한 옥황남씨(현 변호사·59)의 이야기를 잠깐 들어보기로 하겠다.
『최대령 부인 옥정애여인는 바로 나의 재종매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 사건을 맡은 것이지요. 옥여인는 4.19가 나던 해 9월에 정부에 탄원서를 내고 남편의 유해라도 찾게해 달라고 했지요. 옥여인은 절차와 그밖의 사정으로 꽤 시일이 걸렸어요.
<미망인, 남편 원죄풀고 사망>
64년10월23일에 가서야 원심판결을 뒤엎고 무죄로 확정됐읍니다. 장본인이 사형된후 무죄를 받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만 옥여인은 남편의 원죄를 풀어주는 것이 살아 생전의 자기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옥여인마저도 3년전에 죽었지요. 내 동생이어서가 아니라 옥여인이야말로 이 혼탁한 세상에 열녀였다고 생각합니다. 15년이란 긴 세월을 청산과부의 몸으로 갖은 고생과 수모를 겪으며 남편은 죽었을 망정 억울한 누명이나마 벗어주려고 안간힘을 썼으니까요.』
6·25 전란과 엉킨 여인들의 애화도 부지기수이지만 옥여사의 경우는 좀 더 가슴 메어지는 예라 하겠다.
『가장 길었던 3일』은 한강교의 폭파를 클라이맥스로 막이 닫힌다.
적침시각을 대체로 25일상오 4시로 잡는다면, 28일 미월의 한강교 폭파참극까지 불과 만 3일도 못되는 짧은 시간에 너무도 엄청난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3일 동안에 일어난 이 많은 일들은 미해·공군의 한국군 지원결정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비극이요, 비보였다. 물론 이런 비극의 근원은 북괴의 불의의 남침으로 강요된 것이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 전체 국민, 그중에서도 특히 당시의 정부와 군부에도 적지않은 책임이 있었다. 이들의 만심과 방심과 무책으로 이런 화를 자초했다면 과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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