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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1)
사실 난, 서울대를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설대입시에 실패하여 다른대학을 다니다가 다시 시험을 봐서 들어왔다
설대 작곡과는 당시 실기와 함께 다른 주관식 문제들도 시험 보았는데.....,(수학, 역사, 국어, 피아노 실기,화성법, 음악분석, 시창 청음, 작곡-주제와 변주곡, 3부형식 작곡 등 등)
돈이 있어야 레슨 받고 음대 작곡과에 들어가는 시절인데. 당시 레슨비가 한주에 4-6 ? 만원 공무원 월급이 20-30만원, 중고등 학교 선생 월급이 20만원 정도 하였으니. 돈 없으면 레슨 받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일단, 독학으로 화성법 책을 사고 혼자서 작곡 공부를 하고 피아노(베토벤 소나타, 바하 4성 인벤션) 연습을 하여 혼자서 시험을 보았다. 서울음대생에게 약간 레슨을 받긴 했지만 선생이 놀러가고 바쁜나머지...... 입시를 앞두고 사라진 선생이 어느날 나를 길 거리에서 보더니 숨어버리셨다..그래도 지금도 학교 선배이지만 ... 내 후배들이 선배님이라고 불러도 나는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선생님은 선생님인 것이다.
당연히 그 어려운 작곡과에 떨어질 수 밖에, 그래서 이 후 서울대 대신 다른 대학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다가. 군사훈련 전에 휴학하고 입시 준비를 하여 설대에 합격하였다. 그런데 들어간 학교에서 다시 시험을 봐서 서울대에 들어온 사연이 있으니- 꼭 그런 것 만은 아니지만, 서울대가고 싶어서 다시 시험 본 것이지만-
당시는 선 후배 사이가 엄청나게 군기가 세었다. 군 제대 후 돌아온 음대 선배들이 한 마디 말만 하면
알아서 '차려총이었다' 여하튼 신입생 환영회 때 술먹으라고 하고 얼차례 주고 난 기독교 인이라 술 안먹는다 " 하여 미움을 먼저 받았다. 요사이 그 때와 달리 와인이나 비어정도는 하지만 그 때는 순수했던 것 같았다, 신앙적으로도 그 때가 정말 순수했던것 같다. 요사이는 그렇지 못하니 말이다.
그래서 이차 집합을 다음 날 당하였던가 ?..... 바로 윗 학년 선배들이 불러서 차려 열중셨 ! 하더니 일렬 횡대로 세웠다.... 나는 아니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왜 그러십니까 ? 다 의자에 앉게하시죠 하면서..앉았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얼굴을 큰 주먹으로 한 방 갈겼다. 그리고 난 모른다.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바로 뒤에 있는 콘크리트 기둥에 머리를 박고 콘크리트 바닥에 또 받쳐서 뇌진탕을 잃으킨 것이다.
일어나자... 시간과 공간이 확인이 안되고 내가 왜 이자리에 있는지 기억이 되지 않았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서 토하고 학교에 출석해도 계속 토해서 일주일 후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 이후로 기억력이 떨어진 것 같았다.
학음대 학장이 찾아와 그 녀석을 학교에서 징계하려하니 자네가 잘 이야기 해주게 부탁하여
학생처장을 찾아가 용서해 주시길 간청했던 것 같다. 사실 형사처벌되어 퇴학을 당하여야 마땅했지만.....,
서울음대 들어간 지 몇 년 후에 그 선배가 졸업정원제 때 우리 때 보다 정원도 두 배 많아져 입시가 무지하게 쉬었진 상태에선 서울대에 입학하였다. 졸지에 선배가 후배가 된 것이다.
저 녀석, 이번에 내가 얼차례를 줘야 될 텐데...사실 그랬었어야 후련했을지도 모른다. 순진해서 인사하고
존댓말 써주고.... 그리고 사라져서 지금은 음악게에 흔적도 없다 설대 졸업했는지도 모른다.....
새로 드러간 설대 음대에서는 선배라고 때리고 얼차례 주고 그런 것은 없었던 같았다.
