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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시 여행] 제천2경 박달과 금봉이의 슬픈 연가 박달재...........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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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쪽에서 올라가는 박달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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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시 여행] 제천2경 박달과 금봉이의 슬픈 연가 박달재...........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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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2경! 울고 넘는 박달재! 왜 울고 넘어야 했을까? 여기에는 천등산 골짜기 골바람을 타고 하나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흐른다. 봉양읍과 백운 면을 가르는 박달재[해발 453m]는 유행가 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에 가수 박
재홍이 부른 '울고 넘는 박달재'로 유명해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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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을 정도로 박달재의 전설을 배경으로 한 향토적이고도 구슬픈 사랑 이야기다, 조선
초 경상도 선비 박달 도령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중, 고개 아랫마을에서 하룻밤 묵으면서부터 이야
기는 시작된다. 박달 도령은 이 집 주인 딸 아름다운 처녀 금봉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과거에 급제한 뒤 함께 살
것을 言約[언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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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금봉 생각에 공부를 못 했는지 박달은 낙방하고, 금봉은 오매불망 박달을 기다리며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숨을 거둔다. 뒤늦게 돌아온 박달은 금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목 놓아 울다가 목숨을 버린다. 오늘 유랑자는
그 사랑이 깃든 박달 고개의 설화를 찾아 박달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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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방문으로 눈에 익은 길을 따라 오르건만 금봉이의 애닳던 사랑의 눈물일까. 박달의 통곡의 눈물일까 오
늘따라 비는 억수로 쏟아진다. 빗길을 뜷고 굽이굽이 오른 박달재, 정상에 오르니 박달과 금봉의 동상이 유랑자
를 맞는다. 알겠지만 박달재 하면 전국에 몇 군데 있다. 김천과 홍천, 그리고 춘천시 서면에도 있다. 그중 오늘의
이야기는 제천의 박달재를 이야기 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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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넘는 박달재'는 반야월이 작사했다. 그는 1946년 공연을 위해 충주에서 제천으로 가려고 박달재를 넘던
중 성황당 길가에 서서 손잡고 울고 있는 젊은 부부를 만나게 된다. 사연이 궁금해진 반야월이 여성에게 물어보
니 '남편이 서울로 돈 벌러 떠나는데 여기서 헤어지는 게 가슴 아파 운다'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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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박달재에서 관광객들에게 박달재를 소개하는 문화해설사 님들은 "조선시대부터 유행한 박달과 금봉의
전설 때문에 박달재라고 불리게 되었다"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박달재 전설은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가 만들어
진 뒤 만들어져 퍼진 '신야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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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 면과 봉양읍 사이 박달재는 제천 10경중 2경으로 관광의 고전이다. 지금은 바로 아래 터널이 뚫린 뒤부터는
시간 많고 관심 있는 여행객들만 일부러 찾는 고개가 되었다. 하지만 과거엔 충주에서 제천을 가려면 이 고개를
넘어야만 된다. 아무튼 제천의 상징적 공간인 만큼 박달재 고개엔 소공원으로 꾸며놓아 제천 지역을 대표하는 인
물 동상과 조각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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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노랫말에 나오는 천둥산으로 알고있다. 그러나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박달재 노래비.
