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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빨간 립스틱
“아이고 아고고! 아고고…….”
병실 안이 온통 덕순할머니 신음 소리로 가득 했어요.
“거 좀 조용히 해요. 어디 혼자만 아픈가? 밤 새 한 잠도 못 자게 하더니만. 에이그!”
덕순할머니 옆 침대에 있는 을자할머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어요.
“아고고, 아고고. 나 죽네.”
덕순할매는 아랑곳없이 죽는 소리를 했어요.
“여편네하고는. 도저히 못 참겠어. 집에 갈 거야.”
입이 거친 을자할매가 주섬주섬 짐을 싸기 시작 했어요.
“왜 또 그러세요? 자자, 어르신 진정 하세요.”
요양보호사가 을자할매를 달래며 짐을 빼앗아 다시 서랍에 넣었어요. 갑자기 머리가 핑 돌며 속이 울렁거렸어요. 을자할매 말대로 덕순할매의 신음 소리에 잠을 못자긴 나도 마찬가지였지요.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벌떡 일어나 휭, 하고 나가버리고 싶지만 어디 그렇게 일어 날 수 있어야지요. 또 가면 어딜 가겠어요? 에휴.
“어르신, 약 드실 시간이에요.”
요양보호사가 물 컵을 들고 왔어요. 뚱뚱한 그녀가 건네주는 약은 한 움큼이나 되었어요.
“아이고, 쓰다. 약 먹는 것도 지겨워.”
텁텁하고 씁쓸한 뒷맛에 인상이 저절로 찡그려졌어요.
“어쩜. 어르신은 찡그리신 얼굴도 이렇게 고울까요?”
요양보호사가 말했어요.
“곱기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도 모르게 입이 벙글어졌어요. 곱다는 말을 싫어 할 여자가 어디 있을까요?
“날 휴게실에 좀 데려다 줘요.”
요양 보호사에게 말했어요.
“요즘 휴게실에 자주 가시네요?”
요양보호사가 휠체어를 가져오며 말했어요.
3층에 있는 휴게실은 창문이 넓어서 좋습니다. 창밖으로 푸른 나무들이 보이고, 꽃도 보이고 새도 보입니다. 새를 보면 새가 되고 싶어요. 새가 되어 훨훨 날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이렇게 닭장 같은 요양원에 갇히는 신세는 면할 테지요. 참, 새들도 늙으면 날개가 아플지도 모르겠네요.
“안녕하시우?”
휴게실 안으로 들어서는데 누군가 인사를 했어요. 고개를 들어보니 이복동 할아버지였어요. 할아버지 옆으로 몇몇 할머니들이 둘러 앉아 있었어요. 휠체어에 앉아 있는 할머니, 보행기를 의지한 할머니, 나처럼 한쪽 손발이 불편해 보이는 할머니…….
‘저 할미들은 다들 왜 저기 모여 있는 거지?’
심통이 났어요. 그래서 본 체도 안 하고 창가로 갔어요.
“이리로 오십시오.”
이복동 할아버지가 내게 손짓을 했어요. 할머니들이 모두 쳐다보았어요.
“일 없어요. 내가 거길 왜 가요?”
고개를 휙 돌려 버렸어요.
‘지조 없는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어머나!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어요. 지조라니요? 누가 누구한테 지조를 지켜야 한단 말인가요?
‘망령이 나도 단단히 난 게야.’
얼굴이 달아올랐어요.
이복동 할아버지는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했어요. 아직은 그럭저럭 보이지만 언제 완전히 안 보이게 될지 모른대요.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무척 놀랐어요. 얼핏 보기엔 멀쩡하게 보여서 저런 영감이 뭐 하러 이런 곳에 왔나 싶었지요.
덕순할매의 신음소리가 듣기 싫어서 피해 오던 휴게실이 자꾸만 가고 싶은 곳으로 바뀐 건 순전히 이복동 할아버지 덕분이었답니다. 어제는 할아버지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휴게실에 있던 사람들이 다들 병실로 돌아간 뒤였어요. 그 때까지 남아 있던 이복동 할아버지가 가려다말고 멈칫하며 물었어요.
“안 들어가십니까?”
“좀 더 있다가 가려구요.”
“그럼 같이 동무해줘야겠군요.”
