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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2 / 배진기 목사
올해로 6.25전쟁 발발 64주년을 맞았습니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전쟁 중입니다. 잠시 정전했을 뿐입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 159차 회의에서 정전협정을 맺은 후 61년이 되었습니다. 종전(終戰)이 아니라 정전(停戰)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은 7천명의 한국전 참가 전사자들을 추모하면서 2009년부터 정전 협정일을 “한국전 참전 용사 정전일”로 정하고 조기를 게양하고 기념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정전으로 평화가 주어졌지만 아직은 임시적인 평화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대한민국은 진정한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전쟁 도발의 위험을 느끼고 살고 있으며 특별히 핵무기를 개발하여 그것을 빌미로 협박을 하고 있는 북환 공산 괴뢰집단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76년 이북 5도청의 통계에 의하면 이산가족의 수가 1천만이었는데 2014년 현재 이산가족은 약 500만으로 추정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숫자의 오차도 있겠지만 이산가족의 절반이 가족을 못 만난 채 죽었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 대한민국에 진정한 평화와 화평이 주어졌다면 이산가족의 비극이 청산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대한민국은 아직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의 몰지각한 인사들이 화평을 깨는 원인자인 북한 공산 당국과 평화를 말하고 대화를 해야 한다며 정신 나간 짓들을 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화평을 위해서는 거짓 평화와 화평을 말하면 안됩니다. 화평을 위한 전쟁과 싸움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파괴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와 발전을 위한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거짓을 말하는 자는 거짓을 깨고 굴복 시켜야지 타협하면 나 자신까지 거짓에 물들게 되는 것입니다.
철저한 반공의식으로 무장하고, 우리가 하나 되어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고 가장 중요한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전쟁은 우리끼리의 분쟁과 다툼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한 마음 되어져 거짓과 기만과 파괴의 세력을 굴복 시켜야 합니다. 강한 나라를 만들고 더 발전된 사회를 이루어 국론의 분열이 없이 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저는 참된 화평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접목해 보았습니다.
1. 참된 화평을 누리기 위해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화평과 평안을 원합니다. 그래서 아무런 분쟁이나 시끄러움이나 다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화평과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인 조건이나 환경 그리고 육안으로 보여지는 관계가 평안하다고 진정한 화평입니까?
성도된 우리는 세상이나 환경이나 인간관계의 화평을 추구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마귀에게 속는 일입니다. 가장 중요한 화평과 평안은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평안을 구합니다. 그래서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과 같이 “가시적 만사형통”을 구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평화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궁극적인 목표와 그 역사에 대해 요한복음10:10에서 단호하게 말씀 하셨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깨어서 영적 전쟁을 해야 합니다. 다투고, 싸우고, 투쟁해야 합니다. 편안하게 신앙생활 하려고 하면 거짓 평화에 속아서 다 빼앗겨 버리고 맙니다.
사도바울은 진정한 하나님과의 화평을 위해 영적인 싸움을 싸울 것을 강력하게 권면하였습니다(에베소서 6:10-18).
하나님과의 화평을 위해 우리의 씨름을 포기하지 맙시다. 십자가의 군병들이 됩시다.
2. 참된 화평을 누리기 위해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요즈음은 자격증의 시대입니다. 무슨 일에든지 라이센스를 취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격증을 취득하려고 애를 씁니다.
심지어는 돈을 쓰는 데에도 자격증을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이 놓여져 있어도 그것을 누리거나 사용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시설이 준비되어 있고 내가 충분한 돈이 있어도 회원권이 없으면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데에도 자격증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먼저 성도의 자격증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1절의 서두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 성도의 자격증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의롭다하심’의 자격입니다. 성도는 무엇보다 '의'의 자격증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에 그 분의 축복을 누리려면 무엇보다 '의'의 자격증이 필요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6:9에서 불의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성도의 의의 자격증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집니다. 로마서 3:28에도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창세기15:6에도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것을 믿을 때에 바로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2:16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고 말씀 하였습니다.
아무리 회원권을 가지고 있어도 그 회원권에 대한 약관이나 규정을 알지 못하면 회원권의 권리를 마음대로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가 무엇을 말함인지 바로 알지 못하면 의의 자격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의’란 헬라 원어로 ‘디카이오스’라는 말로 다음의 세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 ‘의’란 죄가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지만 에베소서 1:7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
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름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은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죄 사함은 적당한 처리가 아닙니다. 완벽한 처리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44:2에서
우리의 죄를 도말하신다고 했으며 이사야 43:25과 예레미야 31:34에서는 우리의 죄를 기억지
도 아니하겠다고 하셨고 이사야 38:17에서는 우리의 죄를 주의 등 뒤로 돌리신다고 하셨습니
다. 이사야1:18에서는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완벽한 죄 사함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
리는 언제나 죄를 해결하는 열쇠를 받은 복된 백성들임을 깨닫고 당당해야 합니다.
당당한 죄인임을 확신하고 철저한 회개의 삶을 삽시다.
요한일서 1:9-10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
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
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의란 나 자신 스스로 갖는 당당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2. ‘의’란 마귀의 참소를 받지 않는 자격을 말합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을 속여서 스스로 넘어지도록 유혹할 뿐이지 우리를 절대로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도 뱀을 통해서 인간을 유혹하여 스스로 선악과를 따먹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마귀는 사람을 참소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참소란 거짓과 허위로 남을 헐뜯고 비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의인 욥을 하나님께 참소하여 큰 시험에 빠지도록 하였습니다. 욥기2:1-6에 마귀의 참소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마귀의 참소가 아무런 효력이 없고 또 우리를 참소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권세가 참소하는 마귀를 쫓아내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12:10 에 우리를 밤낮 참소하던 마귀가 쫓겨났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나 자백하면 그 죄가 사함 받기 때문에 마귀의 고소는 참소가 되므로 하나님 앞에 마귀의 고소는 효력을 상실합니다.
또한 요한복음 1:12 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는 마귀의 참소를 받지 않는 권세입니다. 이처럼 의란 마귀 앞에서 우리가 갖는 당당한 자격을 말합니다.
3. ‘의’란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는 자격과 권세를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는 자격과 권세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3:12에서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고 말씀과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과 당당히 나아감을 얻었습니다. 이처럼 의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갖는 당당한 자격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 스스로 죄 사함 받은 당당한 자격을 인정하고 마귀 앞에서 그의 참소가 아무런 힘이 없음을 인정하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므로 의의 자격증을 마음껏 누리는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참된 화평을 누리기 위해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야 합니다.
진정한 화평은 주권을 가지고 있고 힘이 있는 자가 먼저 베풀어야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 주권자이며 전능자이신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화평의 길을 여셨습니다. 우리와의 화평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의 자격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에베소서 2:14 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라고 말씀 하였고 에베소서 2:16-18에서는 십자가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우리에게 평안을 전하셨다고 말씀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1:20 에서도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고 말씀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화평을 누리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고 두 번 반복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자고 권면하였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사도행전4:12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요한복음16:23-24에서 "(23)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4. 참된 화평을 누리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소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명예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영광을 추구합니다. 아무리 개처럼 돈을 벌어도 종국에는 그 더러운 이름을 씻으려고 돈을 씁니다. 누구도 부끄러운 성공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탐욕에 눈이 멀면 우선 소유하고 보겠다고 다른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나중에 수치를 가리려고 더 큰 수치를 행합니다.
성도는 영광스러운 자격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큰 기대를 가지고 삽니다. 그 기대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기대입니다. 이 기대란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지만 그 약속이 너무나 확고부동하고 크고 영원한 것이기에 우리는 이 땅위에 살면서 언제나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누리며 사는 여유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바로 천국의 영광입니다. 부활의 영광입니다. 고린도후서 4:16-18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 말씀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란 중에서도 즐거워합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큰 영광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며 누릴 수 있는 힘! 인내함으로서 환란을 즐거움으로 이기는 힘! 연단의 결과를 알기에 오히려 연단을 기쁘게 받아들여 자신을 새롭게 하는 힘! 이 힘이 바로 누구의 것입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즐거움으로 누리며 살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백성들 바로 우리 안디옥 교우들의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셔서 우리를 영광스러운 백성들로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증하고 그 영광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늘의 영광을 얻은 우리는 당연히 모든 범사에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삶이 즐거움이 넘쳤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고난과 역경 속에서 언제나 자신의 삶을 즐긴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로마서8:32의 말씀을 묵상하며 범사에 기대에 넘쳐서 즐겁게 삽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할렐루야!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있는 그대로 enjoy 합시다.
결론을 맺습니다.
6.25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정전 중이므로 우리는 긴장하고 하나 되어 공산당의 세력을 굴복 시키므로 진정한 화평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성도로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립시다. 그러기 위해 항상 의의 자격증을 확인하고 삽시다.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삽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나에게 주어진 삶을 즐겁게 삽시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며 삽시다.
예수로 말미암는 은혜
롬 5:1-4 / 김광일 목사
토니 캠폴로 (Tony Compolo)목사의 신앙 간증록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캠폴로 목사가 젊은 시절에 학생들의 ‘캠프 카운슬러’로 상담사역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학생들의 신앙캠프에서 신앙부흥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일의 발단은 ‘빌리’라고 하는 뇌성마비 학생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빌리를 노리개로 삼았습니다. 온몸을 비틀면서 더듬더듬 천천히 말하는 빌리의 흉내를 냈습니다. 그런데 빌리를 저녁 기도회 인도자로 세우면서 일이 일어났습니다. 기도회는 매일 저녁 각 숙소에서 열리며 학생들이 인도하는데, 그날은 빌리를 인도자로 세웠습니다. 빌리의 더듬는 모습을 보려고 학생들이 재미로 세운 것입니다. 기도회 시간이 되자 빌리가 입을 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사랑해요… 나도…예…수…님을…사랑…해요.” 이 짧은 말을 하는 데 3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웃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빌리의 말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그곳에 모인 학생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살기로 결단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학생들의 신앙부흥을 위하여 캠폴로 목사는 많은 예산을 들여 유명한 운동선수와 슈퍼스타들을 캠프에 초청했습니다. 그러나 슈퍼스타들이 못한 일을 뇌성마비 소년 빌리가 해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로 말미암아 살아야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게 하시는 예수의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는 로마에 세워진 교회에 보낸 바울의 서신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믿는 믿음의 도리를 기록하였습니다. 특히 로마서 5장은 칭의 즉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은 의롭다함의 근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로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단어입니다. 의로워지는 것은 인간의 어떠한 행위로 되는것이 아닙니다. 선으로도 아닙니다. 윤리나 도덕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는 기쁨의 근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로 말미암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2절에 “예수로 말미암아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가까이 나아가는 길은 예수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아무나 원한다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예수의 소개가 필요합니다. 유일한 안내자인 예수를 의지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로 말미암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을 통해 ’예수로 말미암는 은혜‘가 어떠한 은혜라고 증거합니까?
