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대답 없이 택시를 잡아주고 뒷문을 열어준 뒤, 선배는 기사 아저씨께 돈까지 쥐어준다.
" 대신동까지 잘 좀 데려다 주세요 아저씨. "
앞문을 닫으며 손을 흔들어 주는 저 사람.
참으로 앞날이 걱정되는 사람......
하지만 저 사람보다 더 걱정되는 건 바로 나.
하아......너 이제 세진이 얼굴 어떻게 볼래? 응?
미쳐... 젠장......
...
......
익숙한 건물들.
나름대로 정겨운 상점.
......우리 동네다.
느릿느릿.
난 집 앞에 서서 잠시 태윤 선배의 니트를 바라보았다.
잠시 한숨을 내쉬고 벨을 누르고...
딩동 딩동.
[누구세요∼]
인터폰으로 울리는 오빠의 밝고 명랑한 목소리.
[나야 오빠.]
[꺄악∼ 눈은 퉁퉁 부어서 소멸되고 머리엔 혹 하나 달고 위에 입은 옷은 교복도 아니고 너 누구냐! 누구인 거야!]
[나 장난칠 기분 아니야.]
[난 장난칠 기분이야∼ 위에 옷은 니 거 치고 너무 크고 좋아 보이는 걸! 누구 거야?]
[제발 문 열고 들어가서 말 좀 하자!!]
어떤 사람은 날씨 춥다고 옷까지 벗어주는데
어떻게 된 게 오빠라는 인간은 문 밖에 동생을 세워두고 어찌 저리 말이 많을꼬-_-+
" 엄마는? "
내 물음에 빙글빙글 눈을 돌리며 중얼거리는 오빠.
" 이 시간에 들어오면 그게 우리 엄마냐? "
하긴... 엄마는 2년 전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뒤, 회사 일이 무척이나 바빠지셨다.
엄마 대신 집안 일을 해내는 건 오빠.
이 집에서 제일 필요 없는 사람은 나, 은정연.
때론 내가 이 집의 짐짝 같다...
" 너 근데 위에 옷은 누구 거냐?? "
" 태윤 선배 거. "
" 누구 거라고? "
눈알 굴리기 놀이를 그만두고 진지해진 은재연.
" 태윤 선배 거라고! -_- "
니트를 벗으려 내 방으로 들어가는 날 붙잡는 오빠.
" 태윤이 옷을 네가 왜 입어? "
" 추우니까 입지! 왜 입긴 왜 입어!! "
오늘은 정말 피곤하단 말이야......
오빠랑 놀아줄 기분이 아니에요.
" 너도 참 이상한 애다. 태윤이가 준다고 그걸 덥석 받아서 입냐? "
" 아, 정말 왜 그래? 어차피 태윤 선배, 오빠 잘 아는 후배고 이상한 의미도 아니잖아? "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내 말엔 잔뜩 짜증이 묻어버렸다...
" 난 태윤이처럼 과잉 친절 베푸는 놈도 좀 이상하다 싶지만 너처럼 아무 생각 없이 좋다구나 하고 헬렐레하는 애들이 더 짜증나. "
무표정한 얼굴로 냉랭하게 말하는 은재연.
...오빠의 말이 왠지 그럴싸하게 들린다.
어쩌면 무분별한 친절이 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분별한 수용이 독이 되는 것일까.
어쩌면 그동안 상처를 받아왔던 건 태윤 선배를 둘러싼 사람들이 아니라 태윤 선배 자신이었을까......
...
......
" 오...오빠! 악보 다듬어 준거 정말 고마웠어! "
" 말 돌리는 거 봐라. 저거 봐라. 쯧쯧... "
" 눈치 빠르네-_-; 근데 오빠... 솔직히 말해봐. 서준후야? 윤소리야? "
집에 오는 길 택시 안에서 내내 생각했던 물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이 커진 오빠.
" 한가지 진실을 두고 두 사람의 이야기가 다르다면 오빤 누굴 믿겠냐구. "
어디서부턴가 길을 잃고 헤매는 두 사람.
두 사람은 너무나 다른 곳에 서 있다.
왜 길을 잃었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각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겠지......