이복동 할아버지가 빙긋이 웃으며 옆으로 와 앉았어요. 그러더니 뜬금없이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일찍 혼자되어 외동딸을 키웠는데 결혼을 하여 먼 외국에 나가 산다고 했어요.
“저런. 아버지를 이렇게 혼자 두고…….”
“오라고 하지만 말도 안 통하는 그곳에 가느니 차라리 이곳이 더 편하답니다.”
내가 안타까워하자 할아버지가 말했었지요. 그런데 오늘은 다른 할머니들 틈에 끼어 있네요. 쳇!
나는 곧 요양보호사를 불러 병실로 돌아갔어요.
다음 날이었어요.
“아이고, 아고고. 나 죽네. 나 죽어…….”
밤새 앓는 소리를 하던 덕순할매가 아침이 되자 소리까지 질러 댔어요. 머리가 지끈거렸어요.
“날 휴게실로 데려다 줘요.”
요양보호사가 눈치를 채고 휴게실로 데려다 주었어요.
“아이고, 어서 오세요.”
이복동 할아버지가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아 주었어요.
“어제는 그렇게 가셔서 무척 서운했답니다. 오늘은 오시려나 어쩌려나, 그래도 한 번은 오시겠지 싶어서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지요.”
콧날이 시큰해졌어요. 요 근래 나를 이렇게 반갑게 맞아 주는 사람이 또 있었나 떠올려 보았어요. 아들, 며느리, 손녀……. 글쎄요. 고개가 저어졌어요. 그렇다고 내색 할 수는 없었어요. 그냥 지나쳐서 한적한 곳으로 갔어요.
“심심할 때 드십시오.”
언제 따라 왔는지 주머니에서 사탕을 한 움큼 꺼내 주었어요. 할머니들이 입을 삐죽거리며 쳐다보았어요. 벙그레 웃음이 나왔어요.
“아이고, 뭐 이런 걸. 두었다가 드시지 그러세요?”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어요.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할아버지의 귀한 사탕을 넙죽 받을 수도 없었지요.
“아닙니다. 드십시오.”
할아버지가 기어이 내 손에 사탕을 쥐어 주었어요.
“그럼 어디 하나 먹어 볼까요?”
사탕을 받아 포장을 뜯으려는데 불편한 한쪽 손 때문에 쉽지 않았어요.
“이리 주세요.”
할아버지가 얼른 가져다 뜯어 주었어요. 나는 멍하니 할아버지를 쳐다보았어요. 갑자기 죽은 영감 생각이 났어요. 사탕을 입에 넣고 보니 할머니들이 모두 휴게실을 빠져 나가고 있었어요.
“오늘은 우리 박 할머니 이야기 좀 들어보고 싶군요.”
할아버지가 말했어요. 박 할머니란 날 두고 하는 말이지요. 박영란. 이게 내 이름이에요. 이름을 불려본지가 언젠지 모르겠군요.
“난 아무 얘깃거리도 없답니다.”
손을 저었어요.
“그러지 마시고 말씀 좀 해 보시지요.”
할아버지가 허허, 웃으며 쳐다보았어요. 그 눈길이 가슴 속에 따뜻한 파문을 일으켰어요.
나는 뭐 특별하다고 할 것도 없는 내 이야기를 시작했답니다.
…… 영감은 초등학교 교감으로 있다가 정년퇴직을 했지요. 영감이 퇴직을 하던 그때만 해도 별 걱정이 없었답니다. 우린 아직 건강했고 자식들도 다 커서 일가를 이루었으니까요.
남편 그늘에서 살림하고 아이들 키우면서 한평생을 살았지만 지루하거나 불만이 있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그게 여자의 일생이려니. 그렇게 살았지요. 남편 와이셔츠 하얗게 빨아 다려 입히고 자식들 도시락 챙겨 주면서 난 행복했답니다. 간혹 남편 따라 나간 자리에 남편이랑 같이 근무 하는 멋진 여선생들을 보면 주눅이 들긴 했지만 배움도 짧고 재주도 없는 걸요, 뭐.
