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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중대한 문제
성경:히브리서 9:27-28
오늘 우리 교회를 찾아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전도주일이기 때문에 여러분들 중에는 처음으로 초청받아 교회에 나오신 분들도 적지 않을 줄 압니다. 어떤 분은 예수를 믿어 구원 받기 위하여 나오신 분도 계실 것이고 어떤 이는 마지못해 나오신 분들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여간 함께 예배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저는 오늘 모처럼 귀한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기 위하여 나오신 여러분들과 함께 ,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대한 문제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하고저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인생에게 있어서 중대한 문제는 수없이 많을 것같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어느 부모에게서 태어나느냐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는 매 50초마다 신생아가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매 25초마다 신생아가 임산부의 자궁 안에서 낙태의 희생자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둘만 낳고 하나만 낳는 부모에게 태어나는 인생은 햇볕도 보지 못하고 죽어야 합니다. 또 부모님 잘 만나서 호강한 사람도 많고 가난한 부모님 만나 고생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부모를 임으로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만, 하여간 부모님을 만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고3학생들에게 있어서 수능학력고사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열여덞살의 어느 날 어떤 점수를 땄느냐에 따라 그의 나머지 인생이 결정되기”때문입니다.
직장을 선택하는 문제도 중대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 직장에 따라 한평생의 생활이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청춘남녀에게 있어서는 배우자선택문제도 보통문제는 아닙니다. 한 인생의 행·불행은 어떤 사람을 배우자로 맞느냐하는 것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된장 신것은 1년원수 못된 아내는 100년원수”이기 때문이다.
“딸로서는 Diamond이지만 아내로서는 유리가 될 수도 있다.”
“결혼은 천국같을때도 있고, 지옥같을때도 있다”
“죽음으로 비극은 끝나고 결혼으로 희극은 끝난다”
목사는 교회를 잘 만나야 하고, 교회는 목사를 잘 만나야 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인생사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대수롭지 않은 것치고 중요한 것으로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크레인. F. 박스톤목사님은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 세 가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는 죽음에 관한 문제요 둘째는 심판에 관한 문제이며 셋째는 영원에 관한 문제이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대한 문제는 한 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는 죽음과 심판과 내세에 관한 문제임이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이보다 더엄숙한 문제는 달리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인생의 중대한 세 가지 문제에 대하여 살펴보고저 합니다.
(1)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대한 문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27).
여기 “정하신”것은 “앞에 가로누워있는”것을 의미합니다. 다시말하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말합니다. 그래서 「호라티우스」는 “이세상의 부나 권력이 끝끝내 이겨내지 못하는 한계, 그것이 죽음이다”라고 말한 것같습니다.
사람들은 잘 살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시체를 썩지 않도록 미이라(mirra)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또 무덤을 공원처럼 아름답게 꾸밀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죽음을 떨쳐버릴수는 없습니다. 죽음을 금방 여기있었는가 하면 벌써 저편에 가 있습니다. 도처를 분주하게 쏘다니고 있는 것이 죽음입니다. 모든 것의 주위에, 모든 것의 내부에, 그리고 모든 것의 위, 아래에 죽음은 존재합니다. 이 죽음에서 보호하여 줄 장소는 이 세상 아무데도 없습니다.
그리고 젊다는 것이 공동묘지에서 멀다고 말할 사람도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죽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소년이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사람은 몇 살에 죽어요?” 아들의 질문을 받은 엄마는 그 아들로 하여금 묘지에 가서 무덤 앞의 비석에 쓰여있는 년수를 헤아려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 소년은 수많을 비석을 살펴보았습니다. 죽는나이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은 어느 나이에서나 죽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노인도 죽습니다. 그러나 또한 젊은이도 죽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도 죽습니다. 그러나 또한 어린이들도 죽습니다. 죽음에는 양의 동서와 단의 남북에 차별이 없고, 빈부귀천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습니다. 죽음은 만 사람이 가는 길이건만 우리는 이 죽음에 대하여 무관심합니다.
죽음은 바로 내앞에 있건만 죽음과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아니 갈 자사가 없습니다. 정든 집을 떠나야 합니다. 일가친척을 떠나야 합니다. 철부지 어린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떠나야 합니다. 붙잡아도 소용없고, 안 간다고 발부둥쳐도 소용없습니다.
