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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어원적 의미
□ ‘철학’이라는 명칭: ‘철학’은 번역어
영어의 philosophy, 혹은 독어의 Philosophie라는 말은 다 헬라스어 philosophia (φιλοσοφία)로부터 유래한 용어이며, 이 용어로부터 철학이라는 번역어가 생겼다. 그러므로 헬라스어 φιλοσοφία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파악하면 철학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philosophia는 philein (φιλεῖν) 혹은 philia (φιλία)와 sophia (σοφία)라는 단어로 구성된 복합어다(philia tēs sophias, φιλία τῆς σοφίας). 따라서, 이 두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면 이 복합어의 의미가 드러난다. 그러면 우선 ‘sophia’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자. 이것은 첫 번째로, 지혜(wisdom)라는 의미와 두 번째로는 지식(knowledge)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philia’는, 뒤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겠지만 ‘사랑(관심을 가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philosophia’는 ‘지혜의 사랑’ 혹은 ‘지식의 사랑’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런데 가장 오래된 헬라스의 저술가들인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에 있어서는 sophia라는 말은 나오지만 philosophia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이 말은 비록 형용사형으로서이기는 하나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BC 544경-484)에 있어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즉, 거기에 ‘φιλοσοφός ἀνῄρ’ [‘지혜(지식)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언급이 나와 있다(BC 500년경). 동사형(φιλοσοφεῖν)으로서 그 말은 약 50년 후 역사가인 헤로도토스(Herodotos, BC 484-425경)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거기서는 크로이소스(Kroisos)왕이 입법가 솔론(Solon)에게, “나는 그대가 지혜를 사랑하면서(ὡς φιλοσοφέων), 관찰을 위하여(θεωρίης εἵνεχεν) 많은 나라를 두두 돌아다녔다고 듣고 있노라”(헬라스⋅페르시아 전쟁기Ⅰ, 30)고 말하고 있다. 헤로도토스 이후 50년쯤 된 후에 φιλοσοφία라는 말이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라는 대화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소크라테스가 그 말을 이미 사용했는지 그렇지 않은지 우리는 모른다. 플라톤에 있어서 φιλοσοφία는 σοφία와 대립해 있다. 즉, 후자는 지혜의 소유를, 그리고 전자는 단지 지혜를 향한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한다.
나의 화이드로스(Phaidros)여, 그를 지혜로운 자(σοφόν)라고 부르는 것은 나로서는 너무 지나치게 보이고 그것을 오로지 神에게만 적합할 것이다. 그러나 지혜의 친구(φιλόσοφον) 또는 그와 비슷한 명칭을 그는 더 좋아할 것이고 그것이 또한 그에게 더 어울릴 것이다(Phaidros, 278 d).
이러한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자기의 사명을 sophistai (σοφισται)에 대립해서 날카롭게 구별했다. 스스로 지혜의 소유자라고 칭하는 자들에 대립해서 그는 자기 자신을 지혜를 얻고자 노력하는 자라 하였다(Taeaetetus, 145 e). 헬라스적 사고의 주지주의(主知主義)적 특징에 따라서 이 지혜는 통찰 내지 지식으로 이해된다. 즉, σοφία는 ἐπιστήμη와 동일시된다. 그러므로 ‘지혜에 대한 사랑’은 ‘통찰⋅인식⋅지식을 위한 노력’ 이외의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 지식과 지혜의 의미
1) 그러면 지식과 지혜는 어떻게 다른가? 우선, 지식은 ‘어떤 사태에 관한 정보’라고 잠정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때의 ‘사태’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나 사태가 현실화(現實化)될 때, 즉 실현(實現)될 때, 이것을 가리켜서 ‘사실’이라고 철학에서는 구분하여 사용한다. 어떤 사태나 상황, 그리고 이것이 실현된 사실은 주어와 술어의 형식을 지닌 진술로 표현될 수 있다(예를 들면, “나의 책상 위에는 컴퓨터 모니터와 키보드가 있다.”) 정보(情報)를 설명하는 경우에는, 이에 상응하는 외국어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훨씬 용이할 것 같다. 이에 해당하는 영어는 ‘information’인데, 이것은 in이라는 전치사와 form의 명사형인 formation이라는 두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in은 ‘~의 속으로’라는 뜻이고 formation은 형태화함, 형상화함이라는 뜻이다. 즉, 인식주관의 외부에 있는 어떤 사물을 인식주관의 ‘속으로 형상화시키는 것’이 바로 information이고 정보다.
