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3월4일 [(자) 사순 제3주일]
[수도회] 주님의 뜻을 담아내 성전이 되는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탈출 20,1-17
○ 제2독서 1코린 1,22-25
† 복음 요한 2,13-25
◈ 오늘의 묵상
요한 복음사가는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사건을 전하며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사두가이들과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은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정화하고자 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님의
시대를 내다보며 하느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56,7) 하고 말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집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히셨습니다(시편 69〔68〕,10 참조). 말라키 예언자는 메시아가
성전에 와서 레위 자손들을 정화시켜 의로운 제물을 바치도록 할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3,1).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행위로 유다 지도자들은 분노하여 그분을 죽일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예수님을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는 ‘하느님의 모독자’로
단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패와 권력욕으로 만연해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영적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새 성전’으로 만드시고자 하십니다.
그 성전은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 몸 안에 성령께서 머무시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성전이
됩니다(1코린 3,16 참조). 신약의 백성들은 크고 화려한 건물보다도
귀한 하느님의 집인 영혼 안에서 주님을 경배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이기심과 탐욕을 버리고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킴으로써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죽음과 부활을 통해 거룩한 성전이 되십시오.
2018년 나해 3월4일 사순 제3주일
제1독서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다(요한 1,17).)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20,1-17
제2독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2-25
복음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25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많은 것들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언제가 어떤 형제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카페에 가서 커피를 주문해서 받은 다음 나오는데 조금
이상하더랍니다. 글쎄 분명히 만 원짜리 지폐를 냈는데, 자신의 손에는
오만 원짜리 지폐가 들려 있던 것이지요. 거스름돈이니까 6,000원이
손에 있어야 하는데 5만 1천 원이 있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갈등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거의 동시에 전날 대리기사에게 1만 5천 원을
줘야 할 것을 5만 원짜리와 5천 원짜리를 혼동해서 6만 원을 준 것이
생각났거든요. 즉, ‘어제의 손해를 이렇게 메우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기분이 좋지 않아서, 결국 오랜
망설임 끝에 다시 카페에 오만 원을 돌려주었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문제는 그 카페 직원의 반응이었습니다. 건성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고 자신의 이 행동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더라는 것입니다. 다시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괜한 짓을 했구나.’
형제님께서는 기도하면서 이 일이 생각났고 크게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돌려주어야 할 것인데도 욕심으로 인해 망설였던 자신의 모습,
또한 대단한 것을 한 것도 아닌데도 인정받고 칭찬 받으려는 허영심을
보게 된 것이지요.
어쩌면 누구나 이러한 경험이 한 두 번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연한 것을 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대단한 것을 한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지고, 악을 피하고 선을 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 안의
이기심과 욕심으로 인해서 각종 핑계 속에서 악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유혹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문제는 이 유혹에 넘어가면 그렇게 마음이 편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불편한 마음과 함께 부정적인 생각이 함께 자리합니다. 여기에 지금
이 순간을 기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래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을 통해서 세상의 어떤 유혹도 거뜬하게 물리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많은 이들이 주님의 곁을 떠나고 있습니다. 주님을
멀리하니 세상의 많은 유혹에 자유롭지 못하고, 이로써 더 어렵고 힘든
삶을 살 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사랑을 그토록 강조하셨던
주님께서 폭력적으로 보이는 유일한 부분입니다. 즉, 채찍을 휘둘러서
장사꾼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고
탁자들을 엎으십니다(요한 2,15-16 참조). 사랑이 아니라 왜 폭력을
다 쓰시면서 정화를 시키려고 하셨을까요?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유혹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집을 더럽히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은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싼 가격에 번제물을 팔고,
성전에서만 통용되는 돈을 만들어서 웃돈을 받아 환전을 해주었던
것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불의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인정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전해준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탈출 20,3)라는 하느님 말씀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의가 마치 정의인 것처럼 내세우는 저들의 뻔뻔함에 화가
나실 만도 하지 않습니까?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유혹에 넘어가서 하느님을 멀리하는 성전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신 모든 유혹을 이기신 예수님 스스로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거룩한 성전이 되십니다.
이제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1코린 1,24)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오로지 주님만을 섬기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모든 유혹에서 자유로워지면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가질 수 있습니다.
과거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나쁜 소식이지만 미래가 다양한
모습으로 자네 손 안에 있는 것은 좋은 소식이지(앤디 앤드루스).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
나이 먹으면 좋은 점
나이 먹으면 좋은 것은 무엇일까요? 어느 작가가 아래의 7가지가 나이
먹으면 좋은 점이라고 말하더군요. 우선 그 7가지를 보도록 하지요.
1) 얼굴이 두꺼워짐.
2) 행복하고 가치 있는 일에 시간을 씀.
3) 지나온 시간 자체가 교훈이 됨.
4) 감정이 풍부해짐.
5)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됨.
6) 너그러워짐.
7) 인생은 비극보다 희극임을 깨닫게 됨.
나이 먹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나이 먹으면서 갖게 되는 좋은 위의 7가지를 잊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앨범을 보다가 주님 곁으로 먼저 가신 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 [수도회] 주님의 뜻을 담아내 성전이 되는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3월4일 사순 3주일, 요한 2,13-25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주님의 뜻을 담아내 성전이 되는 삶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성전 마당에서 환전상들의 상을
둘러엎으시고, 채찍을 휘둘러 소, 양,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의 양과
소를 몰아내십니다. 환전상들은 폭리를 취하며 환전해주었고, 성전에
바칠 제물용 소나 양,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도 엄청난 부당이득을
취했던 것입니다.
