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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518단체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518의 실상공개를 못하도록 재갈을 물리려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이런 탓에 많은 국민이 518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극성스러운 소동에 신물이 나 관심도 없어졌습니다.
오랜 세월 광주 518단체와 투쟁해 온, 지만원 박사가 국민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있도록 정리한 글을 올렸기에 옮겨 왔습니다.
우리나라에 수 많은 역사학자가 있음에도, 518에 대해 지만원 박사 이상으로 학술적인 연구를 한 역사학자는 없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은 동창 중에 그런 사람을 알고 있고 쓴 글이 있으면 비교가 되도록 올려 주세요.
무등산의 진달래 475송이
머리말
5.18 주역이 북한군이라는 증거 21개
5.18을 북한 특수군이 주도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는 21개나 된다. 그 중 몇 개만 추려본다. 1997년 4월 17일자 대법원의 [전두환 내란사건] 판결서에는 5월 21일부터 광주의 무장시위대가 간첩수 170명을 포함해 2,700명이 수용돼 있는 광주교도소를 5차례 공격하여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기재돼 있다. 그런데 2017년 4월 19일, 당시 광주시장 윤장현과 [5.18기념재단] 상임이사 김양래는 광주시민들은 절대로 광주교도소를 공격한바 없다고 언론을 통해 공식 입장을 밝혔다. 그렇다면 가장 강력한 군대 제3공수여단이 호를 파고 방어하고 있던 교도소를 감히 5회에 걸쳐 집요하게 공격한 존재는 무엇이라는 말인가? 북한군 말고는 다른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5.18 역사를 총괄 관리하고 있는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타임라인’에는 “5월 22일 15:08 서울서 온 대학생 500여명 광주도착 환영식 거행”이라는 일지가 적혀 있고, 5.18역사 조형물인 대형 석판에도 같은 기록이 새겨져 있다. 저자를 형사사건으로 고소한 김양래는 2018년 10월 12일, 서울 형사법정 525호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이 500여명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그는 ‘광주는 서울학생 500여 명의 실체에 대해 규명한 바 없다’고 답했다. 그러면 광주의 공식 기록 공간인 두 곳에 서울에서 왔다고 기록돼 있는 [대학생 500여명]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다시 법정에서 저자 측은 그에게 광주현장 주역들의 모습이 담겨있는 사진 12개를 보여주며, 단련된 몸매에 총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총기를 북한식으로 거꾸로 메고, 무전기들을 들고, 유니폼을 입고, 지휘체계가 갖추어지고 조직화돼 있는 현장 주역들이 광주시민이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그 주역들은 광주시민이 아니라고 답했다. 전두환이 투입시킨 편의대(게릴라)가 아닌가에 대해 초점을 맞춰 앞으로 연구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결론적으로 지휘체계가 완전히 갖추어진 현장 사진 속 주역들이 광주시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2003년 전남대학교 출판부가 발행한 [5.18항쟁 증언자료집-시민군들의 구술]에는 항쟁 총사령관이라 불리는 김종배를 위시해 김창길, 정상용 허규정 박남선 등 항쟁 지휘부 핵심들의 증언들이 담겨있다.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은 광주의 운동권 출신도 아니었고, 1980년 5월 24일까지 조직화된 적이 없으며,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상태에서 5월 25일 한 두 사람씩 도청에 들어갔다가 만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5월 25일 밤중에야 비로소 [시민학생수습대책위원회](자칭 항쟁본부)를 구성했지만 갑론을박 말싸움만 하다가 진압됐다고 증언했다. 5월 18일부터 24일까지 시위대를 구성했거나 지휘한 사람이 광주에는 없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증언한 것이다. 광주를 중심으로 전남지역 26개 시-군 중 17개 시군에 걸쳐 20만 이상이 동원된 시위가 5.18이었는데 그것을 조직한 사람도 광주에 없고 지휘한 사람도 광주에 없다는 것이다.