" 윤소리. "
수학공식에 정확히 일치되는 명료한 답을 내어놓듯 당당한 오빠의 목소리.
오빠의 대답을 이미 예상했던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 나는 서준후. 남들이 뭐라고 지껄이든지 간에 서준후... "
...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 내리며 감정 없는 눈으로 날 바라보는 오빠.
그리고 나는 그런 오빠 눈을 바라보며 피식피식 웃어주었다.
17.
드르륵.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2학년 교실로 직행한 은정연.
이유는 뻔하지 않은가...
세진이와 현빈이는 복도에 세워두고 나 혼자 당당하게 교실 문을 열었다.
노란 색 내 명찰을 보고 힐끔힐끔 쳐다보는 2학년 선배들.
1분단 중간쯤 소리 언니의 모습이 보인다......
" 전화 왜 끊었어요? "
인사도, 구질구질한 설명도 하기 싫다.
보고 있던 참고서를 덮으며 눈이 동그레지는 소리 언니.
" 정연이구나......지금 자습시간일텐데 이동해도 괜찮니? "
아, 정말 화나려고 해.
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은 또 뭐야.
" 왜 전화 끊으셨어요? "
난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해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 밧데리가 나갔거든... 미안해. 어쩔 수가 없었어. "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저 표정.
더 정확히 말하면 얼굴은 미안한데 눈은 전혀 아니다.
어느새 내 옆에 와 서 있는 현빈이와 세진이.
도대체 저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뭐라고 반박을 해줘야 하나 하하...
" 소리 언니도 웃기는 소리 잘 하는구나^^ "
현빈이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노골적인 빈정거림이 가득 묻어있다.
" 뭐야? 이것들 1학년이잖아! "
소리 언니의 짝인 여자가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이며 일어난다.
당황한 듯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작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 언니.
" 나 잘 아는 후배야... 괜찮아. 화내지마...... "
언니는 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에게 밖으로 나가자는 듯 손짓을 한다.
" 전화 받지 못한 건 정말 미안해......하지만 너희가 이럴 일은...... "
" 언니의 친구들이었어요. 준후 오빠 입원시킨 자식들이 언니 친구들이라구요! "
가늘게 떨려오는 내 목소리.
소리 언니의 표정은 변함 없이 차분하다.
" 네가 오해한 거야......내 친구들 아닐 거야. "
......다 알아버렸어. 전부 다.
윤소리... 내 말뜻을 정확히 알아먹긴 한 거야?
중요한 건 그들이 네 친구였다는 말이 아니라 서준후가 입원했단 소식이야.
난 이제 정말 네가 싫어질 것 같아......
" 어리버리 까대다가 서준후한테 절라 터진 강승재 라는 놈. 그리고 머리에 젤 한 통 다 처바른 저능아 비슷해 보이는 새끼도, 지난번 서면에서 언니 옆에 서있던 화장인지 분장인지 엄청 처발라 귀신같던 그 년도 다 언니 친구 아니다 이거죠? 절대 아니죠? ^^ "
일부러 막말을 내뱉고 있는 나......
" 너......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해. "
화낼 줄 알았더니 오히려 슬픈 표정을 짓고 날 바라보는 윤소리.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린다...
...
" 야, 가자. 짜증나려고 한다. "
거칠게 내 손을 잡아끄는 현빈이.
" 현빈이 너......그래도 내가 언니야.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야... "
윤소리가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그 말에 푸하하 큰 웃음을 터트리는 현빈이.
현빈이는 세진이의 손을 이끌고 먼저 걸어간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윤소리를 향해 한마디를 던지는 나.
" 내가 언니였다면 공중전화든, 다른 사람 전화든 빌려서 다시 서준후에게 전화했을 거예요 ......안녕히 계세요. "
...
윤소리는 입을 굳게 다문 채 힘없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 버린다......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렸어.
일주일 뒤로 미뤄진 햇빛촌 최종 심사.
앞으로 수도 없이 마주치게 될 소리 언니.
우리 오빠가 제일 아끼는 후배인 소리 언니.
그런 언니와 난 이제 엇갈려 버렸어.
