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43
■ 1부 황하의 영웅 (43)
제 1권 난세의 강
제6장 정장공의 복수(7)
오랫동안 준비하고 기다려온 복수전이었다.
- 나를 우습게 아는 자는 징벌하리라!
정장공(鄭莊公)과 그 신하들은 바삐 움직였다.
먼저 2년 전 석문에서 동맹을 맺은 바 있는 제(齊)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원군을 요청했다.
제(齊)나라는 바닷가에 위치한 동방의 대국으로 지금의 산동성 일대를 봉토로 하고 있는 제후국이다.
시조는 태공망 여상(呂尙).이 무렵의 군주는 제희공(齊僖公)이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제희공(齊僖公)은 정장공의 원군 요청에 동생인 이중년(夷仲秊)을 장수로 삼아 병차 3백 승을 출동시켰다.
정장공(鄭莊公)은 제나라에 이어 노(魯)나라에도 사자를 보냈다.
노(魯)나라 역시 산동성 일대를 봉토로 하는 대국으로, 당시의 군주는 노은공(魯隱公)이었다.
노은공 하면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공자(孔子)가 쓴 <춘추>라는 책이다.
<춘추>는 노(魯)나라 역사서인데, 그 기록의 첫머리를 장식한 사람이 바로 노은공(魯隱公)인 것이다.
이 무렵 군대의 실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공자 휘였다.
그는 남모르게 정나라 제족(祭足)이 보낸 비단과 재화를 잔뜩 받고 노환공(魯桓公)에게 권했다.
- 이번에 정(鄭)나라가 송나라를 치는 것은 천자(天子)의 명을 받아서이기 때문입니다.
군대를 보내지 않으면 천자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노은공(魯隱公)은 송나라에게 나쁜 감정은 없었다.
그렇다고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송나라를 비호할 정도는 아니었다.
- 병차 2백승을 거느리고 왕사군(王師軍)에 가담하라.
이리하여 노(魯)나라도 정장공을 도와 송나라를 치게 되었다.제(齊)나라와 노(魯)나라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정장공은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채(菜), 위(衛), 성, 허(許)나라 등에도 군대 동원령을 내렸다.
명분은 뚜렷했다. 천자의 명을 받은 왕사군(王師軍)이 아닌가.
그러나 채(菜), 위(衛), 성, 허(許)나라 군주들은 송나라와 친밀할 뿐 아니라 정장공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장공(鄭莊公)의 요청을 거절하고 끝내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다.
정장공(鄭莊公)은 불같이 화를 냈다.곁에 있던 제족(祭足)이 간한다.
"지금은 송나라를 치는 일이 급합니다.
이번에 협조하지 않은 나라들에 대해서는 차후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대 말이 옳소. 하지만 내 반드시 저들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오!“
정장공(鄭莊公)이 주변의 소국을 쓸어 버리기로 마음 먹은 것은 아마도 이때가 아닌가 여겨진다.
이렇게 하여 송나라를 치기 위한 정(鄭), 노(魯), 제(齊) 3개국 연합군이 형성되었다.
- 봉천토죄(奉天討罪).
천자의 명을 받들어 죄를 토벌한다는 뜻이다. 정장공(鄭莊公)이 내건 이번 싸움의 명분이었다.
거창했다. 명분만 거창한 게 아니라 정장공의 행동 또한 위세당당했다.
천자만이 탈 수 있는 노거(輅車) 앞에다 '봉천토죄'를 새겨 넣은 대기(大旗)를 꽂고, 붉은 화살을
수레에 걸었다. 제(齊)나라 장수 이중년을 좌군으로 삼고, 노(魯)나라 장수 공자 휘를 우군으로 삼고,
정장공(鄭莊公) 자신은 중군이 되어 송나라를 향해 파도처럼 덮쳐 들어갔다.
"승리한 장수에게는 그 땅을 떼어주겠다."
정장공(鄭莊公)의 부추김에 노나라 장수 공자 휘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송나라 노도(老桃)땅을 공략했다.
처음에는 팽팽하던 싸움이 시일이 지나면서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땅을 차지하겠다는 욕심이 강한 공자 휘의 거센 공격에 송(宋)나라 병사들은 견뎌내지 못하고
등을 돌려 달아났다. 이 싸움에서 공자 휘가 포로로 잡은 군사만도 250명이었다.
- 노도(老桃) 땅 점령!
첫 승전보가 전해졌다.
정장공(鄭莊公)은 3군을 이끌고 노도(老桃)땅으로 들어가 공자 휘가 바치는 포로들을 받았다.
"그대야말로 이번 싸움의 제일 공로자이오.“
정장공(鄭莊公)은 공자 휘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후, 다음 지시를 내렸다.
- 이곳 노도(老桃)를 거점으로 두 길로 나누어 진격하겠다.
영고숙은 노나라 장수 공자 휘와 합세하여 고성 땅을 공격하라.
- 공자 여(呂)는 영고숙과 공자 휘의 군대를 뒤따르며 접응하라.
