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야화> 인현왕후 민씨
희빈 아들 원자로 책봉되면서 폐위돼 서인으로 유폐생활
남인 숙청으로 왕비로 복위 입궐 7년 만에 병 악화돼 사망
이제까지 영화나 드라마로 가장 많이 만들어진 사극작품은 <장희빈>이 아닐까 한다.
대개는 악역의 중심으로 나오는 장희빈에 의해 수난을 당하는 여인으로 등장하는 왕비가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다.
인현왕후를 숙종의 정비로 생각하지만, 사실 인경왕후가 1680년 20세 때 천연두로 요절한 후 계비로 들어온 여인이다.
1681년 두사람의 혼례식이 이뤄졌을 때 숙종의 나이는 21세, 인현왕후는 15세였다.
인현왕후 민씨는 여흥 민씨 민유중(閔維重)과 은진 송씨 송준길의 딸인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1667년(현종 8년) 한양의 서부 반송방(현재의 서대문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민유중은 송시열과 함께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정치세력의 핵심이었으며,
외할아버지 송준길은 서인·노론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활약한 인물이었다.
민씨는 1681년 간택된 후 어의동 별궁에서 왕비 수업을 받았으며, 5월2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비로 책봉됐다.
20대 후반이 되도록 후사가 없어 초조해하던 숙종은 장희빈을 후궁으로 맞이했고,
1688년 장희빈은 숙종이 고대하던 왕자 균(경종)을 낳았다.
숙종이 균을 원자로 책봉하면서, 장희빈은 왕비의 자리에 올랐고,
인현왕후는 폐위된 후 서인(庶人)의 신분으로 사저인 안국동으로 들어갔다.
서인 정권에서 남인 정권으로 권력교체도 이뤄졌다.
인현왕후가 폐위기간 중 살았던 곳에는 훗날 그녀의 후손이 되는 명성왕후 민씨가 살게 되면서 그 인연을 이어갔다.
1761년 영조는 인현왕후의 사제(私第)를 찾은 후,
침실을 ‘감고당(感古堂)’이라고 이름 짓고 어필로 편액을 써서 새겨 걸도록 했다.
인현왕후의 안국동 유폐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장희빈과 그 후원세력인 남인의 정치력을 불신한 숙종이 5년 후인 1694년 다시 환국(換局)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들이 숙청되고, 서인들이 정권을 차지했다.
6월1일 인현왕후의 왕비 책봉 의식을 거행했고, 장희빈의 왕비 자리는 회수됐다.
왕비로 복위된 후 인현왕후의 삶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입궐 7년 만인 1701년(숙종 27년) 숙종과의 소생 없이 창경궁 경춘전에서 사망했다.
인현왕후의 사망에 장희빈의 저주가 있었음은 사극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창경궁의 취선당에 신당(神堂)을 차려놓고,
인현왕후의 밀집 인형을 만든 다음 바늘로 콕콕 찌르는 모습은 <장희빈> 드라마의 명장면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인현왕후 역시 장희빈이 보낸 궁녀들에 의해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이것이 병을 악화시켰음은
“희빈에 속한 것들이 항상 나의 침전(寢殿)에 왕래하였으며, 심지어 창에 구멍을 뚫고 안을 엿보는 짓을 하기까지 하였다.
…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귀신의 재앙이 있다’고 한다”는
<숙종실록>의 기록에서 장희빈이 측근들을 시켜 인현왕후를 저주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운명이었을까? 장희빈과 인현왕후 두 여인은 1701년 같은 해에 생을 마감한다.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려고 통명전 등에 흉물을 묻은 정황들이 발각되면서, 숙종이 내린 사약을 받게 된 것이다.
1701년 8월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왕비의 시호를 인현, 능호를 명릉, 전호를 경녕으로 정했고,
발인 다음날 현재의 서오릉 경역에 있는 명릉에 장사를 지냈다.
인현왕후의 명릉이 조성된 후 19년 만인 1720년 숙종이 승하한 후에는 이곳 빈자리에 묻혀 쌍릉의 형식이 됐다.
명릉에서 특이한 점은 석물(石物)들이 왜소하다는 것이다.
숙종이 재위 시절 명릉을 검소하고 단출하게 조성할 것을 명하고 자신의 무덤 역시 간소하게 조성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면서 석물들도 실물 크기와 비슷하도록 작게 만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