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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우, 펄만, 라이드 3명의 대원이 버팀 벽으로 등반을 계속했다. 그들이 풍화되어 잘 부서지는 암벽의 난코스로 등반을 계속할 때, 사나운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선등을 교대한 라이드 대원이 눈 덮인 암벽에서 3m가량 추락을 겪은 후, 그들은 전진캠프로 하산했다. 후에 라이드 대원은 존스와 이 암벽에 다시 붙어 세번의 추락을 경험한 뒤 이 난코스를 돌파했기 때문에, 이 피치를 ‘라이드의 네메시스(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복수의 여신)’라고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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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캉슝벽의 중앙 버트레스 (핀세터 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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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우와 여성 클라이머 수잔 길러는 네메시스 위쪽, 버트레스의 최대 난코스를 개척했다. 로우가 자유등반과 인공보조 등반을 병행하며 잘 부서지는 암벽을 등반할 때, 사방에서 계속 쏟아져 내리는 낙석들이 후등자 수잔 길러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두 사람은 폭풍설을 만나 하산했다.
9월 22일 날씨는 맑았는데 버트레스 우측의 설벽에서 거대한 눈사태가 발생해 우르르 쾅쾅 벼락 치는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려, 벽 아래 5km 넓이의 권곡(圈谷)이 삽시간에 눈덩어리들로 뒤덮여 버렸다. 그 후폭풍의 돌풍이 멀리 떨어진 베이스캠프의 텐트까지 뒤흔들었고, 소용돌이치는 눈보라가 12km 거리 밖까지 날려갔다. 로우와 킴 몸 대원은 등반을 재개해 암벽 위쪽 빙벽지대까지 진출했는데, 킴 몸 대원은 위장병이 발발해 하산했다. 로스켈리는 동벽에서 이용하는 정공법이 자신의 등반 스타일과 맞지 않는 데다, 계속되는 악천후 속에서 엄청난 규모의 눈사태의 위험을 전혀 감안하지 않는 등반대장에게 불만을 품고, 등반대에서 탈퇴했다. 그는 위장병이 발병한 킴 몸 대원, 브루스 맥쿠브리 대원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제임스 모리세이는 힐러리를 후송하는 데 동행했고, 하바드는 목 부상으로 치료 중이어서, 실제로 중앙 버트레스의 루트 개척에 투입될 수 있는 대원은 8명뿐이었다. 대원들은 6,500m 지점에 제3캠프를 구축하고 ‘헬멧 캠프(Helmet Camp)’ 라고 명명했는데, 폭풍설이 몰아쳐 베이스캠프로 하산했다.
기상이 호전되어 보카드와 펄만 대원은 헬멧 캠프 위쪽까지 진출해 루트를 가로 막는 거대한 크레바스들을 발견했다. 보카드는 너무 위험한 이 루트에서 더 이상 등반을 지속할 수 없다고 말하며 등반을 포기했다. 모리세이 대원은 힐러리를 후송하고 돌아왔는데, 고소적응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그를 포함해 7명만 등반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로우와 수잔 길러가 루트 개척에 나섰다. 수잔 길러는 헬멧 캠프 위쪽에서 거대한 눈사태 자국을 보고 나서, 동벽의 난코스 등반은 매우 위험하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러나 그녀는 용감하게도 자진해서 헬멧 캠프까지 정상공격 조를 지원했다. 존스 대원이 호흡기 질환으로 베이스캠프로 하산했다.
라이차트가 최고 도달지점까지 올라와 루트를 개척했다. 그는 속도 등반을 실시해 보카드 대원이 2주일 걸릴 것이라고 예측한 거대한 크레바스들을 2시간 만에 돌파했다.