미국의 사학계를 개척한 「H.B아담스」는 애원하는 눈매로 그의 비서를 바라보면서 “여보게 나좀 살게 해다오” 라고 애원했다합니다(Dear Child, Reep me alive).
무신론자 볼테르는 1778년에 죽었는데, 그는 담당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나는 하나님과 인간들로부터 버림받은 자입니다. 나의 생명을 6개월만 더 연장시켜 준다면 나의 재산의 절반을 주겠소”
홉스는 1679년에 죽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전세계를 소유하고 있다면 나의 생명을 단 하루만이라도 더 연장시켜 주는 자에게 주겠노라”
그래서 사람들은 “살아있는 병사가 죽은 황제보다 훨씬 더 낫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죽지 않고 살자가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번죽는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이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생명의 정지상태가 죽음이라고 쉽게 말합니다. 신학적으로는 영혼과 육신의 분리라고 정의합니다. 죽음은 심장이 멈추고 호흡이 끊어지며 몸이 뻣뻣하게 굳은 상태를 말합니다. 어떤 국어사전에 보면 절맥이라는 간단한 말로 표현했습니다. 맥이 끊겼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있는 심장은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고 있습니다. 이 심장은 국경일도 없고 쉬는 날도 없습니다. 우리가 잠을 자는 시간에도 심장은 뜁니다. 춥다고 게으르지도 않고 덥다고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이 심장은 보통사람의 주먹만합니다. 230g정도 됩니다.
이 심장은 매분마다 70번 정도 뜁니다. 1시간이면 4,200번, 하루동안에는100,800번, 그리고 1년이면 36,792,000번이나 뜁니다. 이 심장은 밤낮의 구별도 없이 부지런히 뛰고 또 뜁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 심장이 멈추는 일이 생깁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죽음이라 합니다.
하루도 한시간도 쉴 줄 모르고, 부지런하고 말없는 이충성스런 기계도, 일단 유사시에는 아주 맥을 못 춥니다. 피로를 모르고 일하던 이것이 예고도 없이 뚝 멈추고 맙니다. 건강하던 사람들이 별안간에 쓰려져 불귀의 객이 되고마는 것은 바로 이 심장이 멈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잠들었을 때 멈출런지, 일하다가 멈출런지, 여행 중에 멈출런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고장나는 것은 헌 기계만 아니라 새기계도 가끔 고장이 납니다. 잘 익은 과일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풋과일도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히 있습니다. 노인만 죽는 것이 아니라 젊은 사람도 잘 죽습니다. 죽음은 사정이 없습니다. 죽음은 무자비합니다. 죽음은 차디찹니다.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언제 죽을지도 모릅니다. 또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계로가 스승이신 공자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공자선생님 “未知生이면 焉知死리요”
그뜻은 사는 것도 모르는 주제에 죽음을 어찌알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입니다.
“너희生命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2)우리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대한 문제는 심판의 문제입니다.
인생의 중대한 문제는 역시 죽음의 문제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죽음으로서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 본문은 말씀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27).
죽음이 인생의 종착역이라면 어차피 언젠가는 마지할것, 가는데 까지 가면 되겠지요. 그러나 죽음이 인생의 끝은 아닙니다. 죽음 그후에는 잘살고 못산 것에 대한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인생의 도피처가 될 수 없습니다. 죽음으로 인생이 망각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이 인생의 종지부는 아닙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우리인생에게 엄숙하고 중대한 문제입니다.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전12:14).
여러분, 거짓말을 해 보세요. 거짓말쟁이가 될 것입니다. 남의 것을 훔쳐보세요. 도둑이 될 것입니다. 손가락을 불에 넣어보세요. 뜨거워서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거리에 나가서 죄를 지어보세요. 당장에 경찰이 나와서 잡아갈 것입니다. 콩을 심어 보세요. 콩을 거둘 것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로마에 가면 「우르반」대학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대학의 대강당의 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리고 또 그 다음에는…”
결코 가볍게 여길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인생의 마지막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대를 다니던 장래가 촉망된 고학생이 「필립·네리」라는 부자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노인은 향학열에 불타는 젊은이에게 감동한 나머지 그의 요청을 들어주기로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청년, 법대를 졸업하면 무얼 하겠소?” “변호사가 되렵니다.”