여하튼, 그놈의 선배라는 텃세 때문에 죽을뻔 했다. 하나님이 보호하사 생명을 건진 것이다.
에피소드1)
독일 하노버에서 연수를 받고 있을 때이다. 주말을 이용하여 Mitfahren Centrale(여행지 동승 안내센터)를
통하여 비엔나의 친구들을 찾아보기 위해 하노버에서 뮌헨까지 갔었다. 바로 비엔나로 갈 수 없어서
하룻 저녁을 뮌헨의 식당과 비어하우스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노래하고 춤추고 맥주마시는 독일 사람들에겐 영국의 Pop 레스토랑과 같은데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여하튼, 쾨테인스티튜트와 고등학교 때 배운 독어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같은 자리에 앉아있었던
독일인들과 친하게 되었었다.
여하간, 옆 좌석의 검은 가죽자켓을 입은 사람이 묻길, Wowher Kommen Sie ?
ja, Ich komme aus sud korea !......., Was machen Sie hier ? ja, Ich mache eine reise nach Wien .
aber, Heute Abend, Ich bleibe im Muchen um ich Morgen nach Wien zu fahren. Jawhol !
Er hat mir gefragt, Wie meinen Sie Deutche ?( 히틀러 시절을 회상하면서 항상 죄의식이 있어서 동양인에게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 ja, ich glaube dass, Deutche sind personalich einbissen nicht besser und kleber als Koeraner. aber Alle Deutsch sind besser und kleber als Korener.
(대충 통역하면, 너 어디서 왔니 ? 나 한국에서 왔다, 무었 때문에 독일에 왔지 ?, 응 비엔나로 가는데 오늘저녁 뮌헨에서 하룻밤 지내고 내일 비엔나로 갈거야. 너 독일 사람들 어떻게 생각하지 ?. 응, 개인적으로는 한국 사람이 더 똑똑한 것 같은데 단체적으로는 독일 아이들이 뭉치는 힘이 강하고 똑똑한 것 같아 ....)
한참 있다가 화장실의 큰집에 들어갔는데, 고함소리다 " Wo ist Koreaner ? I will KII you !!!
하면서 화장실을 차고 돌아 다닌다 ! 생각하니 내가 독일 애들 조금 개인적으로 덜 떨어졌다 한 것에 대한
강한 보복을 하려고 검정가죽 자켓을 입은 녀석이 시켜서 들어온 똘만이였던 것이다.
삽십육계 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라 일단, 쥐 죽은 듯 고요히 있다가. 소리가 좀 진정되자.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갔다. 검정 재킷의 그 녀석은 심각한듯 옆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요사이, 러시아에서 외국인들을 상대로 무차별 공격하는 일이 보도 되고 있지만, 사실 당시 독일 사회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Neo-Nazzis 아이들인 것이었다.
ja, Ich muss, jezt aus gehen ! sehen wir wieder !!! (야, 나 지금 가야되 나중에보자!)
일단 자리를 뜨고 볼 일이다.
당시가 전두환 시절이었으니 한국정부와 한국인을 극도로 경멸했던 시절이어서 더 그러하였던 것이었다.
Got sei dank, Ich versteche alle situationen !!!,(하나님이 보호하사 살았다. 다 이해는 되지만!)
독재자 대통령과 그 정부를 싫어한 독일 아이들 때문에 내가 대신 죽을뻔 했다. "휴 !"
여기서도 하나님이 내 생명을 보호해 주신것으로 나는 믿는다 !
에피소드 2)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닐 때, 오전 오후 근무를 한적이 있었는데.
서울 YMCA수영장을 오후 근무시 오전에 이용한 적이 있었다,
YMCA클럽 수영장 클럽의 오래된 멤버들이 항상 수영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중에 한 노익장께서 항상 교통순경 처럼 관리를 하시는데 수영을 하고 지나가다가 조금이라도 물장구를 튀기거나 자기들이 수영하는 라인으로 오면 가차없이 다가가서 정신없이 수영에 열중해 있는 사람들의
등짝을 내려 쳤었다. 나도 한 번 세게 얻어 맞았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시다는 것 때문에 그냥 참았던 것 같다.자기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말인 것이다.