2) 지식의 정의
① 명제지(命題知, know that ~): 지식이란, 정당화된 옳은 신념(justified true belief)이다. ⇨ 플라톤은 테아데테투스(Theaetetus, 200 d ff.)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true: 지식의 객관적인 면 / belief: 지식의 주관적인 면
“‘정당화된 옳은 신념’은, 어떤 사람이 어떤 것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지식에 대한 하나의 정의(定義)다. 즉, 그것은 옳아야 하고, 옳다고 믿어져야 하고, 그 믿음이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정의다. 더욱 형식적인 용어로 말하면, 주체 S는 명제 p가 오직 다음과 같은 경우에만 참이라는 것을 안다:
P 는 참이다. (P is true.)
S는 P가 참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S believes that P is true, and)
S는 P가 참이라고 믿음에 있어서 정당화된다. (S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P is true)
② 기술지(技術知, know how to ~): ‘~을 할 줄 안다’: “그녀는 자전거를 탈 줄 안다.”
③ ‘성관계(sexual intercourse) 경험이 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보아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눅 1: 26~38,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天使)로부터 수태(受胎)를 고지(告知)받은 후에 한 말)
3) 그러면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는 맥락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① 첫째로, 그것은 지식을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추론을 잘 하는 능력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서의 ‘솔로몬 왕의 지혜’를 생각해 보면 이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야 할 내용은, 어떤 사람이 지식이 있다고, 혹은 많다고 해서 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많이 배워서 지식은 많은 사람인데, 지혜롭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이 못 배워서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아주 지혜롭게 행동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지식이 지혜의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반드시 어떤 종류의 지식이건, 그리고 어느 만큼의 양의 지식이건 간에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즉, 어떤 사람이 지혜롭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혜는 지식의 충분조건이요, 지식은 지혜의 필요조건이다. 지식과 지혜의 관계를 우리는 퍼즐놀이를 예로 들어 이해할 수 있다. 즉, 퍼즐의 한 조각 한 조각을, 혹은 조각 전체를 지식이라고 한다면, 퍼즐들 간의 상호관계를 파악하는 능력 및 퍼즐조각을 이용하여 퍼즐을 완성할 수 있는 능력을 지혜라고 말할 수 있다. 퍼즐조각들(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퍼즐을 맞출 수(지혜) 있는 것은 아니지만, 퍼즐을 맞추기 위해선 몇 개이든 퍼즐조각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위에서 말한 차이점 외에도, 지식과 지혜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다르다. 지식은 양적인 관점과 질적인 측면에서 말할 수 있지만, 지혜는 단지 양적으로만 말해진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는 어떤 사람이 지식이 많다거나 지혜가 많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식에는 저차적인 것과 좀 더 차원이 높은 것, 그리고 고차적인 것 등으로, 그 질이 구분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설거지에 필요한 지식은 저차적인 데 비해서, 우주탐사를 위한 왕복선을 만들고 운행하는 데 필요한 지식은 고차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저 사람은 고차적인 지혜를 갖고 있어”라거나 “우리 엄마의 지혜는 저차적이야”라고 말하지는 않고, 단지 지혜가 많다거나 적다고만 말한다.