자꾸 소리 언니가 날 보던 눈이 마음에 걸리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야......
잘못된 건 잘못된 거야.
여느 때와 같이 춥파춥스를 빨고 있지만
여느 때와 다르게 계속 내 눈치를 살피며 날 달래주려는 세진이.
난 세진이에게 태윤 선배를 병원으로 부른 얘기와 선배의 니트를 입고 집에 갔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사실 그런 이야기들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세진이에게 정작 말할 수 없는 이야기는......
" 소리 언니 너무 침착하더라. 그래서 그런지 좀 얄미웠어. 그치? "
내 눈을 들여다보며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하는 세진이.
...
...나 곰곰이 생각해볼게 세진아.
너라면 어떻게 했을까......나 곰곰이 생각해볼게.
나 많이 고민할거야.
잠시만 우리, 비밀 만들기로 해.
너, 나 믿지? ......
지징―
조용한 수업시간 눈치도 없이 울려대는 핸드폰.
문자인지라 단 한번의 진동으로 끝난 것이 다행이다.
[수업 마치고 뒷문으로 나와라. 네가 꼭 알아야 할 얘기가 있어......]
누구지?
모르는 번호인데?
수업시간이라 전화해 볼 수도 없고...
[너 누군데.]
하는 수 없이 문자를 보내놓고 답장을 기다리고 있는 나.
[나와보면 알아. 너도 지은초 얘기 궁금하잖아?]
...
지은초......지은초......
이 사람, 내가 가장 궁금해하는 핵심을 찌르고 있다.
이 문자를 받고 난 뒤부터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한다......
청소를 하는 둥 마는 둥.
세진이와 현빈이를 꼬드겨 야간 자율 학습을 시켜놓고
(우리학교는 유일하게 진정한 자율학습이 이루어지는 곳이다-_-하고 싶은 놈만 한다는 말씀!!)
난 몰래 가방을 메고 빠져나왔다.
뒷문은 워낙 좁은데다 외져서 아이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다.
적어도 눈에 띌 염려는 없을 것이다...
이미 야간 자율학습이 시작된 시간.
마쳐서 갈 사람은 이미 갔고 남을 사람은 남았고 그리하여 한산한 모습의 학교.
뒷문 쪽으로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떼어놓는데...
......이상해.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아.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
다시 몸을 돌려세우려는 내 앞에 불쑥 나타나는 머리통 두 개.
" 오늘 또 이렇게 보니까 반갑네 ^^ "
...
......
아, 저 재수 없는 목소리.
......삐죽이와 강승재, 저 빌어처먹을 놈들...
18.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내 머리에 손을 올리는 강승재 놈.
난 매섭게 그 손을 쳐낸다.
저놈은...내 머리통을 인정사정 없이 차버린 놈, 고소해도 시원찮을 놈...
" 아이구 그래도 머리에 혹은 안 났네 ^^ "
" 웃지 마라? 좀 많이 쏠리거든? "
머리가 고장난 건지, 아니면 안면 근육이 고장난 건지 또 키득키득 거리는 저 놈.
두 놈 다 얼굴에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꼴이 정말이지 가관이다.
하긴... 지금 서준후도 저런 꼴이겠지...
...도대체 여긴 뭐하러 온 거야.
" 어제 일은 미안하다. "
오늘은 그나마 머리를 덜 세운 삐죽이 놈이 사과를 한다.
심하게 발길질을 해대는 것처럼 보였지만 일부러 치명적인 급소는 피해가도록 때린 놈.
윤소리 얘기가 나왔을 때 눈물을 글썽이던 모습이 적어도 인간으로는 보이게끔 한다.
하지만 강승재는 다르다.
자고로 여자 때리는 놈 치고 제대로 된 놈을 못 봤지 암 그렇고 말고...
" 나 너네랑은 할 말 없는데 그만 좀 가라? "
" 우리가 너보다 한 살 많다^^ 선배거든? "
하나부터 열까지 대꾸하는 저 재수 털리는 놈, 강승재 라는 놈.
" 나 너 같은 선배 둔 적 없거든? "
피식피식 웃어대더니 잠시 품속을 뒤져 담배 한 가치를 꺼내 무는 저 놈.
