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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6: 55. 강도를 잡는 것 같이 - 마 26: 56. 선지자의 글
마 26: 55. 강도를 잡는 것 같이 -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
예수는 자기를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뭉치를 가져온 무리에게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칠 때에는 잡지 않았음을 상기시켰다.
1]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강도'(*, 레스테스)라는 말은 조직적이고 폭압적인 강탈자라는 뜻 외에 극단의 민족주의자들의 추앙을 받는 혁명가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Josephus).
예수께서 하시려는 일이 몇몇의 동지를 규합해서 로마나 유대 당국을 전복하려는 것이 아니다. 은밀한 곳에서 모의를 하는 흉기를 든 '강도'와는 전혀 다른 분이셨다.
늘 공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가르치셨으며, 그 가르침의 내용도 '사랑과 평화'였다. 그분은 악한 세력에 대해서는 비겁하게 침묵하지 않으셨다. 원수들을 무서워하지 않으시고 성전을 정화하셨다.
그것이 타락한 무법자요 강도의 행동과 같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되실 때 흉악한 두 강도 사이에 달리심으로(27: 38) 로마와 유대 당국으로부터 끝까지 강도 취급을 당하셨다.
* 마 27: 38 -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 내가 날마다
이 문구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가르치신 기간이 공관복음이 말해 주는 것보다는 훨씬 더 오랜 기간이었을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의 공생에 기간을 길게 잡은 요한복음은 이 같은 사실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 주고 있다.
3]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마태는 예수께서 성전에 '앉아' 가르쳤다고 강조한다. 마태복음의 다섯 설교 가운데 세 설교가 예수께서 앉아서 하신 설교이다.
* 마 5: 1 -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 마 13: 1-2 – 1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 마 24: 3 –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마태는 예수의 가르치는 권위를 그가 '앉아' 가르쳤음을 강조하고 있다. 유대 랍비들이 교훈을 베풀 때 대개 앉아서 하기 때문이다.
마 26: 56. 선지자의 글 -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 하니라. )
주께서 잡히시던 그 밤, 그의 제자들은 다 그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그들은 주님을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다고 고백했던 자들이었다(33, 35절). 그러나 그 결심과 고백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 신변의 위협을 느꼈을 때 두려워하여 다 도망치고 말았다. 그들은 비겁하고 연약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그들만의 연약이 아니고 바로 모든 사람의 연약, 곧 오늘 우리의 연약이기도 하다. 우리도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실패하고 말 것이다.
1]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구약 예언의 성취를 강조하는 전형적인 문구이다.
* 마 1: 22-23 –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 마 2: 15-18, 23 –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 마 13: 34-35 – 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35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 마 21: 3-5 –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마태가 '선지자'라고 말할 때 스가랴(13: 7)의 예언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54절). 그러나 '선지자의 글'이란 율법서와 성문서를 완전히 배제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서는 모세와 다윗도 '선지자'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며, 또 그 예언들을 베푼 자가 왕이나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주로 예언자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 슥 13: 7 -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2]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31절에서 예수께서 예언하신 것이 성취되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35절) 주님 곁을 떠나지 않겠다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모두 떠나 버렸다.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벌거벗은 채 도망간 청년의 행적을 기록하여 그때 제자들의 도피 행각이 얼마나 신속하고 황급히 진행되었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주님은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침묵하시는 동행(同行)만을 기원하며 체포자들의 손에 끌려가게 되었다.
* 막 14: 51-52 –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 요 18: 12-13 – 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3] 주님을 버린 제자들
예수님께서 원수의 무리에 잡히신 것은 자발적인 행위였다. 얼마든지 피할 힘과 대적할 능력이 있었지만 그 길이 그리스도로서의 구원 사역을 감당하는 길이었기에 순순히 그들에게 잡혀 주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진리)를 모르는 제자들은 다 주님을 저버리고 비겁하게 도망을 갔다.
