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은 섬이다. 언어의 섬이다.
지구촌은 삼성의 여자농구 선수들과 또 업무출장으로 또다른 일로 유럽 안내 가이드의 역할을
하면서 유럽 일대를 3~4번정도 다녀온 곳이다.
남한의 반도 안되는 조그만 땅덩이(3만 528㎢)에 일천만 (1034만 1000명(2003))인구가 모여 사는
나라 벨기에. 1인당 국민총생산이 2만 3850달러(2003) 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이다.
이 조그만 나라가 너무도 유럽적이다 온갖 복잡한 민족·언어·문화적 문제가 뒤엉켜 있다.
지금은 분명,하나의 나라 '벨기에 왕국'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전혀 이질적인 두 나라, 발롱(Wallon)과
플라망(Flamans 또는 Flanders)으로 갈라져 있으며 영구히 분리하려고 열심히 투쟁한다.
왕실과 정치 지도층은 반대하지만, 로마제국의 유산은 이 나라에도 아직까지 분쟁의 씨앗으로 남아
있다. 카이사르의 말발굽 아래 정복되어 '벨기카'(Belgica)란 이름을 얻은 이래 이 지방은 라틴문명권에
속하게 되었으나,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남하한 플랑드르족이 발길을 멈추고 로마제국 군대와 대치하
게 된 경계선을 따라 발롱족과 플라망족의 민족적 언어적 국경이 생기게 되었다.
이래서 벨기에에서 라틴문명과 게르만문명은 만났으나 그 불연속선은 이 두 민족의 기나긴 반목과
갈등을 유산으로 남겼다. 자연 서남부의 발롱 지역에서는 프랑스어가, 동북부의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화란어가 공용어로 뿌리내렸고, 경계선 지역의 양쪽 주민들은 신통하게도 길 건너에 사는 사람의 말을
서로 한마디도 못 알아듣는 기묘한 현상을 연출하기도 한다.
여기에다 동남부 리에주 지방에는 독일어를 쓰고 있으니, 벨기에에서는 세 가지 말이 쓰여지고 있는
셈이다. 뒤섞임도 없이. 그래서 리에주로 향하는 고속도로에는 한 도시를 일컫는 세 가지 도시명이
적혀 있다.
Liege(리에주:불어)/Luttich(뤼튀히:독어)/Luik(루이크:플랑드르어) 브뤼셀은 분명 블랑드르어를
쓰는 플라망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도 벨기에 수도인 이 도시 주민 70% 이상이 불어를 쓴다.
그래서 '언어의 섬'이라는 것이다.
왜 이런 기묘한 현상이 벌어졌을까? 한마디로 오랜 역사를 두고 두 민족의 갈등 사이에서도 불어권,
곧 발롱계가 정치·문화·경제적인 주도권을 잡아왔다는 증거다.
이번 세기 후반에 들어 플라망계가 경제 주도권을 쥐면서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지만,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벨기에의 모든 대학에서 플랑드르어가 금지되어, 모든 강의를 불어로만 해야 했던
사실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니 브뤼셀은 플랑드르 땅에 있는 프랑스적인 도시다.
그래서 브뤼셀 출신의 작가나 예술인들은 서울로, 서울로 다시 말해 파리로 가서 활약을 했다.
멀리서는 피터 폴 루벤스에서 시작해 금세기 최고 샹송가수의 하나인 자크 브렐에 이르기까지
기라성 같은 벨기에, 그리고 브뤼셀 출신들이 라틴문명, 프랑스 문화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렇다고 브뤼셀을 파리와 비교해서는 안된다. 그 어느 다른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하고도
강력한 체취를 브뤼셀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깨끗하고 질서 정연한 게르만적 요소와는 정반대인 자유분방하고 개인주의적인 라틴적 요소는
파리보다 더 강하다. '유럽에서 가장 더러운 도시'라는 반갑지 않은 타이틀을 달고 있는 것도
길거리에 태연히 자동차 재떨이를 털어버리는 브뤼셀루아(브뤼셀시민)의 제멋대로인 기질
탓인지도 모른다.
