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 나타나고 나서 소리 많이 힘들어 해. 서준후 저렇게 도망치는 거 옳지 않아. 네가 도와줘... 소리 하루 하루가 다르게 망가져. 더 이상 못 보겠다...
아팠던 걸까.
사랑했던 친구와 닮은 나 때문에 언니는 많이 아픈 걸까.
언니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애써 참아내는 나.
...
" 아우씨, 선배가 바쁘긴 뭐가 바빠요!! "
문 밖으로 들리는 현빈이의 목소리.
또 누구한테 시비를 건 거니 현빈아 -_-;
" 너 그러다 심사에서 확 떨어지는 수가 있다? "
이런...
목소리만 좋은 서준후구나...
소리 언니의 표정을 살펴보기도 전에 현빈이에게 등을 떠밀리며 불만스런 표정의 서준후가 들어온다.
그와 동시에 서두르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소리 언니가 급하게 가방을 메고 고개를 숙인 채 문 쪽으로 뛰어가고
멍하니 문 쪽을 보고 서 있던 나와 심하게 어깨를 부딪힌다.
탁―
바닥으로 떨어진 담배 한 갑.
...
......
어디서 떨어진 건지, 누구에게서 떨어진 건지......
내 발 밑에 떨어져 있는......
소리 언니와 내 눈이 마주치고... 한 눈에도 알아 볼 수 있다.
기호품인데 뭐...... 학생이지만 뭐..... 다들 핀다던데 뭐...... 문제 될 거 없잖아......
달칵.
결코 반갑지 않은 소리.
" 서준후 여기 있냐? "
...
......
...문제가 되어버렸다.
우리 학교에서 제일 무섭다는 학생 주임 선생님.
그리고 햇빛촌 담당 선생님이시기도 하다......
" 아, 여기 있었네. 내일 강당 사용할...... "
짧은 시간이었다.
움직이면 더 눈에 띌까봐 떨어진 담배를 주울 수도 없었다.
" 기가 차네 이것들. 너네 햇빛촌 애들 맞아?! 저거 누구 거야! "
붉어진 얼굴로 버럭 고함을 지르는 선생님.
믿었던 학생들에 대한 분노를 얼굴로도 읽을 수가 있다......
" 제 겁니다. "
천천히 허리를 굽혀 담배를 집어드는... 소리 언니?
아니......
서준후.
22.
현빈이도 나도 너무나 황당한 상황에 머뭇거리는 사이
선생님은 서슬 퍼런 기세로 서준후의 머리를 된통 후려치고......
" 너 임마 참 잘하는 짓이다. 너 선도부다 선도부. 거기다 햇빛촌 회장이다 이놈아!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이래 이놈이!! "
서준후의 귀를 잡고 질질 끌고 가는 선생님.
현빈이가 뭐라고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나는 현빈이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렸다.
문 밖으로 나가던 서준후의 눈을 보았다.
보기 싫었는데......
경고도 협박도 아닌 애원.
보기에도 안쓰럽다.
균열이 가는 믿음에 억지로 시멘트를 처바르고 있는 네가.
" 켁켁..... 야, 너 뭐야? 너까지 돌았어? 왜 준후 선배가 나가는 걸 보고만 있는 거야!!! "
날 보며 고래고래 악을 써대는 현빈이.
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버린다...
나는 소리 언니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소리 언니는 웃고 있다.
웃겨 죽겠다는 듯 간헐적으로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소리.
내가 한발 짝 다가서자 내 귀에 대고 장난치듯 귓속말을 하는 윤소리.
" 저거 다 쇼야......서준후 쇼하는 거야. "
따악 하는 소리가 난 것과 윤소리의 얼굴이 돌아간 건 거의 동시였다.
...
빨갛게 부푼 소리 언니의 뺨.
나는 입술을 깨물고 소리 언니 얼굴을 내리친 내 손을 바라보았다.