- 공손알(公孫閼)은 제나라 장수 이중년과 함께 방성(防城)땅을 공격하고, 고거미는 그 뒤를 받쳐라.
모든 지시를 마친 정장공(鄭莊公)은 중군을 거느린 채 노도(老桃)에 남아
각 장수들로부터 승정보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그 무렵 -.
송나라 수도 상구(商丘)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 발칵 뒤집혀져 있었다.
정나라 하나만을 상대하기도 벅찬 판에 동방의 대국이라는 제(齊)나라와 노(魯)나라까지 합세하여
침공하였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 연합군에 노(魯)나라도 끼었다는 점이었다.
노(魯)나라는 송나라와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지난번에는 연합하여 정나라를 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도의가 땅에 떨어진 시대라고는 하지만 조석간으로 변하는 노(魯)나라의 배신 행위는 너무 심하다."
송상공은 하늘을 우러르며 탄식했다.
하지만 자리에 앉아 탄식하고 있은들 3개국 연합군이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었다.
군신 모두가 흙빛이 된 채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이들과 정면으로 맞붙어 싸웠다가는 우리 송(宋)나라 사직은 송두리째 뽑힐 것이 틀림없소.
한시가 급하오.어서 이들을 물리칠 묘책을 강구해 보시오?"
어느 나라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전술, 전략에 능한 재사(才士)가 있게 마련이다.
정나라의 제족(祭足), 위나라의 석작, 진(陳)나라의 자침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송나라에도 지혜가 뛰어난 재사(才士)가 있었다. 대사마 공보가(孔父嘉)가 바로 그사람이었다.
아마도 송나라가 강국으로서 존립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공보가(孔父嘉)가 병권을 잡고 있는
덕택이었을 것이다.재사(才士)는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송상공이 흙빛이 된 얼굴로 채근하자 공보가(孔父嘉)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공께서는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신에게 정나라를 물리칠 계책이 한가지 있습니다.
이 계책대로 하면 정장공(鄭莊公)은 스스로 물러가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것입니다.“
"정나라는 지금 승승장구(乘勝長驅)인데, 어찌 스스로 물러갈 것인가?"
송상공의 탄식에 공보가(孔父嘉)는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정장공이 왕명을 사칭하고 우리를 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불러모았으나
이에 응한 것은 제나라와 노나라뿐입니다. 그 밖에 채나라나 위, 성, 허나라 등은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정장공(鄭莊公)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이번에 정장공(鄭莊公)이 친히 이 곳까지 왔으니, 그 군대는 매우 강할 것입니다.
주공의 염려대로 정면으로 싸우는 것은 패배를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
"그러나 실(實)이 있으면 허(虛)가 있는 법.
정장공은 이번 싸움에 모든 병사를 동원한만큼 도성인 신정은 텅 비었을 것입니다.
주공께서는 이 기회에 위나라로 사자를 보내어 그들과 함께 정성(鄭城)을 기습하십시오.
정장공(鄭莊公)은 자기네 도성이 공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만 받으면 기절초풍하여 군사를 돌려
귀환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정병(鄭兵)이 돌아갔는데 제(齊)와 노(魯)나라가 무엇 때문에
이 곳에 남아 우리와 싸우겠습니까?"
공보가(孔父嘉)의 말을 들은 송상공은 손뼉을 치며 기뻐하다가 다시 얼굴을 굳혔다.
"경(卿)의 계책이 좋기는 한데 과연 누가 위(衛)나라로 가 위선공을 설득할 것이며,
또한 누가 위나라 병사들과 합세하여 신정을 공격할 것인가?“
"이번 일은 송나라 사직과 직결되는 일입니다.
신이 일지병(一枝兵)을 거느리고 달려가 위군과 함께 신정을 공격하겠습니다.“
그제야 송상공은 화색이 도는 얼굴로 돌아왔다.한시가 급했다.
공보가(孔父嘉)는 그 날로 송상공이 내준 황금과 구슬, 비단 등 많은 보화를 가지고
위(衛)나라로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다. 위선공(衛宣公)은 동맹국의 요청인데다가 많은 보화까지 받자
두말하지 않고 우재 추를 불러 명했다."군사를 거느리고 송나라와 함께 정성(鄭城)을 공격하라!“
"경(卿)이 나서준다면 마음을 놓을 수 있으리라!"
연합이 결성되자 송나라 공보가(孔父嘉)와 위나라 우재 추는 샛길로 달려 정장공이 없는
신정을 엄습했다.그때 신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세자 홀(忽)과 상경 제족(祭足)이었다.
그들은 예상치 않은 송. 위 두 나라의 공격에 크게 당황했다.
그러나 제족(祭足)은 역시 뛰어난 지략가였다. 이내 공보가(孔父嘉)가 노리는 바를 간파했다.
"이들의 공격은 우리 주공을 송나라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한 계책에 불과하다.
굳이 주공에게 연락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단언하고 제족(祭足)은 성문을 굳게 닫아건 채 일체 나가 싸우지 못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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