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그 가지이다.
포도나무 가지는 나무줄기에서
수분과 영양을 공급받아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듯이
우리도 예수님과 일치해야 생명을 누릴 수 있다.
주님과 일치된 삶이란
그분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다(복음).
우리가 왜 신앙인이 되었는지요?
교회에 한 발 더 들어와 봉사자가 되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요?
우리는 자아실현을 위해 신앙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또 자신의 어떤 ‘신념’을 성취하려고
교회의 봉사 직분을 맡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하느님을 위해서 뭔가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인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일 뿐입니다.
가지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나무에 붙어서 수액을 공급받아 전달할 뿐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잘남도 못남도,
높음도 낮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 구성원은 모두 다 예수님이라는
큰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일 뿐입니다.
그 말은 교회의 일은 자기의 것이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농부이신 하느님께서
포도나무를 가꾸시듯이, 우리를 돌보고 가꾸십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운 ‘신념’이나 ‘가치 체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맺는 ‘사랑의 관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살아 있는 가지가 되면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삶의 열매가 맺힙니다.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해서 ‘나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주님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포도나무의 비유’는 많이 들어 왔습니다.
줄기를 떠난 잎과 가지는 말라 버린다는 내용입니다.
뿌리에서 올라오는 수분과 영양을 공급받지 못하니 당연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과의 접촉이 결핍되면 영적 생명은 힘을 잃습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입니다.
선행을 베풀지 않을 때입니다.
성사 생활을 게을리 할 때 그분과의 만남은 고갈되고 약해집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은 공허해집니다.
인생 역시도 무의미해집니다.
인간은 영과 육으로 된 존재이기에
한쪽이 멍들면 다른 쪽도 비슷한 결과를 만납니다.
그러기에 영적 생활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육적인 삶도 허무를 느끼게 됩니다.
삶의 갈증이 찾아오는 것이지요.
왜 살고 있습니까?
당연한 이 질문에도 답하기를 싫어합니다.
이러한 종류의 질문 자체를 꺼립니다.
귀찮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자연스레 물질적인 것에 기대게 됩니다.
그러한 것을 삶의 전부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인생은 꽃밭이 아닙니다.
가시밭과 절벽이 공존하는 사막입니다.
실패와 좌절을 만나면서 ‘삶과 운명’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삶의 뿌리는 하느님입니다.
그분께 닿아 있어야 행복해집니다.
그분은 포도나무며 우리는 가지입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5)
말씀의 손질로
우리의 영혼은 정화된다네.
말씀이
영혼의 잔가지들을
쳐내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고통이라는
가시에 찔리기만 해도
쉽게 무너지고 만다네.
건강하고
풍성한 열매를 위해서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말씀의 가위질이 필요하다네.
- 김혜선 아녜스 -
첫댓글 "예수님과의 접촉이 결핍되면
영적 생명은 힘을 잃습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입니다.
선행을 베풀지 않을 때입니다.
성사 생활을 게을리 할 때
그분과의 만남은 고갈되고 약해집니다."
주님 보시기에 탐탁하지 않은
신앙생활을 반성하면서..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운 ‘신념’이나 ‘가치 체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맺는 ‘사랑의 관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