(1)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① 악인은 의인의 피 흘림을 즐겨한다.
예수님 앞에는 '무리'들이 있었다. 여기에 모인 무리들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유대인들과 로마의 병정들이다.
그들은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다. 헤롯과 빌라도는 서로를 견제하는 불편한 사이였으나 그들은 악을 도모하는 일, 즉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있어서는 의기가 투합되었다.
악인은 악을 행하는 일에 있어서는 손발이 척척 맞아 무죄한 자의 피를 기뻐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의인의 고난이 있다. 그러나 악인의 결국은 영원한 죽음뿐이다.
② 세상 권력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강도를 잡는 것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55절) 주님을 잡으러 왔다. 분명히 검은 로마 병정들이 가졌을 것이고 몽치는 대제사장들의 하속들이 지녔을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그들을 보낸 상관들의 예수님에 대한 분노를 말해 준다.
그곳에 있던 제자들은 살기등등한 그들의 위세에 이러한 사실을 감지하고 더 있다가는 자신들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버리고 다 도망을 쳤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주님보다 세상 권력을 무서워하면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또 주님보다 자기를 사랑하면 긴급한 상황이 닥칠 때, 주님을 버리고 도망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따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2) 주님께서 대항치 않았기 때문이다.
① 주님은 그들에게 항거하시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폭도들을 물리칠 수 있는 큰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예수님은 창조주로의 권능을 소유하신 분이다. 그 자리를 무력으로 피하시려는 마음만 있다면 능히 그리하실 수 있었다.
그러므로 주님이 허락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주님을 잡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대항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강자의 태도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막중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 많은 것을 참으셨다. 제자들은 이러한 주님의 깊은 마음을 몰라 주었다.
② 제자들은 자기의 기대가 무너지자 낙심하고 도망을 갔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 되시길 간절히 바랬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서 혁명을 일으켜 로마의 정권을 물리치시길 원했고 지금도 폭도들과 대항하여 그들을 굴복시키기를 원했다.
만일 주님께서 그들과 대항하셨다면 제자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을지도 모른다. 베드로는 혼자서라도 폭도들을 물리치려는 마음으로 칼로 말고의 귀를 쳐 떨어뜨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자발적으로 폭도들에게 잡히셨다. 그때 그들은 자신들의 꿈이 무너짐을 느꼈고, 그래서 낙심하여 달아났다.
이처럼 주님을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그들은 큰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내 뜻을 포기하고 내 뜻을 세우기 위해서는 주님 곁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후자의 길을 택하였다.
(3)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① 예수님의 메시야성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칼과 몽치를 가지고 강도를 잡듯 자신을 잡으려고 다가온 폭도들에게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56절)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메시야성에 대해 확실히 몰랐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눈을 가려 진리를 훼방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어리석고 불행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② 그러므로 그들은 믿음이 약해졌다.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자 많은 무리가 주님을 따랐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시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핍박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시자 그들은 하나 둘 주님을 버리고 떠나갔다.
그러나 제자들은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음을 고백하고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담대히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고백과 장담은 한낱 허구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확고한 믿음이 없었다. 믿음은 시련을 통하여 증명이 된다.
제자들이 장담했던 믿음은 어려운 시험과 고난에 무기력한 믿음이었다. 믿음은 고난과 연단을 통하여 성장한다. 그러한 과정이 없는 믿음은 나약하고 무능한 믿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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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는 자기를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뭉치를 가져온 무리에게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칠 때에는 잡지 않았음을 상기시켰다.
💖사랑하는 마음은 건강을 가져오고 행복을 안겨 줍니다.
사랑이 꽃피고 행복이 넘치는 웃음 가득한 날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는 자기를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뭉치를 가져온 무리에게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칠 때에는 잡지 않았음을 상기시켰다.
설교 감사합니다.
예수는 자기를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뭉치를 가져온 무리에게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칠 때에는 잡지 않았음을 상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