" 할 말 있다. 얘기 좀 하자. "
저 재수는 그 말과 동시에 내 팔을 거세게 휘어잡고 학교 밑으로 끌고 내려가기 시작한다.
" 놔!! 안 놔? "
내 비명소리가 무색해질 만큼 무서운 속도로 날 끌고 내려가는 저 악당.
더 버팅기다가는 내 팔이 남아나지 않을 듯 싶다 아 젠장...
...
......
의도하지 않은
의도한 적 조차 없는
그러나 서면 한복판에 도착해 있는 나, 은정연 -_-;
강승재와 최성우(삐죽삐죽 머리를 했던 놈-0-)는 지금 내 뒤에 붙어 따라오는 중.
왜 내가 저 놈들과 함께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저 사람들이 아니면 나에게 서준후와 윤소리, 그리고 지은초에 대해 말해 줄 사람이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버스 안에서 내게 조용히 서준후의 안부를 물어오던 최성우의 속마음을 난 알 수가 없다.
죽기 살기로 덤빌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 걱정하는 척 하는 꼴이란...
흡사 윤소리와 비슷하다...
...
" 뭐 먹을래? ^^ "
" 난 너랑 밥 같은 거 먹을 생각 없어. 빨리 할 말이나 해. "
작정을 하고 온 건지, 쇼를 하는 건지 내가 뭐라 하건 웃기만 하는 강승재.
" 그럼 커피나 마시면서 얘기하지 뭐^^ "
그러면서 내 앞을 비켜지나 앞서 걷기 시작한다.
서면에 대한 기억은 별로 좋지 않다...
얼마 전 재연오빠와 소리 언니와의 일도 그렇고...
그리고, 서면은 서준후의 병원과 너무 가깝다...
퇴원하기 전까진 가보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흔들흔들, 자꾸만 마음이 약해진다...
그래. 차라리 어딘가로 들어가서 얘기하는 게 낫겠다.
1층은 대형 팬시점.
2층은 전면이 푸른빛이 도는 유리로 꾸며진 까페.
가까이 앉아 있지만 결코 가까워 질 수 없는 세 사람.
싫다고 고래고래 악을 쓰는 나를 무시하고 내 옆에 턱 하니 앉아있는 저 나쁜...
적과의 동침도... 이런 망할 적과의 동침이 없다.
나는 습관대로 카푸치노를 시키고 앉아 그들에게 말을 독촉하고 있다.
" 너네 원하는 대로 서면까지 왔고, 커피숍에도 들어앉았으니까 이제 얼른 말해. "
유리컵에 반쯤 담긴 물을 찰랑찰랑 흔들어 대다가 날 쓰윽 바라보는 최성우.
" 너 서준후 여자친구냐? "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구나...
" 응. "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나-_-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 놈들이 이야기를 해줄 것 같지 않다...
그는 예상했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말을 한다.
" 얼마만큼 알고 있는데? 나도 뭐가 진짜인지 궁금하거든... "
뭐가 궁금하다는 거지...
난 뭔가 단서를 말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먼저 말문을 튼다.
" 지은초 죽은 사람이란 건 나도 알아. "
내가 태연하게 말을 하자 한숨을 푸욱 내쉬다 결심한 듯 입을 여는 최성우.
"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소리가 입을 열지 않아서... 그냥 짐작할 뿐이야. 너 나타나고 나서 소리 많이 힘들어 해. "
나?
나 때문에 힘들어한다고??
" 서준후랑 소리, 은초 누구보다 친한 녀석들이었고... 또 소리는 준후 여자친구였고... 정말 서준후냐? 준후가 그런 거야? "
애초에 여자친구라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
내가 이미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 최성우는 제대로 말을 하지 않고 잘라먹고 있다.
이런 난감할 데가...
" 은초... 서준후 때문에 그렇게 된 거냐고......"
나름대로 연기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는 나.
눈을 지그시 내려 깔고 생각에 잠긴 척을 하고 있다.
