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여성시대 오페라의 유령의 개
1탄 꿈을 사서 왕비가 된 여인 - 문명왕후
2탄 버들잎 곁에 두고 언제나 나를 생각해주오 -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 이야기
3탄 잠수이별은 조선시대여도 다 뒈져버려야 해ㅗㅗ - 전등사 나부상
4탄 정조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비운의 여인 - 의빈 성씨
5탄 장마 때문에 집이 떠내려가서 후궁 됨;;; - 수빈 박씨
6탄 될 놈은 멧돼지를 때려잡아도 됨... - 산상왕과 후녀
7탄 불꽃처럼 살다가 나비처럼 사라진 여인 - 기생 장연홍
8탄 눈이 내리는 날 흰 당나귀를 타고 그대에게 가겠소. - 시인 백석과 연인 자야
9탄 솔로의 아픔을 노래한 최초의 서정시 - 유리왕의 황조가
10탄 진정한 국모였던 마지막 황후 - 순정효황후
광복을 맞이하여 요즘 계속 근현대사 쪽으로 찌고 있습니다
대한독립만세
남자현 열사는 1872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남
열사의 집안은 굉장한 학자 집안이었고
아버지처럼 똑똑했던 열사는 열아홉이 되기전에 소학과 대학을 마스터 함
열아홉에 남편 김영주를 만나 경북 영양에 살림을 차린 후,
소박하고 단란하게 살아감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일제의 만행이 포악해져 나라가 뒤숭숭해짐
6년이 지난 어느 날 남편 김영주는
임신 중인 열사를 앞에 앉히고 말했음
"부인, 나는 나라가 망해가는데 그냥 지켜보고 싶지 않소.
사내가 되서 어찌 집에만 있을 수 있겠소.
혹 내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면 저승에서 다시 만납시다."
열사는 사랑하는 남편을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지만
남편의 결심을 꺾을 순 없었음
김영주는 당시 영양 지역의 의병장이었던 김도현과 뜻을 같이 하여
의병대에 들어감
그러나 김영주는 왜군과의 전투 중 사망하고 말았음...
남편의 전사소식을 들은 열사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슬픔에 사로잡혔음
곧 그 슬픔은 일본에 대한 타오르는 복수심으로 변했음
당장이라도 발벗고 나서고 싶었으나
열사에겐 부양해야할 시부모+뱃속에 3대 독자 아들이 있었음...
열사는 할 수 없이 양잠을 차려 손수 명주를 짜서
그걸 판 돈으로 생계를 이었음
그렇게 21년의 세월이 흘렀음
열사의 나이 46세 때, 3.1 운동이 열림
그날도 열심히 일을 하던 열사는 마을을 뒤덮은 태극기를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음
'내가 항일 운동을 하는 것이 남편의 원수를 갚는 것이다.'
그러고부터 8일 후,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요녕성에 있는 서로군정서(무장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고
군사들의 뒷바라지를 함
또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에
북만주 일대에 십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고
열두개의 교회를 세워
여자, 농민 등 약자들의 교육 신장에 힘썼음
그러고부터 6년 후인 1925년에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으나
경계가 너무 심해 실패함
그러다 편강렬, 양기탁 등과 협력해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추진하는데 힘썼음
그러던 어느 날,
도산 안창호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다 사망한
나석주 의사의 추도회 겸 강연회를 열었음.
이 강연에는 무려 5백명이 모였음
일본시발럼들이 가만있을리가 없었음
안창호, 김동삼 등 삼 백명의 독립운동가가 투옥됨
열사는 많은 애국지사들이 석방될 때까지
정성껏 옥바라지를 하고,
투옥이 억울하다며 항의하기도 했음
이에 중국 정부는 일본을 무시하고
"어차피 우리 땅에서 벌어진 일이니 죄수를 어찌하든 내 맘이다ㅋ"
하며 안창호 선생 등을 보석으로 석방함ㅋㅋㅋ
그러자 빡친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킴 ㅄ;;
열사를 보호하던 애국지사 김동삼 선생은 일제의 마수에서 벗어나고자
하얼빈으로 갔지만 홀로 체포됨;
독립군들에게는 지시를 내려야 할 선생이 투옥되자 어찌할 줄 몰랐음
그러자 남자현 열사가
"내가 직접 선생을 만나러 가겠소."