첫째로 화평을 누리는 은혜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높이 150m의 거대한 십자가 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스페인은 내전으로 인해 오랜 세월동안 동족들 간에 피를 흘렸습니다. 스페인 총통 프랑크(Francisco Franco)는 임종을 앞두고 국민들에게 요청하였습니다. “우리는 한때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눈 적이 있지만 모두 같은 스페인 사람들이 아닙니까? 바라기는 이제 총부리를 겨누어 원수가 되었던 지역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화해의 삶을 살아가는 표현으로 마드리드에 높은 탑을 세워주기 바랍니다.” 국민들은 어떤 탑을 세워 화해와 평화의 상징으로 만들까 고민을 하다가 십자가를 세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십자가야말로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로하고 화해의 삶을 살아가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높은 십자가 탑을 세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마다 과거의 상처와 미움을 치유하고 용서하는 화평의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여기의 ‘화평을 누리자’는 원어로 ‘에이레넨 에코멘’인데 ‘하나님과 화평을 가지고 있는 중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은 인생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관계에 이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화평의 원어는 ‘에이레네’입니다. ‘전쟁의 종식으로부터 오는 평화’를 의미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번영을 가져오도록 법과 질서가 잘 유지되는 상태를 에이레네로 인식하였습니다. ‘샬롬’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라면 ‘에이레네’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뤄지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기에 환난 가운데도 소망으로 인내하며 즐거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로 말미암는 은혜의 삶이 아닙니까?
둘째로 믿음에 서 있는 은혜
라이언 화이트(Ryan White)는 열세 살 때 혈우병을 앓아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수혈이 잘못되어 후천성 면역 결핍증 (AIDS)에 걸렸습니다.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라이언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도 형제도 특히 의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웃음을 보였고, 모두에게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오히려 염려하는 부모를 위로하며 즐겁게 지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방송 매체를 통해 미국 전역에 전해지게 되었고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전 국민이 라이언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유명 인사들은 앞을 다투어 소년을 찾아와 병문안을 했습니다. 당시 대통령 레이건, 팝 가수 마이클 잭슨도 방문하여 위로했습니다. 라이언 화이트는 5년을 더 살고 18세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아버지는 죽어가는 라이언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아무것도 너에게 해준 것이 없구나. 아빠가 어떤 선물도 줄 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그러자 아들이 대답합니다. “아니에요. 어떤 사람도 아빠가 준 선물을 주지 못했어요. 아빠는 천국 열쇠의 선물을 주셨어요. 예수를 소개해 주셨고, 예수를 믿게 해주었고, 영생까지 얻게 해주셨어요. 이보다 위대한 선물이 어디 있어요? 감사해요, 아빠!” 눈앞의 죽음까지도 뛰어넘는 믿음이 라이언 소년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믿음에 굳게 서 있는 은혜의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의 ‘믿음으로 서 있는’은 원어로 ‘피스테이 엔 헤 헤스테카멘’인데 ‘모든 환경 가운데 이미 소망을 가지고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성도는 의롭다 하심의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가지고 믿음에 서 있으므로 즐거워하여야 합니다.
믿음에 서 있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며 ‘모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한다’라는 의미입니다. 또 끊임없이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부디 믿음에 굳건히 서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마치 바다와 같습니다. 인생들은 바다를 항해하면서 죄악의 폭풍과 파도에 시달려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평안을 얻는 길은 안전한 항구에 닻을 내리는 일입니다. 예수 믿는 믿음이 바로 항구에 닻을 내리는 일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은 은혜로 믿음에 든든히 서서 안전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영광을 바라는 은혜
이탈리아 조각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Buonarroti)가 길을 가다가 버려진 대리석을 발견했습니다. 주인에게 왜 대리석을 버렸냐고 물었더니 쓸모가 없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내 눈에는 대리석 안에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안고 있는 형상이 보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쓸모없어 버린 돌이 그에게 놀라운 형상으로 보인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그 속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인 피에타 형상을 보았습니다. 그에게는 하늘의 빛과 구름이 보이고 하늘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평소에 눈에 뜨이지 않던 어떤 것이 어느 순간 확대되어 삶을 지배합니다. 그 대상이 사람일 수도 있고, 개나리나 민들레일 수도 있고, 어떤 장면일 수도 있습니다. 초승달이 유난히 빛을 내거나 노을에 물든 하늘이 갑자기 환하게 빛을 내기도 합니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를 통해 이런 영광스러운 경험들을 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영광의 경험을 해야 합니다. 만약 이런 경험이 없다면 형식적 그리스도인에 머물게 될 것이며 진정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습니까? 비 한 방울이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로 말미암는 은혜로 살아갈 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의 ‘영광을 바라고’는 원어로 ‘엘피디 테스 독세스’인데 ‘소망을 안고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광중에 계시는 주님을 만나 뵙는 소망입니다. 초대교회 스데반 집사는 이를 체험했습니다. 돌에 맞아 죽기 전에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를 보았습니다. 그 영광을 바라보며 돌에 맞아 죽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로 말미암는 은혜가 영광으로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천국 영광에 대한 소망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천국입니다. 성도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하나님의 성품과 진리를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그것을 소망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런 복이 예수로 말미암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의 소망을 붙잡고 마귀의 공격을 이겨나가시기 바랍니다.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 박사는 페니실린의 발견으로 인류 역사에 공헌을 한 인물입니다. 사람들이 질문했습니다. “박사님, 당신이 발견한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당연히 페니실린이라고 대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플레밍 박사는 한참 생각하더니 입을 열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평생 가장 위대한 발견은, 나는 죄인이지만 예수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진리이신 예수를 알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록 많은 것을 알지 못하고 많은 것을 소유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를 소유하고 있다면 이미 복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살아가시렵니까? 세상 물질입니까? 쾌락입니까? 명예입니까? 권세입니까?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예수로 말미암는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믿음에 서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그 은혜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쁨이 충만한 삶
로마서 5:1-4 / 문기태 목사
미국에 세인트 루이스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여행중이던 한 변호사가 그곳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날이 주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인 그는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디에 교회가 있는지 알 수가 없어 길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 순경한테 물었습니다. "여행중에 예배를 드릴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어디에 교회가 있습니까?" 순경이 상세하게 일러주는대로 가보니 정말 교회가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많이 받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그 순경을 또 만났습니다. 변호사는 그 순경에게 또 물어 보았습니다. "당신이 일러준 교회를 찾아가면서 보니까 다른 교회가 많던데 하필 맨 끝에 있는 그 교회를 소개해 주었습니까?" "저는 참된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교통정리를 하면서 예배를 드리러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더니 그 교회로 드나드는 사람들의 얼굴이 제일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교회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어떤 교회의 수준을 정해주는 것은 그 교회가 얼마나 교인들이 많으냐?가 아니고 그 교회의 교인들이 얼마나 부자냐?도 아닙니다. 그 교회에 상류층인사가 얼마나 많이 있느냐?도 아니며 그 교회가 얼마나 멋진 건물을 가졌느냐?도 아니라 그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표정은 억지로 꾸며지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한국교회가 처음 이 땅에 들어온지 오래지 않았을 때 어떤 사람이 한국이 여러 종교를 평한 글이 있습니다. 거기보면 재밌는 부분이 있는데 불교를 상갓집에 비유했습니다. 그저 나무아미타불이요 인생무상만을 강조하다보니 다 죽고 다 없어진다는 것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니 상갓집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교는 마치 제사집과 같다는 것입니다. 효도를 한답시고 밤낮 제사만 지냅니다. 유교방식대로 살다보면 일년내내 정성을 다해 제사지내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잔칫집같다고 했습니다. 언제나 찬양소리가 그치지 않습니다. 예배가 감사의 축제입니다. 신자가 되면 사람들의 얼굴이 밝아집니다. 행복해집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행복과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식욕이나 성욕, 소유욕, 지배욕, 지식욕같은 것의 충족에서 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받으면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된 새로운 사람이 된 감격에서 큰 기쁨을 얻고 그 기쁨은 영원한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살5장15절에 보면 항상 기뻐하라 하시며 이는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슴하십니다. 항상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약속된 축복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항상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1.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면 가능합니다.(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 5:1) 하나님과 화평하는 것이 기쁨의 뿌리입니다. 하나님과 등지고 원수가 되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죄짓고 하나님을 거스리면서 살며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순간적인 기쁨은 만날 수 있지만 또다시 공허해지고 근심이 그를 누룹니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잠 14:13)'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기쁨의 근본은 하나님과 화목하는데 있습니다. 눅15장에 보면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자기가 불행한 원인이 재산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친구를 다 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해진 진짜 이유가 아닙니다. 후에 그는 깨닫습니다. 자신이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버지품을 떠나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잘되건 못되건, 가난하건, 부유하건 그것은 기쁨과 상관없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둘째 아들은 곧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 품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그가 재산을 다 탕진한채 거지가 되어 돌아왓으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냄새나는 모습으로 가진 것 하나도 없이 돌아왔으나 기뻐하며 그를 끌어안고 즐거워합니다. 실패한 자식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잔치를 크게 열고 새옷과 새신 가락지를 내어주며 사람들에게 돌아온 자식을 자랑하며 즐거워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성경의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성공한 모습을 하나님께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채 성공하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하나님을 떠난채 세상적으로도 실패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실패한 모습도 괜찮습니다. 거지가 된 초라한 모습도 괜찮습니다. 가난해서 헌금 한 푼 할 처지가 되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직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진정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를 반겨 맞으십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니'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면 선물을 주십니다. 그것은 '의롭다하심'입니다. 지금까지 죄인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죄인이라는 딱지가 붙어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회개하고 믿으면 그 딱지가 떨어지고 의인이라는 새 딱지가 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된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죽어도 좋은 것 아닙니가? 당장 이대로 죽어도 주님을 반갑게 대할 수 있는 하나님과 화평한 가운데 있는 사람, 이 사람에게만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 화평이 없으면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됩니다.
2절에 보면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합니다. 이 은혜에 들어감을 입었을때에만이 새로운 세계에서 살게 되고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열리고 밝은 미래를 바라보며 오늘을 살때 참된 즐거움이 넘쳐난다는 말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된 자리에 참여할 소망이 있는 자만이 쉽게 식어지지 않는 기쁨이 솟아나는 행복한 삶이 약속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기쁨이 있습니까? 이 기쁨이 여러분안에서 인생을 풍성하게 하는 생명력으로 역사하게 있습니까? 이 기쁨이 여러분안에서 위대한 창조력으로 역사하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까?
아직 그 기븜이 없으시다면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점검해 보시고 즉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2. 환란가운데 있어도 충만한 기쁨이 가능합니다.(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성도의 기쁨은 평안할 때 분 아니라 환란을 만날때에도 가능합니다. 환란이 무엇입니까? 질병을 만났을 때, 사고를 만났을 때, 실패를 만났을 때, 극히 가난해 졌을 때, 인간관계가 깨지고 상처를 받았을 때 등등. 환란을 만나면 대부분 근심하고 슬프고 속상한데 어떻게 넘치는 기쁨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미 내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고 그분은 나를 최선의 삶으로 만들어 주시려고 일하시고 있다는 것을 믿으면 두려워할 필요도 사라지고 염려도 사라집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의 등에 업혀 있든지 아빠의 품에 안겨 있으면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 돌의 한 복판에 있어도 울지 않습니다. 아주 높은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그를 보호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안전합니다. 그러나 별로 위험하지 않은 곳에 있어도 부모없이 홀로 있으면 불안하여 우는 것입니다. 부모의 보호밖으로 밀려나면 아이는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으면 무슨 일을 만나도 걱정이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목적아래 하나님의 계획아래 만나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오직 필연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게서 하나의 작품을 만들려고 때로는 깍으시고 때로는 파내시고 때로는 불속에 넣으시고 때로는 물속에 담그시는 것입니다. 결국 아름다운 최대의 작품이 탄생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성격이 고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래 믿었으면서도 말을 함부로 하여 이 사람 저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어떤 사람은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도 아주 구두쇠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숙한 사람같은데 별 것 아닌 일에 화를 잘 냅니다. 예수를 믿어도 성품은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예수를 닮은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데 이것은 성경공부를 통해서도 설교를 통해서도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환란을 통해서 만들어 가십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으로 바꾸십니다. 당시에는 아프고 괴롭지만 환란은 아주 유익한 것입니다. 정말 감사한 것입니다.