젊었을 적, 옆집 댁네는 남편 술주정에 힘들어 하고, 앞집 댁네는 먼저 간 남편을 대신해 거친 세상으로 나가 돈을 벌어야했지요. 그래도 나 정도면 팔자 편하다 싶어 감사하며 살았답니다. 옆집 댁도, 앞집 댁도 모두 날 부러워했으니까요. 난 은근히 그들 앞에서 우쭐대기도 했답니다. 졸업한 남편의 제자들이 가져온 사과 따위를 나누어주면서 말이에요.
문제는 남편이 앓다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였어요. 정년퇴직을 하던 날, 영감이 내 손을 잡고 말합디다.
“그동안 수고 많았소. 이제 나랑 손잡고 산에나 다닙시다, 그려.”
그 말이 얼마나 고맙던지요. 우리는 영감 말대로 산에 다니기 시작 했답니다. 그저 아침 식탁에 올려놓았던 반찬 두어 가지 담아 도시락을 싸고 물이나 한 병씩 챙겨 넣으면 하루 종일 심심하지 않았어요. 영감은 도시락 넣은 배낭을 도맡아 메고 허리가 안 좋은 내 걸음걸이에 보조를 맞추어 주었지요.
말이 등산이지 허리가 아픈 나 때문에 둘레 길을 천천히 걷는 산책에 가까웠답니다. 가다가 힘들면 앉아서 쉬고, 배고프면 아무 때나 한적한 곳을 찾아 도시락을 먹었어요. 영감이 타 주는 봉지 커피는 얼마나 고숩던지요.
내려오는 길 끝에선 조촐한 저녁식사도 하고 왔답니다. 집에 가서 식사 준비할 내 수고까지 생각해준 살뜰한 영감의 배려였지요. 칼국수나 곤드레 밥, 순두부찌개……. 그런 것들이 비싸면 얼마나 비쌀까. 영감 앞으로 나오는 연금이 우리 두 사람 그 정도 사치는 부릴 수 있는 것도 고마운 일이구요.
“아이고, 보현이 할머니는 점점 젊어지는 것 같아.”
“영감 잘 만난 호강을 제대로 하는구먼.”
친구들이 모두 부러워하더군요. 아직 자식을 못 여읜 친구들도 있었고 좀 늦은 친구들은 학교도 졸업을 못 시켰거나 아니면 졸업을 하고도 직장을 못 잡은 친구들도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요. 별 탈 없이 자라준 형제는 각자 일가를 이루고 제 밥벌이를 하고 있었으니 감사하다마다요.
세월이 그렇게만 흘렀으면 좋으련만. 문제는 영감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부터랍니다. 평생 감기 한 번 안 걸리던 그 양반이 암이라니. 나는 듣고도 믿기지가 않았답니다.
“아범아, 지금 의사 선생님이 뭐라고 한 거냐?”
“뭐라구? 암이라구?”
“정말 암이라 했단 말이냐?”
함께 간 큰아들을 붙잡고 묻고 또 물었지요. 그 양반이 둔한 건지 몸이 그렇게 되도록 내색 한 번 없었지 뭐예요. 산행 길에 숨소리가 좀 거칠다 싶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내 죄가 커요. 너무 늦게 발견되어 손도 쓸 수 없었지요. 영감은 그렇게 허무하게 갔답니다. 진단 받은 지 3개월만에요. 그러니 그 죽음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어요? 자다가 더듬으면 손에 잡힐 것 같고 화장실에서, 안방에서, 건너 방에서 문을 열고 불쑥불쑥 나올 것만 같아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서성댔답니다.
“그래도 그게 훨씬 나아요. 병치레 오래 하지 않았잖아요.”
“그럼요. 쉽게 죽는 것도 복이에요.”
무심한 사람들. 그것도 위로라고 하는 건지. 자기네도 영감 그렇게 한 번 보내 보라지. 속에서 울화가 치밀더군요. 날마다 넋을 놓고 우는 내가 딱했던 걸까요?
“어머니, 저희가 들어오겠습니다. 어머니 혼자서는 안 되겠어요.”
큰 아들 내외가 말합디다. 고마웠지요. 역시 내 아들이다 싶었답니다. 혼자 살기엔 제법 넓은 집에 아들네 식구가 들어오니 가득 차는 게 영감 빈자리를 그나마 잊게 해 주더군요. 방긋방긋 웃는 손녀 재롱 보는 재미도 있구요.
