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피리
한하운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면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 ㄹ 닐니리
(시집 『보리피리』, 1955)
[어휘풀이]
-인환 : 인간의 세계
-기산하 : 많은 산하
[작품해설]
이 시는 ‘보리피리’에서 환기되는 소박한 낭만적 정서가 아닌, 나병이라는 육체적 고통을 아름다운 서정으로 극복한 명작이다. 일반인과 격리되어 살아가는 고통 속에서 보리피리 불며 어닐 시절 꽃 청산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인은 ‘인환의 거리’ ‘인간사’를 꿈꾸며 절망하지만, 마침내 병랑의 숱한 산하와 눈물의 높은 언덕을 건너는 더 큰 아픔을 통해 자신의 절망을 내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정형룰을 살린 민요체의 정감 어린 가락으로 비유나 상징이 없는 간결하고 쉬운 시어로 구송(口誦)하듯 노래하여 진정 아름다운 시로 격상시킨 이 작품은 자신의 한 맺힌 삶을 ‘피-ㄹ 닐니리’라는 애절한 피리 소리에 담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있어서 피리를 부는 것은 자신의 존재론적 한계 초월하고자 하는 행위이자, 자신을 학대하는 인간 세상에 대해 따뜻한 애정을 실어 보내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작가소개]
한하운(韓何雲)
본명 : 한태영(韓泰永)
1920년 함경남도 함주 출생
중국 북경대학 농학원 졸업
1944년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에 근무
1945년 나병의 악화로 사퇴
1946년 함흥 학생 데모 사건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석방
1949년 『신천지』에 12편의 「한하운 시초」를 발표하여 등단
1975년 사망
시집 : 『한하운 시조』(1953), 『보리피리』(1955), 『한하운시선집』(1956),
『한하운시화집』(1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