② 지혜는 “일반적으로, 지(知)의 한 형태, 그리고 이 형태에 결합(연관)되어 있는 삶의 태도다. 지혜는 본질적인 것에 관한 지, 그리고 모든 존재자의 근원⋅근거⋅의미⋅목표에 관한 지라고 파악된다. 그러므로 지혜는 개별적⋅우연적인 존재자에 관한 지가 아니다. 지혜는 삶의 실천과 관련되어 있다. 지혜는 (...) 보편적⋅포괄적⋅궁극적인 행동목표에 관한 통찰 내지는 인생의 목표에 관한 통찰을 뜻한다. 그러므로 지혜는 인간의 정신적ㆍ인륜적, 도덕적⋅윤리적인 근본태도를 규정한다.”
③ “고대에는, 지혜는 선을 분별하고 선한 삶(훌륭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지식의 유형으로 생각되었다.”
⇨ 따라서, 악한 행위에 필요한 지식은 지혜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남의 집에 들어가서 물건을 훔치다가 집주인에게 들켜서 경찰에 붙잡힌 도둑을 보고, “지혜롭지 못하게 붙잡히다니!”라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어떤 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머리를 잘 쓰는 사람을 우리는 ‘지혜롭다’고 하지 않고 ‘교활(간교)하다’(cunning)고 말한다.
④ 지식(사실)들에 대한 포괄적인 조망을 가지고 그들 상호간에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나 판단력[지(智) ⇨ ‘밝게(日) + 안다(知)]
이제는 philia 혹은 philein의 의미를 살펴볼 차례다. philein은 ‘사랑하다, 어떤 대상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이 단어가 뜻하는 바를 플라톤의 심포지온(Symposion)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는 에로스(eros, Ἒρος, Ἒρως)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에로스는 결핍을 상징하는 여신인 페니아(penia, Πενία)라는 어머니와 풍요를 상징하는 남신인 아버지 포로스(poros, Πόρος)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의 양(兩) 요소를 다 가지고 있어서, 한 편으로는 부족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풍요로움을 가지고 있다. 에로스는 이러한 중간자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모자란 것을 채우려고 한다. 그래서 에로스는 “완전에의 추구” 혹은 “이데아를 향한 충동, 욕구”라고 한다. 에로스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우리 인간의 모습, 철학하는 사람의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 인간은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닌, 중간자의 상태에 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생길 때, 호기심을 갖게 되고 그것을 알려고 한다. 만약에 모든 것을 다 아는 신이 계시다면, 그는 무엇을 알려고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만약에 자기가 무엇을 모르고 무엇을 아는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동물이나 미물(微物)이 있다면 그러한 존재자 역시 무엇을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존재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모르는 어떤 것을 알려고 한다. 파스칼은 빵세(Pensées)에서, 인간은 전지자(全知者)인 신과 전무지자(全無知者)인 동물의 중간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어떤 대상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을 philia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philosophia란, 지혜나 지식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 그것들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헬라스어로 철학자를 필로소포스(philosophos)라고 한다. 글자 그대로, 지혜나 지식을 사랑하여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자신들이 이미 지혜나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만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소피스테스(sophistes; pl. sophistai)라고 한다. 철학자의 태도는 마치 사도 바울이 기독교의 성서(聖書)에서 고백하는 바와도 일맥상통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립보서 3:12). 철학자 야스퍼스(Karl Jaspers)도 철학의 이러한 특징을 “도상(途上)에 있음”(Auf-dem-Wege-sein)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2. 그렇다면 철학은 학 전체를 가리키는 말인가?