“그 다음에는요?”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요?” “좋은 집을 짓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에는요?” “마차를 사겠습니다.”
“그 다음에는요?” “예쁜 아가씨와 결혼해야지요.”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에는요?” “자녀를 낳아 영재를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그 다음에는요?” “점점 늙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에는요?” “·········” 아무말이 없었습니다.
젊은 법대생은, 대답은 못하고 다음과 같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황혼이 오고, 뜨거운 이 피는 식어 싸늘하게 될 것이다. 음산한 어느 겨울날 장례식이 거행되면 북망산에는 무덤이 하나 더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영원한 망각속에 빠져 버릴 것이다….”
「네리」노인은 아무대답도 못하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그 대학생을 향하여, 엄숙히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원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영원한 천국이요. 예수 밖에서는 영원한 지옥입니다.”
돈 뭉치를 받아든 청년은, 노인의 말씀에 심각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중요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로마」법대에서 「우르반」대학으로 전학하여 거기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둡니다. 종두득두요 종과득과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갈6:78).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심고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거두시겠습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사람은 죽음으로 끝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죽은 후에는 또 심판이 있습니다.
아침이 가면 밤이 옵니다. 학교에 입학하면 졸업할 날이 옵니다. 만나면 헤어지기 마련이고 기뻐한때가 있으면 슬퍼할 날도 있습니다. 장사를 펼쳐 놓으면 거둘때가있고 씨를 뿌렸은즉 수확할 날이 옵니다. 날 때가 있은 즉 죽을 날이 있고, 하나님께서 천지를 시작하셨으니 심판할 날이 있는 것은 당연한 진리입니다.
여러분, 이 심판날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 안 섬기는 불신자는 모아서 지옥 보내는 날입니다. 믿으라면 비웃고, 전도한즉 욕하고 코웃음치던 자들이 지옥가는 날입니다. 불신자들이 가슴 치며 통곡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죽음을 무서워하고 겁냅니다.
그러나 예수믿는 신자는 죽는 날이 천국 가는 날입니다. 정말로 기쁜 날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찬송하고 감사합니다.
어떤 소녀가 읍내에 갔다가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가 집으로 오늘 길에는 공동묘지가 있고 그곳을 지나게 됩니다. 누군가가 그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너 공동묘지를 지나올 때 무섭지 않더냐?” 그 소녀는 태연하게 대답하기를 “무섭긴 왜 무서워요? 무덤 건너편에 저희 집이 있는데요.” 라고 반문하였습니다.
성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건너편에 영원한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이 없는 사람은 진실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감사하기 바랍니다. 천국소망이 있음을 감사하기 바랍니다.
(3)우리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대한 문제는 영원한 세계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죽어서 심판을 받은 후에 영원한 세계로 가야 합니다.
영원한 세계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천국에서의 영원이요. 다른 하나는 지옥에서의 영원입니다. 사람들은 죽어 심판을 받은 후 천국의 영원한 세계로 가든지, 지옥의 영원한 세계로 가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 세상 억천만 인간은 어김없이 이두곳중의 한곳으로 가게 됩니다.
한번가면 그곳에서 영원입니다. 오고갈 수가 없습니다. 죽을 수도 없습니다.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한번 지옥에 가면 지옥에 가서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한번 천국에 가면 그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 천국은 너무나 좋은 곳입니다. 그 천국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러나 지옥은 무서운 곳입니다. 그곳은 어둡고 캄캄한 곳입니다. 지옥은 벌받는 곳입니다(마25:46). 지옥은 고통 당하는 곳입니다(눅16:23). 지옥은 모든 욕망이 거절되는 곳입니다. 지옥은 무서운 불이 붙고 있는 곳입니다(마13:42, 50, 계20:15,14:10).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불못”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음부”라 하였습니다.
지옥은 영원히 불타는 곳입니다. 뜨거워서 견딜 수 없는 곳입니다. 영원히 영원히 헐떡거리면서 고통 당하는 곳입니다. 죽고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곳입니다. 이렇게 무서운 지옥에서 산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이같은 지옥에 가는 것입니까?