바울과같은 위대한 사람도 육체에 가시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때문에 겸손해지고 그것때문에 바울에게서 더 큰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환란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품격을 낳고 품격은 소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고난을 만나도 저주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때로 환란을 만나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고난도 나에게는 필요한 축복이다. 하나님께서 이 고난을 통해 나를 인도하시는 중이다. 라고 믿으십시오. 야고보사도는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고 권면하십니다. 왜? 믿음의 시련이 큰 구원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쁘십니까? 환란이 찾아와도 여전히 기뻐하실 수 있으십니까?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그 기쁨이 모든 근심을 이기고 어리석음을 이기고 절망을 이기고 여러분으로 승리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은혜가 이깁니다
로마서 5:1-11 / 이윤재 목사
3월 셋째주, 사순절의 한 복판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이긴다고 생각합니까? 지난 주 차를 몰고 심방가다가 급하게 서점을 들렀습니다. 평소에 사고 싶었던 책이 있었는 데 마침 서점이 보여 차를 주차해야 하는 데 주차장이 어디인지 안 보입니다. 한 5분간 돌다가 겨우 자리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주차하는 데 아무래도 불안해서 쪽지 하나를 남겼습니다. “5분간 헤매다 주차합니다. 금방 나옵니다. ”. 그리고 한 마디 더 붙였습니다. “내 죄를 사하소서.”
그런데 웬일입니까? 정확하게 5분만에 나와 보니까 스티커가 붙어 있습니다. 경찰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했는 데 쪽지도 한 장 붙어 있습니다. 이렇게 씌여 있었습니다. “5년간 이 근처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스티커를 붙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말이 중요합니다. “시험에 들지 말고 악에서 구하소서.” 둘 다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목사고 또 한 사람은 경찰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내 죄를 사하여 주소서”하며 믿음으로 주차하고, 한 사람은 “악에서 구하소서”하고 사명으로 스티카를 붙였습니다. 그날 누가 이겼습니까? 경찰이 이겼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매일 이런 싸움을 합니다. 누가 이길 것인가? 누가 이길 것인가의 질문에 대해 우리는 보통 “강자와 약자”를 구분합니다. 강자는 힘있는 자, 약자는 힘없는 자입니다. 강자와 약자의 대결에서는 보나마나 강자가 이깁니다. 문제는 어떤 강자며 어떤 약자냐입니다. 강한 것은 강팍한 것과 다르며 약한 것은 부드러운 것과 다릅니다. 가장 강한 자가 누구입니까? 강팍하지 않으면서 강하고 약하지 않으면서 부드러운 자입니다. 긴 겨울을 지나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봄이 강한 겨울을 이긴다”. 우리의 몸을 보면서 배우는 것도 있습니다. “단단한 이보다 부드러운 혀가 강하다”. 자녀를 키우는 어머니들을 보십시오. 억센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부드러운 어머니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럴까요? 우리는 항상 강한 자가 되는 것을 꿈꾸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가 약해서 못쓰시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강해서 못씁니다. 우리는 사실은 약한 데 강한 척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실은 강한 데 약합나다. 이것을 성경은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힘을 다 쓰시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삽니다.“은혜”가 아닙니다. 강한 데 힘을 안씁니다. 오히려 져줍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우리 모두는 약합니다. 약할 뿐 아니라 죄인입니다. 두 종류의 죄인이 있습니다. 자신이 정말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과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있습니다. 로마서가 말하는 메시지가 그것입니다.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것이 로마서의 주제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롬1-3장을 통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착하게 살아도 그것이 우리를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이유를 수영의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수영을 전혀 못하는 사람이나, 조금 하는 사람이나, 조오련같은 수영선수도 태평양을 건너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하나님의 의를 힘입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을 통헤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들어왔습니다. 마치 은행의 계좌이체처럼 내 통장에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의로우심, 하나님의 도우심의 은혜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운 자로 되었습니다. 여기까지가 3장입니다. 여러분은 로마서의 이 말씀을 인정하시나요?
이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롬5:1절 앞부분입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이것이 로마서 3장의 요약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은혜는 얻는 것이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거저 받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이 아닙니다. 영어로 하면 achieve가 아니라 receive입니다. “얻었으니”, 이 말의 문법적 형태는 완료형입니다. 완료형이란 과거의 어떤 시점에 완성된 동작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에 관한한 우리가 더 이상 할 일은 없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얻었습니다. 이 말의 주체도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롬3:24절이 잘 요약했습니다.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기서도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주까지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롬5장으로 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뀝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다면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이렇게 묻는 사람들에게 롬5장은 세 가지 놀라운 결과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첫째 하나님과 평회를 누리게 되었다. 1절을 다시 볼까요?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들어와서 우리에게 생긴 첫 번째 변화는 하나님과 화평를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갖게 되었다는 말은 과거에는 하나님과 싸웠다는 것 아닙니까? 과거에 나쁘게 지냈던 사람이 잘 지내는 것을 “평화”, “화평”이라고 합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감, 반항, 반역이 죄입니다. 반목하던 사람끼리 평화를 이루려면 많은 대가가 필요합니다. 세계 제2차 대전때 영국의 채벌린 수상이 1938년, 뮌헨에서 히틀러와 평화조약을 맺습니다. 유럽의 먹구름으로 떠오른 히틀러와 어렵게 평화조약을 맺고 영국으로 돌아온 챔벌린른 우리 시대의 평화를 이루었다고 자랑스럽게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1년 후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했고, 유럽은 전쟁의 도가니속으로로 들어갔습니다. 평화는 평화조약 맺었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거짓 평화를 말할수 있고 평화를 운운하면서 전쟁할 수도 있습니다.
평화는 반드시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이루어집니다. 성경에서 “화목”이란 말은 “교환”을 의미하는 경제적 용어입니다. 시장에서 상품을 구매할 때 동일한 대가를 지불하고, 환전소에서 돈을 바꿀 때 동일한 가치로 바꾸는 것을 “화목”이라고 합니다. 가령 우리가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만원을 건네받는다고 할 때 만원짜리가 없으면 5천원짜리 하나와 천원짜리 4장, 500원짜리 두 장을 받으면 됩니다. 5천원짜리, 천원짜리가 없으면 5백원짜리 동전 20개를 줘도 됩니다. 같은 가치로 바꿔야 교환입니다.
롬3:25절을 볼까요?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여기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세우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밎바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가치와 우리의 가치가 같다는 것입니다. 묻습니다. 예수님의 가치와 우리의 가치가 같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피조물인 우리와 같은 가치입니까? 상식적으로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고 우리를 예수님과 맞바꿔주셨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강도이며 살인자인 바라바를 바꾸어 바라바는 살리는 예수님은 죽으신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신적 교환”이라고 부릅니다. 십자가에서 바라바같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교환된 것입니다. 그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불평등한 교환이고 불합리한 교환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죽고 우리는 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상처받고 우리는 나음을 얻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형벌을 당하고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입니까? 6절부터 10절에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롬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연약한 자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는 아직도 죄인입니다. 롬5:10,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에 대해 원수입니다. 연약하다는 말은 우리 몸이 약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을 아는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죄인은 우리 존재의 근본입니다.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원수.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다는 뜻입니다. 시. 에스. 루이스의 말대로 우리는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해야 할 반역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우리를 그 자신과 맞바꿔주셨습니다. 롬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해 죽으셨도다”. 8절, 우리가 여전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10절, 우리가 원수되었슴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롬5:10,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화목하게 되었은즉”, 이것이 화평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을 믿습니까? 화목되었을 뿐 아니라 그 화목을 누리는 사람이 된 것을 믿습니까? 다같이 “누리라”. 하나님과 화목되어 우리는 그 앞에 예배하고 그에게 기도하고 그와 교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첫 번째 축복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다.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에게 주신 두 번째 축복이 있습니다. 2절입니다. 롬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서 “들어간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세 번 밖에는 쓰이지 않았습니다. 로마서에 한번, 에베소서에 두 번 나옵니다. 이 말은 백성이 왕앞에 나갈 때 쓰는 말입니다. 엡2: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왕궁에 가면 의전담당이 있습니다. 그의 안내로 왕앞에 나아갑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나 왕궁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격을 갖춰야 하고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은 왕이신 하나님께 나갈 자격을 얻었고 허락도 받았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허락받았습니다. 다시 2절을 보시겠습니까? 롬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에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께 서겠습니까? 오직 믿음으로 섭니다. 오직 은혜로 섭니다. “은혜 아니면”이라는 찬양을 아십니까? 가사가 너무 좋습니다. “은혜 아니면 나서지 못하네. 십자가의 그 사랑 능력아니면 나서지 못하네. 은혜아니면 나서지 못하네. 놀라운 사랑 그 은혜아니면 나서지 못하네”.
그 은혜는 그냥 은혜가 아닙니다. 2절,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 왜 “서 있는 은혜”입니까? 이 말은 사전에 보면 “견고히 서다”(stand fast), “온전히 서다”(stand whole)라는 말입니다. 은혜가 우리를 서 있게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오직 은혜안에서만 우리는 섭니다. 그래서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시 2절입니다. 롬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에 “영광”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영광”은 하나님앞에 마지막으로 서게 될 때 경험하게 될 찬란한 미래의 축복입니다.
고등학교때 앙드레 지드가 쓴 <전원 교향곡>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1890년대 스위스의 한 불어권 지역을 배경으로 한 소설입니다. 주인공은 목사와 제르트뤼드라는 이름을 가진 소경인 소녀입니다. 목사가 소녀를 사랑해서 눈먼 소녀에게 알프스의 초원, 화사한 꽃들, 백설이 뒤덮인 산의 장엄한 경관 등을 설명해 줍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납니다. 이 소녀가 근처 도시에서 어떤 안과의사의 수술로 시력을 회복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소녀는 말로만 듣던 모습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감격해서 소리칩니다. “목사님, 목사님 덕분에 시력을 되찾고 보니, 아, 제 앞에는 제가 지금껏 꿈꾸어 왔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졌어요. 저는 햇살이 그렇게 찬란하고, 빛이 그렇게 눈부시며, 하늘이 그렇게 광활할 줄은 결코 상상하지 못했어요.” 재가 어릴 때 그 소설을 읽으며 하나님앞에는 그렇게 찬란한 영광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천국을 이야기하는 사람마다 공통점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때 바울이 말한대로 우리는 찬란한 영광을 볼 것입니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나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확실하게 볼 것입니다. “그 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주의 영광 이곳에 가득해. 우린 서네. 주님과 함께. 기도하며 우리는 전진하리. 모든 열방 주볼 때까지” 아멘.
환란을 이기게 하신다.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에게 주신 세번째 축복이 있습니다. 3-4절입니다. 롬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여기서 “환란중”이라고 말합니다. “환란중”이 무엇입니까? 환란이 진행중인 때입니다. 태풍으로 말하면 태풍의 눈속에 있을 때입니다. in the midst of the tribulation, “환란중”의 “중”은 “가운데”입니다. in이 중요합니다. 환란이 오기 전에는 누구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환란이 지난 후에는 누구나 잊어 버립니다. 그러나 “환란중”입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환란중“입니다. 누가 환란을 좋아할까요? 아무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좋아할 이유가 있습니다. 환란 이후의 유익입니다. 다시 3-4절입니다. 롬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란이 주는 축복이 있습니다. 환란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낳습니다. 연쇄적입니다. 일단 우리가 믿음으로 환란을 받아들이면 그 환란은 수레바뀌처럼 굴러 갑니다. 환란은 인내를 낳습니다. 인내는 견디는 힘입니다. 인내는 연단을 낳습니다. 영국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또 있습니다. “폭풍은 참나무가 더욱 깊이 뿌리를 박도록 한다.”