가사에 나오는 천등산은 이곳이 아니라 제천을 기준으로 직선거리 남서쪽 방향으로 5.87km 떨어져 있는 충주와
제천 사이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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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종일 그 부부의 사연을 생각하면서 노랫말을 만들게 되는데, 막상 만들려고 하니 부부의 이름을 몰라 가
사에 넣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유행하던 이광수 소설 <그 여자의 일생>에 나오는 주인공인 '금봉'을 아내 이름으
로 해서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랫말을 완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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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세차게 내리는 비를 잠시 피해 있다가 밖으로 나가본다. 우산을 받쳐 들고 돌아보는 공원은 왼지 쓸쓸
하고 서글프다 못해 금봉이의 눈물처럼 보인다. 우라질 웬~ 비가 이렇게 까지....... 유랑자는 빗속을 뚫고 소공원
으로 향한다. 비 때문일까 공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해설사님 외엔 아무도 없다. 오늘도 공원 중앙엔 박달과 금
봉이의 큰 동상이 처량하게도 비를 맞으며 서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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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비.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로 시작되는 노랫말 때문에 박달재 앞에는
천등산이 수식어처럼 붙는다. 하지만 실제 천등산은 충주 산척면과 제천 백운면 사이 다릿재 터널 위다. 박달재
는 북측 주론산(901m)과 남측 시랑산(691m) 사이 고갯길이다. 이를테면 시랑산 자락으로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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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 [낡아 오를면 위험하다.] 제천시 관광협회 관계자들은 뭐하는지 모르겠다. 보수는 언제 할것인지? 묻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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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넘는 박달재’는 경남 마산 태생인 작곡가 반야월(1917~2012)이 악극단 지방 순회공연 중 충주에서 제천으
로 가는 길에 남녀의 이별 장면을 목격하고 작사 했다고 전해진다. 반야월은 일제강점기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일억 총진군], [조국의 아들 –지원병 노래]. [고원 십오야]노래를 다수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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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그는 해방 이후에 가수와 작사가로 계속 활동을 하며 수많은 인기곡을 발표했다. 그리고 반야월은 1948년
울고 넘는 박달재를 作詞[작사]했다. 이런 저런 논란 때문에 노래비 옆에 반야월의 친일 행적을 상세하게 적은 안
내문을 별도로 세워 놓았다. 아무튼 박달재의 가장 큰 테마는 누가 뭐라해도 ‘박달과 금봉’이다. 한번쯤 들어봤을
전설에 살을 덧붙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설을 토대로 노래가 나온 것이 아니라, 반대로 노래를 바탕으로 야담
이 만들어진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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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가 나오고 애창되기 전까지는 박달과 금봉이 전설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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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이와 금봉이의 시신은 없지만 그들의 넑을 기리고 애틋한 사랑을 기억 하자는 의미에서 가묘를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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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과 금봉이의 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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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재의 전설*★ 다음과 같다.
👉“박달재의 전설은 조선 중기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다. 조선 중엽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도중 백운면 평동리에 이르렀다. 마침 해가 저물어 박달은 어떤 농가에 찾아 들어가 하룻밤을 묵
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금봉이라는 과년한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금봉은 사립문을 들어서는 박달과 눈길
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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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은 금봉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을 정도로 놀랐고, 금봉은 금봉대로 선비 박달의 의젓함에 마음
이 크게 움직였다. 그날 밤 삼경[23~01시]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밖에 나가 서성이던 박달도 역시 잠을 못
이뤄 밖에 나온 금봉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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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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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에는 천등산 박달재로 되어 있으나 박달재는 천등산을 넘는 고개가 아니다. 천등산 북동쪽에 있는 시랑산
과 주론산 능선을 넘어가며, 천등산을 넘는 것은 그 보다 서쪽에 있는 다릿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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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선녀와 같아 박달은 스스로의 눈을 몇 번이고 의심하였다. 박달과 금봉은 금세
가까워졌고 이튿날이면 곧 떠나려던 박달은 며칠 더 묵게 되었다. 밤마다 두 사람은 만났다. 그러면서 박달이 과
거에 급제한 후에 함께 살기를 굳게 약속했다. 그리고 박달은 고갯길을 오르며 한양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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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봉은 박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사립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박달은 한양에 무사히 당도하긴 하였으나 머
릿속이 온통 금봉의 생각으로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과거 시험까지 며칠의 나날을 오롯이 금봉을 생각하
며 그리움에 대한 詩[시]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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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과 금봉이의 약속의 금반지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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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던 박달은 머릿속이 온통 금봉에 대한 일로 가득차 있었던 터라 결국 낙방을 하고 말
았다. 박달은 금봉을 볼 낯이 없어 제천 평동에 가지 않았다. 한편 금봉은 박달을 떠나보내고는 날마다 서낭당에
서 박달의 장원급제를 빌었으나, 박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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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봉은 그래도 서낭에게 빌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을 박달을 부르며 오르내리던 금봉
은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 후에 박달은 풀이 죽어 평동에 돌
아와 고개 아래서 금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목 놓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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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방망이 매점[각종 음료판매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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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다 얼핏 고갯길을 쳐다본 박달은 금봉이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환상의 모습이 보였다.