...
......
쫘악―
이런......소리 언니의 힘도 장난이 아니다.....
불에 데인 뜻 뜨거워......
" 너 사라져! 없어지란 말이야!! 너 때문에 매일매일이 지옥 같아!! "
내 눈을 똑바로 노려보고 마치 비명을 내지르듯 필사적으로 악을 써대는 언니...
" 서준후 용서하려 해도, 못이기는 척 눈 감고 귀 막으려 해도 너 때문에 안 돼. 안 된다구!
잊으려 아무리 애를 써도 은초 닮은 너 볼 때마다 서준후 용서하는 게...
모르는 척 하고 살아가는 게...... 은초에게 얼마나 못할 짓인지...... 너 제발...... "
참다가 폭발한 듯 서러운 울음을 터트리는 윤소리.
...
......
" 내가 지은초 왜 죽었는지 맞춰 볼까요...? "
그런 언니가 놀라 고개를 들만큼 내 목소리는 모래처럼 메마르게 퍼석거리고 있다.
...
알 것 같아.
왜 죽었는지 밝힐 수 없는 이유.
한 여자의 인생이 망가질 만한 일.
친구 때문에 남자를 용서할 수 없고 남자 때문에 친구의 죽음을 알릴 수 없다...
무서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 무서워.
이제 열일곱인데
근사한 사랑을 꿈꿀 나이인데 너무 빨리 그 환상이 깨어지고 있잖아......
소리 언니의 얼굴을 보며 갑자기 생각난 거 뿐이야.
그러니까 맞을 리 없잖아.
아니잖아.
아니잖아. 그런 거 아니잖아.
내 헛소리 따위 맞을 리가 없잖아.
...
......
" 그래요... 사실 난 아무것도 몰라요.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요. 서준후는 아니야. 아니라구요. "
돌연 낮아진 내 목소리에 소리 언니가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눈으로 날 멍하니 바라본다.
" 믿어주면 안되나요... "
가늘게 떨려오는 내 목소리를 들으며 벽에 등을 기댄 채 스르륵 주저앉는 소리 언니.
대꾸할 힘도 없어 보인다.
나 많이 양보했어요.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끔찍한 말 언니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언니... 믿어주면 안되나요.
저렇게 안쓰럽게 혼자 애쓰는 서준후 믿어주면 안되나요.
...
...이제야 오빠가 하던 말을 알 것 같다.
햇빛촌에 들어가지 말라던 오빠 마음을 알 것 같다.
자꾸만 반복되는, 끝도 없을 이 싸움에 내가 다칠까봐 그랬던 거구나......
나는 내 가방을 찾아 메고 조용히 문을 열었다.
소리 언니는 그때까지 아무런 말이 없다.
내가 문을 닫으려 할 때 나지막한 목소리로 언니가 입을 연다.
" 너도 나 믿어주면 안 되는 거니...... 현우 오빠한테 1학년 남자애 보낸 사람 그게 나라는 생각은 너......안 해본 거니...... "
23.
젠장...
아프다.
마음이 아프다.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 처음엔 내 친구일거라 생각하지 않았어. 네가 잘못 안거라 생각했어...... 나중에야 네 말을 듣고 알았지만......그 땐 말할 수가 없었어......
서준후 입원했단 말에 온통 정신이 쏠려 있었으니까...... "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는 상황이 이런 걸까.
언니의 목소리는 조금 전에 비해 많이 안정되고 낮아져 있었다.
" 너보다 준후를 잘 알아. 너만큼이나 나도 준후 생각해...... 나 좀 도와주면 안되겠니......"
흔들리지 말자. 은정연.
너 서준후 편 하기로 했잖아.
누가 뭐래도 그 사람 심장 믿기로 했잖아.
그렇지만......
" ...내가......어떻게 도와주면 되는 건데요......? "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중얼거리듯 말하는 나.