이 모든 것은 은혜로 말미암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로 말미암았습니다. 자, 다시 보죠.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은례로 구원하심으로 첫째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다. 둘째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게 되었다. 셋째 환란이 있겠지만 환란중에서라도 인내와 연단을 통해 승리하게 하신다. 이것이 은혜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이 아닙니다. 로마서 전체를 보면 더 큰 그림이 나옵니다. (도표)
롬1-3장 롬3:21-31 롬 5장 롬 6장 롬 7장 롬 8장
죄 은혜(의) 하나님과 평화 예수님과 연합 죄로부터 자유 성령안에서 승리
여러분은 고구마 캐보셨습니까? 고구마는 줄기를 잘 잡아당기면 고구마들이 줄줄이 따라 나옵니다. 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3장 21절 부터입니다. 그 은혜가 임하면 어떻게 됩니까? 오늘, 5장, 하나님과 평화를 이룹니다. 6장, 예수님과 영적으로 연합됩니다. 7장,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8장, 성령안에 승리하게 됩니다. 이 네 가지는 고구마줄기처럼 줄줄이 일어나고 연속적으로 일어납니다. 이 뿐 아닙니다. 8장으로 갑니다.
롬8:1-11 8:12-17 8:18-25 8:26-27 8:28-30 8:31-39
정죄가 없슴 양자가 됨 아들의 영광 기도의 응답 합력하여 선을 이룸 최후승리
8장에 이르면 모든 승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받으면 정죄가 없습니다. 다만 두려워 하는 아들이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양자가 됩니다. 그 아들은 영광의 아들입니다. 그 아들이 기도하면 아버지는 무엇이나 응답합니다. 가끔 나쁜 일도 있지만 그 일은 결과적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최후 승리에 이릅니다.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7절, 롬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은혜는 환란과 연단을 통해 최후 승리까지 가며 은혜는 은혜를 통과하여 최후 승리로 갑니다.
이것을 롬5장은 “은혜의 왕노릇”이라고 말합니다. 롬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은혜가 왕노릇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롬5장은 은혜가 승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두 개의 독특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더욱”과 “넘치게”입니다. 롬5장에는 “더욱”이란 단어가 몇 번 나오는지 살펴보십시오. 9절, 롬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더욱”입니다. 10절, 롬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5장 15-17절에 세 번이나 더 나옵니다. 롬5:15,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17절입니다. 롬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더욱”, 은혜은 간신히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더욱”이깁니다. “넘치게 붓다”라는 말이 또 있습니다. 롬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붓다. 부었다”는 말은 여름 하늘에서 소낙비가 쏟아지는 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무더운 날 바케스에 물을 가득 채워 머리위에 붓는다면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그렇게 부으면 어떻게 됩니까? 흘러 넘칩니다. 나를 적신 물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갑니다. 예수님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더욱, more & more, 하늘에서 소낙비가 부어지듯 우리의 몸과 역사에 overflow, 차고 넘칩니다. 그래서 누구도 어거할 수 없는 능력이 됩니다.
은혜가 이깁니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세상에서 가장강한 자가 가장 약한 자된 은혜가 세상을 이깁니다. 그리고 우리도 억지로 강한 자가 아니라 스스로 약한 자로 살 때 세상을 이깁니다. 은혜가 이깁니다.
소망을 이루어라!
로마서 5:1-4 / 최인근 목사
사람에게는 그 누구에게나 꿈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이 종은 그래서 어린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을 만나면 제일 먼저 “네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봅니다.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자신의 꿈을 고백하게 하고 그 꿈을 스스로 이루어 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지난 주간에 한국에서 온 친구 김학기 목사님과 같이 터코마에서 살고 있는 박윤식 목사님 가족들의 초청으로 식사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예지, 상준, 예인이와 함께 하며 아름다운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우리 교회에 있을 때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상준이가 벌써 청년이 되어 이번 9월에 UW에 공부하러 온다는 소리에 참으로 놀랐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장래 네 소망이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는 서슴없이 대답하였습니다. “엔드류 선생님과 같이 변호사가 되겠습니다.”고 말입니다. 참으로 가슴이 뿌듯하였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최의룡변호사가 롤 모델이었다고 하면서 그와 같은 선생님을 따라 자신도 로스쿨에 가고 장차 변화사가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고 청년들이 야무진 소망을 품고 순간마가 기도를 받으며 자라나고 있습니다. 보기만 하여도 든든하고 기대가 가는 귀한 청년들입니다. 하지만 꿈은 꾼다고만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 장애도 많고 견제도 많으며 넘어야 할 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너무나도 당당하게 이 꿈을 이루는 방법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롬 5:3-4 /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오늘은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소망 성취에 관한 진리를 가슴으로 받고 우리 모두가 다 가슴에 품은 꿈과 소망을 하나씩 둘씩 이루어 가는 벅찬 인생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 시대에 가장 큰 불행은 젊은 청년들과 청소년들의 가슴에 꿈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학에 진학을 하였는데도 아직 무엇을 전공으로 선택해야 할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 주변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년 동안에 끝내야 하는 전공을 수시로 바꾸며 졸업을 늦추고 있는 현실 또한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꿈이 없는 인생은 죽은 인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공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꿈에 대한 생각들을 한 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신의학자 A. H. Maslow - 소망은 인간의 가치관을 좌우한다.
신학자 Paul Tillich - 소망은 인간에게 살아야 할 의미를 제공한다.
현대철학가 Huson Smith -소망은 만족한 생활의 기본적인 구조다.
이렇듯 소망은 인간 존재의 의미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의 공통분모는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살아야 할 소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어제오후 4시에도 한국 울산에서 46살의 소방공무원이 울산대교에서 바다로 뛰어 내려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공무원이 되겠다고 밤낮으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생들이 백만 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소방공무원인 그는 왜 그렇게 허망하게 생명을 버렸을까요? 삶에 의미와 소망이 없다면 다 그렇게 허망하게 자살이라는 최악의 길을 선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반듯한 소망을 안고 비록 힘든 세상일지라도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는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결국은 두고 가야 할 허무한 것들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소망은 이 땅에서도 하늘나라에서도 진정한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참된 소망을 품은 자라면 그 어떤 시련과 고통이 앞을 가로막는다 할지라로 끝까지 성취하는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소망을 이루는 세 단계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롬 5:3-4 /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오늘은 우리 모두가 다 이와 같은 과정을 잘 뛰어 넘어 진정한 소망을 이루며 살아가는 복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환난의 과정을 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환난”은 곧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고통이라는 놀라운 것을 주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고통이라는 특수한 것을 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문자 그대로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너무나도 악합니다. 죄를 밥 먹듯이 저지르면서도 전혀 죄의식이 없습니다. 남을 이용하여 자신의 유익을 만들어 갑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당연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곳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섞여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환경에서 꿈을 실현하며 소망의 내일을 기대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현실입니다. 그렇잖아도 허덕이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고통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뜻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버지 대라와 함께 우상장사를 하며 대사 없이 살아가고 있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셨습니다.
창 12:1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우리는 단순하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셨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부모와 친척과 본토를 떠나갔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심층적으로 우리 자신들에게 적용해 본다면 그 모든 과정이 “고통” 바로 그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오늘날과 같이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그 때에 이렇게 부모와 본토를 떠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양식이 풍족한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사랑하는 아내마저도 빼앗겨야만 하는 끔찍한 고통을 당하여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 같은 역사가 없었다면 그는 아리따운 아내를 타국에서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조카 롯과 헤어져야만 하였습니다. 외롭고 힘든 이민생활 속에서 유일한 핏줄이었고 위로가 되었던 롯과의 이별은 그야말로 늙어가고 있었던 아브라함에게는 더 없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이 백 살에 기적 같이 얻었던 아들 이삭을 번제로 태워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 아들마저도 바쳐드려야만 했던 처참한 고통의 늪에 빠져야만 했었습니다. 소망과 약속의 땅 가나안을 얻기 위해 아브라함이 당해야만 했던 고통이 바로 이러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대한 소망을 이루는 길은 이렇듯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던 것입니다.
옛날 요단 계곡에 세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세 나무는 각기 갖고 있는 꿈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첫째 나무는 "나의 꿈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이 되는 것이야. 그렇게 되면 평생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을 테니까." 둘째 나무는 "나는 사람들을 섬기고 싶어. 나의 몸으로 큰 배를 만들어 푸른 바다를 가로지르며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것 말이야." 셋째 나무는 "나는 크고 굵게 자라서 지나가는 사람이 편히 쉴 수 있도록 그늘을 제공하고 싶어." 얼마 후 세 그루의 나무는 이름 모를 도끼에 의해 잘려지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는 성전의 제단이 된 것이 아니라 어느 집의 냄새나는 말구유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큰 배가 아니라 갈릴리 호숫가에 머무는 작은 고깃배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사형수를 처형하는 십자가 형틀로 만들어 졌습니다. 세 그루의 나무들은 그들의 짧은 생각 끝에 그들의 생이 무의미하며 실패 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심한 좌절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먼 훗날에, 첫째 나무는 심히 냄새나고 누추한 말구유가 되었으나 어느 날 밤 가장 거룩한 성스러운 아기 예수님이 눕혀지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갈릴리 호숫가의 조그만 고깃배가 되었으나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그 배에 오르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어떤 큰 배보다 더 큰 명예를 얻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나무는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매달리신 십자가가 되어 그 후 영원한 믿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요단 계곡에 서 있던 세 그루의 나무들은 한때 자신들의 꿈이 좌절되는 듯한 고통을 겪었으나, 그 고통 이후에 참으로 영광이 넘치는 기쁨을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통 이후에 반드시 그 이상의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실패와 고통을 넘어서 계시는 하나님을 알고 믿고 바라볼 때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놀라운 기쁨과 감격을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인내의 과정도 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환난을 오히려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환난을 통해 더욱 단단해 지는 인내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환난을 무섭게 이겨낸 단 한 사람을 들라면 우리는 서슴지 않고 욥을 들 것입니다. 그는 한 순간에 아들 일곱과 딸 셋, 그리고 당대에 가장 부자로 살았던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몸마저도 병들어 누워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와 같은 모든 고통과 환난을 이겨낸 욥을 인내의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약 5:11 /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그렇다면 우리는 욥이 어떻게 인내의 사람이라는 영광스러운 별명을 듣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가 환난을 당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처럼 환난이 인내를 만들어 내고 하나님의 더 없는 놀라운 축복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한다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역시 그 엄청난 환난과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싸워 이겨내고 오늘 우리들이 아는 아브라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 모든 환경을 참아내고 견뎌내고 싸워내며 기다릴 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참지 않고 이루어 낼 수 있는 승리는 없습니다. 모든 역사와 승리의 배후에는 길이 참고 견뎌내는 인내가 있었음을 우리는 우리들의 경험과 역사를 통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참아내는 인내의 사람들을 욥과 같이 귀하게 여시시고 축복으로 보상해 주시는 것입니다.
