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감정
김효선
평생 구두에 꼭 맞는 발을 갖기란
꼬리에 새장을 달고 허공을 나는 새
살기 위해
비우라는 말인가 채우라는 말인가
부풀어 오르는 살들 까이는 이력들
살을 맞대고 살면 어떤 냄새가 내 것이 될까
신기하게도 내 구두에 꼭 맞는 발이야
슬로우 슬로우 퀵퀵 스톱― 스톱―
누워 있던 구두가 서 있는 발을 무시한다
족저근막염이나 무지외반증을 선물하며
살냄새를 다 먹어치운 휘발성 얼굴로 또박또박
다시 말해 봐 노력은 해 봤어?
어디서 고등어 썩는 냄새 안 나?
아, 어떻게 질문은 이별이 아닐 수 있을까
지루한 구두가 발을 버린다
버려진 발은
사라진 냄새를 따라 어디론가 킁킁 걸어간다
어느 악기의 고백
첫눈이 온다고 했을 때 눈을 감았다
비가 내린다고 했을 때 귀를 닫았다
오후 다섯 시부터
태양은 매일 자신이 죽은 곳으로 인간들을 인도한다*
이 세상에 우연이 없다고 생각해?
줄을 튕기면 바다거북의 심장 소리와
암소가 내지르는 비명과
산양의 창자에서 쏟아지는 핏물
12월이면 나는 사라진다 수수께끼처럼 휘파람을 불며
나는 공기의 모든 것
늦게 오는 사람이 있다
기다림 끝에 더 긴 기다림이 있을 거라는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다시는 그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달은 사라진다
살점이 아직 무릎뼈에 붙어 있다
죽는 것도 죽지 않는 것도 아닌
잊지도 못하고 놓지도 못하는
이 세상에 영원이 없다고 생각해?
이별할 때 버드나무를 꺾어 주었다는
옛사람의 눈빛으로 소금을 켠다
내지르는 비명은 달콤하다
긴 어둠에서 17년을 버티고 나와
고작 두 시간 동안 치른 정사
네 목소리를 들은 건 일주일이다
물론 옷을 벗고 있었다는 건
너만 아는 비밀
*파스칼 키냐르
― 김효선 시집, 『어느 악기의 고백』(시인수첩, 2020)
김효선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에서 태어났다. 2004년 계간 『리토피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우수교양도서’ 선정),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가 있다. 2018년 《아르코 창작기금》을 수혜했으며, 제2회 《시와경계문학상》, 제2회 《서귀포문학작품상》을 수상했다. 현재 제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