“어머님, 제가 일을 하게 되었어요. 보현이 좀 부탁드릴게요.”
살림을 합친 지 일 년도 채 안 되었을 때, 며느리가 말하더군요. 그 때 손녀는 돌이 막 지났을 때였지요. 그래도 둘이 벌면 우리 아들 덜 힘들겠다 싶어 그러마고 했답니다.
그 손녀가 자라서 유치원에 들어가고, 초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번번한 외출 한 번 못해보고 집만 보았네요.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요.
“어머님, 집안일은 제가 다 할게요. 보현이만 봐 주시면…….”
그 말을 찰떡같이 믿은 제가 바보였답니다. 꼬질꼬질한 와이셔츠를 그대로 입고 나가는 아들을 어떻게 보고만 있겠어요? 내가 하지 않으면 죄 바깥음식을 사다먹는 꼴을 어떻게 보란 말입니까? 영감 그렇게 보내고 나니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더군요. 우리야 그저 따로 신경 쓰지 않아도 식성 자체가 요즘 말하는 웰빙이니 뭐 그런 거지만 젊은 애들이야 어디 그렇던가요? 그저 제 입에 맞는 대로, 제 몸 편한 대로 사다 먹는 걸 속 터져서 보고만 있을 수 있어야지요. 손녀 들쳐 업고, 유치원 보내놓고, 학교 보내놓고 손이 불어 터지도록 살림을 했답니다. 김치도 담그고, 장도 담그고, 제철에 나는 나물들도 삶아 조물조물 무치고…….
“역시 우리 엄마 손맛이 최고야!”
아들이 맛있게 먹는 걸 보면 피로가 싹 가시던 걸요.
“저도 빨리 어머님한테 배워 둬야 할 텐데…….”
며느리도 살살웃으며 말하더군요. 며느리는 늦기가 일쑤였지만 일하는 게 다 그렇지 싶어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아침엔 조금이라도 더 자라고 아침밥까지 내가 차려 바쳤지요. 제 골 빠지는 줄 모르고 말이에요.
영감 있을 때부터 말썽이던 허리는 점점 나빠져 걷는 것도 힘들고 앉기도 힘들었지만 나이 들면 다 그렇거니, 했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그런 걸 어디 쉽게 말할 수 있습디까? 그냥 미련스럽게 꾹꾹 참았지요. 그러나 그 때 참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랬다면 허리가 이렇게 굽지는 않았을 거예요.
어느 날이었답니다. 아들 며느리 출근하고 손녀도 학교에 가고 난 뒤였어요. 갑자기 말이 어눌해지면서 잘 걷지도 못하겠고 머리가 어지럽더군요. 종종 있던 일이니 그냥 한 잠 자고나면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눈을 뜨니 병원이더군요.
“어머니, 이제 정신이 좀 드세요? 꺽꺽…….”
병상 맡에 있던 아들들이 눈물을 흘리더군요.
“어머니, 죄송해요. 흑흑.”
며느리들도요. 그 후유증으로 나는 반신을 못 쓰게 되었답니다. 그래도 처음엔 아들, 며느리 수시로 드나들며 받드니 죽어라 하고 일만 하던 때 보다는 오히려 낫다 싶더군요. 큰 며느리는 하던 일도 그만두고 내 병수발을 맡았지요. 반찬도 먹기 좋게 따로 해 주고, 목욕도 시켜 주고, 때마다 약도 챙겨 주고……. 그동안의 고생을 잊을 만큼 지극했답니다.
그런데 한쪽 몸을 못 쓴다는 것은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더군요.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어요.
“어머니, 약 드실 시간이에요.”
“거기 두어라. 내 이따가 먹으마.”
“지금 드세요. 또 잊어버리면 어쩌시려고…….”
“놔두라면 놔두지 웬 말이 그렇게 많으냐?”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곤 했답니다. 나도 모르게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더군요. 구정물을 휘휘저으면 그 속에 가라앉았던 찌꺼기들이 위로 둥둥 떠오르듯이 나도 미처 몰랐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떠올랐지요. 배우지 못한 설움, 그게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영감도 나이 들어서야 마누라 고마운 줄 알았지 젊었을 때에야 어디 그랬게요? 혼자 신문보고 책 읽으며 난 으레 그런 건 모르는 사람 취급했지 뭐예요.
