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찬비 긋는 트렁크
박몽구
입술 선을 읽는 아이들 더디게 걷던
구화학교 골목길 지나다
처마까지 켜켜이 쌓인 트렁크들에 시선을 빼앗긴다
키 작은 집들 헐리고
몇 달째 월세 밀린 끝에
몸만 허물 벗듯 빠져나간,
쑥쑥 올라간 다세대 반지하 창가
트렁크에 다 담지 못하여
울룩불룩 삐져나온 옷가지,
멍든 구두코들
들이치는 비에 젖고 있다
덜덜 떨고 있는 트렁크를 한참 보고 있으니
찬 기운이 팔목으로 옮겨진 듯 시리다
카자흐스탄, 우즈벡에서 온 청년들
험한 일 하는 데는 이골이 났다
불룩거리는 근육으로 이삿짐을 옮기고
건설 현장 가파른 비계를 타고
외식 집 주방에서 튀기는 기름에 데여도
희망의 주소를 외며 견뎌왔다
그나마 중국발 얼어붙은 경기 탓에
일자리마저 빼앗겨
공치는 날이 많단다
몇 달째 월세를 밀린 끝에
새 보금자리 마련할 돈이 없어
최고장에 셋방을 떠나며
반지하 창가에 짐을 두고 떠났다
켜켜이 쌓인 트렁크 사이로
언 손으로 닌텐도 게임기 두드리며
이방인 친구들이 죽인 시간
얼음에 데인 듯 아프게 다가온다
개발 붐에 밀려 쫓겨난
구화학교 아이들
빈자리에 끼어 살던 외국인 청년들
트렁크만 찬비에 맡긴 채 숨어버린
마포 강변 동네
이제 누가 지키나
무거운 짐 옮기느라 휘청거리는 어깨
훤히 드러낸 채
죽죽 비 긋는 트렁크 앞에서
내 기운 어깨도 차갑게 젖는다
에어팟 블루투스 헤드셋
요즈음 들어 부쩍 외계인들이 늘고 있다
안양역 발 출근 지옥철
비명을 연방 질러도
헤드셋으로 완벽하게 귀를 덮은 외계인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달라붙는 슈트 장착한 채
밀착한 사람들 사이,
쓰윽 빠져나가
미끄러지듯 단숨에
빈자리 찾아 털썩 앉는다
그들에게만 닿는 너튜브 방송
외계와 은밀하게 소통하는 헤드셋
나도 하나쯤 갖고 싶다
다음 시그널은 무엇일까
붐비는 틈을 타
모르는 남자가 밀착해오자
젊은 여자가 획 뿌리치며 악을 써도
방음이 완벽하여 귓바퀴에 걸리지 않는다
너튜브로 블랙핑크 숏컷 돌리기에 바쁜
외계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세계
벽을 허무는 일은 노코멘트
그렇게 혼자 잘 사는 외계인들
쓰윽쓱 퍼지는 사이
슬그머니 미국을 건너
원산지 표시 페인트만 지운 채
우크라이나로 날아간 155밀리 대포알
몇 배 큰 맷집으로 돌아올지 모르는데도
누구 하나 귀 기울이지 않는다
오늘 아침에는
외계인들이 더 늘어났다
한겨울에도 찜통인 만원 전철
제자리를 확보하느라 발 디딜 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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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두 편
찬비 긋는 트렁크 / 박몽구
김명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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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6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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