" 나도 믿고 싶지는 않아... 소리가 입을 열지 않아서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내 느낌에 서준후 짓이다... 준후가... 은초 그렇게 되게 만들었어... "
한참을 듣고만 있던 강승재는 갑자기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메뉴판을 구겨버린다.
빙글빙글...
은초는 죽었다.
서준후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럼 서준후가 은초를 죽였다고?
...
......
" 헛소리하지마... "
내가 머리로 생각을 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쏟아내는 말.
내 입이 제 멋대로 움직이고 있다...
" 그래. 나도 믿을 수 없어. 하지만... 너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서준후 저렇게 도망치는 거 옳지 않아. 네가 도와줘... 소리 하루 하루가 다르게 망가져. 더 이상 못 보겠다... "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주먹을 꽉 움켜쥐는 최성우.
나는 너무나 황당한,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에 망연자실해서 카푸치노가 놓인 테이블만 보고 있다.
딸랑―
까페 문이 열릴 때 들리는 맑은 종소리.
그와 함께 갑자기 긴 팔을 내 어깨에 두르며 날 자신의 어깨 쪽으로 바짝 당기는 강승재.
소리 지를 힘도 없는데...
" 손 치워라. "
내 나지막한 말에도 꿈쩍하지 않는 저 놈.
아 젠장...
고개를 들고 강승재의 팔을 내치려는데 내 앞으로 그리 낯설지 않은 사람 넷이 보인다.
...
기가 찬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현우 선배와...
어리둥절한 표정의 세진이, 화가 난 듯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현빈이...
그리고... 처음 보는 무표정한 얼굴의... 태윤 선배.
...하아......강승재 너 끝까지 날 엿먹일 생각이구나......
19.
사람이 한 순간에 바보가 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변명할 기회도 내겐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어제 서준후와 나를 무지막지하게 패던 놈과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오해는 꼬리와 꼬리를 물고 끊이지 않겠지...
강승재와 최성우 얼굴을 알지 못하는 세진이만 무슨 일이냐는 눈빛으로 날 바라볼 뿐...
찬바람이 쌩하고 돌 정도로 세차게 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현우 선배.
현빈이가 그 뒤를 따라 나가고...
태윤 선배도...내게 등을 보이며... 파란 문 너머로 사라진다.
세진이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우물쭈물 거리는 사이
" 너 빨리 안나와?! "
냉랭한 목소리로 현빈이가 고함을 빽 지르더니 세진이의 손을 붙들고 나가버린다.
...
" 꺼져... 너 내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마. "
나는 겨우 이 한마디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 왜 그래? 재밌잖아. 나도 이렇게 엿먹은 적 있는데 뭘. "
커피 잔을 쥔 채 킬킬거리는 강승재의 얼굴에 카푸치노라도 엎어주고 싶지만...
애초에 이들에게 서준후의 얘기를 들으려고 한 내가 잘못이었다.
어색한 표정을 하고 날 보는 최성우.
미안하지만, 너는 친구를 잘못 둔 것 같다.
저 또라이 같은 새끼만 아니었다면 너도 그럭저럭 봐줄 만한 놈인데 말이야......
목구멍으로 치미는 이름 모를 분노를 애써 누르며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왜 이렇게 서럽지...?
내가 나쁜 건데... 내가 나빴는데
그래도... 한 번쯤 여기서 뭐하냐고 물어줄 수 있는 거잖아.
그럴 수 있잖아.
누구 한 명이라도... 그렇게 물어봐 줄 수 있는 거잖아.
......선배 정말 나쁘다... ^-^
그렇게 뭐든 이해해주고 믿어줄 것처럼 하더니...
투욱...
맹세코 난 우는 것이 아니다.
제멋대로 눈에서 땀이 나는 거야.
짠 걸 봐서 분명히 땀이야.
여름도 아닌데...왜 벌써부터 이런담......
...
......
" 뭐야 너 얼굴이 왜 이래? "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게 달려드는 우리오빠.
난 요리조리 오빠를 피해서 내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잠구어 버렸다.
" 누가 울렸어!! "
내 방문을 쾅쾅 두드리며 소리를 질러대는 우리오빠 -_-;
처음부터 그냥 오빠에게 물어볼 걸 그랬나...
