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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월 20일
신창원, 부산교도소 탈옥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신창원만큼이나 대중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탈옥수도 없겠다. 그는 지난 1997년 1월20일 부산교도소 감방 화장실의 쇠창살을 절단하고 탈옥에 성공했다. 그는 전남 순천의 어느 아파트에 은거하고 있던 99년 7월16일 가스레인지 수리공의 신고로 검거될 때까지 2년6개
월 동안 경찰의 수사망을 뚫고 전국 각지에 출몰하며 숱한 화제를 뿌렸다.
67년 전북 김제에서 빈농의 막내로 태어난 신창원은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를 중퇴한 뒤 절도 등으로 소년원과 교도소를 전전했다.
89년 강도치사죄로 무기징역형이 확정된 신창원은 서울구치소와 청송교도소 등을 거쳐 94년 11월 부산교도소로 이감
돼 복역 중이었다.
경찰조사 결과 신창원은 도피생활 중에도 무려 108건의 강·절도를 저질러 9억800여만원을 강탈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이 돈으로 다방 여종업원 등 유흥업소 여성들과 동거하면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신창원이 오랫동안 붙잡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동거여성들의 ‘연대의식’ 때문이었다. 이들은 신창원이 중대범죄자
인 줄 알면서도 ‘우리는 다같은 소외계층’이라는 생각에서 신고하지 않았고, 은신과 도주를 도왔다.
그의 도피기간 경찰은 공조수사 부재, 주민신고 무시 등의 문제점을 드러냈으며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수많은 경찰관이
옷을 벗어야 했다.
현재 청송교도소에 복역 중인 신창원은 종교에 귀의해 독실한 신앙인이 됐으며, 암투병 중인 이해인 수녀와의 서신교환
사실이 보도되기도 했다
▶2009년‘ 용산 철거민 진압 참사’ 6명 사망
농성 중이던 철거민이 불길에 휩싸인
건물 4층에 매달려 있다.
2009년 1월 20일, 철거예정인 서울 용산 재개발지역 상가건물 옥상을 불법 점거해 농성을 벌이던 철거민 40여 명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불이 나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숨지고, 24명이 부상했다.
경찰은 농성 시작 하루만인 1월 20일 오전 5시30분쯤 전경 2개 중대 180여 명을 동원해 재개발 지역 철거민들이 농성 중인 N빌딩을 포위한 뒤 ‘철수하지 않으면 강제 해산하겠다’ 는 내용의 경고 방송을 했다. 이어 오전 6시 45분쯤 대형 크레인으로 경찰특공대를 태운 컨테이너를 들어올려 건물 옥상에 투입했다.
철거민들은 발 밑 도로에 있는 전경과 컨테이너에서 내린 특공대를 향해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철거민들이 옥상에 쌓아둔 20L들이 시너통 수십 개에 불이 붙어 폭발음과 함께 삽시간에 옥상이 불길에 휩싸였다. 철거민들이 옥상에 4m 높이로 세운 함석 망루는 무너졌고, 불길은 30여 분 만에 잡혔다.
이 화재로 경찰특공대 소속 김남훈(31) 경장과 이성수(50)·이상림(70)·양회성(55)·윤용헌(48)씨 등 철거민 5명이 사망했다.
앞서 철거민들은 N빌딩을 철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9일 새벽 5시30분쯤 이 건물을 기습 점거했고, 이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건물내부로 진입하려는 건설사 용역직원과 경찰에 맞서 화염병 수십 개와 돌을 던졌다.
이에 경찰은 19일 오후 7시 김석기 서울지방경찰청장(경찰청장 내정자) 주재로 대책회의를 갖고, 경찰특공대를 보내달라는 백동산 용산경찰서장의 요청에 따라 이튿날 새벽 철거민들을 강제 해산시키기로 결정했다. 경찰은 김 청장이 특공대 투입을 최종 승인했다고 밝혔다.