그들이 아직까지 고도 7,000m를 돌파하지 못한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등반참여가 가능한 대원은 5명뿐이고, 그중에 무산소로 8,000m 이상을 돌파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라이차트 대원뿐이었다. 라이드와 조지 로우, 라이차트 3명의 대원이 정상공격을 시도할 수 있었지만, 만일 버트레스 위쪽 고소에서 정상 공격조의 어느 한 대원이 눈사태로 부상을 당하거나 고산병에 걸리면, 대원들은 무산소 등반을 하면서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커다란 위험 속에 빠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동벽 등반을 포기했다.
1983년 미국 대 3명씩 두 차례 동벽 등정
1983년 미국 대(대장 제임스 모리세이)가 에베레스트 동벽에 재도전했다. 등반대는 1981년 동벽 등반에 참가했던 등반대장을 비롯해, 존 보일, 데이비드 치스몬드, 데이비드 쿰, 크리스토퍼 콥친스키, 루이스 라이차트, 조지 로우, 앤드루 하바드, 킴 몸, 대니얼 라이드, 제프리 타빈, 칼 토빈, 2명의 신규대원 카를로스 불러와 제이 카셀 등 총 14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1981년 등반대가 설치했던 고정로프와 피톤들을 그대로 이용했지만, 28일 만에야 중앙 버트레스(일명 로우 버트레스, 또는 아메리칸 버트레스)를 돌파했다. 그들은 위험한 루트의 두 군데 구간에 윈치(winch : 권양기)를 설치해 500kg의 장비를 끌어올려 많은 인력을 절약할 수 있었다.
9월 25일 그들은 버트레스의 얼음 걸리 위쪽에 제2캠프, 즉 핀세터 캠프(Pinsetter Camp·6,126m)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 위쪽에 제3캠프인 헬멧 캠프(6,492m)를 구축했다. 그들은 1981년의 무산소 등반대와 달리 최종 캠프 위쪽부터 정상까지 산소를 사용할 계획이었다. 다음 글은 정상 설원까지 심설을 헤치며 선등한 카를로스 불러의 등반 일지이다.
1983년 9월 26일. 나는 짐 운반을 위해 캠프 간을 반복해서 오르내린 후, 핀세터 캠프(제2캠프)에 머물렀다. 오전 내내 무전 교신이 끊이지 않았는데, 지시사항이 우왕좌왕했다. 스노 캠프(제1캠프)에 있던 대원들은 처음에 나한테 내려오라고 했다. 그런데 운반할 짐이 제1캠프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나에게 헬멧 캠프(제3캠프)로 짐을 운반하라고 말했다. 잠시 후 그들은 나에게 제2캠프에 꼼짝 말고 그냥 있으라고 말했다. 폭설이 내려 하루 종일 짐 운반은 무산되었다. 중앙 버트레스 위쪽의 설벽을 다 오르려면 10월의 맑은 날씨가 찾아 올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유리할 것 같았다.
나는 시간의 흐름에 관해 초인적으로 느긋한 자세를 취했다. 베이스캠프에서 악천후로 한 달을 허비했는데도 나는 초조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악천후 속에서 고소 등반을 강행하다가 눈사태로 동료를 잃는 것보다 좋은 날씨를 기다려 안전하게 등반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악천후 속에서 캉슝벽의 고지대는 등반하기에 정말 위험한 장소였다.
9월 27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제프리 타빈이 대원들한테서 다소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괴로움을 이기지 못했다. 나는 대원들에게 그에게 신경을 좀 써 주자고 제안했다. 한 대원이 나에게 대규모 등반대에서 대접을 받으려면 자기 하기 나름이고, 한 대원의 행동에 너무 신경을 쓰다가는 등정의 성공에 타격을 입게 된다고 말했다. 나는 당장이라도 원정대를 탈퇴하고 싶은 괴로운 심정이었다. 눈물이 났다. 대규모 원정대에서는 대원들 간의 불화가 다반사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라이차트와 나는 헬멧 캠프(제3캠프)로 짐을 운반했다. 나는 심설 속에서 선등을 하느라고 녹초가 되었다. 차후에는 선등을 교대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좋은 날씨만 계속된다면 10일이면 등정이 마무리 될 듯싶었다. 나는 그때까지 가장 튼튼한 대원들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지만, 4명의 정상 공격조에 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무슨 상관인가? 이 위험한 등반대에 참가한 영광만 해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9월 28일. 나는 오늘 무척 피곤하다. 라이차트와 나는 7,163m 지점까지 등로를 개척했다. 나는 최초로 차례가 돌아온 등로 개척의 기회에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내일 제4캠프(7,132m)로 짐을 운반할 작정이다. 나는 오늘 등반대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기회를 얻은 것을 매우 기뻐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로 처음 전진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내 생애에 최고의 행복한 날이었다.