“누구든지 생명 책에 기록되지 못한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20:15).
예수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죄인들이 가는 곳입니다. 마귀 섬기는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저주를 받은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마25:41). 마귀와 그 추종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이 곧 지옥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믿던지 안 믿던지 지옥은 존재합니다.
여러분이 안믿는다하여, 있는 지옥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믿던지 안 믿던지 지옥불은 타오릅니다. 여러분이 믿던지 안 믿던지 지구는 둥굽니다. 여러분이 믿던지 안 믿던지 지구는 지금 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믿던지 안믿던지 지옥은 실재합니다. 여러분이 믿던지 안 믿던지 예수를 배척하면 지옥에 갑니다.
제발 예수 믿고 구원받으시기 바랍니다.
체면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업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다할지라도 지옥불 끄는 것보다 급한 일은 없습니다. 아무리 중대한 일이있다할지라도 예수믿는것보다 중한 일은 없습니다.
부산 영도3교회에서 있었든 일입니다.
머리가 하얀 점잖은 분이 있었습니다. 몇 주일만에 그를 만나 둘은 그의 간증입니다. 그분도 20청년때 신앙생활했었답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유산으로 양반행세한다며 수염도 기르고 술친구들과어울려 활쏘기, 골패치기, 주색잡기로 어느새 60이 되었습니다. 그많은 재산 다날려보내고 남은 것으로 부산영도에 겨우 집한채 샀을 뿐입니다.
어느 날 새벽 잠은 안 오고 지난날이 허무하고 무상하여 몸부림치고 있는데 어느 교회에서 새벽종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분 이름이 정지영인데 “뗑겅, 뗑겅”하는 종소리가 “정지영 지옥가 지옥가 정지영”이렇게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공포에 질려 금방 지옥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같더라는 것입니다.
종소리는 끝났는데도 여전히 그의 귀에는 “정지영 지옥가 지옥가 정지영”하고 들려왔습니다. 지옥의 고통 속에 지내는데, 재종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일어나서 옷을 챙겨 입고 나온 것이 제3영도 교회였습니다. 그는 지난 때 버렸던 예수를 다시 영접하여 지난 죄를 애통하면서 새벽마다 회개하고 감격하면서 천국백성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도여러분, 오늘 말씀을 마치려합니다.
우리인생에게는 중대한 삼대사실이있습니다. 첫째는 죽음이요 둘째는 심판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영원이라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영원입니다. 우리인생에게는 두갈래길의 영원이있습니다. 지옥에 가서 영원히 살수도있고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살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을 가렵니까? 오늘처럼 이대로 가면 천국 갑니다. 혹 도중하차하실 분이있습니까?
영국에서도 한때 예수믿는자는 미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죠지휫필트 」목사님이 마차를 타고 가는데 어떤 부인이 “당신예수믿는 휫필드지요?”라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부인은 소리소리지르면서“마차를 멈추세요. 내리겠어요. 예수 믿는 사람과 함께 안 가겠어요.”라고 욕을 했습니다.
그때 휫필드 목사님이 부인에게 “부인, 하나 물어봅시다. 제가 만일 다행히도 천국에 들어가는데 당신도 그곳에 있다면 그래도 내리시겠습니까?” 라고 했더니 천국에는 가고 싶었던지 “죄송합니다”라면서 사과했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천국행 열차에 승차하신 여러분들중에 한 분도 도중하차하는 분이없기를 축원합니다. 모두가 천국에서 영생복락누리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일학교교사가 6세된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영희야 네가 하늘나라에 가면 맨 먼저 누굴 만나겠니?” “선생님 저는 하늘나라에 가지않을거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니 천국엘 가지 않는다니?”깜짝 놀란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영희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우리엄마도 언니도 다 천국에 가겠지만, 우리아빠는 천국에 못가요. 난 아빠가 혼자 지옥가는것이 불쌍해요. 난 아빠가 가는 곳에 함께 갈래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며칠후 그 주교사는 영희 아빠를 만나서 영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영희 아버님 영희아버님은 어디로 가실거예요?”
영희아버님은 대답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바꾸어야겠어요. 사랑하는 내딸이 나처럼 되어서는 안돼요. 나때문에 내딸이 지옥가게할수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