5.18은 현대사에서 규모와 후유증이 가장 컸던 소요의 역사다. 그런데 5.18 유공자 5,800여 명 중 유공의 최고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5.18유공자들이 나서서 5.18 시위를 조직한 사람도 지휘한 사람도 광주에 없다고 증언한 것이다. 2018년 10월 12일, 법정에 출두한 김양래는 ‘시위를 지휘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광주시민 전체가 지휘자였다”고 답했다. 지휘자가 없다는 말이었다. 대한민국 5천년 역사 상 지휘자 없는 봉기, 지휘자 없는 역모는 단 1건도 없었다. 현대 역사 상 가장 큰 규모의 시위를 지휘한 사람이 대한민국에 없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은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것을 믿으라는 정도의 억지일 것이다. 이치가 이러하기에 5.18 시위에는 반드시 지휘자가 있어야만 한다. 법정에서 김양래에게 보여준 12장의 현장 사진들에는 고도의 군사훈련을 받은 어깨들이 지휘체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지휘자 없이 지휘체계가 가동하는 법은 없다. 지휘체계가 형성돼 있는 모습들에 대해 법정에 출두한 김양래는 전두환이 투입시킨 편의대라는 억지 답변을 했다. 여기까지만 정리해 보아도 5.18에는 확실하게 지휘자가 있었고, 그 지휘자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1991년 북한에서 최초로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가 개봉되었다. 남한에서는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가 그로부터 16년 후인 2007년에 개봉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남한에서 개봉된 5.18영화가 10여개나 되었다. 그런데 그 모든 영화의 주인공은 [지휘자]가 아니었다. 북한이 제작한 영화의 주인공은 시위기간 내내 도망가 있다가 광주사람들로부터 ‘비겁자’로 낙인 찍혀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교도소에서 금식하다 사망한 전남대학 총학생회장 박관현이었다. [화려한 휴가]의 주인공은 공수부대 대령 출신이라는 가공의 인물이었다. 영화 [택시 운전사]의 주인공은 운전사 김사복이었다. 5.18 핵심유공자들로 행세해온 항쟁지도부 인물들의 증언을 보나, [5.18기념재단]의 공식입장을 보나, 남북한에서 상영된 모든 영화들이 내세운 주인공들의 캐릭터를 보나, 김양래의 증언을 보나, 5.18을 지휘한 사람이 광주에는 없는 것이다. 이 중요한 사실에 대해 사람들은 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지 답답할 때가 많다.
재미 역사학자 김대령 박사는 순전히 5월 단체가 유네스코에 제출한 광주자료 86만 쪽만 가지고 4부작 [역사로서의 5.18]을 저술했다. 광주폭동이 북한이 통제하는 외지인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이 연구의 결론이다. 저자는 18만 쪽의 수사기록을 위주로 하여 연구했고, 김대령 박사는 광주인들이 생산하고 보유한 86만 쪽의 자료들을 위주로 하여 연구했지만 두 사람의 연구결론이 같은 것이다. 이에 더해 박사 학위자들과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19명의 [5.18역사학회]가 저자의 연구와 김대령 박사의 연구를 적극 수용하고 지지한다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다.
5.18 행사, 남한은 광주에서만 하루, 북한에서는 전지역에서 여러 날 거행
통일부가 매주 발간하는 [주간북한동향보고서]에는 해마다 5월이 되면 북한은 북한 전역의 도-시-군-도시 단위에서 5.18기념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한다는 사실이 반복 기재돼있다. 남한의 5.18행사는 광주에서만 하루 열리지만, 북한의 5.18기념행사는 북한 전역에서 여러 날 동안 거행된다. 북한이 무엇 때문에 여러 날에 걸쳐 북한 전 지역에서 남한과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성대하게 5.18을 거행하겠는가? 통일부 자료에 의하면 북한에서 최고인 것들에는 영예의 상징으로 5.18글자를 상으로 수여한다. “5.18청년호”, “5.18 무사고 정시견인 초과운동”, “5.18공장”, “5.18단조공장” “5.18영화연구소” 등이 이에 대한 사례다.