잠시 망설이다 소리 언니가 입을 연다.
" 햇빛촌 포기해 줘...... "
...
다 끝났다.
내 역할은 여기서 끝...
열일곱 해를 살아오며 처음으로 끌리던 사람.
밤에 보는 바다처럼 무섭고 두려웠지만 나도 모르게 끌려가던 사람.
이제는 모르는 척 살아야 할 사람......
" 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
나는 애써 웃으며 발걸음을 옮기고 내 등뒤로 미안하다는 말을 연거푸 반복하는 소리 언니.
서준후.
이젠 아프지 마.
아파서 윤소리 이름 부르지마.
이름 불러대지 말고 그냥 옆에 둬.
하지만...너 그거 알아?
나도 많이 아팠었어...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도 늘 아팠어.
영문도 모른 채 계속 심장이 아파서
자꾸만 목이 따끔거려서
나도 많이 힘들었어.
미안해.
네 기억 속 제일 아픈 사람...닮아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
......
천 근 만 근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난 잠시 태윤 선배 교실을 들여다보았다.
한 손으로 볼펜을 돌리며 책을 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태윤 선배.
정말 많이 다른 감정이다.
어느 하나 가볍지 않지만 다른 감정, 다른 생각.
나도 모르게 여러 사람을 상처 입혔어.
이젠 똑바로 하자.
정신 차려 은정연.
은정연...
오늘만큼 내가 은정연이라는 사실이 저주스러울 때가 없다......
...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
" 은정연!! 정연아? "
음...... 누구 목소리?
" 너는 긴장도 안되냐? 좀 일어나라 좀 -_-^ "
눈뜨자마자 보이는 건 잔뜩 골이 나 있는 표정의 은재연.
나 학교 안가도 되는데...
어젯밤 난 오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일어나 얼른!! "
내 엉덩이를 걷어차는 은재연-_-^
" 나도 여자란 말야!! 어딜 차는 거야!!!!!!!! "
" 네가 어딜 봐서 여자야!!!!! "
... 지금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말했다가는 오빠에게 학교까지 질질 끌려가기 십상이다.
억지스레 일어나서 대충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머리도 감고 교복을 입었다.
힘차게 손을 흔드는 오빠를 뒤로하고 현관문을 나서니 눈이 부시도록 날씨가 좋다.
하늘까지 나를 무시한다-_-;
비라도 확 내렸으면 좋았을 텐데!!
...
편의점 앞에 도착했을 때 어느 때보다 밝은 표정의 세진이가 보인다.
" 안녕∼ "
환한 얼굴로 인사를 대신하는 세진이.
내가 선도부를 피해서 일찍 등교하면서 개학 첫날 빼고는 세진이와 같이 등교해 본 적이 거의 없다.
날씨 좋고
안 오던 세진이까지 날 데리러 오고
아주 날 미치게 하는구나...
" 마지막 연습은 잘 했어? ^^ "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 보이는 세진이에게 아침부터 초치는 얘기는 하기 싫다......
나는 그랬다고 대답을 하며 세진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힘차게 걷는다.
내 손을 떨궈내는 세진이.
" 손 치워!! 내가 너보다 키가 더 큰데 왜 네가 손 올리고 난리야. "
" 웃기고 있어-_-^ 너 나보다 1cm 나 작잖아!! "
" 그게 무슨 유언비어래? "
환하고 따뜻한 세진이를 바라보며
갑자기 불쑥 고개를 내미는 '죄책감' 이라는 놈......
나는 세진이를 바라보며 애써 웃어본다.
죄책감 들 일 따위 이제 없을 테니까......
학교 앞은 날씨보다, 세진이보다 한 술 더 뜨는 꼬락서니를 하고 있다-_-
각종 무대 의상을 입은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사진사며, 음료를 파는 아줌마며 잡상인들도 보이고...
그야 말로 축제구나.
...
