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옥’이란
‘한옥’은 우리가 지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는 집을 ‘한옥’이라고 한다. 원래 ‘한옥’이라는 명칭은 없었다. 70년대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집과 형태나 구조가 다른 집을 부르는 명칭으로 ‘양옥洋屋’, ‘적산가옥敵産家屋’ 등을 사용했다. ‘양옥’은 19세기 말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서양 사람들과 같이 들어온 집을 후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방하여 지은 집을 말하고, ‘적산가옥’은 일본사람들이 들어와 짓고 살았던 집이 해방이후 그대로 남아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집에 대해서는 그냥 ‘집’으로 통칭했고, 서양에서 들어온 집이라는 뜻의 ‘양옥’이라는 말밖에는 없었다. 이런 집이 이제 ‘양옥’이 주류가 되고 보니 우리가 살던 집이 소수가 되어 이제는 ‘한옥’으로 바뀐 것이다. 이런 예는 옷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옷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양복洋服’과 ‘한복韓服’을 구분하는데 우리가 일상에서 입는 옷도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고, 그 옷이 주류가 되고 보니 우리 전통 옷을 이제는 ‘한복’으로 불러 구분하고 있으며 처음 들어 올 때 정장차림의 옷이 ‘신사복紳士服’이라고 불리던 것이 이제는 ‘양복’으로 치환되었다.
모든 문화가 그렇듯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거는 19세기 말 쇄국을 풀고 서구문물을 받아들인 이래로 서구문화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에 따라 변화해왔다. 아궁이가 연탄에 맞춰 변화하고, 온돌이 보일러 시스템이 들어오면서 온수바닥난방으로 변화하였다. 또한 콘크리트라는 재료가 들어오면서 집을 짓는 방법도 목조에서 철근콘크리트조로 변화하였다.
이런 변화가 자의든 타의든 우리에게 접목되어 주거도 변화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가 지어 우리나라 사람이 사는 집을 ‘한옥’이라고 정의한다면 지금 대표적인 한옥은 주거비율이 50%가 훨씬 넘은 ‘아파트’가 우리나라의 한옥이 아닐까 한다.
아파트도 자세히 살펴보면 서양의 아파트와는 완전히 다른 구조이다. 크게 두 가지가 서양의 주거와 다르다. 첫 번째는 온돌에서 변화된 바닥 난방시스템이고 두 번째는 신을 벗고 들어간다는 것이다. 주거형태는 과거 우리 전통한옥에서 발전 변화한 것으로 우리나라 주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자연환경과 한옥의 형식
그러나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한옥은 좁은 의미의 한옥으로서 전통한옥을 의미한다. 전통한옥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이나 나라의 전통건축은 자연환경과 나름의 고유한 생활 습관 또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사회환경에 영향을 받아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집을 보면 그 곳의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우선 자연환경이 한옥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한옥하면 우리는 기와집을 떠올린다. 조금 나이가 든 분들은 초가집이 더 많이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한옥은 생각보다 종류가 다양하다. 이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연조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와 주변 환경에 맞추어 발전하다 보니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 우선 재료로 기준할 때 가장 일반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지붕재료에 의한 구분이다. 지붕 재료에 따라 기와집, 초가집, 너와집, 굴피집, 너새집으로 구분한다.
기와집은 기와를 굽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 부자들이 살던 집이고, 일반 서민들은 대부분 초가집에서 살았을 것이지만 새마을 운동 등으로 지금은 거의 다 사라져 몇 채 남아있지 않다. 초가집은 겨울에 추수를 하고 탈곡한 후 남는 부산물인 짚으로 지붕을 잇는 것으로 짚 속이 파이프처럼 비어있고, 짚과 짚 사이의 공기층 때문에 보온성이 뛰어나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 그리고 가벼워 서까래, 도리, 기둥과 같은 부재를 작은 것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경제적어서 민가 대부분이 초가로 되어있다.