9월 29일. 나는 이곳에 모인 대원들이 캠프 설치 장소를 두고 왈가왈부할 때 고산 등반에 관해 일종의 열등감을 느꼈다. 만일 화창한 날씨가 계속된다면 우리들은 일주일쯤 뒤에 등정 시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13명의 대원들 중에서 나는 속도 등반으로 누구보다 앞설 각오가 되어 있다. 나는 12명의 동료들과 인간관계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나는 고소에서 어떤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나는 이번 등반에서 등정을 못 하더라도 고도 기록을 세우고 싶다. 내가 짐을 운반하면서 깨달은 바는 동벽의 루트가 거봉의 등로 치고는, 고도의 등반 기술을 요하는 유례없는 루트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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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헬멧 캠프 502m. 2 피크38 7,589m. 3 로체샤르 8,383m. 4 로체 8,501m. 5 사우스콜 7,986m. 6 에베레스트 8,848m. 7 피너클 지대. 8 북동릉. 9 라퓨라 6,501m. 10 동릉. 11 트리니티 걸리. 12 1983년 중앙버트레스. 13 1988년 버트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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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우리들은 제4캠프에서 야영하고 7,680m 지점의 제5캠프 예정지까지 루트를 개척할 작정이었다. 내 몸은 고소에 잘 적응했다. 나는 가장 노련한 산악인으로 평가받지도 못한 주제에, 4명의 1차 공격 팀에 발탁되었다. 우리들이 5일 내에 등정한다면, 에베레스트를 신 루트로 등정하는 산악인의 가장 큰 꿈이 이루어진다.
10월 2일. 헬멧 캠프에 폭설이 계속 내리고 있다. 누워서 휴식을 취하거나 식사하거나 음료수를 마시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내 건강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내일 제4 캠프로 올라가 등정을 시도할 계획이다.
10월 3일. 계획이 변경되어 1차 공격조는 3명으로 줄어들어 킴 몸, 라이차트와 내가 선택되었다. 조바심 속에서 5일 후에 내 꿈이 이룩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10월 5일. 제4캠프에 정적이 감돌았다. 대원들의 건강상태 때문에 정상 공격 팀이 A팀, B팀 6명으로 변경되었고, A팀에 로지 로우, 콥친스키, 데이비드, B 팀에 라이차트, 킴 몸, 나 이렇게 세 사람이 배정되었다. A팀이 제5캠프로 출발했고, 라이차트와 킴 몸이 그 뒤를 따랐다. 라이차트와 킴 몸이 제6캠프(7,986m)를 구축하고 그곳까지 짐을 운반할 계획이었다.
나도 그곳까지 짐을 운반하기로 되었다. 텐트 밖에서는 강풍이 몰아치고 짙은 검은색 구름은 맑은 날씨를 예고하지 못했다. 날씨만 좋다면 4일 후에는 등정이 이루어질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
10월 6일. 데이비드가 폐수종 증상을 보였다. 정상 공격조는 5명으로 줄었다. 그중에서 제일 약골인 나는 그저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지 로우와 콥친스키가 등반대장과 무전기로 통화하면서 사정상 등반을 포기하겠다고 말할 때, 나는 A팀이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 라이차트와 킴 몸 외에는 등반 중에 모두 약골이 되었다.