이번엔 젊고 혈기왕성한 청년이 자유형으로 수영을 하다가
또, 물을 튀기자 거침없이 다다가 큰 손으로 등짝을 내려쳤다.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 청년은. 너무 놀라고 아픈 나머지 소리치며 욕하며 대들었다.''' 속이 후련하였다.
당연히 대들어야 했으며 소리 쳤어야 했다.
에피소드3)
강의를 끝내고 집으로 바로 돌아가기 어려운 시간에 나는 가끔씩 서울 남산도서관을 이용한다.
남산의 명물 독일문화원 도서실도 가끔씩 이용하지만 주차가 용이하지 않아서.....,
독일 문화원은 정말 좋은 곳인데 요사이 수리하는 중이라 더군다나..그래서 남산도서관을 갈 수 밖에 없다. 주차요금도 1시간은 무료이고 허기질때 저렴한 가격으로 식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도서관은 시립도서관이라 이용료도 없다.
도서관 직원중에는 친절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간혹 있다.
그들의 눈에는 이 도서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갈곳이 없어서 찾아오는 서민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새로 주인이 바뀐 식당은 식권구입을 기계로한다. 터치 스크린을 보면서 돈을 집어넣고 작동 시키면 메뉴대로 식권을 구입할 수 있다. 오작동이 되어 다른 메뉴를 사기위해 환불할려고 하자 불쾌한 듯 찡그리며 뭐라고 그런다. 싼것 사서 먹는데 아무거나 먹지 귀찮게 한다는 눈치다. 그럴만도 하다. 라면이 2000원, 백반이 3500원 돈까스가 3000원이니 박리다매이다.
도서관 경비 비슷한 사람인것 같은데 퇴실 시간만 되면 1분도 못기다리고 늦게 나오면 소리친다.
여중생들이 도서관 복도에서 이야기 하면서 나오는데 도서관 끝나는 시간이라 친구들끼리 '쟁알 쟁알' 하면서 나오자 반말로 야 ! 니네들 이리와 ! 마치 학교 교련 선생보다 더하다. 내가 왜 아이들에게 반말로 함부로 말하며 이리 저리 오라 하냐 하자? 도서관 분위기 지도하는 사람이라면서 막말로 대든다 . 다음날 도서관에 다시 가자 아예 나를 따로 보자며 폭행과 폭언을 퍼붇는다. 나를 남산도서관에 다시 못오게 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주객이 바뀐 느낌이었다. 시민이 이용하는 곳을 서비스 할 생각은 없고 자기들의 직장이니
귀찮게 말라는 것이다....
물론 다른 몇 개의 룸의 사서들도 비슷하다.-다는 아니지만 종치면 퇴근해야 한다- 그야 말로 철가방 만고 요지부동 사각지대이다. 2-3분이라도, 책을 덜 읽어서 늦으면 난리다. 끝났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을 통해서 느낀 것은,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한 ' 한국사회의 식민지 잔존의식 '쪽바리' 근성이다. 물론 남산 도서관에 올 정도면 그들의 눈에는 파고다 공원에 가지 않는 수준 조금 이상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수 있다.
그래서 돈도 없으면서도 큰차를 타고 다녀야 되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란다.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은 룸살롱 주인이나, 조폭들이나 큰차를 몰고 다니지 일반 샐러리맨들은 기름 값이 비싸서 1주에 한 두 번 정도 자가용 운전을 하고 다른날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근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젊고 예쁜 여자들이 룸살롱으로 빠지는 이유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들은 나로 하여금, 3급 공무원인 남산 도서관장에게 전화를 걸게 만들었다. ! 꼬리 내린 강아지들이었다....., 내가 다시 갔을 때 말이다.-사실 서울시장이 내 친구의 친구라는 말은 사실이고 사실이었다.
그 친구가 중학교 때 그와 싸워서 이겼다고 한다- 나도 그 친구를 이겨본 적이 없다( 그 녀석은 오히려 나를 이긴적이 없다고 하지만.....)