150만 인구에 육박하는 애완동물들도 이에 질세라 거침없이 거리에 분뇨를 방출하는 도시-
이런 도시가 유럽 정치·경제의 심장부로 동서남북의 교차로 역할를 맡고 있음은 아마도 이처럼
'자유로운 도시의 공기' 탓이 아닐까? 보잘것없는 것은 넘어 어이없기까지 한 '오줌싸개 소년'이
브뤼셀 관광의 전부인양 알고 관광객이 떼지어 몰려오지만, '그랑플라스'(시중심 광장)에 서는 순간
이 도시의 진가는 대분에 증명되고 만다.
유럽 산업화의 1번타자, 자본주의 발달 1번지, 북구 르네상스의 효시-전유럽을 서울이라고 비유한다면
브뤼셀을 바로 종로 1번지였던 것이다.
여행사 사장이 운동 후배라 서초동 유지 아줌마들을 모객하여 후배에게 소개를 했는데 여행사 사장이
유럽 경험도 없고 해서 내가 같이 안가면 모두들 안간다고해 할 수없이 모시고 북유럽과 유럽을 25일
정도의 일정으로 갔을때 브리셀에서 일어난 일이다.
나는 비디오 카메라와 사진카메라를 들고 여행사 사장은 돈가방을 들고 다녔다.
브뤼셀 시내관광을 위하여 23명의여자와 나와,사장 남자 2명으로 25명이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길을 건너는데 신호등이 중간에 바뀌어 내가 앞의 몇명과 길을 건넣고 나머지는
여행사 사장과 길 건너에 쳐저 있었다.
그런데 뒤쳐진 우리일행 중에 저놈 잡아라하고 소리를 지르는 음성이 들려왔다.
뒤 돌아보니 맨뒤에 따라오는 여행사 사장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돈지갑을 불량배들에게 탈치기
당한 것이다. 나는 응겹결에 비디오카메라,사진카메라를 메고 길을건너 내리막길을 따랐다.
사장이 내 앞에 정원을 가로질러 뛰었다.
그러나 도망가는 젊은 아이들과 40~50m 이상차이가 난뒤 였다. 그런데 광장에서 도망가던
불량배들이 사람이 많은 시가지 골목으로 숨어 들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사람속에 썩여 외국인이라 분간을 할 수 없어 포기하고 만 추억이 생각난다.
교훈은 손가방은 손목에 감아쥐든지. 허리춤에 차던지 해야 한다는 사실이며 마침 전날저녁
사장한테 여권 사본을하고 여권은 손가방과 분리해서 들고다니라고 했던 것이 다행으로 여권은
주머니 속에 있어서 분실하지를 않았다. 돈은 잃었지만 여권이 있어서 여행 일정에는 차질없이
마쳤던 기억이 생생히 남는 브리셀이다.
또한 독일이 종주국이라고 알고 있는 맥주 패스트 푸드의 대명사가 된 감자 튀김(포테이토칩)은
벨기에가 원산지라는 사실이다.
영어로는 Brussels, 프랑스어로는 Bruxelles로 표기한다. 처음에는 비교적 한적한 도시였으나,
지금은 교외에 있던 18개의 자치시를 병합하여 브뤼셀 대도시권이 이루어졌다. 17세기경에 이미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평을 받은 브뤼셀의 역사는 길다.
로마시대부터 거주가 시작되었으며, 6세기에 센강의 중앙에 있는 섬에 자리를 잡은 후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7세기에는 그 곳에 요새가 구축되었다.
그러나 1830년 혁명으로 벨기에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자 새로이 벨기에의 수도가 되었다.
유럽 굴지의 아름다운 역사도시인 브뤼셀의 시가는 서쪽의 상업구와 동쪽의 주택구로 갈라져 있다.
유명한 레이스·융단을 비롯하여 모직물·면직물·염색·가구·종이·인쇄·출판 등 각종 산업이 발달했으며,
유럽 공동체(EC)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본부도 이곳에 있어서 서유럽의 수도 구실을 하고 있다.