10월 7일. 오늘 라이차트, 킴 몸, 나는 A팀이 되어 정상으로 떠난다. 라이차트가 짐을 꾸리고 있다. 날씨는 화창하다. 7,680m 지점의 제5캠프에서 고통스러운 하룻밤을 보냈다.
10월 10일. 라이차트와 킴 몸, 나, 카를로스 불러는 이틀 전(10월 8일) 에베레스트를 등정했고, 조지 로우, 대니얼 라이드, 제이 카셀은 어제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다. 우리 등반대원들 중에서 모두 6명이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아 우리의 꿈은 이루어졌다. A팀으로 교체된 라이차트, 킴 몸 그리고 나는 캉슝벽에 신 루트를 개척하며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것이다. 정상까지 등반 내내 체력저하로 꿈속을 헤매듯이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가 힘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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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정자 카를로스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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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7일 제6캠프로 진출하는 일은 평온무사하게 진행되었다. 나는 라이차트나 킴 몸과 경쟁하지 않고 달팽이 걸음으로 그곳에 도착했다. 우리들은 그날 밤 다량의 수분섭취를 위해 4~5시간 동안 차를 끓여 마셨다. 그리고 정상으로 출발하기 전 밤 1시부터 4시까지 다시 차를 끓여 마셨다. 고산병 예방 차원이었다.
나는 10시간 45분 동안 심설 속으로 루트를 개척하느라 녹초가 되고 말았다. 남동릉 상의 8,382m 지점까지 400m 못미치는 고도를 돌파하는 데 6시간이나 소요되었다. 소름끼치는 고소의 심설에 눈 도랑을 뚫는 작업은 정말로 고달픈 작업이었다. 나는 기운이 모두 소진되어 기어 가다시피 등반했다.
우리들은 남동릉에서 5명의 일본 무산소 등반대원들과 2명의 셰르파들을 만났다. 남봉으로 오르는 설사면의 루트도 심설로 인해 방심할 수 없이 위태로웠다. 힐러리 스텝을 지나니까 판상 눈사태 구간이 등장했다. 1975년 이 지역에서 실종된 영국 산악인 미크 버크를 생각하고 나는 신중하게 걸었다. 동벽 위에 매달려 있는 거대한 눈 처마들을 피하기 위해 능선의 좌측 낮은 코스를 택했다. 나는 선등을 하면서 계속 일어나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곳만 무사히 통과하면 정상이 나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정상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킴 몸과 라이차트를 기다렸다. 함께 정상을 밟기 위해서였다. 그날은 환상적인 날씨였다. 우리 셋은 크램폰으로 설벽을 밟으며 산마루에 올라섰다. 하나의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정상에 촛불을 켜놓아도 꺼지지 않을 듯했다. 그러나 내가 올림푸스 카메라를 꺼냈더니 얼어버려 작동되지 않는 것을 보고 정상의 기온이 혹한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킴 몸은 휴대용 무선 전화기를 꺼내 전진 캠프로 등정 소식을 전했다. 무전기에서 베이스캠프의 티베트 야크(Yak) 몰이꾼들이 올리는 기도소리가 묻어 들려왔다.
우리들은 사진 촬영을 위해 깃발 꾸러미를 꺼냈다. 우리들이 정상에서 산소 장비를 벗었기 때문에 동작이 매우 굼떴다. 급히 하산해야 할 생각에 정상에서 파노라마를 감상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허약한 다리 힘으로 지구 끝 너무 먼 곳까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산할 생각이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 순간 강력한 만족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산소가 부족한 상태에서 우리들의 목표가 성취되었다는 꿈같은 인식이 서서히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이제 우리들 앞에는 무사히 하산하는 일만 남았다. 정상 부근에서 실종된 미크 버크에 관한 생각이 반복되어 나타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우리들은 그날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오후 3시 25분에 하산을 시작했다. 나는 몇 개의 돌을 줍기 위해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 사이에 라이차트와 킴 몸은 시야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순간에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홀로 미아가 된 기분이 들었다. 하산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정상으로 향하는 5명의 일본 무산소 등반대원들 때문에 힐러리 스텝에서 병목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라이차트는 산소마스크에서 나오는 수증기가 자신의 보안경에 얼어붙는 것을 막기 위해 산소장비의 작동을 중단시켰다. 그리하여 그의 동작은 흡사 노인들의 동작처럼 굼떴다. 그는 힐러리 스텝을 아주 천천히 내려갔고 뒤따르던 나는 조바심을 느꼈다. 그와 내가 남봉에 도착했을 때, 킴 몸은 벌써 혼자 남동릉으로 멀리까지 내려갔다. 그는 암흑 속에 갇힐까봐 초조해서 속도를 내고 있었다.