김일성, 황석영과 윤이상 데려다 5.18영화 제작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 가면 김일성이 1989년부터 3년에 걸쳐 제작한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관람할 수 있다. 황석영으로 하여금 영화 시나리오를 쓰게 했고, 윤이상으로 하여금 배경음악을 작곡하게 했다. 그 주제곡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그 대가로 김일성은 황석영에게는 당시 화폐로 25만 달러를 주었고, 윤이상에게는 15층짜리 [윤이상 음악당]과 호화주택을 주었다. 이상의 몇 가지만 보아도 5.18은 북한이 주도했다는 점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북한 특수군 숫자 600명, 남북한 문서 모두에 기록
5.18폭동을 광주 현장에서 주도한 작전 활동은 기록으로 보나 현장 사진들로 보나 가히 세계 최정상급이라는 것이 일부 방송국 진행자들을 포함해 많은 국민들의 판단이다. 그러면 그 특수작전 능력을 발휘한 어깨들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600명이었다. 강조하건데 이600명의 숫자는 저자가 판단한 숫자가 아니라 남북한 공식 문서에 명백하게 기재돼 있는 숫자다. 600명이 각별하게 기재된 북한 문헌이 2개 있다. 하나는 1982년 ‘조국통일사’가 펴낸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이고, 그 제595쪽에는 “600여 명의 광주학생시민들은 도청 지하실에서 최후의 항쟁을 선언했다.”는 기재가 있다. 또 다른 하나는 1985년에 ‘조선노동당출판사’가 펴낸 [광주의 분노]다. 그 제35쪽에는 “600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은 괴뢰군 제199지원단 제1훈련소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숱한 무기를 탈취하였고, 지원동 석산의 독립가옥에 보관되어 있는 많은 폭약과 뢰관들을 빼앗아 내었다.”라는 기재가 있다.
위 북한 책들이 나오는 동안 한국 사회에는 언론들이 제각기 가공해낸 픽션 자료들만 넘쳐나 있었고, 팩트로 내세울 수 있는 자료가 없었다. 팩트가 담겨있는 남한 자료는 5.18 수사자료 및 재판자료들이다. 그런데 이 중요한 자료들이 2004년 말까지 검찰 지하실 문서 창고에 비밀로 분류되어 보관돼 있었다. 이 자료들은 2004년 대법원이 ‘국민이 5.18역사를 연구할 수 있도록 비밀을 해제하라’는 판결이 있고서야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한 사람이 한국에는 저자 말고는 없었다. 비밀 해제된 자료들 중에는 1985년 안기부가 작성한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보고서가 있고, 1995년 군과 민간 검찰이 공동으로 작성한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보고서가 있다. 이 두 개 자료에도 600명이라는 어깨 집단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들이 수행했던 작전내용들이 기록돼 있다. 이처럼 600명이라는 숫자는 저자가 판단해낸 숫자가 아니라 북한당국이 발행한 2개의 문헌과 남한당국이 보유한 2개의 보고서를 합해 총 4개의 문헌에 다 같이 기록돼 있는 숫자다.
북한 문헌들의 기재와 남한 자료들의 기재 사이에는 무슨 점이 같고 무슨 점이 다른가? 중요한 팩트와 숫자들이 일치하고 구체적 상황 묘사가 다르다. 북한 문헌들에는 수많은 곳에서 동시다발로 발생한 작전상황이 남한자료들에 비해 훨씬 더 자세하게 묘사돼 있는데다 남한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시위전략과 시위전술 그리고 실패한 이유에 대한 교훈까지 도출돼 있다. 북한 책들을 읽으면 5.18 현장 현장에 전사(War History)를 기록하는 북한인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5.18 작전이 북한의 전략과 전술에 따라 수행됐다는 것을 저절로 느끼게 될 것이다.
북한특수군 600명의 폭동 내용
당시 광주에서는 운동권들이 다 잡혀 갔거나 숨었고, 지각 있는 대학생들은 거의 다 숨어 있었다. 오로지 20세 전후의 구두닦이 식당보이 껌팔이 철공 목공 등 이른바 양아치 계급으로 대변되는 개념 없는 사회적 불만 계급들이 시위에 앞장섰다. 아래의 내용들은 수사기록과 안기부 보고서에 있는 내용이다. 아래의 작전 내용들을 이른바 광주의 양아치 계급이 수행했다고 판단할 국민은 아마 없을 것이다.
“1980년 5월 21일 08:00시, 300명의 날랜 어깨들이 극비에 속하는 현역 제20사단 지휘부 차량부대의 이동계획을 서전에 입수하여 그 전야에 장애물을 설치해놓고 미리 매복해 있다가 정확히 08시에 습격했다. 사용한 무기는 주로 몽둥이와 화염병이었다. 사단장용 지프차를 포함해 14대의 지프차를 빼앗았다. 이들 300명은 도보거리인 인근 아시아자동차공장으로 갔다. 이 공장은 군용 트럭과 최신형 장갑차를 제조하는 군납 업체였고, 높은 벽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망루들에 의해 삼엄하게 경비되고 있었다. 09시가 되자 또 다른 어깨부대 300명이 대형버스 5대를 타고 아시아자동차공장으로 왔다. 이들 600명의 어깨부대는 아시아자동차 공장의 삼엄한 경비를 무력화시킨 후 매뉴얼 없이는 운전할 수 없는 최신형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4대를 탈취해 전남 17개 시군에 비밀로 위장돼 있었던 44개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만에 털어 5,403정의 총기를 탈취해 시민들에 나누어주고 총기 훈련을 시켰으며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정교한 방법으로 시민들을 살해 했다. 계엄군에게 덤터기를 씌우기 위한 모략작전을 수행한 것이다. 총상사망자 117명 중 75%에 해당하는 88명이 카빈총 등 무기고 총에 의해 사실됐고, 사망자의 80% 이상이 계엄군이 없는 곳들에서 사망했다. 전남도청 지하실에 2,100발의 TNT폭탄을 조립해놓았다.”