하지만 오빠는 일방적으로 소리 언니의 얘기만을 믿고 있다.
나는 오늘 얘기 듣지 않은 걸로 할거야.
내가 아는 서준후는...
그런 짓을 할 위인이 못되니까.
누가 뭐라 지껄이든 서준후의 심장을 믿기로 했으니까.
" 오빠 나 잔다.. "
오빠는 내 방문 앞에서 혼자 중얼중얼 한참을 떠들더니 조용해졌다...
...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잠을 청해보는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
벌써 몇 시간 째야......
머릿속이 뒤죽박죽......지독하게 엉킨 실타래처럼 풀어지지가 않아.
그토록 믿었던 세진이까지도 이 시간이 되도록 연락 한 통이 없다.
태윤 선배 때문에 네가 제정신이 아니구나-_-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닫았다 하기를 수십여번.
...
......
지잉―
반짝반짝 액정에 '전화 왔습니다' 라는 글씨가 뜨고 있다.
그래. 이세진 넌 믿었어.
[여보세요]
[ ...... ]
상대편은 아무런 말이 없다.
[세진아? 세진이 아니야?]
[...세진이 전화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
터억.
숨이 터억 막혀버린다...
[ ...선배 왜 그렇게 갔어요... 선배까지 나 오해하는 건...아니죠?]
[휴우...]
선배는 잠시 한숨을 내쉬고 말이 없다.
[현우가 감정이 좋지 않아서... 거기서 시간 끌면 싸움 날까봐 얼른 나왔어......]
하긴......
현우 오빠는 얼마나 내가 괘씸할까......
[그런데 왜 이제야 전화해요-0- 많이 기다렸단 말이에요]
[그럼 아마 기다린 보람이 있겠다^^ ......창문 열어봐.]
[창문 열면 뭐 있는데요?]
[뭐가 있을지 한 번 열어봐^^]
장난 끼 섞인 선배의 목소리.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창문을 열어보는 나.
쏴아―하는 소리와 함께 상쾌한 바람이 들어오고...
그 바람과 함께 내 눈에...
...
......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환하게 웃는...
태윤 선배의 모습이 보인다.
타닥.
타닥타닥.
엄마가 깨건, 오빠가 깨건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현관문을 나서는 나.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인데
왜 그리 많아 보이는지.
아무렇게나 구겨 신은 운동화는 또 왜 그리 걸리적거리는지.
현관문을 벗어나 내 방 창가 쪽으로 달릴 즈음
천천히 다가오는 저 사람.
가까워질수록 더 선명히 내 눈에 각인되는 저 사람.
맞구나...
정말이네......
걸음을 멈출 수가 없어.
좁은 거리를 두고서도 걸을 수가 없어.
지금 뛰고 있으면서도 단 몇 초가 아까워.
그대로 달려가
내 멋대로 달려가
두 팔을 뻗어
나는
그렇게 달려가서 그 사람의 품에 안겨버린다......
...
......
아무런 말 없이 날 감싸안는 이 사람.
한 손으로는 내 머리를 안고 또 한 손은 내 허리를 감싸는 이 사람......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세상 어떤 것도 무기력해지는......
나의 지구는 지금 이 사람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20.
인생에도 예고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만약 예고편을 봤다면 다시 테잎을 감고 잘못된 부분을 수정할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하지만...
다시 테잎을 돌려 감고
누군가의 허락이 떨어져 재편집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고 해도......
나는
그 시간을 잘라내지 않아.
잊지 않아......
믿어 줘.
마지막엔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거야.
내가 그렇게 할게.
그렇게 해볼게 세진아......
...
......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누구보다 내 마음을 잘 아는 태윤 선배는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고마운 사람......
...
" 세진아 안녕. "
아침부터 영어 책을 보고 있는 세진이 녀석...
내 가방엔 다양한 색과 맛을 자랑하는 춥파춥스가 엄청나게 들어 있다...
주섬주섬.
춥파춥스를 책상에 꺼내 놓으니 세진이는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싱겁게 웃는다.
가슴이 따끔따끔...누군가 잔뜩 길러댄 손톱으로 긁어대는 느낌.