오후 4시 반이었다. 태양의 고도는 이미 낮아졌다. 나도 시간의 압박감에 쫓기고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의 산악인이 남봉으로 올라왔다. 그는 일본대 셰르파였다. 그도 일본대원들처럼 무산소 등반을 하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서툰 영어로 질문했다.
“정상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려요?”
나는 무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어리둥절했다. 시간은 이미 늦은 시각이었고 밤의 암흑이 군림하면 기온은 영하 40℃ 이하로 떨어질 판이었다. 나는 목이 잠겨 말하기 힘들었다. 내 산소마스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산소를 사용한다면 한 시간이 걸려요. 그러나 무산소라면 몇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어요.”
나는 어깨를 들썩하며 당황함을 나타냈다. 그는 아직도 멀리서 힐러리 스텝을 오르고 있는 일본 산악인을 바라보면서 “시간이 부족해요. 시간이 부족해요”라고 자신의 생각을 토로했다. 그러나 나는 산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최종 판단을 내리는 것은 그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등정을 포기하고 하산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나는 배낭에서 보온 벙어리장갑 속에 넣어둔 수통을 꺼내서 눈 속에 놔두었다. 하산하는 일본대가 그것을 필요로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남봉에서 설사면으로 하산하기 시작했다. 설벽은 단단히 얼어붙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한 번 추락하면 제동을 거는 일이 불가능해 보였다. 라이차트는 나보다 12~15m 뒤떨어져 설벽을 등지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구조의 소리를 질렀다.
급히 뒤를 돌아보니 그는 경사도 35도의 설사면에 머리를 아래쪽으로 눕히고 큰 대자로 누워 있었다. 내가 프런트포인팅으로 그에게 달려가 그의 추락을 저지하려고 그의 몸을 덮쳤다. 나는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아서 헐떡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동안 우리는 팔다리와 아이스 액스가 얽혀서 한 덩어리가 되었다.
라이차트는 그 지점에서 벽을 마주보고 기어 내려오다가 깊이가 25cm에서 30cm 되는 크레바스에 빠지면서 무릎에서 몸이 뒤로 꺾여 있는 상태였다. 라이차트는 일어나 나머지 가파른 설사면을 마주보며 내려왔다. 나는 킴 몸이 동벽으로 내려가기 전에 그를 따라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때 남봉에서 만났던 일본대의 셰르파가 위쪽 남동릉의 설사면을 내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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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버트레스의 칼날 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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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벽으로 내려가려는 킴 몸에게로 재빨리 다가가고 있었다. 킴 몸은 혹한을 견디지 못해 혼자 하산을 고집했다. 나는 라이차트가 따라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수분 후에 라이차트가 또 다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들었다. 그가 나에게 다가와서 자신이 방금 목격한 장면에 관해 설명했다. 남동릉에서 한 사람이 그를 스칠 듯이 미끄러져 내려 남동벽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남봉에서 만났던 셰르파였다.
우리들은 사우스 콜로 내려가 일본대에 연락을 취할 작정이었다. 그때 다른 셰르파가 남동릉으로 하산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그동안 발생한 사건의 자초지종을 그에게 말해 주었다. 그는 언어장벽 때문에 우리들의 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탈진 때문인지 무감각한 표정이었다.