이명박 대통령은 20일 용산 철거민 참사사건에 대해 철저한 진상파악을 지시했으며 민주당은 이 사건과 관련해 원세훈 행정안전부 장관과 김석기 서울지방경찰청장의 파면을 요구했다.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며 “이 상황은 강경 진압에 의해 온 것으로, 진상을 철저히 규명해 책임질 사람은 책임져야 한다” 고 말했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미국 제44대 대통령 취임식
취임 연설 중인 오바마 대통령
▶2001년 조지 W 부시, 제43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
▶2001년 필리핀 에스트라다 대통령 사임-
아로요 부통령, 대통령 승계
아로요 대통령의 취임식.
▶2000년 1월 20일 새천년민주당 창당
(총재 김대중, 대표 서영훈)
20일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새천년민주당 창당대회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대형 스크린으로 중계되는 가운데 총재 치사를 하고 있다.
▶1997년 빌 클린턴 대통령 집권2기 취임
▶1997년 신창원, 부산교도소 탈옥
▶1996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역사적인 총선거,
자치정부 수반에 아라파트 당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을 위한 역사적인 총선거가 1996년 1월 20일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 및 가자지구에서 일제히 실시됐다. 이번 총선에서는 1백만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유권자들이 자치정부 수반 겸 자치회의 의장과 88명의 의원들을 선출했다.
야세르 아라파트.
수반 선거에는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과 무명의 여성운동가 등 2명의 후보가 출마했으나 88%의 압도적 지지로 아라파트 의장이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건설과 이스라엘과의 평화 완결을 위임받은 자치정부 수반(대통령격)으로 당선됐다. 아라파트는 이날 실시된 자치정부 수반 선거결과 총 유효투표의 88.1%를 얻어 9.03%를 얻은 샤미아 할릴 후보를 누르고 자치정부 수반으로 당선됐다.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총리는 이번 팔레스타인 총선의 성공적인 실시는 평화에 대한 지지를 표로 나타내 보인 것이라면서 환영했다.
▶1996년 천호대로 4.5km 구간
버스중앙전용차로제 실시
▶1993년 빌 클린턴, 미국 제42대 대통령에 취임
▶1993년 오드리 헵번 사망
`로마의 휴일`에서 청순한 모습으로 전세계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1993년 1월 20일 장암과의 오랜 투병 끝에 63세를 일기로 스위스 로잔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1929년 3월 4일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아일랜드계 영국인 은행가와 네덜란드 귀족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헵번은 1951년 영화계에 데뷔, `로마의 휴일`(1953년)에서 깜찍한 연기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과 함께 `할리우드의 요정`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헵번은 이후 `사브리나`(1954년) `전쟁과 평화`(1956년)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년) `마이 페어 레이디`(1964년) `어두워질 때까지`(1967년) 등을 통해 1950∼60년대 최고 인기여배우로 활약했다.
26편의 작품을 통해 티없이 맑고 순진한 여성상을 표출해 온 헵번은 1960년대 이후 이따금 단역으로 스크린에 모습을 비춘 것을 제외하고는 은막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1988년 유니세프의 친선대사 제의를 흔쾌히 수락해 인도적 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특히 말년의 4년간을 국제아동기금 순회대사로 세계 각지를 돌며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아동들을 돕기 위한 모금활동을 헌신적으로 전개, 전세계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1992년 9월 투병 중에도 헵번은 기아와 질병의 땅 소말리아를 직접 방문, 전세계가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호소하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헵번 [Hepburn, Audrey, 1929.5.4~1993.1.20]
ㆍ‘로마의 휴일’로 떠오른 스크린 요정
영화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그녀는 요정이었다. 벨기에 익셀에서 1929년 태어난 그녀의 본명은 오드리 캐슬림 루스톤. 세상에는 ‘오드리 헵번’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세기의 여배우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점령된 네덜란드 안하임에서 자란 헵번은 어릴 적부터 발레를 배웠다. 48년 영국 런던으로 옮겨 발레 수업을 계속 받으면서 사진 모델로 일했다. 이후 몇몇 유럽 영화에 얼굴을 비췄지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51년 제작된 브로드웨이 뮤지컬 <지지>에서다. 그후 헵번의 출연작들은 줄줄이 대히트를 쳤다. <로마의 휴일>(53년)로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거머쥐고, 최우수 영국여배우상과 뉴욕영화비평가협회상까지 휩쓸었다. <사브리나>(54년), <전쟁과 평화>(56년), <티파니에서 아침을>(61년), <마이 페어 레이디>(64년) 등으로도 수많은 상을 받았다. 54년에는 TV시리즈 <운디네>에서 물의 요정 역을 맡아 토니상을 받기도 했다. 마지막 영화 출연작은 89년 촬영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얼웨이즈>였다.
