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2일(수)
아침에 일어나니 날씨가 좋다.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콜택시를 불러 영실오름으로 갔다. 한라산 기슭에서 중턱까지 한참을 올라간다. 영실탐방로 주차장에서 또 2.8킬로를 더 올라가니 등산로 입구가 있다. 붐빌 때는 택시만 올라갈 수가 있고 자가용은 위 주차장에 자리가 나는 경우만 갈 수가 있다고 한다. 등산로 입구에 도착하니 이른 시간이라 한적하다. 입구에 서성이는 여자분들이 있는데 보니 일본사람들이다. 태용이가 유창한 일어로 대화를 한참 한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탐방로 입구로 들어섰다. 이곳은 해발 1280미터다. 등산로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 소리와 새들의 지저귐에 기분이 상쾌하다. 등산로 옆으로 싱싱한 푸른 가지를 뻗은 아담한 구상나무들 사이로 나목이 된 주목들이 앙상한 팔을 벌리고 서 있다. 1.5킬로 정도 오르니 오른편 앞쪽으로 커다란 병풍바위가 보인다. 병풍바위 옆으로 암벽 능선이 힘찬 기세로 아래로 이어지고 있다. 비스듬히 비치는 아침 햇살에 드러난 암벽들의 골격이 마치 서로 힘자랑을 하는 것 같다. 영실기암(靈室奇岩)은 한라산을 대표하는 곳이며 영주십이경 중 하나로 봄꽃, 여름 녹음, 가을 단풍, 겨울 설경 등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모습과 울창한 수림이 어울려 빼어난 경치를 보여주는 명승지이다. 지금은 4월인데 이곳은 기온이 낮아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한라산 정상의 남서쪽 산허리에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들이 하늘로 솟아 있고, 석가여래가 설법하던 영산(靈山)과 흡사하다 하여 이곳을 영실(靈室)이라 일컫는데, 병풍바위와 오백나한(오백장군)상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병풍바위를 바라보며 약 2킬로를 올라가니 윗세오름 대피소에 도착한다. 제법 넓은 오목한 공간에 경사를 따라 나무데크로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학생들이 여러 명이 모여 단체 사진들을 찍고 있다. 경상도 전라도에서 수학여행 온 고등학생들이다. 이곳은 해발 1700미터다. 한라산 백록담 정상 남쪽벽이 눈앞에 보인다. 이전에는 이곳을 통과해서 정상에 오를 수 있었으나 지금은 안전 문제로 등산로를 폐쇄했다고 한다. 남벽분기점 가까이 가니 계곡에는 눈이 아직 녹지 않고 덮여 있다. 준비해간 빵과 우유로 요기를 하고 어리목코스로 하산했다. 약 두 시간 내려가니 버스가 다니는 중산간 길이 있다.
240번 버스를 타고 중문사거리에 내려서 다른 버스로 갈아타고 하모3리에서 하차하여 택시를 타고 알뜨르비행장으로 갔다. ‘알뜨르’는 ‘마을 아래에 있는 너른 벌판’이란 뜻인데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농사지으며 살던 주민을 쫓아내고 인근 주민을 심지어 어린이들까지 강제 동원하여 비행장을 만들고 비행기 격납고를 만들었다. 일제는 이 비행장을 전초 기지로 삼아 약 700km 떨어진 중국의 난징을 폭격하기 위해 오무라 해군 항공대의 많은 전투기를 ‘알뜨르’에서 출격시켰다. 그러나 1938년 11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하자 오무라 해군항공대는 중국 본토로 옮겨졌고, ‘알뜨르비행장’은 연습 비행장으로 남았다. 비행장 규모는 약 80만 평에 이르고 활주로는 남북 방향으로 길이 1,400m, 폭70m이었다. 안내 표지판 왼편으로 격납고가 있고 그 안에 모형 비행기를 만들어 놓았다. 철사로 엮은 비행기에는 방문자들이 쓴 글이 적힌 리본이 빽빽하게 걸려 있다. 이 격납고는 모슬포 바닷가의 자갈과 모래를 철근, 시멘트와 혼합해서 만들었는데 규모는 폭 20m, 높이 4m, 깊이 10.5m이다. 일제는 1943년에 이러한 격납고 20기를 만들었는데 현재는 19기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격납고를 둘러보고 표지판을 따라 왼편 농로를 따라 가다 보면 지하벙커가 거의 원형 상태로 보존되어 있고 그 인근에 비행장 관제탑 터를 볼 수 있다.
알뜨르비행장 남쪽에 섯알오름이 있는데 그 입구에는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추모비’와 사건경과를 기록한 ‘불법주륙기’가 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 1천 여명의 제주도민들이 예비검속되어 계엄군에 의해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한밤중에 무참하게 총살되어 이름모를 산야에 암매장되거나 검은 바다에 수장되었다. 그중 제주 모슬포 경찰서에서 예비검속으로 구속된 선량한 양민 250여명은 이곳에서 학살되어 탄약고였던 구덩이에 암매장된 것이다. 학살 후 군은 소문을 듣고 찾아온 가족들이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게 해서 6년이 지난 1956년에야 가족들이 ‘만벵디 유족회’를 결성하여 수습을 시도했으나 신원을 확인할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한꺼번에 안장하고 ‘백조일손 묘역’을 조성할 수밖에 없었다. 섯알오름 언덕에는 일본군이 만든 고사포 진지 두 개가 보존되어 있다. 이는 미군 항공기의 공습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미군 폭격기 B29에 대응할 수 있는 최신형 고각으로 사정거리가 20km에 달했다고 한다. 섯알오름을 넘어가면 바로 앞쪽으로 송악산이 마주 보이고 그 왼편 해안 절벽 아래에는 일본군이 만든 17개의 동굴진지가 있는데 일제강점기 말 패전에 직면한 일본군이 해상으로 들어오는 연합군 함대를 향해 소형 선박을 이용한 자살 폭파 공격을 하기 위해 구축된 군사시설이다. 지금은 안전사고 위험으로 가까이 가지 못하게 막아 놓아서 멀리서만 동굴 입구만 바라볼 수 있다. 인근 마라도 선착장 옆 ‘해녀의 집’에서 자연산 해삼, 멍게, 소라 등 해산물 한 접시와 막걸리로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바로 앞바다에 마주 보고 떠 있는 형제섬이 손에 잡힐 듯하고 탁 트인 먼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택시를 타고 모슬포 호텔케니로 와서 샤워를 하고 지난번에 갔던 인근에 있는 ‘호정이네 갈치’에서 갈치조림과 갈치구이로 저녁을 맛있게 먹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