고대 희랍에서는 철학이 곧 학이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philosophia란 ‘지혜나 지식에 대한 사랑’이었으니까 말이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에게 있어서도, 소위 자연학(physica)으로 통칭되는 생물학, 심리학, 천문학, 기상학 등의 학문은 모두 다 철학, 더욱 구체적으로는 제 2철학(he deutera philosophia)이었으며, 제 2철학의 대상인 자연(physis)의 배후에 있는 원리들(archai)이나 원인들(aitia)을 탐구하는 학문을 제 1철학(he prote philosophia)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학 전체를 가리키던 필로소피아, 즉 철학이 이제는 많은 학문들의 중의 하나를 가리키는 말로 그 의미가 축소되고 말았다. 마치 옛날에는 책 전체를 가리키던 말인 Biblia가 오늘날에는 여러 책들 가운데 하나인 성서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여러 학문분과들 중의 하나인 철학이 하는 일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선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있다. 그 중의 한 입장은, 철학은 과거에 모든 지식의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탐구해 왔으나, 이제는 철학으로부터 개별학문들이 각각 독립해 나가서 그들이 각 영역별로 세계를 탐구하므로, 이제 철학은 직접 세계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과제가 아니라, 개별학문에서 사용하는 개념 및 방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과제라고 하는 입장이다. 예를 들면,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는 철학의 사명을 “개념의 명료화”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는 다른 또 하나의 입장은, 앞의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철학의 임무를 그에 국한하지 않고, 아직도 철학 고유의 영역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인간의 인식의 원천, 방법 및 범위 등을 다루는 인식론(theory of knowledge, epistemology), 선악의 문제, 바람직한 삶의 문제 등을 다루는 윤리학(ethics) 또는 도덕철학(moral philosophy) 그리고 형이상학(metaphysics) 등이 바로 그것이다.
□ ‘philosophia’가 ‘철학’으로 번역된 유래
◎ ‘philosophia’를 누가 왜 ‘철학’이라고 번역했나?
• philosophia가 철학이라고 번역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1877년에 일본인 서주(西周: 니시 아마네, 1826-1894)라는 사람이 영국의 철학자 J. S. Mill의 Utilitarianism [공리주의(公利主義)]이라는 책을 이학(利學)이라는 제목을 붙여 번역했는데, 이 책의 서문에 ‘philosophy’라는 말이 있어서 西周는, “본역 중 소칭철학, 즉 구주지유학야 (...) 차어원명 비로소비야 (本譯中 所稱哲學, 卽 歐洲之儒學也 (...) 此語源名 非露蘇非也”[본 번역 가운데 철학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유럽의 유학이다. 이 어원이 되는 이름은 히로소히(영어 philosophy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본에서 처음으로 ‘철학’이라는 번역이 생겼다. philosophy의 번역어로는 당시 일본에서는 ‘이학(理學)’, ‘성학(聖學)’, ‘희현학(希賢學)’, ‘희철학(希哲學)’, ‘성리학(性理學)’, ‘궁리학(窮理學)’ 등의 용어가 사용되고 있었고, 중국에서는 ‘지학(知學)’이라고 번역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 나라 모두 철학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고 있다.
◎ 한자 ‘哲學’ 자체의 의미
1) 시경(詩經)에 “명차철 이보기신(明且哲 以保其身)”(略해서 “明哲保身”이라고도 함)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사물에 밝고 도리에 통해 있다면(시대나 사회가 아무리 변하든) 내 몸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여기서 ‘哲’은 ‘도리에 통하는 것’을 말하는데, 도리에 통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것을 알아야 하므로 ‘哲’은 ‘지식’도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철(지식) + 학 = ‘여러 가지의 지식을 최고의 엄밀성을 가지고 정리하고 체계화한 것’이라는 뜻을 갖는다.
2) ‘哲’을 파자(破字)해 보면, ‘折’[꺽을 절= 扌(손) + 斤(도끼 근)] + 입 구(口)로 나눌 수 있다. 입의 기능은, 첫째로는 음식물을 섭취하는 일과, 둘째로는 말하는 것인데, 후자의 의미와 연결해서 생각하면, ‘哲’은 ‘언어분석(言語分析)’이라는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 철학적 질문과 비철학적 질문의 차이점은?