링컨이라는 사람은 인내심이 뛰어나게 강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변호사 개업을 하고 있던 때의 일입니다. 어떤 사건의 변호 의뢰를 받고 법정에 나가 보니, 당시 유명한 변호사이던 스탠튼이라는 사람이 같은 변론을 담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교만한 스탠튼은 법정에서 링컨을 가리키며, 저런 시골뜨기 변호사와 나를 한 자리에서 변호하라고 하는 것은 내게 대한 모욕이라고 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그 많은 사람 앞에서 그런 망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링컨도 사람인데 분한 생각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단 한 마디의 반박도, 대꾸도 없이 묵묵히 서서 그 모욕을 참아냈습니다. 그것이 그의 위대한 점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인내심은 확실한 소망을 토대로 하지 않고는 생기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인내심으로 이어가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사도 바울은 힘 있게 부르짖었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확신하는 사람만이 현재의 고난을 참을 수가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고 우리는 오늘 이 괴로움을 이기고 살아갑니다. 이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날, 주님과 함께 길이 살 것을 믿고, 인내의 아름다움으로 일관하여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도 이와 같은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인내로 승리할 수 있도록 연단 받고 훈련 받기를 기대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축복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약 1:2-4 /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연단의 과정을 넘어야 합니다
연단은 잘 달련되는 것을 말합니다. “비 온 후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을 참아내고 견디면 굳어진 땅과 같이 잘 달련된 날이 썬 칼과 같이 믿음의 사람, 성공하는 사람, 소망을 성취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참아내고 견디며 결국에는 기적 같이 아들을 얻었고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아 이 땅에서 최고의 영광을 누리는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 1:1 /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사도 바울도 이와 같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감명을 받았고 그의 영적인 삶을 좋은 귀감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의 인내와 연단을 친히 기록으로 남겨 두었던 것입니다.
롬 4:18-20 /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숱한 환난을 인내로 이겨내고 마침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우뚝 서서 꿈에도 그리던 소망을 이루어 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인 가나안이었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소망의 항구를 향해 달려가는 천국의 백성들입니다. 과연 우리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와 같은 소망을 우리는 어떻게 이루어 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불행하게도 꿈은 야무진데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피와 땀을 흘리기는 꺼려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꿈은 꿈으로만 남고 현실은 늘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고향과 본토와 아비와 친척들을 떠나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그럭저럭 남들이 살았던 것처럼 살다가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을 순종하여 소망을 품고 비록 고통과 시련이 넘쳐나는 새 인생이었지만 그 소망의 길을 쫓았기에 그가 떠난 4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모두의 가슴에 살아 있는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진정한 하늘의 소망을 가슴으로 품고 비록 아브라함과 같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친다 할지라도 끝까지 견디며 단단해지는 연단의 종들이 되어 후손들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그런 멋들어진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소망을 품고 사는 길이요 또한 그 소망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귀한 날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올라오신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아브라함과 사도 바울 같은 진정한 소망을 이루는 하나님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구원받은 성도의 참된 삶
로마서 5:1-11 / 성흥모 목사
우리는 지금 사순절 세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부활 공동체였습니다. 모든 주일을 작은 부활절로 지키면서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오늘과 같은 완전한 교회력은 없었다고 하지만 모든 주일을 작은 부활절(Little Easter)로 지키고 있었기에 기쁨과 감사와 승리의 축제적인 분위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심한 핍박을 받아도 주일이 되면 우리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면서 승리의 감격을 누리며, 힘과 위로를 얻고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부활절에 세례를 주었습니다. 옛날 교부들은 부활절은 세례를 베푸는데 가장 의미 있는 날이라고 말했습니다. 세례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세례를 받아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하는 기간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6세기 경에 오늘과 같은 여섯 주간의 사순절이 확정되었는데,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는 실제로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부리면서 회개하였고, 흙에서 온 몸이요, 다시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피부로 체험하기 위하여 땅위에 꿇어앉아 기도를 드렸습니다. 40일 동안의 사순절을 지키는 것은 몇 교회들이 움직여 시작된 것이 아니라, 325년에 모인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40일의 사순절을 지킨다고 결의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 회의 주역이었던 유명한 아타나시우스의 편지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기간 많은 사람들이 금식하면서 기도하였고,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면서 경건하게 보냈습니다. 세상적인 오락을 금하고 경건생활에 힘을 썼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였습니다. 개인적인 회개의 시간을 가졌고,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으며 자신을 부정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으며, 우리 주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나를 위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기독교가 국교가 되고 보니 성인이 되어 세례받아야 하는 이들이 적어지고 거의 모두 유아세례를 받게 되므로 세례를 준비한다는 처음의 의도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모든 성도들이 참여하면서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게 되었고, 모든 성도들이 경건 생활에 힘을 쓰면서 참회하는 기간으로 보내게 된 것입니다. 사순절은 세례 받기 위하여 준비하던 것으로부터 성도들의 참회와 화해로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사순절의 중요한 용어로 등장한 것이 "참회자의 화해"라는 말이었습니다. 고난주간에 성찬식과 세족식을 거행하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성목요일에는 세족식을 거행하면서 그동안 교회로부터 책망을 들었거나 책벌을 받아 근신하고 있던 사람, 심지어 출교당하였던 사람들이 교회 앞에 나와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면 회중들이 그들을 받아들이는 화해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것을 '참회자의 화해'라고 불렀습니다. 사순절은 개인적으로 죄를 회개하는 절기로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순절에는 회개, 기도, 화해, 금식, 성숙을 위한 절기로 보내야겠습니다.
오늘은 로마서5:1-11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구원받은 성도의 참된 삶"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느냐 하는 질문을 가질 수 있으며, 또 하나 구원받은 성도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냐 하는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이 이룩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진행하신 구원의 역사, 구속사를 보면 하나님이 아들 독생자를 보내어 대속의 피를 흘리므로 율법이 요구하였던 의를 이루시는 이 구속의 진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구속의 진리를 받아들일 때,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롬5:1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이신칭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내가 어떻게 하여 구원을 받았는지,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기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데, 그러면 누구를 믿었다는 말이며, 무엇을 믿었기에 의롭다 하심, 곧 구원을 받은 것입니까?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떤 자리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까? 죄로 인하여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의 백성으로,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요5:24에 의하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아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을 주셨습니다.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 앞에 갔을 때에 심판 받지 아니하고 상급 받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영원한 멸망 지옥에서 생명의 자리, 천국으로 옮겨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본래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었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은 모든 자범죄로 인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고, 심판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놓이게 되었다고 확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3:5-6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요한복음3:36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었다고 합니다.
로마서2:5의 말씀처럼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하는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쌓는도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하지 아니하고 세상 중심으로 나가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매맞을 일만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였고, 진노가 머물게 되었고, 계속하여 진노를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아담에게 명령하시기를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고 했습니다. 반드시 죽으리라, 정녕 죽으리라, "범죄하는 영혼은 죽으리라"(겔4:18),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6:23)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신다고 하셨으면 반드시 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와 상관이 없으시고, 하나님은 진리의 광채요, 빛이시기에 어둠이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범죄하여 어두움에 쌓여 있었고, 그 속에 진리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는 연약하였습니다. 경건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의인은 없는데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 죄인이요, 다 하나님과 원수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의 실상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느 정도였습니까? 우리의 죄악이 얼마나 깊어지고 무거워졌습니까? 처음에는 연약한 정도였는데, 경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죄인으로 살아갔는데,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원수와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 중에 6-11의 말씀을 잘 이해하여야만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53:6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라고 하셨습니다. 다 양 같았습니다. 다 각기 제 길로 가고, 본래부터 죄인이다 보니 하는 일마다 죄였고, 우리의 삶 속에서 죄 아닌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롬3:12에서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었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2)라고 하셨습니다. 다 치우쳤습니다. 무익하게 되었습니다. 선을 추구한다고 하였는데 모두다 위선이었습니다. 우리가 행한 일들이 다 죄인이 행한 죄악이었습니다.
C.S 루이스는 이런 말을 합니다. "자신에게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독교는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나는 율법에 따르면 정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스스로 병들었다고 인정할 때만이 의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다 죄인이요, 치우쳐 무익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여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진노'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표현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지정의를 가지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와 교제가 가능하시고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사랑하시기에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당신이 모든 만물에 대하여 책임지시고 다스리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실 두려우신 분이시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의 몸을 마음과 영혼을 함께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바르게 살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셨는데, 인간 사회는 죄가 관영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영혼을 심판하시기로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의인이 없는데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 죄인이요, 심판해야 하며, 진노 아래에 놓였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여야 하고, 죄를 벌해야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때문에 고민입니다. 인간이 아니시기에 인간을 대신하여 죽을 수가 없고, 하나님은 언제나 심판하시는 자리에 설 수밖에 없고, 인간은 자기의 죄에 대하여 아무런 조처를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은 사랑하시지만 인간을 위하여 죽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지 않는 한 인간을 위하여 죽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후로 생각하시고 결단하신 것은 '아들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어 죄 없는 인간이 되게 하고, 그로 인간을 대표로 하여 심판 받아 죽게 하고, 이 세상에 이미 살았던지, 지금 살던지,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까지 모두다 죽은 것이요, 다 심판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시고 예수 안에 들어온 사람은 의롭다 여기고, 구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심이라"(고후5:21)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담당하시고, 또한 대신하시고 우리의 죄가 되셨습니다. 이제부터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게 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표적, 사인이 되셨습니다. 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깊이 읽어보고 연구해보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 '때'라는 말씀과 '기약대로'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연약할 때,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 그런데 하나님은 기약대로, 하나님의 시간이 되어 우리들이 받아야 하는 모든 심판과 진노를 아들에게 쏟아 부었습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외면당하고 그 순간 아들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속죄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 때에 우리 주님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절규하셨습니다. 그리고 운명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 다 이루었다"(요19:30)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다 이루었다"는 말은 "완불되었다", "빚을 다 갚았다"는 말입니다. 범죄한 인간이 받아야 하는 모든 벌을 받으셨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율법의 핵심, 범죄한 영혼을 죽으리라는 말씀을 다 이루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김영길 박사 하면 창조과학회를 만들었으며, NASA-미국 항공우주국에 근무한 학자이며, 한동대학교 총장으로 우수한 대학을 만드신 분입니다. 미국 유학 중에 부인을 따라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같이 똑똑한 사람이라고 해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왜 죽었다고 하는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교회에 나가 앉아 있어도 모르겠습니다. 교회를 출석하고 있지만, 전혀 감동이 없는 마지못한 출석이었습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열심히 읽었습니다. 유명한 기독교 서적이란 서적을 다 읽어갔습니다. 어느 날 저녁 6시 경부터 밤 11시까지 성경과 신앙서적을 놓고 연구하는데, 갑자기 깨달음이 왔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을 구원하려면 죄 없는 누군가가 대신 죽어야 하며, 죄인을 대신하여 죽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신이신 하나님이 대신하여 죽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내려보내 주셨고, 그가 죄 없으신 분인데,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심판을 받으시고 예수님 바로 그 분이 나를 위하여 속죄의 제물이 되셨다"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 어두웠던 마음이 물러가고 환하게 밝아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두 손을 모으고 주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이 시간 저의 죄를 주님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그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도하면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였습니다. 아침이 되어 출근하는데, 하늘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그 하늘은 어제 본 그 하늘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새로웠으며, 다르게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시는 순간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의가 충족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었는데, 아들 예수님이 죽으시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죽은 것이요, 아들이 죽으셨다가 살아나는 순간 모든 사람을 살려주시고 다 구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주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들의 공로를 그대로 인정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의 공로가, 예수님의 피흘리심으로 이루신 구원이 모든 인간에게, 예수님을 모르는 인간에게까지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들어가거나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강제로 어떻게 하실 수 없습니다.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강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죄인이었습니다. 가만히 놔두면 그냥 심판에 이르고 저주에 이르고 지옥에 걸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 주님으로 인하여 우리는 심판의 자리에 서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에게 나의 주님이 되어 달라고 고백하며 기도하였습니까? 그는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요한복음6:47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가질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소유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구원의 보증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죽어도 나 혼자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이 동행하시고 나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는 것은 천국이 들어온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구원받은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입니까? 잘 아시는 내용이기에 세 가지로만 요약합니다. 1)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화해자가 되시고 화해를 위한 중보자가 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면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누린다'는 말은 '즐긴다', '소유한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심판받을 것 같아 불안해 하십니까? 안심하고,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우리는 사는 이유가 있으며, 죽을 수 있는 이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은혜 안에 인도함을 받아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도록 허락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가야 할 사람이 되었습니다. 시시하게 세상의 일에 목숨 걸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3) 우리는 소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땅에 사는 동안 환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환란은 결코 환란으로 그치지 않고, 인내심을 길러주었고, 인내는 인내 그 자체로 끝나지 않으며 연단, 단련을 가져다주었고, 마침내 소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소망, 하나님의 소망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어 의롭하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소망 중에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즐거운 인생
로마서 5:1-11 / 엄기호 목사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으로 불리는 시인 천상병은 1967년 “동베를린공작단사건”에 연루되어 6년간 옥고를 치르고,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은 시인입니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인 <귀천>에서 보여주듯이 그가 고통스런 젊은 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소풍을 즐기듯 누구보다 즐거운 마음, 행복한 마음으로 삶을 대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인 천상병의 시는 우리에게 즐거운 인생의 비결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우리는 삶 속에는 고난과 고통, 질병 그리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납니다. 이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부정적인 부분에 시각을 맞추고 더욱 깊이 불행의 늪으로 빠져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불행에 울고 탄식하며 괴로워하고 저주스럽게 사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좀 더 즐겁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가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처했던 사도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무슨 이유 때문에 즐거워한다고 고백했을까요?