무등산의 진달래는 광주에서 떼죽음 당한 북한군
여기까지만 보아도 5.18은 북한이 주도한 것으로 인식될 것이다. 그러면 무등산의 진달래는 무엇이고 475송이는 무엇인가? 북한 특수군 600명은 김일성의 지령을 받아 5월 21일 밤중에 무리하게도 광주교도소를 5회씩이나 공격했다. 6.25때의 고지전을 방불케 하는 인해전술이었을 것이다. 야간 전투였기 때문에 공격도 방어도 훈련된 군병들의 직감 에 의해 이루어 졌다. 5회에 이르는 파상공격 과정에서 공격자 600명 중 대부분이 사살되었을 것이라는 결론은 군사이론이기 이전에 상식에 속한다. 600명중 살아남은 특수군병은 전남도청에서 북한지휘부를 호위했을 100명 내외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저자 측에 의해 발굴된 광수(광주에 왔던 북인인) 총 661명 중 군인광수는 불과 90명뿐이었다.
광주에 온 북한집단에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이 개입했다는 증거를 남기지 않는 것이었다. [북한 개입]에 대한 증거를 잡히면 북한은 즉시 유엔에서 전범재판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광주에서 죽은 북한군 시체는 [북한 개입]이라는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먼동이 트기 전에 어디론가 감쪽같이 치웠어야 했다. 그렇다면 600명의 전투요원들 중 몇 명이 공수여단에 의해 사살됐을까? 그 수는 475명, 북한이 문헌, 영화, 기자회견을 통해 반복한 글씨가 [무리죽음]이고, 475명이기 때문이다.
[무등산의 진달래], 북한 당국이 매일같이 등교 시에 확성기를 통해 들려주던 5.18노래의 제목이다. 탈북자 대부분이 이 노래를 익히 알고 있다. 가사에는 “동강난 조국 땅을 하나로 다시 잇자/억세게 싸우다가 무리죽음 당한 그들/사랑하는 부모형제 죽어서도 못 잊어/죽은 넋이 꽃이 되어 무등산에 피어나네”라는 표현이 있다. 북한이 무엇 때문에 이런 노래를 만들었으며 날마다 등교하는 학생들에 들려주었겠는가? 북한은 동강 난 조국을 하나로 통일시키기 위해 공들여 훈련시킨 600명의 맥가이버들을 광주로 보냈다가 그 중 475명을 잃었다며, “죽어서도 못 잊는다”고 노래한다. 북한이 선전해온 [찢어진 깃폭]에도 같은 취지의 분노와 증오심이 표출돼 있다. “총알에 누더기가 되고동포의 피로 얼룩진 민중의 응어리진 원한이 서린 저 깃폭을 보라. 뉘라서 이 응어리진 분노를 풀어 줄 것인가”
진달래 475송이의 증거4개
첫째,1982년 조국통일사가 펴낸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제591쪽14-16줄에 기재돼 있다. “광주시의 도청 지하실 한 곳에만도 얼굴을 알 수 없도록 화염방사기에 그슬리고 찢긴475구의시체가 쌓여져 있는 사실만 놓고 보아도 놈들의 살육만행이 얼마나 참혹하였는가를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는 것이다.”
둘째, 1985년 북한의 노동당출판사가 발행한 [광주의 분노] 제86쪽에도 475명 기재돼 있다. “<민주투쟁위원회>는 신임괴뢰국무총리가 광주에 온다는 소식을 봉기군에게 알려주었다. <민주투쟁위원회>는 <공정대>놈들이 <도청> 지하실에 감추어 놓았던 475구의 봉기군 시체를 꺼내다 <도청> 분수대 앞에 안치하여 놓았다. 시체들의 대부분은 <공정대>의 화염방사기에 맞아 까맣게 타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셋째, [김일성훈장을 수여받은 조선기록영화촬영소 편집]으로 자막 돼 있는 북한이 제작한 선전 선동 기록물 [군사파쑈도당을 반대하는 광주인민항쟁] 42분 분량의 분노에 찬 선동 영화가 있다. 5.18 직후부터 전라도 사람들이 몰래 모여서 보았다는 [광주 비디오]인 것이다. 아래는 그 일부를 녹취한 것이다.