철학적 질문은 보편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죽음에 관해 물을 때, 죽음이란 무엇인가? 삶과 죽음은 어떻게 다른가? 죽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영혼은 불사(不死)인가? 등의 물음은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철학적인 물음이라 할 수 있는 반면에, 금년 한 해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었으며 어느 집 강아지가 죽었는가? 라고 묻는 것은, 보편성을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비철학적 물음이다.
□ 철학의 발생(발단, 출발)
1. 놀라는 마음[경이감(驚異感), θαυμάζειν, thaumazein]:
• 플라톤에게 있어서 驚異는 모든 철학의 시작이다:
“Μάλα γὰρ φιλοσόφου τοῦτο τὸ πάθος, τὸ θαυμάζειν: οὐ γὰρ ἄλλη ἀρχὴ φιλοσοφίας ἢ αὕτη (경이는 지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태도다. 실로 이것 외에 철학의 다른 시작은 없다).“(Platon, Theaetetus 155 d).
• 아리스토텔레스
“διὰ γὰρ τὸ θαυμάζειν οἱ ἄνθρωποι καὶ νῦν καὶ τὸ πρῶτον ἤρξαντο φιλοσοφεῖν, ἐξ ἀρχῆς μὲν τὰ πρόχειρα τῶν ἀτόπων θαυμάσαντες, εἶτα κατὰ μικρὸν οὕτω προϊόντες καὶ περὶ τῶν μειζόνων διαπορήσαντες, οἷον περί τε τῶν τῆς σελήνης παθημάτων καὶ τῶν περὶ τὸν ἥλιον καὶ ἄστρα καὶ περὶ τῆς τοῦ παντὸς γενέσεως (지금이나 그 첫 단계에서나 사람들은 놀라움 때문에 철학을 하기 시작했으니, 처음에는 눈앞의 갖가지 기이한 현상들에 대해 놀랐고 그 뒤에는 조금씩 앞으로 발전하면서 더 중요한 것들에 대해 의문에 사로잡혔는데, 예컨대 달 표면의 현상들, 태양과 별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들, 온 세계의 생성이 그런 것들에 해당한다.”(Met. I 2, 982 b 11 ff.) ⇨탈레스의 예
2. 호기심(好奇心, Neugier)
3. 회의(懷疑, doubt, Zweifel)
□ 철학의 필요성
1. 지적 욕구[호기심(好奇心, Neugier)]의 충족 ⇨ 아리스토텔레스: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형이상학 980 a 21)
2. 비판정신의 함양
3. 명석한 사유의 필요
4. 올바른 인생관⋅세계관을 확립함으로써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함
⇨ 우리가 처한 상황은 <문제상황>: ‘문제(問題)’ = problem [pro (앞) + ballein (던지다)]: ‘앞에 던져져 있는 것‘, ’앞에 던져져 있어서 우리를 가로 막고 있는 장애물‘, ’해결해야 할 것‘
⇨ 때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aporia < a (없다, 아니다) + poros (길, 방법) = 난문(難問), 무방도(無方途)]에 부딪힌다. 이때, 나의 무지(無知)가 더욱 또렷이 자각되는 동시에 참된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는 진지(眞知)에 대한 요망 (要望)이 가일층(加一層) 절실하게 된다.
□ 철학의 특성: 궁극성(근원성); 비판성; 전체성
1. 궁극성(근원성, 철저성)
• 궁극성이란, 상식 및 과학적 지식에 대하여 철저한 반성을 가한다는 것 ⇨ 철학적 사유의 이러한 특징을 곧잘 <무전제성(無前提性)>(Voraussetzungslosigkeit)이라고 함(‘무전제’란, 전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성을 가진다고 생각되는 원리에 우리의 판단이 도달함을 뜻한다).
• Paul Tillich (1886~1965): “철학은 궁극적인 것에 궁극적으로 관계한다.”
1) 존재(자)의 측면에서
• Leibniz: “도대체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존재하는가?”(Warum ist überhaupt Seiendes und nicht vielmehr Nichts?) ⇨ 존재론의 근본물음
• 존재자의 (발생)원인을 물음: 나 < 부모 < 조부모 (...) < 원조(元祖) < 신(神) (?)