구원의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고 했고, 9절에는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 그 찢기신 몸과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아낌없이 죽음의 자리에까지 내어놓으신 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형벌에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가난과 저주의 굴레에서 자유케 된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생명적 존재의 즐거움이며, 살아 있는 즐거움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은 구원의 기쁨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즐거운 인생, 행복한 삶을 소유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많이 소유하는데 행복이 있는 줄 알고 소유를 추구합니다. 권력을 소유하고, 명예를 소유하고, 재산과 돈, 사치와 허영을 소유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소유했다고 해서 결코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물질과 명예, 혹은 세상 권세가 자신의 미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의 마지막은 언제나 불행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소유하는 것에는 참 만족도, 인간 삶의 참 가치나, 참 행복이 없습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갈증을 느끼게 하고 몸부림을 치게 할 뿐입니다.
헛된 것에서 즐거움을 찾으려고 할 때 우리 인생은 더욱 비참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인생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예수 그리스도께 맡겨야 합니다.
그럴 때, 죄에서 건지고, 질병과 가난과 문제에서 건져내고, 불행과 불가능과 부족에서 건져내신 그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즐거운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주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낌없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 받을 자격이 있고 조건이 되고 형편이 되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끊임없이 당신을 반역하고, 배반하며, 거부하고, 불신할 때 찾아오셔서 사랑해 주셨습니다. 미워하고, 시기하며, 싸우고, 불의하며, 죄를 짓고 있을 때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되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나아가 사랑을 나눠줄 때 가질 수 있는 즐거움과 행복을 누리기 원하십니다.
사랑의 햇살이 따스하게 비치는 곳은 그곳이 비록 초라한 곳일지라도 행복한 자리지만, 사랑의 햇살이 비치지 않는 곳은 궁전같이 화려하고 아름답다고 해도 불행한 곳입니다. 사랑이 없는 인생은 풀 한 포기 없는 사막과 같고 샘물이 다 말라 버린 샘터와 같습니다.
삶에 빛을 주고, 향기를 주며, 기쁨을 주고, 보람을 주며, 가치를 주고, 힘을 주며,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는 것이 곧 사랑입니다.
사는 동안 얻는 즐거움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며, 기쁨을 주려고 했을 때 얻게 되는 보상입니다. 남을 슬프게 하면 내가 슬퍼집니다. 근심을 주면 내 마음에 근심이 뒤쫓아 옵니다. 남에게 한 송이 꽃을 꺾어 주는 사람은 자기 손에 향기가 묻어오는 법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알고 즐거워하며 그 큰사랑과 무한한 즐거움을 이웃에 나눠줌으로써 서로 즐거운 인생을 누리길 바랍니다.
소망을 가진 즐거움 때문입니다.
본문 3~4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답답한 현실에서도 소망을 가진 사람은 활기차고 즐겁게 생활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갑니다. 하늘나라의 큰 축복과 약속된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미래의 영광을 알면 현실의 모든 환난도 오히려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려움을 당해도 담담하고, 답답한 일에 처해도 낙심하지 않고 승리의 삶을 만들어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에 기준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환경은 수시로 요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보여주듯이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소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환경에 기준을 두는 것이 아니라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기준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인생에 소망이 있는 한 살아 남게 되어 있다고 믿는 믿음은 우리 인생을 즐거운 인생으로 만드는 커다란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소망을 가진 사람의 삶에는 좌절이 없습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의 삶은 절망에서 희망의 삶으로 변화되며, 즐거운 인생, 감사하는 인생, 행복한 인생이 됩니다.
주님 안에서 소망을 잃지 않음으로써 승리하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헬만 멜빌레는 인생을 여행이라 했고, 헬렌켈러는 인생이란 모험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어떻게 정의하듯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의 인생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나를 웃겨 주고 즐겁게 만들어 주려니 기대하는 것은 인생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주안에서 모든 즐거움을 찾읍시다. 그 곳에 행복이 있고, 삶의 희열이 있으며, 인생에 축제가 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고 했습니다. 즐거운 인생에는 건강이 있고 축복이 있으며, 능률이 있고 세상 시험을 이기게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기쁨이 넘치는 즐거운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즐기면 산다
로마서 5:1-11 / 류영모 목사
“불교와 유교 그리고 기독교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물으면 초대교회 전도자들은 그때마다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불교는 초상집과 같고 유교는 제사집과 같고 기독교는 잔치집과 같다고요.” 불교가 인생 무상의 종교, 유교가 치레와 예식의 종교라고 한다면 기독교는 희락의 종교라는 의미겠지요.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가길 원하시는가? 하나의 삶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기뻐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구원받은 당신의 자녀들이 원망하며 탄식하며 이그러진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하나님은 원치 아니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구원받은 백성들이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얼마나 원하셨던지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제자들이 몹시도 근심하며 염려하고 있을 때에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것을 내가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에게 내 기쁨이 충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우리가 기쁘게 살아가는 것, 우리의 삶을 즐겁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 그것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한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쁜 일만 이 세상에 늘 있지 않다고 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입니다. 한 전도자가 마을에서 전도하고 다음 마을로 전도하기 위해서 언덕을 넘어가는데 큰 호랑이가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놀랬던지 아 이때에 놀라지 않으면 솟아날 구멍이 있겠다 싶어서 호랑이한테 하나님께 잠깐 기도하겠다고 잠깐만 기다리라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기도했습니다. 한참이나 열심히 기도하고 눈을 떠 보니까 호랑이가 다소곳이 앉아서 호랑이도 기도를 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 얼마나 기뻤던지 “호랑이 너도 하나님을 믿느냐고. 너도 예수를 믿느냐고” 호랑이 하는 말이 “지금 방금 식사기도 끝났다”고 하더랍니다.
나는 행복하고 싶은데 그것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그것을 깨려고 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한없이 기쁘게 살고 싶은데 그 기쁨을 빼앗아 가려고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각처에 도사리고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환경 여하에 상관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존재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즐겁게 기쁘게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부터 부흥축제 기간동안 로마서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예수 믿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로마서 5장 예수 믿는 사람들은 즐겁게 살아가는 존재다. 행복한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복이 무엇입니까? 심리학자 에릭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질문 앞에서 인간의 행복이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있음을 말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누리는 복이라고 하는 것은 have동사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나에게 소포로 보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복의 열매가 있어서 내가 따먹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은 받는 것이라기 보다는 신구약 성경을 살펴보면 복은 있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복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소유 속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거기에 생명을 걸고 살아갑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행복을 찾아 소유의 시장을 뒤져 보았습니다. 정치시장에서 권력을 얻어 보았지만 그 권력이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명예의 시장을 뒤져서 사치와 허영의 시장을 뒤져서 이 세상 시장바닥을 뒤져서 땅의 것들을 얻어 보았지만 그것들은 바닷물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더 깊은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듯이 그것은 많이 가지면 많이 가질수록 우리 인생을 허무하게 만들었고 더욱 목마르게 만들어 가는 것들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수한 세월동안 거짓된 행복에 너무 많이 속고 살아왔습니다. 그것을 소유하면 행복이 있으려니 찾아가 보았지만 신기루처럼 붙들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얻었다 할지라도 그 안에 행복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요 순간적인 것들뿐이었습니다.
행복의 조건이 환경 속에 있는 것 아니었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근심하게 만드는 염려하게 만드는 모든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나를 좇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다 짊어지고 예수 따르려고 하니 무겁기만 합니다. 아니 예수 믿은 다음에도 그것들 얻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인 양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행복이 뭔지 모르는 것이죠. 좋은 집이 필요합니다. 좋은 옷도 필요합니다. 좋은 음식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내가 복 있는 존재가 된 다음에 문제였습니다.
