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불전은 순조 11년 1811년 일어난 화재로 없어진 후 재건한 것입니다
천불전 안에는 목조 삼전불 뒤로 옥돌로 만든 불상 천개가 자리하는데,
당시 천불전을 재건한 완호스님께서 화승이던 스님에게 경주 불석산에 가서 옥돌로 천불을
만들어 오라고 합니다. 석공 열 사람이 6년에 걸여 마침내 천불을 다 만들어
배 세척에 나누어 싣고 해남으로 출발했는데 그중 한 척이 풍랑에 표류하다가 일본 나가사키현으로
흘러갑니다. 그때 일본 사람들은 절을 지어 이 옥불을 모시려 했는데, 그날 꿈에 불상들이 나타나
자기들은 원래대로 해남 대둔사로 가는 길이니 여기에 머물수 없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1818년에 돌아와서 안치되었으며, 이때 일본에 갔다온 불상 768구에는 어깨나 좌대에
날일자를 넣어 표시했다고 하네요.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요즘처럼 냉랭할 때 더욱 와 닿는 이야기 같습니다.
아울러 천불전 분합문짝 창살은 내소사 창살과 함께 우리나라의 가장 아름다운 꽃창살로 꼽힌답니다.

천불전 분합문 꽃창살 정말 예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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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전 내부는 반야용선을 상징하는 용의 꼬리도 그대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대흥사의 가장 남쪽 구역인 표충사 영역으로 향합니다.
표충사는 정조가 임란 때 나라를 구한 서산대사의 공을 기려 짓게 한 곳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사찰 안에 유교 형식의 사당이 자리한 곳입니다.
대흥사 이야기에서 서산대사 이야기가 빠질 수 없는데요.
임진왜란 후 1604년 서산대사가 묘향산에서 향년 85세, 법랍 67년 입적을 앞두고 자신이 의발을
해남 두륜산에 두라고 부탁하고 입적을 합니다. 의발을 전한다는 것은 선종에서
자신의 법맥을 그곳 혹은 그 사람에게 전한다는 뜻이랍니다.
실제 서산대사의 의발을 제자들이 이곳에 전한 후에 대흥사는 사세가 크게 일어납니다.
서산대사가 대흥사에 의발을 전하는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 하셨답니다.
"그곳은 기화이초가 항상 아름답고, 옷과 먹을 것이 끊이지를 않는다.
내가 보건데 무엇이든 잘 될 곳이다. 오래토록 (불)법이 이어지고 펼쳐질만한 곳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영정 뒤에 붓으로 글을 쓰고 그대로 결가부좌한채 입멸하셨다고 하네요.
그때 남긴 글이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였답니다.
서산대사라고 하면 3공화국 당시 호국영웅들을 크게 치켜세울 때
임란의 승병장으로 알려서 그런 쪽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대단한 선승이셨다고 합니다.
특히 신라 원효나 의상의 사상을 이어 선종과 교종의 통합을 위해 애를 쓰셨다고 하네요.
사실 임란 전까지 조선에서 대단히 억압받던 불교가 다시금 중흥을 맞게 된 것이 바로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국에서 일어난 승병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임진왜란 이후로 재건된 사찰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표충사의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서산대사의 영정과 제자인 유정 스님과 처영 스님의 영정을 모시고 있습니다.

아무 볼 것 없을 것 같은 보현당 앞까지 슥, 걸어간 이유는
대흥사 전각들의 처마선을 여러분들과 함께 감상하고 싶어서였답니다.
옛것이란 참 아름답니다.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저렇게 곱게 살아가고 싶은데요...

파노라마로 쭉 남겨봅니다.




다시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잠시 들어가본 유선관의 정원입니다.
서편재의 한 장면을 여기서 촬영했다고 하지요?

길 가의 동백숲...



매표소까지 흩뿌리는 비를 맞으며 걷습니다.
우중걷기는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지요. 그 매력에 흠뻑 빠지신 분들입니다.



자, 강진군민의 사랑을 받는다는 한정식 집 중에서 선호도 1위인 다강을 찾았습니다.

기본 상차림입니다. 제 상에 있던 지느러미살은 제가 꿀꺽 해버렸습니다. ^^;


산낙지를 비롯해 메뉴들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자리가 모자라서 계속 접시를 갈아가면서... ^^;;


다강의 명품요리. 대하버터구이입니다.

삼합이 빠지면 서운하지요. 여기 삼합 너무 맛나서 추가 주문해서 먹었어요. ^^

떡갈비까지 아구아구 먹어줍니다.

표고버섯 탕수육.

요건 다 아시지요?

이날의 숙소는 다산초당까지 걸어서 이동이 가능한 다산수련원이었습니다.
바로 이날까지 리모델링을 마치고 재개장하기 하루 전날 우리가 첫 개시를 하는 거랍니다. ^^
깨끗한 이불과 트윈침대가 너무 맘에 듭니다.

맛나는 다산수련원 아침식사.


다산수련원에서 바로 다산초당을 향해 걸어갑니다.

아, 이쁜길.




뿌리의 길이란 별칭이 있는 구간입니다만,
사실 이 들어난 뿌리는 너무 이용객이 많아서 나무가 아파한다는 증거랍니다. T.T
오히려 복원을 해주어야 할 겁니다.

작은 석상이 눈길을 끌어던 어느 묘지 앞.
푸른돌님의 설명에 따르면 수도권에서 멀어질수록 이런 석상들은 각 지역의 샤머니즘과 결합하여
다양한 모습을 띤다고 합니다.



다산초당 바로 옆의 동암에 붙은 다산과 추사의 글씨체 비교입니다.
추사 김정희는 다산 정약용 선생보다 24살이나 어려서 제자라고도 하고, 우정을 나눈 사이라고도 불립니다.


다산 선생이 자신의 고향인 두물머리를 그리워하며 바라보았을 천일각의 구강포 풍광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강진 유배 18년 중에 후반부 10년을 이곳 다산초당에서 보내게 됩니다.
강진에서 혜장선사를 만나 다도를 배우고, 불교를 공부하게 되지요. 또 이곳 유배지에서 주역을 심도 있게 공부했다고도 합니다.
목민심서를 비롯한 500여권의 저술서는 주로 후반 5년 간 쓰여졌다고 합니다.
즉, 유배생활 13년 동안 공부하며 쌓은 내공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백련사에 계시던 혜장선사와 다산 정약용의 아름다운 교분이 싹튼 바로 그 길을 따라
백련사까지 걸어갑니다.




첫댓글 천불전 분합문짝 창살 정말 고왔습니다.^^
덤으로 매표소까지 보슬비 빗길을 걸은 건 뜻밖의 멋진 보너스 길이기도 하구요....
다강식당의 깔끔하고 맛나던 한정식이 그리운 시간입니다.^^
천일각에 앉아 구강포를 바라보는 느낌이 사뭇 진지하게 마음 한 켠에 남아 있습니다.....
발견이님께서 애써 설명해 주셨던 것은
벌써 다 까먹었어요 ㅋ
다산초당에 오르는 숲길과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 다시
숲길이 이어지고
다시금 빼곡한 동백숲 사이로
걸으며 그곳에 머물 수 있었던 그 순간
그저 감사한 마음이였답니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을 걸으며 감격스러 웠지요.
혜장선사가 돌아가셨을때
다산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도 생각해 봤습니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동백 숲길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발견이님 넘 갑사해요~..
이렇게 멋지게 남겨주신 사진과 글을 보니
가슴이 뜨거워져요~~..
멋진 시간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