EC의 창립회원국은 벨기에·프랑스·서독·이탈리아·룩셈부르크·네덜란드였다. 1973년 덴마크·아일랜드·
영국이, 1981년에 그리스, 1986년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가입하며 모두 12개국이 회원으로 활동하
였다. 그후 스웨덴·핀란드·오스트리아가 가입하여 회원국이 모두 15개국으로 늘어났다.
1993년 5월 유럽자유무역연합과 통합하여 유럽경제지역를 결성하고, 1994년 1월 1일부터 상품·사람·
자본·서비스 등의 자유이동을 제한하는 물리적 문제, 조세 문제를 해결하고 유럽단일시장을 탄생시켰다.
1993년 11월 1일 마스트리히트조약 발효에 따라 1994년 1월 1일부터 EC는 EU(유럽연합)로 공식명칭을
바꾸었다. 사무국은 브뤼셀에 있었다.
벨기에는 북해에 돌출된 라인강(江) 삼각주의 남쪽에 위치하며 기온은 전체적으로 해양성기후로서,
평균기온은 여름 12∼25℃, 겨울 0∼10℃이다. 내륙에서 해안에 이를수록 평균기온은 상승하나 해안지
대에서도 겨울에는 대서양의 영향을 잘 받는 브르타뉴 해안이나 아일랜드 해안에 비하면
그다지 따뜻하지는 않다. 연강우량은 780㎜로 강수는 1년을 통하여 고루 분포하나 해안지대만은
4계절을 통하여 비가 내리고 특히 가을에 많이 내린다. 봄에는 한기(寒氣)를 수반하는 동풍의 영향으로
맑은 날씨가 계속된다. 경작에 좋은 날씨이며 전체 토지면적의 25%가 농업에 이용되고, 삼림과 목초지
가 각각 21%, 20%이다. 주요 관광지로서는
- 오줌 누는 소년상
벨기에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명소로 불리는 동상이다. 그랑 광장에서 시청사 왼편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1619년 제롬뒤케누가 제작한 소년상이 서 있다. '
브뤼셀의 가장 나이 많은 시민'으로 사랑받고 있다. '꼬마 줄리앙'으로 불리우는 이 동상은
만들어 동상과 함께 보냈다고 한다.
이후 각 나라의 관료들이 벨기에를 방문할 때는 이 꼬마 동상에게 옷을 만들어 선물하였다.
볼 수 있다.
브뤼셀 시내 중심부에 있으며 이 지역의 사회와 문화를 특징짓는 건축물과 예술이 잘 융합된 예이다.
바로크양식의 건축물들이 세워져 있으며 바닥에는 돌이 촘촘하게 깔려 있다.
높이 96m의 탑이 세워져 있으며 아름다운 외관과 함께 호화스러운 내부 장식으로 유명하다.
왕의 집은 16세기에 건설하였는데, 현재는 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된다.
길드하우스는 외관이 화려한 17세기의 건물로서 여러 직업조합의 사무소로 쓰인다.
이밖에 고딕양식의 생미셸대성당, 18세기의 왕궁, 오줌싸개 동상 등이 유명하다.
1998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양복업자 등 각정 동업조합의 길드하우스였다. 중앙역으로부터 와서 좌측에 있는 건물군은 브라방
공의 거관이라 불리고 있었다. 백조상이 보이는 건물은 일찍이 푸주한의 길드하우스였는데 지금은
고급 레스토랑인 메종 뒤 시뉴가 들어 있다. 그 옆의 건물은 맥주 양조업자의 길드하우스로서 지금은
맥주박물관이 되었다. 길드하우스는 현재 레스토랑·은행·카페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브뤼셀 중앙역 북쪽 커다란 고딕 양식의 대성당이 벨기에에서 가장 격조가 높은 성 미셸 성당이다.
1226년 공사를 착공해서 17세기가 되어서야 완성되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성채 기적의 채플'과
'성모마리아의 채플'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릅답다. 뾰족한 두 탑이 있는 정면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과 비슷하다. 1960년 현 국왕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