복잡한 인파 속에서 나는 세진이의 손을 꼭 잡고 강당으로 들어섰다.
천 명쯤 수용할 수 있는 강당은 이미 꽉 차 버렸다.
순서대로 무대위로 올라가야 할 세진이와 나는 대기실 쪽으로 향하고......
잠시 후면 난 무지막지한 욕을 들어야 하겠지.
서준후의 말대로 엄청난 이벤트가 될 테지 젠장......
대기실로 들어서자 한 쪽 구석에서 요란한 의상을 입은 아이들과 수다를 떨던 현빈이가 날 보고 고개를 획 돌려버린다.
어제 일로 단단히 삐진 듯 옆구리를 콕콕 찔러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현빈이.
까만 전선들이 가득 엉킨 기계들 사이에서 흰색 A4지를 손에 들고 바삐 움직이는 서준후.
현빈이가 선생님께 사실대로 말한 건지 어쨌는지 두드려 맞은 기색은 없다.
내 옆구리가 썰렁하다 싶었더니 어느 새 태윤 선배 곁에서... 영어 원고를 재잘거리고 있는 세진이.
아무리 봐도 어울리는 두 사람.
나를 발견한 태윤 선배는 특유의 따뜻한 웃음으로 내게 인사를 건네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다......
그리고
대기실 문을 조심히 열고 잡다한 물건이 담긴 박스를 들고 들어오는 소리 언니와 은영 언니.
소리 언니의 얼굴을 어두운 표정으로 바라보다...
의아한 눈길로 날 살피는 태윤 선배의 눈길을 느끼고
재빨리 악보를 꺼내 손가락을 퉁기며 연습을 하는 척 하고 있는 나.
정말이지 비참하다...
...
......
까만 커튼이 쳐지고
환한 조명이 무대 위를 밝히고
은영 언니와 현우 오빠가 무대로 올라갈라치면
와―
강당이 떠나갈 듯한 아이들의 함성소리.
천 명이 넘는 아이들이 모두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나만......
나 혼자서만......
웃을 수가 없다.
24.
마이크를 타고 흐르는 경쾌한 은영 언니와 현우 오빠의 목소리.
총 스물 다섯 팀이 최종 심사를 준비 중 이란다.
그 중 댄스와 노래를 준비한 팀들이 제일 많다.
간혹 모노 드라마를 준비한 아이도 있고 요가를 준비한 아이도 있다-_-;
맨 처음, 요란한 음악 소리와 함께 멋진 춤을 선보이는 아이.
현빈아 너 저기서 살아남을 수 있겠니-0-
중간 중간 선배들은 점수를 매기는 듯 수첩을 들고 움직인다.
네 팀 정도의 공연이 끝나자
낯익은 음악이 들려온다.
영화 'Moulin Rouge' 의 대표곡인 'Lady Marmalade'
신나는 리듬과 함께 등이 한껏 파인 섹시한 옷을 입고 등장한 현빈이.
나는 마음속으로 힘껏 응원을 해주었다.
Hey sister, go sister, soul sister, flow sister ♩♭♬
요염한 걸음걸이를 선보이며 심하게 흐느적 거리는 현빈이 녀석...
아이들의 함성소리가 점점 높아진다.
온 바닥을 쓸고 다니는 현빈이-_-;
진작 말하지 그랬니.
너의 댄스는 섹시 댄스가 아니라 엽기섹시댄스라고 -_-;;
Christina Aguilera 의 파워풀한 목소리가 들릴 즈음에는 귀가 멍멍할 정도로 모두 소리를 질러대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모두들 재미있어 하는 표정.
박현빈, 너 성공인 것 같다^^
" 현빈아, 너무 멋졌어! "
방방 뜬 내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하얗게 흘기는 현빈이.
" 아는 척 하지마!! "
그러면서도 대꾸를 해주는 현빈이.
나는 바보처럼 하하 웃고 말았다.
