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妃)와 빈(嬪)의 차이❤
국왕의 정실과 부실을 보통 비빈(妃嬪)이라고 한다. 양반에 비유하면 비는 정식 아내, 빈은 첩에 해당된다. 일반적으로 빈(嬪)이 국왕의 정실 아내로 책봉되면 비(妃)가 된다.
고려 시대에 일부다처제에 따라 왕이 여러 비를 거느리던 경우와 달리 조선에서는 적첩(嫡妾)과 적서(嫡庶)의 구별을 분명히 가렸다. 그리하여 태종때에 중국 제도를 모방하여 비빈(妃嬪)의 구별을 명확히 하고 왕의 소실을 여관(女官)의 상위 품계로 편제했다.
비는 품계가 없지만 그 외의 후궁(後宮)들은 품계가 있다. '후궁' 이란 말은 원래 중국 천자가 머무는 궁중 뒤 깊숙한 부분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여자인 까닭에 궁궐 여자들도 후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임금의 여자' 를 의미한다.
후궁 중 가장 높은 지위는 빈으로 품계는 정1품이다. 빈으로는 장희빈이 유명하다.
빈 밑으로 귀인(貴人) 종1품, 소의(昭儀) 정2품, 숙의(淑儀) 종2품, 소용(昭容) 정3품, 숙용(淑容) 종3품, 소원(昭媛) 정4품, 숙원(淑媛) 종4품, 상궁(尙宮)은 정5품이다.
그런데 국왕은 왜 왕비 외에도 여러 아내를 두었을까?
우리나라, 특히 조선 시대 국왕은 많은 수의 후궁을 두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대를 잇고자 하는데 있다. 나라의 통치자가 될 자격은 오직 임금 아들에게만 있는 데다 당시에는 아이가 건강하게 성장하지 못하고 병에 걸려 죽는 일이 흔했으므로 되도록 많은 여자를 통해 아들을 많이 낳고자 한 것이다.
조선 시대의 후궁은 규정상 숙원에서 빈까지 8명에 이르나 태종, 세종, 성종, 선조, 영조 등은 더 많은 후궁을 두었다.
한편 조선 시대에 궁녀는 10년에 한번 정기적으로 선출되었다. 궁녀는 원래 비에서 뽑는 것이었지만 가끔 양가의 딸은 선입(選入)하는 예가 있어 이를 면하려 나이가 열살 이상인 딸을 가진 집들은 다투어 혼가(婚嫁) 시키느라고 혼란을 빚곤 했다.
#금혼령(逆)
궁녀를 선출할 때는 처녀성 감별이라는 희귀한 방법을 꼭 치렀다. 즉 의녀(醫女)가 앵무새의 생혈(生血)을 그 팔목에 묻혀 보고 그대로 묻으면 처녀, 안 묻으면 처녀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비과학적인 속신(俗信)에 불과하지만 구한말까지 궁중에서는 이를 시행했다. 다소 허황된 일이라 하겠다.^^* |
첫댓글 지금과는 너무 동떨어진 비 과학적인 일이지요
하하 당근이지요
맛저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