에피소드4)
내가 대학의 교학처장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학장님을 모시고 서해안으로 가서 새우(대하)를 먹고오자고 누군가 바람을 잡아서 나도 동행을 하였다. 살아있는 새우를 소금그릇 위에 담아왔다.
구워먹는다는 것이다. 새우는 성질이 급해서 숨을 못쉬면 금방 죽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것은 알지만. 바로 살아있는 것을 숨못쉬게 고통을 줘서 바로 죽여 구워 먹는다 ?
약간 잔인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쩌랴 그렇게 먹어왔다니...
그러나, 새우가 죽는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한 사람이 살아 있는 새우를 손으로 들어서 바로 수염을 뽑더니 살아있는 새우를 바로 입으로 집어넣는다. 아니 ? 기절 초풍할 광경이다. 또, 다른 사람도 따라서 한다.
- 잔인함의 극치다- 쪽바리들이 살아있는 생선을 회를 떠서 먹는 것을 보고 잘못된 식문화를 접한 사람들의 행동이다. 결국 이 두 사람은 교수 연봉제 싸인 강요에 압장서서 후배 교수들을 강요 협박하여 가장 교권을 유린한 교수들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얼마되지 못하여 그들도 결국 토사구팽되어 징계도 먹고 찬밥 신세가 되었다. 후배 교수들은 그들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잠도 못 이룬적도 있었다고 한다. 권불십년이고 결국 잔인한 인간은 잔인하게 버림받는 것을 보게 되었다.(그 두 사람이 내 뒤를 이어서 교학처장을 한 사람씩, 하더니 말이다 !)
에피소드5)
방학 때, 휴가기간에 하이이에 여행간적이 있었다. 비싼 하와이 하이야트 호텔에 묶고 있었는데 그랜드 크럽 층에 묶는 사람에겐 리무진택시가 하루에 한 번은 무료로 쇼핑센터를 다녀올 수 있어서 좋았다(사실, 서울하야트 호텔 마일리지 적립으로 업그레이드 한 것이었지만 )
진주만을 구경하기 위해서 렌트카를 하지 않고 호텔 소개로 리무진택시를 이용한 적이 있는데 호텔 그랜드 클럽 일본인 여직원이 소개해서 당연히 믿고 택시를 탔다. 베트남 운전사였지만 친절하ㅏ고 동양인이라 친근감도 있었다. 와이키키 비치해안선을 따라서 화산 분화구를 보고 하와이 비버리힐즈를 보고 진주만 기념관으로 갔는데 가방을 들고 내릴려고 하자 가방을 못 들고 가니 놓고가라는 것이었다(사실 입장 후 락카가 있어서 가방을 집어넣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믿고 가방을 놓고 내렸다 지갑이 들어있었긴 하지만......, 여하튼 호텔에 돌아오는 길에 지갑을 보고 돈을 세어보았다. 정확히 총금액중 200달러가 없어졌다. 그 전날 밤 정확하게 돈을 계산하여 잔액이 얼마 남아있다는 것을 안 이사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오리발을 내민 그는 이리 저리 거짓말을 하다가택시 요금을 안내어도 된다고 했지 만 경찰을 불러서 신고를 했다. 증거부족으로 일단 택시비를 다시 내기 했다 분실한 돈 200달러, 택시비200달러 합 400달러가 지출된 것이다. 단순히 돈 때문이었다면 타협하고 분실된 돈으로 택시비를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 이외에 여행을 하는 한국사람들에게 또 같은 일을 하고 호텔직원들과 연결되어 소개받아서 관관객에게 계속 그 짓을 할 수 있기에 신고한 것이다. 경찰은 신고하여 재판에 회부할 것인가를 나에게 묻자 그렇다고 하였다, 재판 기일에 출석을
할 수 있냐고 묻자 '돌아가야 하기에 할 수 없을 것 같아고 했다' 모든 정확적 근거와 자료를 다해서 제출하고 여행에서 돌아왔다. 호텔지배인이 미안해서인지 저녁 식사를 무료로 대접하겠다고 해서 다행히 150달러 정도의 저녁식사를 먹었다. 호텔보안직원들 메니저 소개해준 일본인 모두 다 이사실을 알게되었다. 그 베트남 운전기사는 결국 내가 숨겼으면 계속 영업을 할 수 있었으나 하야트 호텔에서는 다시 고객을 소개받지 못하고 앞으로 그러한 신고가 들어오면 비록 나의 신고에서는 피해갔을 수 있지만 다음 번엔 피해갈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같은 외국인이지만 녀석이 나에게 텃세를 부린격이다. 그 이후 영리하고 똑똑하게 생각되었던 베트남인들은 나의 기억엔 교활한 사기꾼으로 경계의 대상으로 생각되게 되었다(비록 한 녀석이 그렇긴 했지만.....).