89년 유니세프 친선대사가 된 이후 소말리아, 케냐, 에티오피아 등을 돌아다니며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들의 손을 놓지 않은 그녀였지만, 사실 유니세프와의 인연은 훨씬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헵번은 친선대사로 임명되면서 “2차 세계대전 때 나도 유니세프의 구호품을 기다리던 아이 중 하나였다”고 말한 바 있다. 이미 50년대부터 그는 유니세프 자원봉사자로 일했다. 92년 구호활동의 공로로 미국 대통령이 수여하는 ‘자유의 메달’을 받았으며, 유니세프는 창립 60주년을 맞은 2006년 헵번을 ‘60년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선정했다.
패션 아이콘으로서나, 박애주의 천사로서나 세계에 큰 감동을 안겨준 헵번은 93년 1월20일 세상을 떴다. 99년 미국영화연구소는 헵번을 ‘가장 위대한 여배우’ 3위에 올렸다.
https://youtu.be/OIfSOEuvJVk
▶1990년 문성길 WBC 슈퍼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프로복싱 WBC슈퍼플라이급 4위에 올라있는 문성길이 1990년 1월20일 무역회관 특설링서 벌어진 경기에서 동급챔피언인 나나 코나두를 격렬한 경기 끝에 물리치고 챔피언에 올랐다. 문성길의 프로통산 전적은 22전 20승 2패로 20승 가운데 16번을 KO로 이겼다. 그가 한국 프로복싱 사상 경량급에서 가장 무서운 주먹을 가진 선수였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수치다.
문성길 선수.
이날 경기로 문성길이 한국복싱 사상 세번째로 2체급 석권의 위업을 달성했다. 첫번째는 WBA 밴텀급. 1988년 8월14일 태국의 카오코 갤럭시를 물리치고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가 1989년 7월 9일의 3차 방어전에서 갤럭시에게 챔피언을 되돌려주었다. 문성길은 1993년 11월13일 멕시코의 호세루이스 부에노에게 10차 방어전에서 타이틀을 빼앗길 때까지 3년 10개월간 왕좌에 있었다.
▶1989년 조지 부시, 미국 제41대 대통령 취임
▶1986년 현대자동차 포니 엑셀, 첫 대미 수출 선적
▶1984년 미국의 자유형 수영선수 와이스멀러 사망
▶1981년 이란, 미국인질 52명 석방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제40대 대통령에 취임
▶1980년 카터 미국 대통령,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 촉구
▶1980년 민주사회당 창당(당수 고정훈)
▶1972년 동국정운원본 전6권 발견
▶1969년 한글 전용을 반대한 충남대 유정기 교수 파면
▶1962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법 통과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법이 1962년 1월 20일 만들어졌다. 이 영화법의 주요 골자는 검열제도를 비롯 영화제작신고, 상영허가, 상영정지 또는 중지권 부여, 그리고 영화업의 허가제도 등 규제적 측면 위주였다.
영화법으로 1965년 이만희 감독은 ‘7인의 여포로’ 로 용공혐의를 받아 입건된 바 있으며, 한국 영화사상 최초의 성인영화라 할 수 있는 ‘춘몽’(1965년 제작, 유현목 감독, 신성일-박수정 주연)은 적나라한 정사 장면으로 유현목 감독이 외설죄로 기소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1969년 박종호 감독의 ‘벽 속의 여자‘, 신상옥 감독의 ‘내시’ 역시 외설 혐의로 검찰에 입건됐다.