박달은 벌떡 일어나 금봉의 뒤를 쫓아 금봉의 이름을 부르며 뛰었다. 고갯마루에서 겨우 금봉을 잡을 수 있었다.
와락 금봉을 끌어안았으나 박달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렸다. 이런 일이 있는 뒤부터 사람들은 박달이 죽
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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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금봉의 아버지는 박달의 시신을 수습해 저승에서나마 못 다한 사랑을 이루라며 금봉이 무덤 옆에 고이 묻어
주었다. 이 무덤이 오늘날 박달재에 있는 둘의 무덤이었다. 그래서 일까 봄이면 두 남녀의 이루지 못한 애달픈 사
랑을 대변하듯 박달재에는 연분홍 진달래꽃이 아름답게 피고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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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재 전설의 형성과 '울고 넘는 박달재''란 논문의 저자인 세명대 미디어 문화학부 권순긍 교수는 "박달과 금
봉이의 전설은 노래가 유행한 뒤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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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 금봉당 가는 계단길[목글암 옆에서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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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전설의 이야기는 상당히 안쓰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 전설은 노래가 나온 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만 안다. 반야월은 노래를 지을 때 모티브로 삼은 것은 1948년 당시 공연을 위해 충주에서 제
천으로 가던 중 길가에서 만난 젊은 부부의 이야기로, 남편이 서울로 돈을 벌러 가는데 그 이별을 슬퍼하며 울던
부부를 생각하며 노래를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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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보릿고개에 ‘초근목피’를 먹을 정도로 굶주리고 살았던 시절이다. 그래서 당시 수많은
사람들은 가슴아픈 일이지만 곯은 배를 채우기 위해 농촌에서 도시로 돈을 벌러 가던 젊은 부부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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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전엔 "박달재를 매개로 '양반 선비를 사랑한 평민 처녀' 설화의 한 유형이 전승돼 오다가 반야월이 '울고
넘는 박달재'를 작사한 1948년 이후 노래가 유행하면서 거기에 맞춰 부대 설화로 전파되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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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기원장, “박달 금봉당” [목굴암 뒤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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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반야월은 당시 그 부부의 이름을 몰랐기에 이광수의 소설 "그 여자의 일생"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을 따
금봉이라는 이름을 넣은 것이다. 이야기로 보자면 완전히 노래에 의해서만 창작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사랑
에 대한 과거의 설화들이 있었던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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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존재했던 박달재를 매개로 한 양반과 평민 처녀의 사랑이라는 정형적인 설화로 노래의 창작 이후 디테일
하게 다듬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제천시에서는 박달과 금봉이의 사랑에 대한 전설을 만들고 박달재 공원에는 둘
이 애틋하게 마주보고 있는 대형 동상을 비롯해 이야기의 주요 장면을 조각으로 세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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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달 금봉당”:박달이는 신선이 되고 금봉이는 박달재의 수호신이 되어 이곳 박달재에 내려와 사랑이 영원
하길 기원하는 모든 이들의 소원을 들어 준다고 하니 사랑을 약속한 이들이라면 이곳에서 변치않은 영원불별의
사랑을 약속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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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재의 노래
1."천둥산(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
마다 구비마다 /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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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아 /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
아주며 / 한사코 우는 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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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박달재 하늘고개 울고 넘는 눈물고개 /돌뿌리 걷어차며 돌아서는 이별 길아 / 도라지꽃이 피는 고개마다 구비
마다 / 금봉아 불러본다 산울림만 외롭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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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이 곡의 작사가 반야월이 가사 1절에 나오는 물항라의 의미는 옅게 물들인 비단이라고 한다. 해방 직
후에 박달재를 넘게 되었는데 마침 그 날 부슬부슬 비가 내렸고 박달재를 지나다 성황당 하나를 발견했는데 거기