그러나 억새가 많이 나는 곳에서는 억새로도 지붕을 올리는 경우가 있다. 억새는 초가와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구성이 뛰어나 오랫동안 교체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점에서 매우 효율적인 집이다. 이런 억새로 지은 집은 초가와 비슷한 모습을 하지만 억새가 짚보다는 뻣뻣하여 지붕물매가 부드럽지 못하다.(창녕 하병수가옥)
초가집(예산 정동호 가옥/ 이하 사진자료출처는 문화재청 사이트임)
초가집은 쌀농사를 하는 곳에서 짓는다. 기와를 구하기 힘들고, 쌀농사를 할 수 없는 산간에서는 참나무를 기와크기 만큼 쪼갠 너와를 덮은 ‘너와집’, 굴참나무 껍질을 사용하여 지붕을 덮은 ‘굴피집’, 천연슬레이트로 지붕을 덮은 ‘너새집’ 등이 있다. 이런 재료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지붕의 기능성에 따라 달리 불리기도 한다. 기능성을 더 한 집으로 지붕에 배기구를 낸 ‘까치구멍집’이 있다. ‘너와집’이나 ‘굴피집’은 모두가 ‘까치구멍집’이다.
‘까치구멍집’이 생긴 것은 벽에 창을 많이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온이 낮고 동물들의 침입이 우려되는 산간지역에서는 벽에 창을 내 환기를 하는 대신 지붕 꼭대기 합각면을 배기구로 이용하고 있다. 이런 구멍을 ‘까치구멍’이라고 하고 이런 ‘까치구멍’이 있는 집을 ‘까치구멍집’이라고 한다.
신리 너와집 : 지붕꼭대기에 있는 구멍을 까치구멍이라고 함
내부에서 본 까치구멍
대이리 굴피집
지붕은 형태에 따라 ‘맞배지붕’, ‘우진각지붕’, ‘팔작지붕’, ‘사모지붕’, ‘육모지붕’ 등으로 나누는데, 중요한 건물에서는 주로 ‘팔작지붕’을 많이 하고 성문 등에서는 ‘우진각지붕’을 많이 사용한다. 지붕 제일 높은 부분을 ‘용마루’라고 하고 지붕에 따라 ‘내림마루’, ‘추녀마루’ 등이 생긴다. 기와는 ‘암키와’와 ‘숫키와’ 그리고 맨 앞쪽에 설치하는 ‘암막새’, ‘숫막새’ 등이 있으며 궁궐의 주요전각에는 추녀 끝에 ‘잡상雜像’을 설치한다. ‘잡상’은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 등의 이름을 붙였는데 중국은 우리와는 다른 이름을 붙이고 있다.
경회루 추녀마루의 잡상
* 요새 일부 매스컴에서 ‘잡상’을 ‘어처구니’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지붕형태 : 별첨 1 그림 참조>
집은 평면형식에 따라 나누는데 이것도 자연조건에 영향을 받아 지역적으로 다르다. 추운 북쪽지방인 함경도 집은 외기로 열을 빼앗기는 것을 막기 위해 방을 두 줄로 배치하였다. 이런 집을 ‘겹집’이라고 부른다. 이런 ‘겹집’은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전파되어 경북 영덕 지방까지 진출했고 북으로는 만주지역으로 퍼져 만주지역에서 우리나라 사람들 살림집이 이런 구조이다.
상대적으로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오면 방이 한 줄로 배치된 ‘홑집’이 대부분이다. 홑집은 시대가 지나면서 발전해 가는데 방 앞에 툇마루를 두면서 반 칸을 더 내고, 더 시대가 흘러 18세기 후반이 지나면서 뒤쪽으로도 반 칸을 늘리기 시작한다. 이렇게 앞에만 반 칸을 늘린 집을 ‘전퇴집’이라고 하고, 뒤쪽까지 반 칸을 더 늘린 집을 ‘전후퇴집’이라고 한다. 이렇게 방을 앞뒤로 늘려가는 것은 살림의 규모가 커지면서 넓은 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가 되면 새로 짓는 집이 ‘전퇴집’은 기본이고 많은 집들이 ‘전후퇴집’으로 변하게 된다.
<지역에 따른 평면 : 별첨 2 그림 참조>
어느 나라이든 전통가옥에서는 자연에 순응하면서 자연을 가장 잘 이용하려는 지혜가 있다. 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기온과 강수량이다. 그 특징 잘 나타나는 것이 지붕이다. 비가 많은 지방일수록 배수를 위해 지붕 경사를 급하게 준다. 비가 없는 지역은 배수걱정이 없어 평지붕으로 한다. 그리고 눈이 많이 오는 지방에서는 눈이 쌓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붕물매가 매우 급하게 해서 지붕을 뾰죽하게 만든다.