그러다 1996년 10월 4일, 영화법에 대해 위헌제청 및 헌법소원 등과 관련한 중요한 결정을 내렸는데, ‘공연윤리위원회 심의와 관련된 내용은 헌법에 위배된다’ 는 내용이었다. 이에따라 영화진흥법이 개정(1997.10.11 시행)되었고, 그동안 영화 사전심의를 감독했던 공연윤리위원회는 자율성과 독립성이 강화된 공연예술진흥협의회로 바뀌었으며 영화심의도 삭제나 수정하는 조치를 금지하고 등급분류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춘몽‘(1965년 제작, 유현목 감독,
신성일-박수정 주연) 포스터
▶1961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에 취임
제35대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
▶1960년 소련, 태평양 로켓 실험 성공
▶1954년 반공포로 7700여명,
인도군 포로수용소에서 모두 석방
▶1953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 취임
▶1952년 정규 4년제 육군사관학교 첫 입교
▶1949년 미국 트루먼대통령,
미개발국 원조계획 제창
▶1947년 입법의원, 신탁통치 반대안 가결
▶1944년 한국학생, 일본학병으로 동원 개시
▶1942년 반제회의
회의는 국가보위부 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초대로 이루어졌다. 하이드리히와 친위대 소속의 아돌프 아이히만까지 포함해 모두 15명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안이 결정됐다. 회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고, 이의제기와 토론도 없는 회의였다.
반제회의 이전에도 강제수용소에서는 독가스가 사용되고 있었으기 때문에 반제회의 이후로 홀로코스트가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반제회의 이후로 '유대인 절멸'이 나치의 공식적인 뜻으로 확인되었고 대량학살이 죄의식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회의로 여겨지고 있다. 지금도 반제회의는 독일 교과서에 명기돼 독일인들의 참회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1936년에드워드 8세 영국왕 즉위
▶1936년 영국 왕 조지 5세 사망
▶1925년 일본, 소련과 국교조약 조인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 창립
우리 토산품의 생산과 사용을 장려하고 우리 기업을 성장시켜 민족독립의 기틀을 마련하자는 조선물산장려회가 1923년 1월20일 서울 낙원동 협성학교에서 창립됐다.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들은 1920년대초 조선물산장려회를 만들어 `조선에 나오는 토산품을 사용하자`는 강연회와 가두시위 등 활동을 펼쳤다
회의가 길어져 23일에 다시 모인 발기인들은 다가오는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옷과 음식, 일용품 등에서 조선물산을 사용하기로 결의하고, ‘남자는 두루마기, 여자는 치마를 입을 것’ ‘음식은 소금ㆍ설탕ㆍ과일 등을 빼고 조선물산을 사용할 것’ 등을 행동지침으로 결정했다.
물산장려운동은 서울보다 평양에서 먼저 일어났다. 평양에서는 1920년 7월에 발기모임을 가진 후 1922년 6월20일에 조만식을 회장으로 한 물산장려회가 창립됐다. 창립초기에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데는 조선일보ㆍ동아일보의 계속된 보도와 조선청년연합회가 현상모집한 표어가 크게 기여했다. ‘내 살림은 내 것으로’ ‘조선사람 조선 것’ 등의 표어가 전국적으로 전파되면서 대중의 관심과 참여를 불러일으켜, 길거리에서는 ‘물산장려’를 외쳐댔고 학교에서는 국산교복 착용운동이 일어났다. 기생들까지 동참했다.
그러나 이를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보는 일제의 탄압과, 토산품값 급등으로 기업과 상인들만 살찌우고 일반 서민들은 더욱 궁핍해지는 예상치 못한 결과도 나타났다. 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사회주의자들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생활향상과는 무관하다며 비판하고 나섰다. 1937년∼1940년 경에 해체됐다.
▶1920년 이탈리아 영화감독 펠리니 출생
▶1919년 문예동인지 `신천지` 창간
▶1917년 안곽 `조선문법` 간행
▶1915년 호요방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 출생
▶1906년 독일 사회민주당, 베를린에서 시위
▶1906년 외교관, 공사제,영사제 폐지
▶1900년 영국 비평가 존 러스킨 사망
▶1877년 미국 현대무용 혁신가 세인트 데니스 출생
▶1875년 프랑스 화가 밀레 사망
▶1868년 한말 의병장 박윤식 출생
▶1783년 영국, 베르사유조약 체결로
프랑스·에스파냐와 강화 맺음
▶1716년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3세 출생
▶1628년 아일랜드 정치가 헨리 크롬웰 출생
https://youtu.be/kFUM81EH7IM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