“무슨 책이에요?”
“말하면 알기나 해?”
그 말이 얼마나 서럽던지……. 부엌으로 나가 혼자 눈물 흘린 날도 많았답니다.
“어머나, 얘 이마 왜 이런 거예요?”
“잘 좀 보시지…….”
“집에서 종일 뭐하셨어요? 이것도 안 해 놓고.”
철없는 아들 며느리들이 무심코 던진 말들…….
“딸년들을 가르쳐서 뭣에 쓰려고.”
“뒀다가 니 오래비 좀 주거라.”
아,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의 딸 타박까지. 켜켜이 쌓여 있더군요. 전에는 잘 참던 것들도 참을 수가 없었어요. 똥통에 똥이 가득 찼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더 이상 들어갈 자리가 없는 상황 말이에요.
“아, 짜증 나. 할머니 미워!”
제 어미보다 할미가 좋다던 손녀도 슬슬 피하더군요.
“도저히 더 이상은 못하겠어요. 왜 나만 해야 해요? 나만 며느리예요? 동서는 며느리 아니에요? 당신도 좀 보세요. 이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며느리도 큰소리를 내기 시작했지요.
“당신이 조금만 더 참아.”
아들은 제 마누라 앞에 쩔쩔매고요.
“아, 이유도 없이 버럭버럭 소리 지르고 화를 내기도 하고…….”
“그러니 어쩌겠어? 당신 수고하는 거 다 알아.”
아들도 다 소용없다 싶었답니다. 이유 없는 게 어디 있겠어요? 그걸 알려고도 하지 않고…….
내가 처음 쓰러졌을 때, 이틀이 멀다하고 오던 작은 아들 내외는 언젠가부터 더 이상 오지 않았답니다. 그러니까 그 애들이 영감 죽고 내 이름으로 되어 있던 집을 그래도 우리 제사상 차려줄 큰 아들에게 넘겨주었는데 그 일로 서운했던 모양입디다.
어느 날이었답니다.
“그러니까 요양원으로 모시자구요. 요즘은 다들 그렇게 한다구요. 솔직히 이젠 돌아가실 일 밖에 더 남았어요?”
며느리가 아들에게 하는 말을 듣고 말았어요. 머리가 핑 도는 것이 앞이 하얗게 변하더군요. 이제 죽을 일만 남은 사람……. 아, 난 죽을 일만 남은 사람이구나! 생각해보니 끔찍했어요.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닌 사람. 사람도 아닌 사람. 그날 이후 며칠을 뜬눈으로 새웠지요.
어느 날, 아들이 어렵게 말문을 열더군요.
“저어, 어머니…….”
말을 더 잇지 못하는 것 같아 내가 먼저 말했답니다.
“애비야, 날 요양원으로 데려다 다오. 그곳이 그렇게 좋다더구나. 오히려 집보다 낫댜.”
그 때 아들의 표정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아무튼 그래서 이곳으로 온 거랍니다. 닭장 같은 이곳엘 말이지요.
이야기를 마치기까지 나는 몇 번이나 눈물을 닦아야 했어요.
“그러셨군요.”
그 때마다 할아버지가 휴지를 건네주었어요.
다음 날도 어김없이 덕순할매의 앓는 소리에 잠이 깼어요.
“휴게실에 모셔다 드릴까요?”
아침을 먹고 나자 요양보호사가 먼저 말했어요. 휴게실에 들어서는데 뭔가 허전했어요.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았어요.
‘오늘은 왜 안 오셨지?’
나도 모르게 이복동 할아버지를 찾고 있었어요.
‘노망이 나도 단단히 난 게야.’
기가 막혔어요. 머리를 흔들었어요. 그 때였어요.
“오셨군요. 서두르느라 했는데…….”
이복동 할아버지가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섰어요.
“저어, 이거……. 영란 씨 드리려고 샀답니다.”
할아버지가 뭔가를 내밀었어요.
“이게 뭐죠?”
어리둥절해 하는 내게 그 영감이 말하더군요.
“립스틱이에요. 빨간 립스틱. 영란씨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영감이 싱긋 웃었어요. 여기저기서 할머니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보았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입이 벙글어지는 걸 어떡하나요?
<강원아동문학 44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