우리들은 괴로운 심정으로 동벽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곧 태양이 지평선으로 넘어갔다. 킴 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은 등반할 때 만들었던 눈의 홈통 속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오후 8시경에 우리들은 제6캠프의 한 동짜리 텐트에 도달했다. 텐트 속에는 2차 공격조, 조지 로우, 콥친스키, 대니얼 라이드, 제이 카셀이 있었다. 텐트가 비좁으니까 킴 몸은 라이차트와 나를 위해서 고달픈 몸을 이끌고 제5캠프로 계속 하산했다는 것이다.
그날 밤 우리들 6명은 3인용 텐트 VE 24 속에서 고통의 밤을 보냈다. 다음날 콥친스키는 등정을 포기했다. 그는 남동릉에서 추락사한 셰르파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10월 9일 2차 공격팀의 조지 로우는 대니얼 라이드, 제이 카셀보다 앞장서서 등정했다. 그는 등정길에서 하산하는 일본 산악인 엔도를 만났다. 그는 남봉 부근에서 비박했는데 그 영향 때문인지 비틀거리며 남동릉으로 하산하고 있었다. 제이 카셀과 대니얼 라이드는 조지 로우보다 여러 시간 늦게 화이트 아웃 속에서 함께 등정했다. 날씨가 급변하고 있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힐러리 스텝에서 우리가 만났던 5명의 일본 무산소 등반대원들 중에서 3명만 생환했다. 조지 로우는 힐러리 스텝에서 일본대원 한 사람이 박아놓은 아이스 액스를 회수해 가지고 내려왔다. 그는 일본의 가족들에게 그것을 유품으로 보내 주었다.
10월 11일. 나는 에베레스트를 선등한 탓으로 오늘도 탈진 상태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나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하산할 예정이다. 하산하면 귀국길에 오른다. 내 몸은 산으로 올 때처럼 건강한 상태가 아니다. 나는 어제 25cm의 적설량을 보인 폭설 속에서 하루 종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나의 심각한 탈진 상태를 보고 우리 등반대의 제3차 등정시도는 좌절되었다.
우리들은 산에서 고정자일과 고정 캠프를 철거해 원래의 자연 상태로 복구해 놓았다. 모든 대원들은 귀국길에 올랐고 대니얼 라이드와 제이 카셀만 무사히 하산하면 우리 대원 중 한 사람도 낙오자가 없게 된다.
10월 13일. 지난 며칠 사이에 우리가 에베레스트에 신 루트를 개척했다는 사실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내가 이 거대한 봉우리 정상에 섰고, 내가 최종 캠프에서 정상까지 선등했다는 명예를 얻었다. 나는 전에 그런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10월 14일. 나는 에베레스트의 동벽 등반에 혼쭐이 나서 오랫동안 다른 원정대에 참가하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로 회귀해 한 원정대에 참가해야 한다면 바로 에베레스트 캉슝벽 원정대에 다시 참가하고 싶다. 왜냐하면 모든 대원들이 건강하게 귀환했고, 한 사람도 실종되지 않았고, 게다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또한 좋은 우정을 맺었기 때문이다.
10월 18일. 화창한 오늘 나는 에베레스트의 동벽을 마지막으로 바라본다. 마칼루, 초모론조, 로체 그리고 에베레스트 모두 장엄한 풍광을 이룬다! 내가 산 밑에서 에베레스트를 아무리 바라보아도 이미 그 정상에서 내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내가 그 정상에 잠시 머물렀다는 사실은 변함없고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1988년 4명으로 구성된 영-미 합동대가 캉슝벽의 중앙 버트레스 좌측의 버트레스로 사우스콜에 도달했다. 1명은 사우스 콜에서, 2명은 남동릉의 8,600m 지점에서 등반을 포기했고 베나블스는 단독으로 등정에 성공했다.
캉슝벽 등정자 카를로스 불러는 1996년 하계에 러시아 산악인들과 K2의 북릉을 등정했고, 동계에 낭가파르바트 디아미르 벽을 등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