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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희생 서울대 재학생들
고순자 김치호 박동훈 손중근 안승준 유재식 |
국회의사당을 목표로 바리케이트를 뚫고 종로로 진출한 서울대 학생들은 동국대와 성균관대, 동성고 학생 등 1만여 명과 함께 경무대 앞으로 나아갔다. 경무대 앞과 시내 곳곳에서 무차별 사격을 받고 쓰러진 사람들 속에 서울대 학생들이 있었다. 19세 박동훈 (법학 2학년) 동문과 갓 21세이던 김치호 (수학 3학년) 동문, 손중근 (국어교육 4학년)·유재식(체육교육 2학년)·고순자 (응용미술 3학년)·안승준 (경제 3학년) 동문 등 6명이 이날 총격으로 숨졌다. 병원으로 옮겨진 김치호 동문은 위중한 상황에도 자신보다 어린 학생에게 치료 순서를 양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4·19 전체 희생자 중 대학생은 총 22명. 서울대 재학생 희생자 6명은 수유리 국립 4·19 민주묘지에 안장됐다. 김치호 동문의 형 김치선(행정47-51) 전 서울대 법대학장과 안승준 동문의 형 안승환씨는 동생을 기리며 서울대에 장학금을 출연하기도 했다.
며칠 후엔 교수들의 시위가 서울대를 거점으로 시작됐다. 4월 25일 연건동 의대 교수회관에 전국 대학교수 258명이 모여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를 외치며 거리로 나온 교수들의 모습은 큰 반향을 얻었다. 다음날 학생과 시민들이 다시 결집해 10만명 규모의 시위를 벌임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을 이끌어냈다.
민주주의 역사의 전환점이었던 4·19혁명은 이후 대학의 풍경도 크게 바꿔놓았다. 4·19를 기점으로 대학의 자율성이 확대되고, 교수와 학생의 자치 활동이 활발해졌다. 기존에 정부가 가졌던 서울대 부속기관장의 임명권은 총장에 위임됐고, 교수의 자치조직인 교수협의회가 꾸려졌다. 학생회의 역할을 대신했던 학도호국단은 해체되고 총학생회와 각 단과대학별 학생회가 조직됐다.
대학 축제가 활성화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대학의 사회적 의무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요즘 ‘농활’의 원조인 ‘농촌으로 가기 운동’과 의대, 치의대의 무의촌 진료 활동이 시작됐다. 대학생들은 신생활운동, 민족통일운동 등을 주도했다.
‘역사상 처음 아래로부터 성취해낸 정치적 변혁’을 경험한 이 세대 동문들은 이후 다방면에서 4·19정신을 이어갔다. 특히 정계에 대거 진출했다. 당시 사회학과 3학년으로 시위를 주도한 윤 식 전 국회의원을 비롯해 고 이수정 전 문화부장관, 이영일ᆞ박 실(정치58-63)·양성철(정치58-64) 전 국회의원, 이우재(수의학57-62) 전 한나라당 부총재, 문리대 학생회장이었던 한광옥(영문60입)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이 대표적인 정치권 4·19세대다. 1학년 때 시위에 참가한 이경재(사회60-64) 동문은 4선 의원을 지내고 4·19혁명 50주년 기념사업회장을 역임했다. 386세대 이전 정치권의 젊은 주역으로 기대를 모았던 이들은 이후 각기 다른 정치적 행보를 걸었다.
문단에서는 4·19를 겪은 서울대 출신 문인들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소설에선 박태순(영문60-64)·김승옥(불문60-65)·이청준(독문60-66) 동문, 평론에서는 염무웅 (독문64졸)·김 현(불문60-64) 동문 등이 4·19 문인으로 꼽힌다. 시인 김지하(미학59-66)·김광규(독문60-64) 동문은 각각 4·19 시의 대표작 ‘타는 목마름으로’와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를 남겼다. “4·19때는 자기 가능성과 희망, 꿈이 거의 무한대로 확산되는 느낌이었다”는 이청준 동문의 말처럼 이 세대 작가들은 4·19 당시 느낀 희망과 자부심, 이후 정치적 격변과 산업화의 소용돌이에서 맞닥뜨린 좌절까지 문학으로 승화하며 한국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서울대 동문은 4·19 정신을 알리고 계승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4·19혁명 주역 모임 ‘4월회’는 안동일(법학59-63) 변호사를 초대 회장으로 출범해 현재 김용균(법학60-64) 변호사가 회장이다. 올해 60주년 기념사업은 외대 재학 당시 4·19에 참여한 김기병(행대원65-67 본회 명예부회장) 롯데관광개발 회장이 이끌고 있다. <답글의 김기병 동문 인터뷰 참고>
소설가 김만옥(국문59-63) 동문은 소설 ‘계단과 날개’에서 서울대 생이 겪은 그날의 풍경을 생생히 묘사하고 “소설에 옛 동숭동의 지리적 존재도 담아두는 것이 내게 부여된 중요한 임무”라며 “그곳이 이 땅의 학문의 본고장이며 4·19의 진원지로서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오늘날 캠퍼스에선 관악캠퍼스 두레 문예관 앞에 조성된 ‘4·19 추모공원’에서 4·19혁명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문리대와 사범대 등 옛 단대 캠퍼스에 흩어졌던 기념탑과 추모비를 한데 모았다.
한때 다소 외진 공대 인근에 위치했으나 2002년 정문 가까이로 이전해 접근성이 높아졌다. 성낙인 전 총장과 오세정 총장이 취임 후 첫 공식 일정으로 이곳을 찾았다. 1961년 문리대 생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한 4·19기념탑은 이정갑(조소55-60) 동문이 설계했다. 시설 하나하나 정의로운 학우를 떠나 보낸 친구들의 그리움이 녹아 있다. 매년 4월 19일 학생 대표와 교수들이 추모공원에서 기념식을 연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