환전상들과 장사꾼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성전의 대제사장들과 짜고 공공연하게
부당이득을 취했습니다. 당시 그러한 장사들을 ‘안나스의 특매점’
이라고도 했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런 심각한 불의에 공분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진노는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열정과, 소외되고
천대받는 이들에 대한 애정표현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신앙의 이름으로 합리화 한 이스라엘의 불의한
사회구조 전반을 보여주었습니다. 성전은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로 나뉘어, 서로를 분리하고 출입에 제한을
둠으로써 차별을 드러냈습니다. 역설적으로 성전에서, 하느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권위와 신분이 중시됨으로써, 평등이 무너졌던
것입니다.
성전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삶 전반이 탐욕과 집단적 이기주의의
모순과 불평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장터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기도하는 집인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마르 11,7). 예수님의 분노는 거짓된 종교관과 독선과 배타심과
탐욕이 낳은 뒤틀린 경제적, 정치적 기반을 바로 세우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셈이지요.
예수님의 성전정화는 우리 각자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요 성령의 궁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드러나는 참된 성전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나아가 이 사회도 정의를 추구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과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성전이 되어야겠지요.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세상 또한 성전이 되어야 하는 까닭입니다.
누구든 그리고 어디든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드러낼 때 성전이 될
것입니다. 개인과 사회는 물론 교회도 하느님을 담아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무관심과 냉대, 권위적이고 배타적인 태도, 독선과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미움과 분노, 허영과 거짓의 쓰레기를 태워버리고,
차별의 벽을 허물어버려야겠지요. 그리하여 다 함께 서로의 고통과
슬픔과 기쁨을 나누며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성전이 되었으면
합니다.
나아가 차별과 소외를 조장하는 그 어떤 제도도 절대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경시하는 그 어떤 행동도 묵인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거짓 권력의 횡포와 부패,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
불의와 핍박에 과감히 맞서는 정의의 실천을 통하여 이 세상이 참으로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 되도록 힘써야겠지요.
우리 모두, 수난과 죽음을 통해 부활의 기쁨을 주시는 새 성전이신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리하여 모든 이에게 자유와 생명을 안겨 줄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구조를 만들어나가야겠습니다. 또한 돈과
기득권층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 안에서 주님을
찾음으로써 살아있는 성전이 되어야겠습니다. 추문의 중심에 서서
성전을 더럽히는 교회와, 탐욕의 늪에서 헤매는 사회가, 다시 주님의
성전으로 복구되길 참회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요한 2,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3월4일 사순 제3주일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2, 21)
허무는 고통을 통해 성전은 다시 살아납니다.
거짓을 내려놓는 것이 자아를 정화하는 겸손입니다.
겸손을 잃게 될 때 성전의 문턱은 높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바로 우리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성전은 인간의 모순을 비추어주는 거울이 됩니다.
물질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곳입니다.
새 술은 낡은 부대가 아니라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듣는 우리들이 되기위해서는
깨어있는 수행의 삶이 신앙의 본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자신이 바로 그리스도의
신비체임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참된 행복과 참 기쁨이 하느님께
있음을 삶으로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봉헌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오염된 성전이 아닌 거룩한 믿음의 성전이길 바라십니다.
사랑받으셔야 할 주님의 성전을 더 이상 아프게 하지 않는 기도의
참된 자녀들이 바로 이 시대의 진정한 성전입니다.
다시 개울물이 졸졸졸 흘러갑니다.
이 사순시기가 건강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결단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사순 제3주일
2018년 나해 3월4일 사순 제3주일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요한 2,13-25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자렛에는 성모님의 성당이 있습니다.
마당에는 각 나라에서 보내온 성모상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만났던 동굴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기도를
하고, 성모님의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성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성 요셉 성당이 있습니다. 규모가 성모님의 성당만큼
크지는 않지만 예수님을 목수로 가르치는 요셉 성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고민하는 요셉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낳으신 분은 성모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보호하고
가르치신 분은 요셉 성인입니다.
요셉 성월을 지내면서 요셉 성인의 도움을 청합니다. 요셉 성인은
법대로 사는 분이셨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듣고 요셉 성인은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남들이
모르게 파혼을 하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성모님께
커다란 배려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은 꿈에서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아이를 가진 성모님을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요셉 성인은 법대로 사는
것을 넘어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로 합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모두
자신의 뜻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성모님께서도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것을 추구하지 않고 우리들이 만든 우상을 섬기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돈, 권력, 명예라는 우상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들을 너무나 쉽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탐욕이라는 우상은 자연과 환경을 파괴하게 하고,
소중한 이웃들을 탐욕의 대상과 수단으로 삼게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섬겨야 하고,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의 이웃과 자연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갈릴래아 호수의 주님의 식탁 성당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징과 가르침은 먼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환전상을 내몰고, 성전을
허물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도 먼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자본주의에 물든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권위를 내세우는
성직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이야기하면서 지키지
않는 성직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욕망의 탑을 허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본의 늪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바쳐서 신앙을 지켜온 신앙의 선조들의 뜨거운 열정을 배워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앙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한 선조들의 희생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금 우리의 교회는 모래
위에 세워진 성전과 같아서 허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제2독서는 하나도 빠지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야할 삶의 태도와
양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약함이 무엇인지는 우리에게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
구원의 표징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할 수 있는
힘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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