일찍이 마틴 루터는 “행복은 존재의 문제요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다”라고 단언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란 말로 시작합니다. 행복을 누리는 시작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음을 말합니다. 여기서 “의”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기쁨이란 복이라고 하는 것은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경제 사회의 문제,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의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얻기까지 인간은 참으로 기뻐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서 행복을 누리기전까지 우리 인생은 참된 행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쉼을 얻기까지 인생은 진정한 쉼을 얻을 수가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시절 어린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얘기 가운데 그런 얘기가 있었습니다. 한 집안에 아이가 새 총을 예쁘게 만들어서 들로 가지고 나갔습니다. 아무리 산 속을 뒤져 보았지만 새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새 총을 쏴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오니 아버지가 키우는 거위 한 마리가 긴 목을 내밀고 꺄우뚱 꺄우뚱 걸어간단 말이죠. 거위를 보고 한번 쏘아봐! 하는 생각이 들어서 쏘았는데 정통으로 맞고 거위가 꽝 넘어졌습니다. 여기까지는 죄가 아닙니다. 실수입니다. 아버지에게 꾸중들을 생각을 하니까 이 거위를 감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가 싹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뒷마당에 거위를 묻고 놀았습니다. 이제 죄가 시작된 것입니다. 저녁에 들어와서 아버지가 묻습니다. “거위가 안 보인다. 아무개야 거위 못 봤냐” “아버지 못봤는데요” 시치미 뚝 떼며 거짓말합니다. 죄는 점점 장성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집에 있는 하인 아이가 보았습니다. 집안에 어른들이 없을 때에 “얘! 너 물 좀 길어 올래” “네가 길어 올 물을 내가 왜 길어와” 하인이 말합니다. “내가 너 거위 죽이는 것 봤거든. 네가 저 뒤뜰에 거위 묻는 것 봤거든” 꼼짝없이 하인의 종이 되었습니다.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 죄의 종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설거지 해! 설거지합니다. 청소 해! 청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랜시간 동안 죄의 종이 되어 살아갑니다. 아버지와의 화평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근심 염려가 자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참다 못해 견디다 못해 아버지를 찾아갑니다. 눈물을 뚝 뚝 흘리며 “아버지 그 거위 내가 죽였습니다” 아버지는 얼마나 기뻐하는지. 꾸중할 줄 알았는데 “얘가 거위가 귀하겠니, 내 아들이 귀하겠니. 거위 열 마리가 없어진다고 할지라도 아버지 앞에 정직하게 찾아와서 고백했으니 아버지는 기쁘다 행복하다” 그 다음날 하인아이가 “야, 물 좀 길어올래” “내가 왜 길어와” “내가 너 거위 죽이는 것 봤거든” “그래서” “뒤뜰에 묻는 것 봤거든”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한테 이른다” “일러라. 나는 자유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혀있던 죄악의 담이 무너진 다음에 속죄함 다음에 구원받은 다음에 용서함 받은 다음에 오는 행복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진정한 행복이요 참된 기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은 사람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들어간 사람은 행복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천국을 얻었으면 그 천국이 오늘 내 안에 지금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기뻐할 수밖에 없는 즐겁게 살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난 다음에도 기쁘지 않은 것은 기적입니다. 예수 믿으면 기쁘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원 얻고 난 다음에도 내 삶속에 기쁨이 없다. 그것은 기적입니다. 왜? 예수 믿고 나면 기쁨이 내 속에 충만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면 어디서 잃어 버렸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이 에덴의 행복을 잃어버린 것은 죄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의 기쁨을 잃어버린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어져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부간에 화평이 깨어졌는데 가정이 행복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오늘 본문 1절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여기 “말미암아”라는 단어와 “더불어”라는 단어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화평, 평화,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누리는 행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이 세상에는 화평이 진정한 행복이 없다는 얘기이겠지요.
인류역사에 전쟁을 연구한 사람들이 지난 3천년동안 전쟁사를 연구해 보니까 3천년동안 2백 80일동안만 전쟁이 없었고 모든 날은 지구상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단 8%의 시간만이 평화의 시간이었고 92%는 전쟁의 연속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얘기를 한마디 더 빌려보면 지난 3천년동안에 8천번의 평화조약이 세워졌고 그것이 모두 깨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화평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이 땅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화평! 거기에 진정한 화평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평을 누리자” 우리말로 그렇게 번역이 되었습니다만 원문을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해 보면 “화평을 즐기자” “행복을 즐기자”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화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고 화평을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사람이 있고 믿음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있고 교회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가정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찬송 한곡을 불러도 그냥 노래를 불러 치우는 사람들이 있고 찬송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듣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고 이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아름다운 교제를 누리며 말씀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어렵게 대학생이 되었는데 대학생 신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대학생 신분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래서 즐거워한다”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2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느니라” 3절에 보면 “환난중에도 즐거한다” 11절에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즐거워한다”는 말을 좀더 정확하게 분석해 보면 “신이 내 안에 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기 때문에, 예수와 함께 행복을 누리는 것, 성령과 함께 즐기며 살아가는 것, 신이 나는 것, 신명이란 이것을 즐긴다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성공철학자 돈 카스트는 성공이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성공하더라고 얘기했습니다. 옛날 조강조는 민초들이 춤추며 사는 세상을 꿈꾸며 살았습니다.
저는 목사가 되어서 하나의 꿈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신명나도록 돕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하나의 꿈이 있습니다. 건강한 교회가 되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면 끝이 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나는데 좋은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건강한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행복한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 문득 문득 넘어지고 영적인 침체에 빠져드는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들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 보면 신앙생활을 관념화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종교를 가지고 있는게 좋은 것 아니겠어. 주일날 가서 한시간 예배드리고 나면 마음이 평안해지는데 뭐. 예배 안드리면 마음이 불안해. 그 정도가 기독교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예배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이 주님의 날은 부활하신 날입니다. 죽음의 문이 열려지고 주님이 부활한 날입니다. 죽어가던 여러분의 심령이 이 예배를 통하여 새롭게 살아가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문제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를 잘못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더라구요. 지옥같은 세상에서 지옥처럼 살다가 죽어서나 가는게 천당인 줄로 압니다. 아니요. 예수 안에서 우리는 천당같은 삶을 살다가 천국같은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살다가 죽어서 영원한 천국에 다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환경에서 뿐만아니고 어려운 환경이 내게 있다할지라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겨놓고 싸운다. 할렐루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이 없을 때만 즐거워하는 것 아닙니다. 환난이 끝난 다음에 즐거워하는 것 아닙니다. 환난과 고난의 한 가운데서 그 한가운데 푹 빠져 있으면서 우리는 즐거워 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병들더라구요. 잘 믿는 사람들도 사업에 실패하더라구요. 가족을 먼저 떠나보내는 고통가운데 우는 사람도 있더라구요. 그러나 이처럼 환난은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것임에 분명하지만 환난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아니하고 슬퍼보이나 얼마나 공감이 가는 말입니까? 환난을 즐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믿는 우리에게는 환난의 프리미엄이 있습니다. 고난의 보너스가 있더라고 하는 것이지요. 주에 자녀가 환난을 당하면 인내하게 됩니다. 인내하다보면 연단을 받게 되고 연단을 받다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소망이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환난을 모르고 지내던 평소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고난의 때는 들리지 않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돈이 우리를 인생을 유지하고 물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줄 알고 돈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때로는 어려움을 겪다보면 아 인생은 돈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구나. 하나님 의지하고 살아가는 존재이구나. 고난의 터널을 지나고 나면 인생이 성숙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 참 성숙한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들의 한결된 공통점이 있습니다. 고난의 터널을 지나온 사람들입니다. 환난의 터널을 지나온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보면 원수가 없어요. 모든 사람들을 다 사랑하며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그 사람들은 입술에 승리를 하는 사람들이라구요. 아무 사람이나 상처를 주고 찌르고 그러지 않더라구요. 옳다고 함부로 말하지 않더라구요. 덕이 되는 얘기, 그 사람의 얘기만 듣고만 있으면 은혜가 되는 얘기를 줄줄이 쏟아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환경 여하에 따라서 변덕부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당당히 승리하는 사람들입니다. 환경 때문에 신앙에 변덕을 부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참 사람이 못나 가지고 주사를 잘 못맞습니다. 병원에 가서 간호사가 큰 주사기를 들고 내 방에 들어오면 가슴이 얼마나 콩닥콩닥하는지. 어릴 때 예방주사 맞으라 그러면 거기다 볼펜으로 찔러서 예방 주사 맞았다고 돌아다녔습니다. 주사 맞는게 그렇게 겁이나요. 어릴 때 발을 삐었는데 침 맞으면 된다고 그래서 침 맞다가 기절해서 쓰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침 꽂는 사람이 얼마나 혼쭐이 났는지 침 빼느냐고 자기가 먼저 기절해 버리더라구요.
이런 못난 사람이 조그마한 수술을 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교인들이 수술한다고 그러면 제가 찾아가서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강하라 담대하라 놀라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염려하지 말아라. 근심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어 나오리라. 그리고 내가 담대히 기도해 주고 나옵니다.
그런데 내가 수술한다고 그러니까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는 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안보이더라구요. 아니 글쎄 내가 수술한다고 그러니까 치료하는 광선은 커녕 촛불도 가물 가물 하더라구요. 이러다가 내가 수술대위에서 죽지 싶은 생각까지 드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죽으면 안되겠다 싶어서 이 예배당이 한참 건축될 때 일인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내가 정히 보고 싶으면 이 건축이라도 끝내놓고 나를 데려가시면 안되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건축이라도 끝내놓고 죽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앞에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내 마음에 응답을 주시는데 “종아 염려하지 말아라. 건축 네가 했냐. 건축회사가 하면 된다” “하나님 아버지 안됩니다. 건축 다 해놓고 전도를 많이 해서 예배당에 교인들을 채워놓고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기도했습니다. 또 하나님이 내 마음 속에 “무슨 걱정을, 네가 왜 전도할 것을 걱정하느냐. 문권사도 있고 서집사도 있고 전도할 사람이 오죽이나 많냐.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안생기더라구요.
여러분 젊어도 죽을 수 있구나. 건강해도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것이구나 하고 나니까 그때부터 죽음이 두려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의 자리에 갖다 온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게 인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환난 때문에 울며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은 싸워서 이기는 사람들이 아니고 이겨놓고 싸운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때문에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환난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군대에서 제대 날짜를 받아온 젊은이들이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 이제는 거꾸로 매달아 놔도 국방부 시간 돌아가서 제대 날짜 돌아오면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이 끝나는 시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고난 가운데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환난 가운데도 승리하며 기뻐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수술 끝나고 난 다음에 은행나무 밑에서 예배당이 덜커덩 덜커덩 올라가는데 얼마나 행복한지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흐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사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종아 행복하냐” “네 미치도록 좋습니다” “뭐가 그렇게 좋으냐” “하나님 아버지 예배당 짓는게 좋고, 교인들 바라보는게 좋습니다. 내가 다시는 이 강단에 서서 설교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한시간 주님의 강단에 서서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게 좋습니다. 행복합니다” “종아 저 예배당 짓는게 좋으면 저 예배당 다 짓고 나면 네가 빚더미에 앉을텐데 그래도 좋으냐” “하나님 아버지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이게 내 집입니까? 하나님 집이죠. 염려하셔야 된다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지. 내가 왜 염려를 합니까? 하나님 행복합니다” 하나님 앞에 행복에 겨워 노래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교회는 기쁨의 기름을 파는 곳입니다. 세상의 짐이 무겁고 세상의 인간관계가 얽히고 설켜서 가슴에 깊은 상처를 주고 받으며 아픔을 가지고 나오신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 전에 올 때마다 기쁨을 사 가지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행복을 얻어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일찍이 고백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 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악인의 집에서 편안히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때로는 갈등을 느끼며 때로는 밤잠을 못자며 사는 것이 더 행복한 줄 알라는 얘기입니다. 직급으로 말하면 회사에서 사장소리 듣는 것보다 내 하나님 집에 문지기 소리 듣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신앙에 신비를 알기 때문인 것입니다.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알고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교회 생활을 가지고만 있지 말고 믿음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만 살지 말고 믿음을 누리며 신앙생활의 행복을 즐기며 살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작은 소그룹 모임이 있으면 열심히 참여하십시오. 성경공부 모인다. 저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축복의 자리구나. 목장에서 모이는 구나. 선교회에서 모이는 구나. 그래 저기 가면 행복이 있어. 저기 가면 기쁨이 있어. 믿음의 공동체가 있어. 달려가 보십시오. 거기서부터 행복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여유가 생기면 봉사하는 자리에 한번 가 보십시오. 우리가 교회에 차 몰고 오는 사이에 진작 와서 청소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봉, 붉은 깃발 들고 다니면서 차를 여기 세우시고 저기 세우시오 안내하는 주차요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집에 문지기 생활하며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영적인 사역에 헌신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역, 어린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역, 어린이를 가르치고 성경말씀을 나누는 자리에 달려가 보십시오.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주일날은 행복을 얻는 날입니다. 쉬는 날입니다. 세상에는 쉼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행복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꽈당! 하고 죽었습니다. 사인을 조사해 보았더니 악보에 쉼표가 없어서 숨이 막혀 죽었더랍니다. 여러분 악보에 쉼표가 없어도 숨쉬고 살아야지요. 조금 적게 벌어도 괜찮습니다. 주일예배 만큼이라도 될 수 있는 한 여러분의 시간으로 만들어 보십시오. 이 한시간이라도 깨끗하고 순결하게 예배를 드리십시오. 감동적으로 감격하게 예배를 드려보십시오. 세상 염려 근심하며 예배 드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인간은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일로 만족할 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재물을 사랑하는 자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헛되이 살다가 갈 뿐이라. 세상 것 붙들고 살아가던 사람들 썩은 새끼줄처럼 그것들 끊어지는 날이 있습니다. 영원을 붙들고 살아야 됩니다. 주 안에 행복이 있음을 붙들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날은 자동차에 주유소와도 같습니다. 폭격기에 실탄 창고와도 같습니다. 여기와서 영적인 능력을 회복할 때에 세상의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며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기름을 얻고 살아갈 때에 기름 등 준비하며 살아가는 신부처럼 이 세상을 달려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전 한 교회에 가서 집회를 마치고 부흥회가 마치는 시간에 온 교우들과 더불어 친교실에 모여서 케잌을 나누고 커피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교회 아무개 장로님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는데 그 장로님의 기도가 내 마음속에 오랫동안 여운으로 남았어요. “하나님 아버지 고맙고 감사합니다. 주일마다 들려주시는 우리 목사님의 설교 한마디로 우리는 행복하고 행복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귀한 강사님 보내 주셔서 꿀송이 같은 말씀을 전해 주시고 그 말씀 듣는 행복에 기뻐서 한 주간 동안 울었습니다. 그 말씀 듣는 행복을 우리에게서 거두지 마시고 이 말씀 듣는 행복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세상에서 복된 소식이 들어올 줄 알고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세상에는 잡된 소리만 들렸지 복음이 없었습니다. 세상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 있나 기웃거려 보았지만 다 썩을 것들 뿐이었습니다. 언젠가는 다 내 곁을 떠날 것들 뿐이었습니다. 어디서 우리는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까?