점점 세진이의 차례가 다가오고 시간이 흐를수록 눈에 띄게 덜덜 떠는 세진이.
세진이가 영어 분야 제일 마지막이라 더 부담이 큰 듯 하다.
" 이세진! 야, 이세진∼ 심호흡 해봐. 응?? "
세진이의 볼을 감싸쥐고 심호흡을 시켜보지만 빨갛게 상기된 얼굴을 한 채 세진이는 안절부절.
어딘가를 보고 있는 듯 해서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예상했던 대로
태윤 선배를 보고 있다.
- 후들후들 떨면서 무대 위에 못 나가겠다고 버티구 있는데 태윤 오빠가 와서 말하더라.
저긴...널 위한 무대라고. 모두 널 위한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환하게 웃어주는데 왜 그렇게 갑작스럽게 용기가 생기던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말을 할 때 세진이가 얼마나 예뻤는지......
더 망설일 것도 없이 태윤 선배 손목을 잡고 끌고 오는 나.
전처럼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내 맘을 먼저 알고 세진이를 살펴주는 태윤 선배.
선배의 옆얼굴을 보면서 괜히 서글퍼지는 나.
세진이 일은 그렇게 잘 알면서
나 지금 속상해 죽을 것 같은 건 왜 몰라요.
질투할 상황도, 질투할 권리도 없으면서...
나는 소리 없는 투정을 부린다.
세진이의 어깨를 가만히 잡고 뭐라고 말하는 태윤 선배.
세진이는 중 2 때 연극제 나가던 날이 생각난 건지 얼굴이 더 빨개졌다.
그렇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저 사람과 있으면 괜히 따뜻해지고 편해지던 마음.
나만 갖고 있는 게 아니었어......
고개를 끄덕끄덕 해 보이며 세진이가 무대 앞으로 나간다.
그런 세진이의 등을 살짝 밀어주며 응원을 해주는 태윤 선배.
곧 세진이의 발표가 이어지고
내가 듣기에도 앞서 발표한 아이들에 비해 월등히 유창한 세진이.
중학교 때 재미있었던 에피소드들을 준비했다는데 난 당연 알아들을 수 없다-_-
...
이제 세 사람 남았다.
곧 다가올 내 차례.
내 폭탄선언 때문에 오늘 축제가 엉망이 되는 건 아닐지......
" 긴장 안 돼? 씩씩하네. "
씩씩하다고?
미운 마음에 태윤 선배를 가만히 노려보자 픽 웃는 저 사람.
간질간질......
옆에 서 있는 태윤 선배와 자꾸 또 손등이 스친다.
신경이 쓰여 손을 위로 들려는데
선배는
그런 내 손을 가만히 잡아 내려놓는다......
...
" 보기 안쓰럽다 너...... "
태윤 선배와 오버랩 되어 보이는 세진이의 얼굴.
언제나 한결 같이 나를 믿어주는 세진이의 얼굴.
" 세진이가 선배 많이 좋아해요. "
...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내가 입을 열고 그런 날 마주보며 아무런 말이 없는 태윤 선배.
" 잘해주세요... "
선배는 대답도 없이 내 손을 꽉 잡아주더니 성큼성큼 걸어가 버린다......
...
......
바보...
...
" 다음은 마지막 무대입니다. 단독 작곡 분야에 도전한 1학년 3반 은정연 양을 모두 큰 박수로 맞아주세요. "
이럴 땐 귀가 먹어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25.
머릿속은 하얗고 속은 울렁거려.
나는 겨우 무대 앞으로 걸어나간다.
까만 머리만 보이는 많은 수의 아이들.
휘청휘청......
아찔해진다.
하얀 색 피아노.
피아노 앞에는 마이크도 준비되어 있다.
나는 힘없이 피아노 앞에 앉는다.
저벅저벅.
서준후가 무대 위로 올라온다.
갑자기 아이들의 함성소리가 두 배쯤 커진다.