서 젊은 부부가 부둥켜 않고서 이별하듯이 울음을 터트리며 통곡하기에 그 모습을 보고 떠올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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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박달 이와 금봉이의 이야기를 읽고 흘러나오는 노래를 다시 들으니 감회가 새롭다. 유랑자는 지금도 거나
하게 한잔 걸치는 날이면 으레 ‘울고 넘는 박달재‘ 이 노래를 구성지게 불러대곤 한다. 좀 웃기는 이야기지만 유랑
자의 어릴 적 꿈이 가수였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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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조선 시대까지 산적이 출몰하는 험한 박달재 고갯길! 지금은 박달재에 가면 정상 휴게소에서 크게 흘러나
오는 구슬픈 이 노래는 멈출 줄 모른다. 노래를 들으면서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박달과 금봉의 애처로운 사랑을
그린 조각들을 살펴 보다보면 작품들도 달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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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당[서낭당] 젊은부부 이별장소, 이곳에서 영원한 사랑을 빌어 보세요.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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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방향에서 박달재로 오르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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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의 손을 잡은 금봉, 한양에서 금봉을 그리는 박달, 금봉의 환영을 쫒는 박달 등이 그대로 한 편의 스토리텔링
이다. 아무튼 박달과 금봉이 그랬고, 서울로 돈 벌러간 젊은 남편이 그랬고, 충주에서 제천으로 시집간 그 옛날 새
댁이 그랬듯이 이 고개는 눈물 없이 넘지 못했었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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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제는 천등산 밑으로 터널이 뚫리면서 자연스럽게 패스 차량들은 그냥 지나칠수밖에 없다. 당연히 사람
들도 관심에서 멀어질수 밖에 없는 구조다. 이젠 이 옛길은 관광도로로 남아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들으려는 사람
들만의 장소가 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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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박달재와 다릿재를 걸어 넘으려면 며칠이 걸렸다고 한다. 게다가 고갯길이 험하고, 박달나무가 우거
져 호랑이 같은 산짐승과 행인의 봇짐을 탈취하려는 도둑들까지 설치는 통에 대낮에도 쉽게 넘을 수 없는 고개였
다고 한다. 때문에 박달재를 넘어 시집가는 색시들은 친정에 다시 올 수 없는 길을 가야하기에 고개를 넘으면서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이 고개가 '울고 넘는 박달재'가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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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가을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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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가을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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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테마! 유독 우리나라엔 사랑에 관련된 설화들이 많다. 남원의 춘향이가 그렇고, 김해의 김수로왕과 허왕
후의 이야기가 그렇고, 부산 송도의 어부와 용왕딸의 사랑이 그렇고, 견우와 직녀의 사랑이야기가 그렇다. 아무
튼 사람들은 허망한 사랑에 목숨을 건다. 아무래도 사랑은 아름다운 감정속에 시간과 거리를 초월하는 것인보다.
레프 톨스토이 이야기 처럼 사랑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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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생각 해보면 사랑은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 인지도 모른다. 왜? 일시적이나마 삶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
다. 그러나 사랑의 끝은 환상속의 허망일 뿐이다. 아무튼 눈물 없이 못 넘었던 이 슬픈 이별의 고개를 박달과 금
봉이의 전설과 더불어 '사랑이 꼭 이루어지는 고개'로 아름다운 그리고 새로운 마케팅 고품격 현대판 스토리텔링
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제 유랑자는 박달과 금봉이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뒤로하고 빗길을 달려 제천 시내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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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가을 찍은 사진 : 박달과 금봉이의 슬픈 연가 '울고 넘는 박달재' 제천에 가면 꼭 가봐야 할 곳 중 하나다.
원래 이름은 '이등령'인데, 조선 중엽 과객인 '박달'과 평동리 살던 '금봉'이라는 처자의 이루지 못한 애절한 사랑
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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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가을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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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재 찾아가는 길
주소: 제천시 백운면 박달로 231
[지번]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 705
관광안내소 043-642-9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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