그리고 비가 많은 지역에서는 습기가 올라오기 때문에 살림집은 2층에 두고 있다. 이렇게 땅바닥에서 올려 살림살이를 하게 한 집을 ‘고상구조高床構造’라 한다. 옛날 삼국시대의 집모양 토기를 보면 고상주거형태이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다. 그러므로 겨울을 위한 시설도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나라 한옥의 특징은 추운지방의 집과 더운 지방의 집이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대청은 여름을 위한 공간이고 온돌은 겨울을 위한 공간이다.
대청은 고상주거가 낮게 변형된 모습으로 고상주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바닥에서 띄워 습기가 올라오는 것을 막아주고, 사방을 틔어 바람이 잘 관통하게 하여 더운 여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도록 변화된 구조이다. 그리고 겨울을 대비하여 온돌로 집을 지었다. 또한 겨울을 대비해서 창문도 개발했다. 가난한 집에선 홑창이지만 조금 잘 사는 집에서는 삼중창, 사중창으로 해서 겨울추위에 대비했다.
사회환경과 한옥
집은 사회 환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옥도 예외가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동해안의 주거형태는 경북 영덕까지 함경도의 주거와 유사하다. 이것은 함경도 지방의 문화가 이곳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으로 삼국시대 진흥왕이 해안을 따라 함경도까지 진출한 것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한옥에서 서민들의 집은 대부분 그렇지 않지만 양반 집은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하고 있다. 지금 한옥으로서 남아있는 살림집은 모두 조선시대에 지어진 집이다. 그러므로 지금 한옥으로 고려시대의 살림집을 유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쨌든 지금 한옥은 남녀유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안채와 사랑채의 구분이 명확해졌다. 이런 구분을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에는 ‘내외담’ 또는 ‘내외벽’이라는 것을 설치해서 바깥사람들이 안쪽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했다.
또한 유교를 기본 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수기치인’의 덕목과 ‘분수’라는 유교적 질서를 집에도 구현하고자 했다. ‘분수’라는 것으로 이야기되는 신분질서는 신분에 따라 건물의 면적(한옥에서는 ‘칸’수)과 높이 등을 제한했고, ‘수기치인’으로 이야기되는 자기 ‘수양’의 덕목은 집을 하려하게 치장하는 것을 금하였다. 따라서 조선초기부터 단청과 같은 색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이런 규제가 처음 생긴 때가 세종 때이다. 세종 때 집의 규모를 제한하고, 새로 짓는 집에 단청을 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런 것이 점점 강화되어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에 명문화하였다.
신분에 따라 집이 달라지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솟을대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솟을대문이라는 것은 아무나 세울 수 없었던 것이다. 최소한 종 2품 (현재로 말하면 차관급)이상을 지낸 집안에서만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솟을대문이 나온 것은 기능 때문이다. 종 2품이상만 초헌이라는 가마를 탈 수 있는데 이런 가마가 편하게 지나가기 위해 지붕을 높인 것이다. 또한 익공이나 원기둥은 일반 양반이라도 사용할 수 없는 구조형식이다.
그러나 조선16세기까지는 고려시대의 유풍이 남아 있어 익공집이 세워진 경우도 있었고 후대에는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원기둥을 사용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익공은 왕족을 제외하고는 쓰지 않았다. 이런 질서가 파괴된 것은 갑오경장이후 신분질서가 흐트러지면서 누구나 솟을대문을 짓고 물익공을 사용하는 집 등이 나오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한옥 중에서 가장 특징이 있는 생활구조를 가진 곳은 제주도이다. 제주도는 같은 집에서도 아들이 분가하면 살림도 따로 나뉜다. 그래서 같은 울타리 안에 있어도 별동으로 집을 지어 완전히 살림을 따로 한다. 이런 생활 습관은 지금까지 내려와 같은 집에 1,2층을 나눠 살아도 출입구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온돌과 한옥
한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온돌이다. 온돌은 한옥의 상징으로서 온돌이 지금까지 우리 주생활을 이끌고 있다. 온돌은 부뚜막 형식의 쪽구들에서 발전된 것이다. 쪽구들은 최초로 고구려지방에서 발명되어 중국황하북부와 한반도 남부로 전파되었다. 황하북부지역에서는 고래가 하나 밖에 없는 쪽구들 형식에서 발전을 멈추었지만 한반도에서는 고래가 한 줄에서 두 줄, 세 줄, 네 줄로 점점 발전하여 방 전체를 온돌을 들이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온돌구조 : 별첨 3 그림 참조>
온돌로 인해 한옥에서의 생활은 크게 변화했다. 이런 변화한 생활에서 가장 큰 특징은 좌식생활과 좌식생활에 따른 실내에서 신을 벗는 것이다. 좌식생활은 서구의 영향으로 침대를 들이고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 등 많이 입식생활도 변했지만 실내에서 신을 벗는 것은 지금도 그대로 이어 오고 있다.