왜 올라오는 거지?
후우......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까.
지금 난 내가 할 말만 하면 되니까.
들이쉬고 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하아하아......
...
" 포기하겠습니다. "
...
......
떠들썩한 아이들의 함성소리 속을 날카롭게 가르고 전달되는 내 목소리.
드디어 말했다...휴......
[쟤 뭐야? 뭐라는 거야?]
[그만둔다는데?]
웅성웅성 자갈치 시장 바닥이 되어버린 강당.
현우 오빠와 은영 언니가 급하게 내게로 뛰어오는 것이 보이고
그 전에 내 팔을 움켜쥐는 이 사람.
서준후.
" 저 포기할...... "
" 마이크 꺼. "
서준후는 무대 밑 햇빛촌 선배들에게 작게 소리를 지르고 날 무대 뒤로 끌고 간다.
시끌벅적. 아이들의 소란을 잠재우려 애쓰는 현우 오빠와 은영 언니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 대신 시간을 메꾸려 몇 명의 햇빛촌 선배들이 공연을 하러 올라간다.
" 너 왜 이래? "
서준후의 딱딱한 목소리.
그 옆에 놀란 얼굴로 날 보는 세진이와 현빈이.
그리고 태윤 선배.
서준후는 아마도...
내가 무대 올라가기 전에 그만둔다 했으면 어떻게든 무대에 올려보냈을 거야.
하지만 모든 애들이 듣는 곳에서 포기하겠다 했으니 이제 아무 말 못 하겠지......
" 저 피아노 못 치겠어요. "
아무런 감정이 섞이지 않은 내 목소리에 어이없다는 듯 날 바라보는 서준후.
"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올라가. 무조건 올라가. "
" 손가락 아파요. 그래서 못 치겠어요. "
일제히 모든 사람들이 내 손을 주시한다.
" 멀쩡하던 손이 왜 지금 아픈 건데? 어디 이유나 듣자? "
아... 디게 서럽네.
나쁜 서준후.
못된 서준후.
반대쪽에서 소품 따위를 정리하던 소리 언니가 이 쪽을 쳐다본다.
그래.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아예 나 전학이라도 갈까봐 젠장.
" 혹시라도 햇빛촌 붙게 될까봐 저 연주 안 할래요. "
팔랑팔랑......
서준후가 들고 있던 A4 지를 내 얼굴에 던지고.......
누군가 내 얼굴을 손으로 가려주어......
종이는 내 얼굴에 와서 닿기도 전에 밑으로 떨어지고 있다.
" 그쯤 해 둬. "
내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는 태윤 선배.
" 이게 지금 그만할 상황이야? "
똑바로 마주 선 두 사람.
키가 거의 비슷하다.
" 내가 올라가. "
태윤 선배는 내 손에 쥐어져 있던 악보를 뺏어버린다......
방금 저게 무슨 말이지......?
" 허락 안 해. "
" 내가 해. "
" 작곡자가 피아노 연주를 거부한다는 게 말이나 돼? "
" 작곡자 곡만 쓰는 사람이야. 피아노 연주까지 할 필요 없어. "
" 곡 쓴 애가 연주 기피하면 저게 저 애 곡이라고 애들이 믿을 것 같아? "
" 증명할 시간은 나중에도 충분히 있어. "
" 이건 형평성 위배야. 명백한 봐주기라고. "
" 융통성 차원의 문제일 뿐이야. "
한 치도 양보도 없는 두 사람...
" 그래도 이건 안 돼. 은정연, 너 올라가. 너 떨어지도록 해줄 테니까 올라... "
" 어차피 이벤트가 필요했던 거 아냐!! "
...
......
...처음으로 내 앞에서 선배가 소리를 지른다.
" ...이벤트 효과라면 내가 더 나아. 이쯤은 나도 연주 가능하니까 넌 그냥 연습대로 노래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