주 음성 외에는 더 기쁨 없도다 날 사랑하신 주 늘 계시옵소서
기쁘고 기쁘도다 항상 기쁘도다 나 주께 왔사오니 복 주옵소서
주님의 음성이 나의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기쁨이었습니다. 주의 집이 내 행복이었습니다. 영원한 기쁨이 내게 있나이다. 할렐루야. 이것이 내 가슴에 차고 흘러 넘쳐 이웃들에게 나누어지는 것이 전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행복은 나누는 것입니다. 이 행복은 즐기는 것입니다. 나 혼자 숨겨두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나누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을 미워하며 살아보십시오. 벌써 내 가슴속에 불행이 찾아오는 것을, 남에게 꽃 한송이라도 나누어 보십시오. 내 옷에 향기가 묻어나는 것을.
여러분 돌잔치다 백일잔치다 하며 밥 한술이라도 가족과 이웃과 나눌 때 행복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언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얼굴로 표현되어지는 것입니다. 웃으며 살아가십시오.
로렉스 시계, 오메가 시계를 선전하는데 7시 25분에 맞춰져 있는 걸 보았습니까? 시계도 7시 25분에 맞춰 놓으면 찡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메가 시계 선전하는 걸 보면 언제나 10시 10분입니다. 웃는 시계 사고 싶은 겁니다. 여러분 길거리 다니며 수표조각 나누어 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웃고만 다녀도 세상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큰일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교회에서 웃고만 다녀도 하나님 앞에 큰 일 감당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 존재들이냐?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믿음 생활을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이 지구상에 60억 인구 가운데 나는 부자는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는 60억 인구 가운데 나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고백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가정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가정보다 가장 부하게 살 필요도 없고 살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가정은 20억 가정 가운데 가장 행복한 가정이다 선언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교회가 이 지구상에 있는 교회 가운데 가장 큰교회가 되는 것은 우리교회의 꿈이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The best Church 한국에 있는 5만 교회 가운데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 가운데 가장 행복한 교회다 선언하며 고백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이것을 노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로마서 5:1-11 / 이삼규 목사
덴마크의 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저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왕자가 말을 타고 시골로 사냥을 가면서 빈민촌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 시골길에서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습니다. 천사같이 아름답고 깨끗한 여인이었습니다. 왕궁에 돌아와서도 그는 그 여인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끝없이 생각나고, 그리웠습니다. 그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여인에게 내 사랑의 진실을 믿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첫째 고민이었습니다. 둘째는 신분의 격차가 엄청납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합니다. 신분의 격차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알릴 수 있을까? 배우고 못 배우고, 가난하고 부하고가 문제 안 됩니다. 사랑은 그 모든 것의 위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하겠는데……. 그리고 셋째로, 잘되고 못되고, 행복하고 불행하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문제가 있든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 넷째로, 어떻게 하면 그녀도 내가 저를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내 사랑을 받아들이게 하고, 저도 나를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그는 이것을 고민했습니다. 물론 연구도 했습니다. 주변의 의견도 구했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그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왕궁에서 입던 화려한 옷을 벗어버리고 그녀가 사는 시골 마을로 가서 조그마한 방을 하나 세 얻어 살면서 목수가 되었습니다. 일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풍습을 배우고, 언어를 배우고, 그들과 깊이 사귀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순박한 생활 속에 엄청난 행복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동네 사람들과 부지런히 사귀었습니다. 마침내는 그 여인하고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듯 모든 넋을 버리고 당신을 찾아왔다.”라고.
비로소 이 여인은 왕자의 엄청난 사랑을 알고, 믿고, 깨닫고 받아들여 왕궁으로 들어가 왕후가 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저는 지난 두 주간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복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복음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봉독해 올린 본문을 보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누리는 축복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립니다.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이런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소망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롬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성령께서 성도와 함께 계시는 결정적인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은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를 향해 물 붓듯이 부어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부은바 됨이니”라는 말씀은 “쏟아 부은바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충분히 넘치게 부어졌을 뿐만 아니라 보이는 물처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우리들에게 베풀어졌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을 두 가지로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십자가와 부활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반문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당장 필요한 것은 물질이요, 건강이요, 자녀가 잘되는 것이 아닐까요?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십자가 하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감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로 십자가 이상은 없습니다.
그러면 왜 십자가가 그토록 중요합니까? 십자가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죄의 문제는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나 지식으로 해결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 외에는 다른 해결방법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가 그토록 중요하고 이것만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또한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의를 확증해주셨습니다. 부활로서 새로운 생의 의미를 주셨고 영생의 길을 주셨습니다. 십자가 안에 내 생명의 진실한 의미를 주셨고 영생의 길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면 곧 십자가요, 십자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됩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대하시는 능력과 지혜가 십자가로 확증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죄와 사망과 사탄과 율법의 진노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사망으로부터 자유하며, 사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고, 율법에 매이지 않으며 진노의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형벌이요, 저주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모두가 훈련이요, 은사이며 내게 주신 축복으로 바꾸어집니다.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3장 17-19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엡 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엡 3: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 길이, 높이, 깊이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1.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 사랑해 주셨습니다. 본문에 "연약하다"라는 말로 번역을 했는데, 이것은 약한 번역입니다. 본래 뜻은 "전혀 힘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무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무능할 그 때에 나를 사랑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에게 무슨 힘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무슨 힘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또 우리가 무슨 능력으로 죄의 자리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를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무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해 주셨습니까?
6절 말씀을 다시 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아직 성장하지 않았을 때에, 또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할 그 때에 사랑하여주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예수 믿은 후부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세례를 받으라고 하면 뒤로 미룹니다. 아직 수준이 미달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는 정도 수준이 올라간 다음에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까지 열심히 믿다가 세례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해야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잘못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수준이 올라가면 얼마나 올라가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벌써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습니다. 내가 믿기도 전에, 알기도 전에 이미 받았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여기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태어나기 전부터 사랑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 바울은 박수치고 증인으로 서 있던 사람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벼락을 내리셔서 죽게 하였다면 그는 그것으로 인생이 끝장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봐주신 것입니다.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가 전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를 때에도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경건치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살았습니다. 하나님 밖에서 멀리 살고 있었던 우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심어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생각은 허망하여 졌습니다. 그리해서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죽어 마땅한 우리들, 경건치 못한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요3:16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경건치 못한 우리를 위하여 보내주셨습니다. 그리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기약대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남을 위하여 죽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비록 그 사람이 의인이라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내가 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죽이기는 쉽지만,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희생하고 죽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많다는 뜻입니까? 적다는 뜻입니까? 간혹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다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깨닫지도 생각하지도 않았을 때에 벌써 사랑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모르고와는 관계없이 사랑하셨습니다. 단지 깨달은 것이 오늘일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얼마나 깨닫고 그 은혜에 감격하느냐에 따라서 사랑이 결정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의 시작은 내가 전혀 몰랐을 때에 즉,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내가 그를 위해서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지 감격할 뿐입니다. 이래도 저래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2.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사랑하셨습니다(8절).
좀더 다른 의미에서 또 하나의 “때”가 있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때는 시간 적인 때가 아니라 신분적인 때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이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6절 말씀이 전적인 무능력을 나타낸 것이라면, 8절은 전적인 타락 또는 부패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의인도 아니었고, 선인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었습니다. 우리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었습니다. 혀로는 속임을 베풀었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었습니다. 입안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했습니다. 우리의 발은 피를 흘리는 데 빠를 뿐이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죽음이란 최종적인 것입니다. 마지막 행동입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셨으니”, “내어 주신”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세상에 보내 주신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죽음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까? 연약한 자, 경건치 않은 자, 죄인을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인 되었던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
이렇게 단순히 말씀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 대신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증명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3.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사랑하여주셨습니다(10절).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도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경건치 못할 때에도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도 사랑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사랑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기록한 바울의 삶을 통해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는 예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바울은 참 끈질겼습니다. 멀리 다메섹에도 예수 믿는 사람이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사람들마저도 다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들고 그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내려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바울은 원수로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버리지 아니했습니다. 그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무능했습니다. 경건치 못했습니다. 죄인이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사랑받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일본이 낳은 유명한 종교가입니다. 그는 시장 아버지와 첩이었던 기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집에서 자라기는 했으나 첩의 아들이라고 눈칫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본처의 자식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저주스러운 생이었겠습니까? 왜 나 같은 것을 낳았느냐고 부모를 원망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담 모퉁이에 우두커니 기대서서 역시 자기 생을 비관하고 있을 때에 북 치고 나팔을 불면서 지나가는 구세군 전도대를 만났습니다. 저들이 전도하면서 외칩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그들 가까이로 다가서서 물었습니다. "기생 아들도 사랑하나요?" "아무렴요, 어떠한 죄인이라도 사랑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글 가운데에는 '나는 기생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는 이야기가 종종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 확실한 의식, 그 감격이 가가와 도요히코를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생 아들 뿐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십니다(북한에서는 원수/웬수가 있다. 원수=김일성, 웬수-대적).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믿고 선하게 살려고 애쓰면서 하나님의 자녀로 지내는 데 가끔이 의심이 생깁니다. 내가 이 정도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바울은 그런 자신을 가리켜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느낄 수 있고 회복할 수 있을 까요?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세 가지로 말씀해줍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사랑하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사랑하셨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사랑하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도 부족합니다. 때로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실수합니다. 때로는 쓰러집니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사랑하여 주셨던 하나님,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사랑하여 주셨던 하나님,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라도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가 믿는 복음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읍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