온돌이 발달하지 못한 고려시대 때까지만 해도 귀족들의 생활은 입식생활이었다. 1123년에 송나라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는 고려 귀족의 생활은 중국과 다르지 않다고 했고 일반인들은 토상土床에서 산다고 했다. 즉 고려시대는 귀족들은 입식생활이 기본이었고 백성들은 온돌인 토상에서 자리를 깔고 생활했다는 것이다.
이런 생활이 조선초기까지는 어느 정도 지속되었다는 것은 세종실록에 방전(方塼 : 바닥에 까는 네모난 벽돌)을 공신에게 하사했다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생활이 언제부터 완전한 좌식생활로 전환되었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장판지의 발명 이후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장판지 개발이 언제 되었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간접적인 자료에 의하면 1515년 장판지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14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발명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입식생활을 하던 양반의 주거생활이 장판의 발명으로 좌식생활로 변화하였다. 좌식생활로의 변화는 단순히 집구조만 변화시킨 것만은 아니다. 가구까지 모두 변하였다. 창문 아래 배치되는 문갑은 좌식생활에 의해 만들어진 가구이고 소반 역시 좌식생활에 맞춰 개발된 가구이다. 농이나 장이 높지 않은 것은 모두 좌식생활에 맞춰 변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온돌 때문에 가구만 변화한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온돌로 인해 우리나라 사람의 의식구조도 변화했다고 생각한다.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 사람이다. 온돌의 특성은 이런 생활태도에서 깊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한다. 우리가 과거 보수적 성격이 많은 것은 이런 집구조의 특성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한옥의 목구조
한옥은 나무로 만든다. 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목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한옥의 목구조는 기본적으로 못을 쓰지 않는 맞춤구조이다. 맞춤은 건축 부재에 따라 여러 종류가 쓰인다. 한옥 목구조는 기본적으로 ‘공포供包’가 있는 구조와 ‘공포’가 없는 구조로 나눈다.
기둥상부에 지붕하중을 받기위해 ‘공포’를 구성하는데 기둥상부에만 ‘공포’가 있는 구조를 ‘주심포柱心包’, 기둥 상부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사이에도 공포가 올라가는 구조를 ‘다포多包’라고 한다. 공포 중 가장 간단한 것이 ‘익공翼供’인데 이것도 익공이 하나면 ‘초익공’이고 익공이 이중으로 설치되면 ‘이익공’이라고 한다.
일반 한옥에서는 현재까지는 ‘초익공집’까지만 찾아볼 수 있고, 왕족의 집에서는 익공에 화려하게 조각이 되어 있는 ‘물익공집’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아마도 그 이상 화려하게 지은 집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지만 아직 실물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추정만 할 뿐이다.
일반 가정집 한옥에서 가장 많이 쓰는 구조는 ‘민도리집’이다. ‘민도리집’은 한옥구조 중 가장 간단한 형식으로서 기둥 위쪽에서 기둥과 기둥을 잡아주는 창방없이 도리에 서까래를 거는 집을 말한다. 이런 ‘민도리집’도 두 가지로 나누는데 도리가 네모로 되어있으면 ‘납도리’, 도리가 동그란 것은 ‘굴도리’라 불리는데 ‘굴도리집’이 더 고급집이다.
귀공포 및 공포(창경궁 명정전)
주심포 건물(예산 수덕사 대웅전)
다포 건물(여수 흥국사 대웅전)
익공건물(사직단 정문)
물익공건물(운현궁 노안당/기둥 상부에 화려하게 장식된 것이 물익공)
민도리집(자료출처 : 그림으로 보는 한국건축용어/김왕직)
목구조의 주요명칭(1고주 5량집/자료출처 : 그림으로 보는 한국건축용어/김왕직)
별첨 1 : 한옥 지붕 형식(자료출처 : 그림으로 보는 한국건축 용어/김왕직)
별첨 2 : 지역에 따른 평면형식(자료출처 : 한국의 전통민가/주남철)
별첨 3 : 온돌 구조 (자료출처 : 그림으로 보는 한국건축용어/김왕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