많은 사람들이 그러다 감옥에 갇힌다며 말렸지만
열사의 뜻은 확고했음
열사는 김동삼 선생의 친척으로 위장하고
태연한 얼굴로 면회 허가를 얻어냄ㅋㅋㅋㅋㅋ
그 덕분에 몇번이고 선생의 지시내용을 독립군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음bbbb
1년 후, 국제연맹조사단이 일제의 만행을 파악하러 오겠다며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이 퍼짐.
열사는 그 말을 듣고 가만 있을 수 없었음
일제의 만행을 온몸으로 표현하기 위해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ㅠㅠ
'조선독립원'이라고 혈서를 쓴 뒤
자른 손가락과 함께 조사단에 보냈음....
하지만...일제의 입김이 너무 쎘던 터라...결과는 미미했음 ㅠㅠㅠㅠㅠ
하지만 열사는 포기하지 않았음
만주에 머무는 일본대사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 것임
열사는 거지로 변장하고
품 안에 권총과 탄환, 폭탄을 몸에 숨기고
장춘으로 떠나려했음
그러나 하얼빈 시의 경계 지역에서 일본경찰에게 들켜 붙잡힘...
열사는 6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됨.....
이미 노년의 나이에 들어선 열사는 사경을 헤매기 시작했음...
그러나 열사에게 죽음 따위 두렵지 않았음
나이 62세에 고문을 받은 몸으로 15일 동안 단식 투쟁을 함...
열사의 항일구국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병신일본잡호로새끼들은
보석으로 석방시킴
하지만 열사는 자신의 죽음이 매우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았음
열사는 아들에게 얼마 안되는 전 재산을 남기고
독립운동에 쓰라고 당부하며
향년 62세로 세상을 떠났음..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하던 모든 독립투사들은
남자현 열사를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불렀음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열사의 죽음에 애통해하며
하얼빈 묘지에 안장하고 공로를 적은 비석을 세움
그리고 열사가 죽은 지 12년 후.
조국은 광복을 맞이하게 됨..
광복의 찬란한 빛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열사는
그 위대한 뜻을 기려
17년 후인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 됨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
남자현 열사
(1872~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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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의 일생이 암살의 안옥윤과 매우 비슷하여
감독이 많이 참고를 하지 않았나 싶어
이렇게도 많은 독립운동가 분들이 계신데
우린 그 중 반의 반도 알지 못하고 있어..
지키고자 했던 조국에서는 친일파들이 여전히 개소리나 해대며 설치고 다니고
후손으로서 한없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든다..............
이 글로 인해 많은 여시들이 남자현 열사와 다른 독립운동가 분들을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대한 독립 만세.
첫댓글 진짜 멋지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아 가슴이 뜨거워진다... 감사합니다ㅜㅜ
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ㅠㅠ
멋있으시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진짜 열심히 살겠습니다..죄송합니다ㅠ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퓨ㅠ멋져ㅠㅠ감사합미다
감사합니다ㅠㅠㅠ
정말 잊지말아야해ㅠ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
감사합니다ㅜㅜㅜㅜ
감사합니다 ㅠㅠ정말 감사합니다
남자현여사 객사하셨다고 알고있음ㅜㅜㅜ 진짜 잊지말아야지 저런분들이 많았는데 잊는다는건 말도안돼 아직도 4천9백여명의 독립위인들의 후손을 찾지 못했다던데... 물론 이름을 알게된 사람이 진짜 소수라서 저수보다 훨씬 많았을거임... 평생 기억해야돼 진짜
소름돋았다ㅠㅠㅠ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ㅠㅠㅠ
감사합니다ㅠㅡㅠ
대한독립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