쾅―
엄청난 소음과 함께 등장하는 멋진 현빈이.
" 은정연 너 뭐야?! 지금부터 십 초 셀 테니까 변명해봐! "
과연... 현빈이답다.
나는 침착한 태도로 차근차근 설명을 하기 시작했고 현빈이는 내 얘기를 고맙게도 다 들어주었다.
" 아우 그 새끼들이 돌아도 한참 돌았네!! 우리 오빠 어제 열 받아서 죽으려고 했어 이 기집애야!! 서준후 두드려 팬 새끼들이랑 너 히히덕 거린다구! "
믿음이라는 건 그렇게 쉽지 무너지지 않나 봐. 그렇지?
현빈이는 내 말을 다 믿어 주고 있잖아...
말없이 사탕만 빨고 있는, 어제 연락도 없던 세진이에게 조금 섭섭하긴 한데...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랄 상황은 아니겠지?...
...
" 야, 오늘 같이 서준후 문병 안 갈래? "
현빈이가 세진이 손에서 사탕 하나를 뺏으며 나를 바라본다.
아......생각나버렸다.
자기 친구들이 아니라는 금새 들통날 거짓말을 하던 윤소리.
이유 없이 나를 불편하고 맘 쓰이게 만들던 서준후.
그리고 지은초...
" 오빠들이랑 같이 갈 건데 너두 가자. 알았지? "
" 오빠들 다 고3 아니니? 공부 안 해? "
" 우리 오빠야 이미 포기한지 오래고 태윤 오빠는 공부할 게 뭐가 있어. 머리가 워낙 출중한 데다가 한국에서 대학 안 갈걸? "
...
한국에서 대학을 안 가다니......그럼 어디로 간다는 거야.
세진이도 잠시 흠칫 하더니 귀를 쫑긋.
토끼 귀가 되어버린 세진이.
" 부담스럽게 왜 뚫어져라 쳐다보고 난리야...... 미국으로 가지 않겠어? 몰라. 그냥 내 생각이야. "
저토록 무시무시한 말을 해놓고 아무렇지 않게 사탕을 쪽쪽 빠는 저 녀석.
왠지 얄미워진다.
설마 정말 다시 미국으로 가는 건 아니겠지......
...
......
문병을 갈까 말까 망설이는 내 우유부단한 마음을 현빈이가 대신 멋지게 결정해 주었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결국 반강제적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뜻이다.
교문 앞에서 선배들을 만나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고 있는 우리 패거리.
난 현우 오빠에게 꿀밤을 한 대 맞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경솔했지 암 그렇고 말고.
힐끔힐끔.
지금 내가 뭐하고 있냐고?
눈치껏 상상해보면 느끼겠지만 태윤 선배 눈치를 살피는 중이다.
변함 없는 모습이 너무 고맙지만 또 한편으론 미운 내 마음을 알까.
세진이는 현우 오빠 옆에 붙어 서서 태윤 선배 가까이로 올 생각조차 않는다.
원래가 그런 욕심은 많은 녀석인데 왜 저러고 있는 건지.
걸을 때마다 태윤 선배와 손이 자꾸 스쳐 부딪힌다.
저 사람의 파란색에 물들어 내 팔이 파랗게 변하지는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나는 그저 걷고 있다...
지하철 1호선 범내골 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종합병원.
병원에 도착하니 서준후를 부축해가던 그 때 기억이 난다...
대구에 계시던 어머니가 오셨다고는 하던데 어머니가 대구에 계시면......
혼자 지내는 걸까... ?
하여튼 난 쓸데없는 관심이 너무 많다......
덜컹 하는 느낌과 함께 멈춰선 엘리베이터.
현우 오빠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졸졸 뒤따라 들어가는 우리 패거리-_-
" 안녕하세요 "
기운 좋은 우리의 인사에 서준후와 한 여자가 고개를 들어 우리를 본다.
서준후의 어머니는 무지 젊다.
화장을 엄청나게 잘하시는 걸까...?
삼십대 중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면 내 눈이 좀 심하게 잘못된 거겠지...
이틀 사이에 많이 좋아진 얼굴의 서준후.