• 존재자의 궁극적 구성요소를 물음 ⇨ 아르케(ἀρχή)의 문제: 물체(책상) < 목재 +못 < 분자(molecular) < 원자(atom) [원자핵[(原子核, atomic nuclei/atomic nucleus = 陽性子(proton)+중성자(neutron)]+전자(electron)] < 쿼크(quark)
2) 인식의 측면에서
• Descartes의 사고방식: ‘방법적 회의(懷疑)’
3) 가치의 측면에서
• 사람의 행위는 단순히 기계적인 인과관계에 의해 설명되는 대신에 욕망과 목적의 관계에 의해 설명된다. 사람이 자기의 욕망에 따라 무엇인가를 의도하고 목적을 세울 때, 그러한 목적을 우리는 가치라고 부른다. 욕망은 가치에 대한 욕망이다.
예) 대학교육(what for?) ⇨ 졸업증 획득(what for?) ⇨ 취직(what for?) ⇨ (what for?) (...) ⇨ 궁극적 가치(=행복?)
☞ 이때 우리는 개개의 욕망들이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가를 물어볼 수 있으며, 또한 궁극적으로 욕망하는 것이 가치가 있는가를 물어볼 수 있다.
2. 비판성(논증의 비판)
• 논리(학)를 도구(organon)로 한 비판 ⇨ 논증의 타당성(妥當性, validity) 및 정연성(整然性, soundness)을 검토한다.
3. 전체성
• 특히 철학의 한 분과인 형이상학의 경우 그러하다.
• Pythagoras: 인생은 체전(體典, Olympiade)과 같다. 어떤 사람은 기량(技倆)을 겨루기 위해 오고, 또 어떤 사람은 장사를 하기 위해 오지만, 최선의 사람은 관객이다. 이와 같이 인생에서도 천박한 사람들은 명예나 이익을 위해 뛰어다니지만 철학자는 진리를 위해 살아간다.
⇨ 체전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1) 운동선수(명예를 얻고자 함)
2) 장사꾼(돈을 벌고자 함)
3) 관객[(경기뿐만 아니라 장사꾼 및 다른 사람들과 여러 일들을 관찰할 수 있다: ‘theorein’[관조(觀照)하다] > ‘theory’[이론(理論)]
⇨ 이와 마찬가지로 인생에도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즉 명예를 목표로 하는 사람, 돈을 목표로 하는 사람, 인생을 관조하는 사람(=철학자)
• 철학자는 관객의 입장에 서서 전체를 바라보며, 그 참모습을 꿰뚫어보는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 문제를 단편적으로 다루면서 거기에 골몰(汨沒)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다른 모든 문제와 관련시켜 문제를 전체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철학 본래의 특징이다.
• 원래 철학은 학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러다가 Newton의 자연과학의 철학적 원리 이후 물리학이 독립해 나가고, 그 후 심리학 등이 분가(分家)함. 존재자를 전체적⋅궁극적으로 다루는 것이 철학이며, 어떤 특수한 부분을 따로 떼어서 고찰하는 것이 특수과학들이다(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Ⅺ 7 1063 b36-1064 b14).
•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학문이 고도로 분화되어 철학은 과학들을 종합하는 위치에 있지 못하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철학이 전체성을 지향(志向)하는 것은 잘못이며, 철학은 마땅히 특정분야에 즉, 제과학(諸科學)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분석하여 개념을 명료화하는(clarification of concepts) 일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 철학의 과제 및 분야
1) 개념의 명료화와 언어분석
2) 철학으로부터 개별학문이 분리해 나간 오늘날, 철학의 과제와 분야는?
① 언어분석철학의 입장
② 논리학,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 역사철학, 사회철학, 정치철학, 종교철학, 예 술철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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