동족상쟁을 일삼는 남조선 군사파쑈놈들, , 국민학생은 물론 세 살난 어린이 노인들까지 가리지 않고 살육 . . 임신부 태아를 꺼내 남판치는 치떨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 . 순진한 여학생들의 젖가슴을 도려내고. .잔인성만이 군대의 길이라고 명령했다 피로 물든 광주는 참혹한 인간도살장이 됐고 피의 목욕탕으로 변했다. 하루에475명이나 도청지하실에 끌어다 죽였다. . 여학생들과 부녀자들을 생매장했다. . 학살된 사람이 2천명을 넘고 부상당한 자가 1만5천을 넘는다. .전두환 도당의 살인만행은 절대로 용서될 수 없다. . 통일이어 어서 오라 민주화와 주국통일을 위해 싸운 공주시민들의 영웅적인 투장은 영원히 승리할 것이다. . .”
넷째,5.18사태가 진압된 지 1주일 만인 1980년 6월 5일, 일본에서 ‘천주교정의평화협의회’가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한 [찢어진 깃폭-어느 한 목격자의 진술]에도 475명이 한 순간에 떼죽음 당했다는 내용이 게재돼 있다.
“그들은 시신을 도청 지하실에서 꺼내 밖으로 내오기 시작했다. . 지하실에 내려가475구의 시체를 보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불에 탄 것도 있어 시민들은 다시 한 번 분노에 치를 떨었다.”
“찢어진 깃폭”의 말미에는 아래 표현이 있다.
“총알에 누더기가 되고 동포의 피로 얼룩진 민중의 응어리진 원한이 서린 저 깃폭을 보라. 뉘라서 이 응어리진 분노를 풀어 줄 것인가. 눈을 감으면 아직도 떠오른다, 저 찢기고 누더기가 된 깃폭이.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린다. 혁명의 붉은 깃폭 아래”
475송이는 광주교도소 공격하다 떼죽음 당한 북한군
5월 21일 오후 북한으로부터 계속 무전이 날아왔다. 광주교도소 수용자들을 해방시켜 폭동의 동력으로 사용하라는 다급한 지시였다. 이를 감청한 계엄당국은 민병대 수준에 불과했던 31사단 병력이 경비하고 있던 광주교도소를 제3공수여단에 넘겼다. 공수부대는 불과 2시간 만에 교도소 주위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범상치 않았던 무장간첩들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북한군이 광주교도소를 5월 21일 하룻밤에 5회씩이나 공격한 것이다. 여기에서 발생했을 대량 주검은 한밤에 어디로 다 사라졌을까?
청주유골 430구가 진달래 430송이
시체를 광주근방에 묻으면 광주시가 빠른 속도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발굴이 쉽게 될 것이기 때문에 광주로부터 멀리 떨어진 으슥한 곳에 가매장했을 것이다. 세월호가 침몰 된지 27일 만인 2014년 5월 13일, 청주 흥덕지구에 축구공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430구의 유골이 군대식 대오를 갖추어 1m 깊이의 넒은 운동장에 가매장돼 있는 것을 한 인부가 발견했다. 이곳은 광주로부터 200km 떨어져 있는 밀림지대였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청주를 선택했을까? 청주지역에는 문경 새재가 있다. 그곳에는 간첩들의 소굴이 있고, 간첩 침투의 가장 큰 길목이 있다. 이곳을 지키는 간첩이 청주에 살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청주 간첩들이 관리하고 감시하기 가장 좋은 곳이 청주지역인 것이다. 5월 14일 수많은 뉴스들이 떴지만 세월호의 쓰나미에 묻혀 주의를 끌지 못했다. 북한 시체 475구 중 430구가 무리로 가매장된 것으로밖에 추정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청주 유골의 포장 방법이 오로지 1980년의 광주에서만 사용했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430구의 유골은 규격이 일정한 칠성판(나무판) 위에 얹혀있었고, 두꺼운 흰색 비닐로 감겨 있었으며, 비닐에는 지워지지 않는 매직으로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청주유골 포장방식은 오로지 5.18 한 순간에만 존재했던 광주 방식
시체 처리 집단은 여름 더위에 대량으로 발생하는 5.18 시체로부터 흘러나오는 역한 액체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시체들은 두꺼운 흰색 비닐로 감아야 했다. 본문에는 흰색 비닐을 사용하는 시체포장 현장사진이 게재돼 있다. 보도들이 이어지자 누군가가 그 유골들을 컨테이너에 적재했고, 컨테이너 사진도 보도되어 있다. 저자 역시 이 뉴스들을 2015년에야 검색 도중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흥덕경찰서와 청주시 체육과에 전화해 보니 “오래 된 것이라 모른다, 화장한 것으로 안다”는 대답만 했고, 5월 단체들은 광주와는 무관한 유골이라며 선을 그었다. 그 후 이 유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430구의 유골을 그 후 화장했다는 근거가 없다. 2015년 9월 9일자 Dailymedi 기사에 의하면 2014년 충북에서 처리한 무연고 유골 화장처리 건수는 불과 18개, 비용은 13,630,000원이었다. 조달청 홈페이지에는 이장 업체를 찾는 입찰공고도 없었다. 그냥 증발한 것이다.