나와 눈이 마주치자 버릇대로 한 쪽 눈을 찡그리는 저 놈.
난 가끔 내 뇌가 어떻게 생겨먹었나 궁금하다.
아마 뇌 세포 수천 개, 아니 수만 개가 고장나 있을 거야...
왜 마음이 아픈 거야.
왜 불안한 거야......
이게 다 병원 가득 배어있는 크레졸 냄새 때문이야...
...
" 선배∼ 선배∼ 얼른 나으세요. 그래야 햇빛촌 최종 심사도 하죠. " - 현빈
" 시간 생겼을 때 연습이나 더 해. " - 준후
" 뭐라구요? 다시 한 번 말해보세요-0- " - 현빈
현빈이와 서준후는 열심히 말싸움 중.
서준후의 어머니는 과일을 깎고 계시고 세진이는 옆에서 도와드리는 척 부산을 떤다.
현우 오빠는 TV 리모컨을 열심히 돌리고 있고 태윤 선배는 그 옆에 서서 구경을 하며 가끔 날 보며 웃는다.
" 아가씨가 우리 준후 병원에 데리고 온 아가씨죠? "
맑고 깨끗한 목소리.
아가씨라는 말이 낯설지만 듣기에 썩 나쁘지는 않다.
대답 대신 나는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고 서준후의 어머니도 웃으시며 고맙단 말씀을 하신다.
가까이서 볼수록 느껴진다.
지나치게 젊다는 걸.
혹시......친 엄마가 아닌 걸까.
...
" 입원했다 길래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는지... "
어머니라기 보단 여자. 연약해 보이는 여자의 느낌.
서준후 너 어깨가 무겁겠다...
...
나는 비어있는 물통을 들고 물을 떠오겠다며 병실을 빠져나온다.
병실을 나와 정수기를 찾으려 두리번거리는데 저 멀리 '산부인과' 라는 초록색 글씨의 안내판이 보인다.
그 글씨를 등지고 서준후 병실의 반대쪽 복도에서 걸어 나오는 여자 둘.
[나 벌써 두 번째야. 아우 재수 없어.]
[그러게 조심하지!! 애 지우는 거 보기보다 위험한 수술이란 말야.]
[의사가 알아서 해주겠지 뭐]
나이는 나보다 조금 더 먹어 보이는데 무지하게 철이 없다.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는 지도 모르고 있다.
말세로구나......
졸졸졸...
심란한 마음으로 겨우 찾아낸 정수기가 이 모양이다.
이 병원 정수기는 누구 인내심 테스트를 하려 만들어진 건지 뭔지 쯧쯧...
물 나오는 꼬락서니 하고는-0-^
욕을 해대며 물통에 물을 채우고 있는데 누군가 내 뒤에 선다.
" 정수기 때문에 너 안 좋은 성질 더 나빠지겠다. "
...머쓱한 표정의 서준후.
" 그 날 고마웠어. 인사도 제대로 못한 것 같다...... "
오늘따라 적응 안 되는 유순하고 착한 눈동자...
괜찮다고 말해주려 하는데 정수기의 파란 꼭지를 만지작거리던 서준후가 다시 입을 연다.
" 그런데... 내 핸드폰 통화 기록에 윤소리 전화번호 있더라. 네가 전화 걸었냐? "
...
......
후후... 그럼 그렇지.
네가 나한테 고맙단 인사씩이나 하려고 날 따라올 위인은 아니지. 그렇지.....
...참아보려고 했는데,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네 얼굴 보니까 나 도저히 못 참겠다...
네 표정 보니까 정말 못 견디겠다.
" 도와달라고 전화했어요. 강승재, 최성우 다 소리 언니 친구 인 것 같아서. "
내가 그 놈들 이름을 다 아는 것에 놀랐는지, 도와달라는 말에 놀란 건지 딱딱하게 표정이 굳어 가는 서준후.
" 그런데 소리 언니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
서준후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린다.
" 내 말 듣고 가요. 듣기 싫어도 들으라구. "
냉랭하고 싸늘한 내 목소리에 서준후의 걸음이 잠시 느려졌지만 곧 다시 뚜벅뚜벅 걸어가는 저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