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야하> 명성왕후 김씨
조선 왕위 계승에 변수 많아 세 과정 모두 거친 유일한 왕비
10세 때 간택…세자와 혼례 8년 뒤 왕비 된 후 원자 낳아
아들 왕위 오르면서 대비까지
세자빈·왕비·대비의 세 과정을 모두 거친 조선의 왕비는 과연 몇명이나 될까?
놀랍게도 현종의 비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1642~1683년) 1명뿐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조선의 왕위 계승에 그만큼 변수가 많았던 시대상을 반영한다.
사실 조선은 27명의 왕 중 적장자 출신이 7명뿐이니, 일단 3단계 과정을 모두 거칠 수 있는 왕비의 숫자는 7명으로 제한된다.
여기에 적장자 출신 왕 중 문종의 왕비는 세자빈의 신분에서 사망했고, 단종이나 연산군의 왕비는 폐출됐다.
인종의 왕비는 후사를 보지 못했고, 숙종의 후계도 후궁 소생으로 이어졌다.
마지막 적장자 순종의 왕비 역시 후사 없이 승하했다.
명성왕후는 청풍 김씨 김우명(金佑明)과 은진 송씨의 딸로 태어났다.
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김육(金堉)이다.
명성왕후가 10세의 나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는 상황은 <효종실록> 1651년(효종 2년) 12월25일의
“아름다운 짝을 명문가에서 간택하였다.
얌전한 천부적인 자질은 사대부 집안에 예쁘게 맺혔고…
11월28일에 술을 따르며 규계(規戒)하고 세자가 친히 맞이하였다”
는 기록과 함께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의 기록으로 전한다.
별궁으로 활용된 곳은 어의궁이었다.
1659년 5월에는 현종이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한 후 왕비의 지위에 올랐다.
왕비가 된 후에는 1661년에 원자인 숙종을 낳으면서 그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현종과의 사이에서 아들은 숙종 한명뿐이었으며, 명선·명혜·명안 세명의 공주를 뒀다.
그러나 명선·명혜 공주는 일찍 죽었고, 명안공주 역시 해주 오씨 오태주에게 시집을 갔으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1659년 현종이 왕위에 오른 후 그녀의 고향인 청풍군은 부(府)로 승격됐다.
왕비 시절 그녀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남편 현종이 정치적으로 큰 업적이 없었던 상황과도 일부 연결되는 것이다.
현종은 조선의 왕 중 후궁이 1명도 없었던 왕이다.
현종에게 후궁이 없었던 것에는 현종의 건강 상태와 더불어 명성왕후의 강한 성격이 언급되기도 한다.
그녀의 강한 성격은 아들인 숙종이 왕이 된 후에 일정 부분 드러나게 된다.
1674년 8월 현종 승하 후 아들인 숙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명성왕후는 대비가 됐다.
당시 숙종의 나이가 14세로, 원칙적으로는 명성왕후의 수렴청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숙종은 왕세자 수업을 오래 받아 친정(親政)을 할 수 있게 됐다.
숙종 초반의 정국이 남인 중심으로 운영돼 서인의 지지를 받는 명성왕후의 수렴청정을 무마시킨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정치적 야심이 컸음에도 아들 즉위 직후 수렴청정을 하지 못한 명성왕후는
1675년 홍수(紅袖·붉은 소매를 한 궁녀를 지칭함)의 변(變)이 일어났을 때 정치에 깊이 관여하는 모습을 보인다.
명성왕후가 숙종을 또 한번 불편하게 한 사건은 장희빈을 궁궐 밖으로 쫓아낸 일이었다.
<숙종실록>에는
“장씨는 나인으로 뽑혀 궁중에 들어왔는데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
경신년 인경왕후가 승하한 후 비로소 은총을 받았다. 명성왕후가 곧 명을 내려 그 집으로 쫓아내었다”
고 명성왕후가 장희빈을 궁 밖으로 쫓아낸 정황을 기록하고 있다.
서인의 정치적 입지를 갖고 있던 명성왕후는 남인의 지원을 받는 장현의 조카 장희빈을 미워했다.
장희빈은 명성왕후가 1683년 승하한 후에 1686년 다시 숙원으로 책봉돼 숙종 곁에 올 수 있었다.
명성왕후는 42세를 일기로 창경궁 저승전에서 승하했고,
무덤은 남편 현종의 숭릉 곁에 쌍릉 형식으로 조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