반 텃세 에피소드6)
일요일날 이승만 대통령이 다녔다는 교회가 있다고 해서 한국인 택시기사에게 물어서 그 곳을 방문하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고 생각과 달리 교인이 많지않았다. 이민 2세대와 그 후손들이 다니는 교회라서 목사님은 한국말과 영어로 동시에 설교를 하였다
처음 방문한 내가, 예배가 끝난 후 바로 가려고 하자 식사를 하고 가라면서 여신도님이 붙잡는다.
서울의 도시교회와는 달리 그리고 어떻게 방문하였는지 어디서 왔는지 부담스럽지 않게 묻고 서울의 이화여대 졸업하고 결혼 후 하와이에 와서 지금까지 몇 십년동안 한 번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다는 거의 미스코리아 정도의 외모와 인텔리전트한 말씨의 중년 여성도 친절하게 대화해 주었다.
이곳은 하와이 교회역사에서도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인데. 내가 처음 보고 느낀 것으론 전혀 텃세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사실 난 자세한 것은 모른다) 교회 역사에 비하여 젊은 사람들이 없고 어린이와 나이드신 어르신분들이 대부분이고 역사에 비해서 교인 숫자도 많지 않은것 같았다.
자세한 것은 모른다. 내가 콜택시를 기다리고 있기에 식사를 할 수 없다 하고 교회 정원에서 기다리자 아예 그릇에다가 식사를 담아와서 기다리는 동안 식사를 하고 가라고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택시가 왔고 여행 일정상 돌아와야ㅡ했다.
3년전의 일이긴 하지만 너무나도 인상적이고 고마운 나머지......, 돌아와서 감사의 편지나 선물을 보내주고 싶었다 그 교회의 누구인지, 성명도 모르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 여신도들의 얼굴이 지금도 가끔씩 떠오른다.
- 이 경험은 나에게 텃세가 아니라-- 반 텃세의 일로 기억되었다.
한국 교회도 제도적으로 '새신자들은 오면 환영실로 오세요가 !' 가 아니라 누구나 새로운 얼굴이 보이면 먼저온 신도들이 다가가서 인사라도 해야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늘날 한국 도시 교회는 목회자들 조차도 신도들과 인사하지 않고 예배가 종료되면 바로 사라지는 것이 현실이다. 신도들이야 말해서 뭐하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나의 감정은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 교회신도와 그들의 따뜻한 말은 나에게 고마움과 감사의 감정을 갖도록 하게 하였다. ( 혹시, 하와이 서울대 동문이 계시고 그 교회를 출석하거나 아시는 지인이 있으면 이 말을 전해 주세요 "고맙고 감사했었습니다 !" 라고 )
첫댓글 잘 하셨습니다,
텃세 부리는 집단이 결코 잘 될 수 없습니다. 친절과 환영이 재상이 됩니다.
그러고 보니 그 텃세 때문에 제가 죽을뻔도 하고 고생 많이했네요! 시간 나면 군대에서 고참들이 텃세부린 것도 올려 놓아야 겠습니다. 저는 의정부 망월사 앞,102보충대에 근무했는데 대기병들 한테 한 마디 욕도 안하고 잘 대해줬던 것 같아요 불쌍하게 생각하고 말이죠! 참, 그 때는 순수했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