김정은 전용기에 실려 간 진달래 430송이
2014년 9월 19일부터 10월 4일까지 아시안 게임이 열렸다. 아시안게임 회원국은 모두 45개국, 다른 나라들은 모두 일찌감치 참가 의사를 통보했는데 유독 북한만은 시큰둥했다. 그러다 5월 24일, 갑자기 호들갑을 떨면서 아시안게임에 참가하겠다고 대시해왔다. 2014년 8월 17일,북한은 전례 없이 김대중 사망 제5주년을 맞아 조화를 보낸다며 박지원, 임동원, 김홍일을 지명해 조화를 가지러 개성으로 오라 했다. 그리고 이들은 개성에 가서 북한 스파이 사령관 김양건을 만났다. 이 순간에 아마도 청주유골 처리에 대한 모의를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2014년 8월 19일, 8명의조추첨 북한대표단이 인천에 왔다. 유골을 가져가기 위한 사전 정찰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2014년 10월 4일,북한 최고위급 3인방인 황병서, 최룡해, 김양건이 김정은 전용기를 타고 갑자기 인천에 왔다. 이들이 감히 김정은 전용기를 타고 인천에 온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고, 그 전용기기 개막식이 아닌 폐막식에 왔다는 사실도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국제스포츠 행사에 참석하는 외국 귀빈들은 개막식에 오지 폐막식에 오지 않는다. 더구나 폐막식에 참가한 다른 나라 귀빈은 일체 없었다. 김정은 전용기는 남한에서 최상의 치외법권을 누리는 공작용 무기다. 430구가 적재된 컨테이너 박스는 아시안게임 조직위 청산실(실장 권경상)을 통해 북으로 갔을 것이다.
나머지 45송이는 이삭
475구의 유골 중 나머지 45구는 미처 5월 22일 먼동이 트기 전까지 추수하지 못한 이삭들일 것이며, 이들 중 12구는 5.18묘지에 묻힌 신원불상자일 것이다. 5월 23일 도청에서 촬영된 관들 중에는 하얀 찔레꽃이 얹혀있는 관들이 있었고, 그 주위에 북한 간부들의 무거운 얼굴들이 촬영돼 있다. 찔레꽃 관들이 아마도 신원불상자로 알려진 12구에 해당할 것이다. 1997년 12월 20일, 종로서적이 발행한 [시민군 계엄군]이라는 책에는 저자인 이양우 국제신문 기자 일행이 보았다는 북한군 시체 2구가 소개돼 있다. 광주 교도소 근방인 담양군 창평에서 5월 22일 오전, 리어카 두 대에 관을 하나씩 싣고 각 리어카 당 얼굴이 어두워 보이는 장정 4-5명이 마치 야반두주라도 하듯이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야산으로 급하게 밀고 올라가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두 개의 관에는 하얀 찔레꽃이 얹혀있었고, 리어카 뒤를 따르는 가족 같은 존재는 일체 없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광주 야산에 묻힌 시체들이 더 있을 것이고, 나머지는 살릴 수 있는 희망이 있는 중상자들로, 북으로 철수하는 대형선박에 실린 후 선박에서 사망했거나, 북한에 가서 사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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